{그림책=선물}
3화 혼자 기다리는 순간에 머무르지 말아요, 룸룸파룸 룸파룸
『두더지의 고민』 『마음 조심』 『버스를 타고』
대부분의 책이 혼자 읽도록 만들어지지만 그림책은 좀 다릅니다. 누군가 그림책을 읽어주면, 귀로는 텍스트를 듣고 눈은 온전히 이미지에 집중하게 됩니다. 글과 그림을 동시에 볼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으로 마주하게 되지요.
만드는 과정도 다른 장르에 비해 유기적입니다. 글, 그림을 한 명의 작가가 진행하는 경우 그림을 먼저 그리는 작가도 있고, 문장을 먼저 쓰는 작가도 있는데 무엇을 작업하든 글과 그림이 어우러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글, 그림 작가가 따로 있는 경우 대부분 원고가 먼저 나오지만, 그림이 완성된 후 그림에 맞게 글을 수정합니다. 이미 이미지로 표현된 것을 텍스트로 남겨둘 필요가 없으니까요. 좋은 그림책은 텍스트가 그리지 못하는 영역을 이미지가 채우고 이미지가 닿지 못하는 부분을 텍스트가 채웁니다. 이처럼 그림책은 한 데 어우러지는 것이 중요한 장르입니다.
{그림책=선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가 연결감입니다. 어떤 그림책을 선물할지 고민하는 것만큼, 누구와 함께 이 고민을 할지 고민하는 것도 중요한 과정입니다. 사연을 보낸 사람과 접점을 가졌거나, 접점을 가지면 좋을 법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머릿속으로 ‘사연을 보낸 사람과 선물을 보낼 사람1, 2, 3(은 저입니다)’을 여러 번 떠올려보고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연결될 때, 비로소 마음이 놓입니다.
스스로를 이십대 초반 여자라고 밝힌 ‘토끼곰’님의 사연을 보고 어떤 분들과 함께 논의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이삼십대 독자들이 많이 이용하는 동네책방 대표님들을 떠올렸습니다.
‘책방 사춘기’는 얼마 전 광진구 군자동에서 마포구 성산동으로 자리를 옮겼는데요, 홍대역과 망원역에서 도보로 이용 가능하니 ‘핫한 홍대’라고 해도 될 만한 위치입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곳이라, 유대표님이 어떤 책을 골라줄지 궁금했습니다.
연남동에서 ‘사슴책방’을 운영하는 정선정 대표님은 그림책 디자이너로 활동하면서, 드로잉그림책학교 ‘디하우스’를 꾸리고 있습니다. 연남동 책방, 그림책 학교와 각종 북페어에서 많은 독자, 그림책 지망생, 작가 들과 소통하는 정대표님은 토끼곰님에게 어떤 책을 권할지 궁금하더라고요.
책을 골라달라고 부탁하면서 저는 한 가지 단서를 붙였습니다. 책방에 있는 책 중에서 골라주었으면 좋겠다고요. 제가 그 책방에서 그 그림책을 사서 보내고 싶다고요. 책방의 기운이 담긴 선물을 받은 토끼곰님이, 그리고 이 사연을 읽는 분들이 직접 이 책방들에 가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렇게 우리가 서로 연결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토끼곰’님은 연애에 대한 고민을 털어놨습니다. 둘 다 첫 연애라서 서로 애틋하고 특별한 마음이었는데 날이 갈수록 관계가 소원해졌다고요. “남자친구와 헤어지면 외톨이가 된다는 생각 때문에 헤어지지 못하는 건지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는 말이 솔직하게 느껴졌습니다.
처음 이 사연을 봤을 때는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어떻게 개선(혹은 정리)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하지만 사연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이 고민은 연애가 핵심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와 함께 그림책 선물을 고른 두 분 역시 같은 마음이라, 보는 눈이 비슷하구나,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게 고른 세 권의 그림책과 편지를 떨리는 맘으로 토끼곰님에게 보내었습니다. (다음은 제가 토끼곰님에게 보낸 편지를 발췌, 일부 수정한 내용입니다.)
안녕하세요, 토끼곰님.
사실 저는 토끼곰님이 프로젝트에 처음 사연을 보내주셨을 때보다, 이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게 되었다고 연락드렸을 때 보내온 답장이 더 뭉클했습니다. 사연을 보내면서 “아무도 공감해주지 못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세상에 이런 비겁한 사랑이 있구나, 외톨이인 사람이 있구나 하고 넘겨지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고 하셨지요. 그래서 저는 토끼곰님에게 그림책 선물을 보내기로 결정하길 잘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림책 『두더지의 고민』을 추천한 사람은 ‘책방 사춘기’를 운영하는 유지현 대표입니다. 이사 후 새로운 보금자리를 정리하느라 정신없는 걸 알면서도, {그림책=선물}을 함께 고민해달라고 졸랐더니, 고심 끝에 『두더지의 고민』(김상근 지음, 사계절, 2015)을 골라 주었습니다.
