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기획의 말
   ‘뜻-밖의 오늘’ 세번째 씨앗은 영화 <혼자 사는 사람들>(감독 홍성은, 2021)의 ‘김민’입니다. 3화에서는 영화 속 주인공들과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콜센터 상담사 김민과 이와 닮아 있는 또다른 노동하는 몸을 상상하고, 그들의 하루를 그려냅니다.

_안경 이보름



   어느 여름, 민의 새벽


   봄부터 틀기 시작한 에어컨은 한여름의 열기를 잊게 한다. 사무실 안은 시원하다 못해 썰렁해서1 민은 혹시나 감기에 걸릴까 얇은 여름 남방을 놓고 다닌다. 서늘한 감촉의 셔츠 아래 팔뚝에는 오소소 닭살이 돋아 있다. 찬바람을 쐰 손가락은 살짝 뻣뻣해졌다. 민아, 나는 전기세 때문에 벌벌 떨면서 삼십 분에 한 번씩 에어컨을 껐다 켰다 하는 내 방보다는 사무실이 좋아. 추운 게 좋아. 차라리 나도 얼어버렸으면 좋겠어. 내 마음도 오늘 겪은 일도. 그렇게 모두 다 얼어버려서 그냥 망치로 꽝! 하고 내리치면 모든 것이 산산조각나게. 그렇게 녹아내려 사라지고 싶어. 민은 오늘처럼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모니터 앞에 한껏 웅크리고 앉아 있을 때면, 이대로 굳어져 동상이 되는 상상을 한다. 오와 열을 맞춰 일렬종대로 배치된, 팔십 센티 남짓한 책상에 몸을 구겨 넣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한껏 굽은 등과 말린 어깨, 길게 뻗은 목과 미간에 잡힌 자글자글한 주름까지.2 다만 민의 두 손과 두 눈은 고객의 말을 받아 적고 화면을 보느라 쉴 새 없이 바쁘다. 스크립트를 내리읽는 입3은 아주 잠깐의 공백도 허용하지 않는다. 시시껄렁한 괴담에 나올법한 살아 있는 이백여 개의 동상들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말한다. 脣. 꼭 맞을 민. 사회의 이로운 자리에 꼭 들어맞으라며 지어주셨다는 한자에 다른 뜻이 있다는 걸 엄마는 알았을까. 脣. 입술 순. 그래서 나는 이렇게나 많이 입을 움직이게 된 걸까. 한평생 입술이 갈라지고 부르트고 목이 마르는 것은 내가 첫 숨을 내뱉을 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던가. 다운아4, 너는 결국 네 자리를 찾아 떠났지만 나는 여전히 이곳에 있어. 민은 머릿속에서 다운을 내쫓으려다가도 며칠 전이 다운의 생일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다운이 올해 몇 살이 되었는지 계산하면서 또다시 다운을 생각하고 만다.


   헤드셋 너머 말소리를 흘려들으며 민은 상담 기록을 확인했다. 드르륵. 민은 스크롤을 내리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곽민규 고객 상담 관리 화면. (출처: 〈혼자 사는 사람들〉 54분 27초 장면 스틸 사진)

곽민규 고객 상담 내역. 기록에 의하면 그는 시간 여행자를 위한 상품 개발에 관하여 총 18회 문의했다.

   민은 민규의 시간을 빠르고 무미건조하게 훑었다. 오래간만의 민규이지만 민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이곳에서 한 번 이상 걸려 온 전화는 다시 처리해야 하는 귀찮은 업무이자 강성 민원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신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은 이 성가신 러시안룰렛의 당첨자로서 재빨리 상담을 끝내야 한다는 목표만 있을 뿐이다.

   “고객님, 정말 죄송하지만 시간 여행 고객님들을 위한 상품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습니다. 즉각적인 도움을 드릴 수 없는 점 죄송합니다. 상품 기획은 저희 부서의 소관이 아니기에 정확한 답변을 드릴 수 없습니다. 제 선에서는 지금 고객님께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정말 안타깝고 죄송합니다. 다른 문의 사항 있으실까요? 네,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아이비 카드 김 민이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가끔 민규처럼 이상한 걸 묻는 사람들이 있다. 시스템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으로 분류하고 별도의 대응 매뉴얼도 제공하지만, 다짜고짜 카드 사용 내역을 몽땅 다 읽어달라는 사람이나, 막무가내로 혜택을 달라고 우기며 욕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민규는 수월한 편이다. 그래서일까? 민규가 고객 센터 사람들 사이에서 ‘#’이 아닌 ‘시간 여행자’라 불리게 된 건? 민은 이전 상담 기록을 복사, 붙여넣기 하며 어쩌면 민규가 거짓말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민규는 ‘당신은 시간 여행을 갈 수 있다’고 말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순차적으로 작성된 열여덟 개의 상담 기록이 증명하듯, 앞으로도 상담자들은 매뉴얼이 시킨 대로 민규를 응대할 것이고, 그런 민규의 시간은 한 치의 뒤틀림 없이 부드럽게 흐를 것이다. 최초의 기록에 따라 아무런 고민 없이 민규를 정의하고 대응하는 시스템 속에서, 우리 모두 살아가고 있으니깐.