유지현 대표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책 속에 나오는 바로 이 말 때문이라고요.
“얘야, 고민이 있을 때는 눈덩이를 굴려보렴.”
이렇게 눈덩이를 굴리다보면 전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기도 하지요.
그림책에서 두더지는 실제 눈덩이를 굴리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눈덩이를 굴릴 순 없으니 ‘나에게 있어 눈덩이를 굴린다는 건 어떤 걸까?’ 떠올려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림책 『마음 조심』(윤지 지음, 웅진주니어, 2017)을 골라준 사람은 마포구 연남동에서 ‘사슴책방’을 운영하는 정선정 대표예요.
정선정 대표는 토끼곰님의 사연을 보고 ‘같은 마음의 무게로 서로를 바라보지 못했던’ 이십대 초반의 연애 경험이 떠올랐다고요. 수많은 그림책 중에서 『마음 조심』을 골라주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다치기 힘든 마음을 조심스럽게 대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쉽게 잘 다치는 내 마음을 혼자 부여잡고 지내지 말고,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과 둘러앉아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고민을 나누었으면 한다고요.
제가 『버스를 타고』(아라이 료지 지음, 김난주 옮김, 보림, 2007)를 고른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원하는 버스가 오기를 막연히 기다리기보다는(물론 기다리는 것 또한 하나의 과정이겠지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을 찾아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지요.
무엇보다 제 마음 깊숙한 곳의 바람은, 토끼곰님이 직접 ‘책방 사춘기’와 ‘사슴책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 그림책을 골라보았으면 하는 겁니다. “친구가 적고, 있는 친구들조차 자주 만나는 편이 아니고, 남자친구를 처음 사귀면서 더더욱 친구들과 안 만나기도 했다“고 했는데, 『두더지의 고민』에서처럼 우연히 친구들이 생기기도 하고 『마음 조심』에서처럼 비슷한 부류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고민이 슬며시 가벼워지기도 하거든요.
이전에 하지 않았던 시도를 해보는, 혼자인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토끼곰님의 마음을 응원합니다.
선물을 받은 토끼곰님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이 왔습니다.
보내주신 그림책과 편지 잘 받았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마음이 담겨 있어서 감동적이었습니다. 저의 부끄러운 고민을 무려 세 분이나 함께 했고 마음을 다해 그림책을 골라주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책은 『버스를 타고』입니다. 앉은 자리에서 다섯 번을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룸룸파룸 룸파룸” 이 말이 마치 주문처럼 마음을 맴돌았습니다. ‘괜찮아. 실망했어도 괜찮아. 실망했다고 꼭 좌절해야 되는 건 아니야. 기대하고 기다린 것이 오지 않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행복해질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버스를 기다리는 소년이었더라면 버스가 왔는데도 못 탔을 때 그 자리에 엎어진 채 울었겠지요. 하지만 소년은 룸룸파룸 룸파룸 걸어서 더더욱 멀리까지 가기로 하죠. 비록 아직까지 소년처럼 힘을 내서 떠나지는 못했지만 그동안 충분히 우울해했고 멈춰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룸룸파룸 룸파룸 외치며 나아가야겠죠. 룸룸파룸 룸파룸.
토끼곰님은 『두더지의 고민』에 나오는 두더지처럼 눈덩이를 굴린다는 게 뭔지 고민해보겠다고 했습니다. 『마음 조심』에서처럼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비슷한 부류의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지만 그런 친구들을 만나면 좋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권한 것처럼, 혼자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그림책 나들이를 가보겠다고 했습니다.
덕분에 제 마음에도 ‘룸룸파룸 룸파룸’의 기운이 전해졌습니다. 저 역시 마음이 고민으로 꽉 들어차서 꼼짝도 하기 싫고, 나만 혼자인 것 같고, 내가 원하는 건 절대 가질 수 없고, 너무 소심한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은 순간에 시달립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애써 별것도 아닌 일들을 벌입니다. 정체불명의 프로젝트에 사연을 보내거나, 그림책 한 권을 선물하겠다고 몇날 며칠 책장을 바라보며 고민하지요. 이 괜한 일들이 우리를 혼자인 순간에 머무르지 않게 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혼자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혼자 이겨내야 하는 순간과 함께여야 하는 순간을 알아가면서, 우리는 조금 더 먼 곳까지 갈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그 길 위에 뭐가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가보지 않고는 모를 일이니까요, 룸룸파룸 룸파룸.
토끼곰님, 그리고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이
직접 그림책방 나들이를 해보시기를 권합니다.
책방 사춘기
일요일, 월요일 휴무 (자세한 영업시간은 인스타그램을 참조하세요)
www.instagram.com/sachungibook
사슴책방
월요일 휴무 (자세한 영업시간은 인스타그램을 참조하세요)
www.instagram.com/deer_bookshop
위모씨
그림책을 좋아하고 그림책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공유하고 싶어 안달하는 경향이 있어 좋아하는 그림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www.facebook.com/we.are.all.children
2018/07/31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