곽민규 고객과의 최초의 상담 기록. (출처: 〈혼자 사는 사람들〉 25분 39초 장면 스틸 사진)


   톡톡. 건너편 주은이 복도를 지나가면서 민의 파티션을 두드렸다. 시간을 보니 1시가 살짝 넘어가고 있었다. 오 분째 전화를 끊지 않고 말을 질질 끄는 고객에게 짜증이 난다. 상담 시간이 길어지면 켜지는 빨간 불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대로라면 팀장이 와서 지랄할 게 뻔하다. 민은 에둘러 고객을 끊어낸 후 서둘러 후처리를 했다.

   작성일 2022-08-23 13:04:52
   내용 사이트 회원가입 문의. 혼자 해보고 문제 있으면 다시 전화하라고 함.
   작성자 구로 사랑팀 김민

   민은 수신 상태를 점심 모드로 바꾼 후 마스크를 내려 급하게 물을 들이켰다.5 코로나가 터지고 난 다음에는 한동안 상담 중 물 마실 여유조차 없었는데 그게 습관으로 굳어진 것이다. 안 마시고 안 싸기.6 사랑팀 단톡방에 화장실 가는 것까지 보고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소소하게 반항하기 위해 고안해낸 민만의 방법이다. 민은 도시락을 챙겨 사무실 바깥에 위치한 휴게실로 갔다. “민님, 여기!” 주은이 구석에서 손을 흔들었다. 사랑팀 도시락 멤버인 민, 주은, 영미, 효선, 그리고 은지는 다섯 사람이 앉기에는 살짝 작은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기상청에서 오늘 장마가 끝난다더니 낌새가 안 보이네요.” 은지의 말이 끝나자 일제히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봤다. 지난주 내내 내리던 비는 아직도 쏟아낼 것이 있는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세게 흐른다. 사무실에는 항상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어서 창문이 있어도 밖이 보이지 않지만, 뭐 실제로 밖을 볼 여유가 없으니 민은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밝은 형광등 아래 아침인지, 점심인지, 저녁인지 시간 감각 없이7 콜을 받는 게 우리의 일이 아닌가. 단순하게 생각하자. 그게 민이 지금까지 버텨온 유일한 방법이다. 그냥 우리는 전화를 받고 매뉴얼에 따라 응답하는 기계라고 생각하면 쉬워. 영화 〈HER〉에 사만다처럼 인간과 닮은 AI야. 깊게 생각하지 마. 그럴수록 너만 상처받아. 이곳에서의 너는 진짜 너가 아니야.

   “아 이번 달 등급표 나왔던데 봤지? 저쪽팀 남자가 또 1등이더라. 아니 내가 말이 조금 느리잖아. 그렇다고 그 남자처럼 기계적으로 상담하는 것도 아닌데, 콜 수 적다고 이렇게 인센 차이 나는 게 말이 되냐구. 팀장이 이번에도 고객팀한테 밀렸다고 아침에 얼마나 뭐라고 하던지. 민이는 지각하느라 몰랐지? 근데 민이 무슨 일 있어? 요새 등수가 안 좋던데.” C등급 김 민8. 고질적인 이명증을 앓는 민에게 다운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눌어붙은 이후로 민의 등급은 계속 떨어졌다.

   언제나 대화를 이끄는 건 영미다. 오십대 언저리의 영미는 오지랖이 넓다. 지금은 저렇게 팀장 욕을 해도 매일같이 누구보다 먼저 출근해서 체리며 복숭아며 갖다 바치는 줄 우리가 모를까. 민은 영미가 자기를 걱정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꼽 줄 때마다 속이 뒤틀린다. “에구 언니도 참, 엄마도 아니고 잔소리는! 알아서 하겠지. 요즘 아가씨들은 우리랑 달라서 다 생각이 있다고.” 효선이 옆에서 말을 거들며 자연스럽게 민의 반찬을 집어 먹는다. “아휴 나는 민님이 볶은 가지가 제일 맛있어. 내가 하면 왜 이 맛이 안 나는지 몰라.” 민이 말없이 빤히 쳐다보자 머쓱해진 효선이 쌜쭉 웃는다. “나도 오늘 저녁에 민이처럼 가지나 구울까. 어휴, 우리 식구들 오늘은 뭐 해먹일지가 내 인생 최대 고민이다, 고민이야. 애들 아빠가 밖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오면 좀 좋니.” 영미는 그 뒤로도 한참을 자기 가족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민은 대충 호응하며 묵묵히 밥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콜이 잔뜩 쌓여 있었다. 화면 상단에 표시된 대기자 수에 숨이 턱 막힌다. 전화를 받는 것보다 숫자가 증식하는 속도가 더 빨라서 0을 만드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하나씩 쳐내다보면 언젠가는 퇴근 시간이 온다. 시계는 성실하게 6시를 향해 움직인다.

   “정성을 다하는 아이비 카드 김민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왜라는 의문도 들지 않는다. 이건 그저 확률 게임이니깐. 하지만 바들바들 떨리는 민의 입술은 어떤 말도 잇지 못한다. 손에는 벌써 땀이 가득 찼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무언가 발밑으로 민을 끌어내리는 것만 같아 온몸이 싸늘하다. 민은 윽박지르는 목소리에 얼어붙어 있을 뿐이다. 간신히 손을 움직여 꽉 움켜쥐기도 하고 엄지와 검지 사이의 인대를 꾹꾹 눌러도 본다. 아직 내가 사라지지 않고 여기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한다.9 나는 그 목소리가 말하는 것처럼 고작 그런 존재가 아니니깐.10

   나는 이제 상처받지 않는다고 자신하지만 여전히 상처받는다. 실패할 걸 알면서도 뛰어들어. 너울거리는 파도에 부서지는 물결처럼 모래사장에 적힌 글씨처럼 생성되고 소멸되기를 반복해. 네가 나인지 내가 너인지 아무렴 어때. 우리는 너무나도 얇고 투명한 존재여서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걸 알잖아. 사람들은 우릴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째로 삼켜. 마구잡이로 먹으려 들어. 차라리 저 새끼의 턱을 머리로 치받아 입을 틀어막을까? 물이 코끝까지 차올라 어떤 말도 할 수 없어. 네 목소리조차 물속에 있는 것처럼 잘 들리지 않아. 말해졌으나 들리지 않고 가닿지 않은 말. 입을 벌릴 때마다 입 안으로 물이 들어와서 영원히 가라앉을까봐 두려워. 하지만 기어코 무언갈 쏟아내기 시작한 이상 우리는 멈추지 않아. 그건 이미 예견된 일이고 우리를 막을 방법은 없어.

   짓무른 상처 위로 또다른 모양의 생채기가 났다. 민은 살갗에 핏방울이 송송 맺히도록 내버려둔 채 정신없이 전화를 받았다. 눈물은 흘리지 않아. 위로받고 싶지 않으니깐. 더이상 비참해지기 싫어. 민은 어느 순간부터 이 현실에 순응하게 되었다. 민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공평해. 엉망으로 일그러진 줄도 모르고 웃어. 그러니 참을 수 있다.


   하루 종일 민이 녹아내린 자리는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금방 마를 것이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처음 그 모습 그대로 내일을 맞이할 것이다. 민은 울음이 내려앉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찾아 재빠르게 사무실을 떠났다. 발목을 끈덕지게 붙잡는 자기혐오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끝을 모르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면, 부단히 발을 움직여야만 한다. 그러나 민은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붙들 것이 없는 민은, 발버둥 칠수록 늪의 한가운데로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지고 만다. 로비에 도착해서야 민은 사무실에 우산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오늘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용기가 없다. 비를 좀 맞더라도 역까지 뛰어가야겠어. 쪼리를 신은 게 흠이지만 달리기라면 자신 있다. 비장한 각오로 건물 밖을 나서려는데 누가 민의 팔꿈치를 낚아챘다.

   “민, 자기야! 무슨 생각을 하길래 불러도 대답이 없어. 자기 우산 놓고 갔더라? 자. 이거 주려고 계단으로 뛰어 내려왔어. 걸음은 또 어찌나 빠른지. 받아 얼른. 뭐해. 그럼 내일 보자고.” 영미는 언제나 그랬듯 자기 할 말만 하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민의 손에 우산을 꼭 쥐여주는 것으로 자기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아무런 미련도 없이 건물을 빠져나간다. 민은 영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우산을 단단히 움켜쥐고 그 뒤를 따라나섰다.11 막상 밖을 나오니 비가 잦아들어 겨우 한두 방울 정도만 내리고 있었다. 무엇을 그리 망설였을까. 안도감과 동시에 허무함이 밀려왔다. 민은 손을 내밀어 끈적한 여름 저녁의 공기를 어루만지다 몸을 에워싸는 미적지근한 온도에 끝내 눈물을 흘렸다. 포근하다 못해 숨 막히게 꽉 껴안는 다운의 품 같은 다정한 여름. 비가 그친 자리에 매미가 찾아와 운다. 아주 많이. 아주 크게. 우는 것 말고는, 소리를 내지르는 것 말고는 가진 언어가 없는 것처럼. 한번 시작한 울음이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12


1 작은 창문 하나 없는 컨테이너 박스는 작열하는 태양을 모두 끌어안았다. 찌는 더위에 한시도 서 있지 못하겠는 그곳은 오래된 환풍기가 간신히 작동하고 있었지만, 악취로 진동한다.

2 너무 빨리 성장한 몸이 무겁다. 이렇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 이 작은 방에 내 양옆으로 다섯 명이 더 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방들이 층층이 쌓여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을 멍하니 구경한다.

3 부지런히 움직이는 입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뭉툭하게 잘린 입들은 바짝 깎은 손톱같이 보기만 해도 아프다.

4 밤의 끝자락과 아침의 첫 자락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는 나의 이름은 새벽이다. 얼마 전부터 이 주변을 서성이며 눈을 종종 마주치는 저치가 나를 혹은 우리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5 깨끗하고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다. 새벽은 벌레들이 꼬인 녹슨 그릇을 강박적으로 콕콕 쑤신다.

6 머리 위로 누군가의 똥오줌이 떨어진다. 새벽도 누군가의 머리 위로 똥오줌을 싼다. 발밑은 누가 언제 쌌는지 모를 오물들로 더럽다. 말라비틀어진 오물들은 이 방에 머물렀던 존재들의 흔적이기도 하다.

7 가끔 새벽은 끝없는 어둠 속에 놓이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밝게 내리쬐는 빛에 잠을 깬다. 어딘가 수상하고 인위적인 밤과 아침. 새벽의 종족은 본래 시간을 관장하는 영물이었다. 새벽이 일어나 울부짖으면 온갖 삿된 것들은 화들짝 놀라 도망치고 땅 위 생명들은 깨어나 움직인다는 신화가 은밀히 전해져 내려온다.

8 새벽과 새벽의 작업량은 엄격하게 관리된다. 그들은 원래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알을 낳지만, 최근 눈에 띄게 양이 줄었다. 이러다가 어느 날 자신을 붙드는 손들에 의해서 이곳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새벽은 알고 있다.

9 미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다. 이미 미친 걸 수도. 군데군데 상흔이 남은 입으로 주변에 있는 것들을 전부 내리 쫀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저 무언가를 쪼기 위한 것인 것마냥.

10 “아이씨 여기 완전 폐급이네. 당장 들어내! 다른 닭들한테까지 병 옮길라.”

11 어떻게 된 건지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철창에 새벽을 욱여넣으려는 손에서 벗어나 내달렸다. 저 멀리 이미 새벽이 컨테이너 박스를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곧바로 새벽도 뒤따른다.

12 새벽은 원래 자주 운다. 아니 우는 게 아니다. 그건 그냥 우리의 언어다. 높고 낮은 음으로 리듬에 따라 매번 다르게 말하는 새벽은, 자기를 향해 손을 벌리고 있는 저치에게 쏜살같이 달려간다. 한 번도 뛰어본 적 없는 연약한 다리로 흙을 매만지면서, 내려앉은 날개를 활짝 펴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거스른다.



   
작업 노트 3.





안경

보름, 지율, 희원은 줄곧 안경을 썼던 고도근시자들로, 비슷한 시기에 시력 교정술을 통해 한 꺼풀의 베일을 벗겨냈다. 세 사람은 선명해진 세계에서 여전히 희미한 존재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인스타그램 : @wescatterseed

2022/10/11
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