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한 일.

   각자 시를 두 편씩 고른다.

   너는 뭐 나눠줄래. 난 시가 너무 길어서 한 장에는 안 들어가는데. 들어갈 수 있는 시를 골라야겠지. 현수막이면 더 길게 해도 될 텐데. 일단 백은선은 「도움의 돌」 「독순」을 골랐다. 안미옥은 「여름의 발원」 「목화」를 골랐다. 김승일은 「나의 자랑 이랑」 「유리해변」을 골랐다. 너 나의 자랑 이랑은 안 한다고 하지 않았나. 사람들이 읽고 이게 뭐야 할 것 같은 시 고른다고 했잖아. 막상 나눠주려고 하니까 좀 아쉬워서……

   칼라 프린트를 하고 재단을 한다.

   선물하는 날이다. 시를 뽑아오기로 한 사람이 인쇄 전문점에 갔다가 너무 비싸서 그냥 왔다. 을지로 가서 뽑았어야 되는데. 내가 멍청했어. 정말 미안해. 괜찮아, 그럼 오늘은 첫날이니까 조금만 뽑아보자. 100장만 해보는 거야. 동네 문방구에 갔다. 재단선이 인쇄되어 나왔다. 야, 이거 다 손으로 잘라야 되겠는데? 그럼 칼이랑 자랑 사서 카페 가서 자를까? 문방구 아저씨가 작두를 빌려줬다. 그래서 미옥이 잘랐다. 조금씩 자르자. 찢어질 수도 있으니까. 을지로 인쇄소는 알아서 잘라준대.


B5 용지에 앞면은 시집 표지, 뒷면은 시 한 편을 실었다.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차 유리창에 끼우기도 하고.


   전봇대에 붙이기도 했다.


   나열하니 간단하지만,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시를 나눠주는 날짜를 잡는 것도 쉽지 않았고, 어찌되었든 처음 해보는 일이니까. 우리는 우왕좌왕 했다. 그런데 그 우왕좌왕이 우리에게 어떤 시간을 선물해주는 것 같았다. 쉽지 않은데 무언가 되어간다. 전단지도 만들고 보니 그럴 듯했다. 이게 될까? 사람들이 우리의 시를 받아줄까? 생각했었는데,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를 나눠주려고 돌아다닌 그 시간들 속에서 우리가 만난 사람들과의 에피소드들이 생겼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는데, 우리가 시를 선물해줬다는(그 사람들도 선물이라고 생각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유만으로, 어떤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이야기가 생겼다.

오늘의 장소는 망원역 입구와 카페 창비 앞이다.


   어떤 할머니는 은선을 너무 뚫어져라 봐서 설마 시에 관심이 있는 건가 했는데, 원피스 어디서 샀냐고 자기한테 팔라고 은선의 허리춤 옷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은선은 누가 자기를 만지는 게 불편했지만, 계속 웃으면서 ‘이 옷은 빈티지라서 같은 옷을 구할 수가 없어요.’ 설명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다시 돌아오셔서 또 묻는다. 자기한테 팔라고. 이 옷이 너무 마음에 드셨나보다. 어…… 이 옷이 엄청 예쁜가봐. 뭔가 잘못되어가는 것 같은 기분. 근데 이런 기분이 또 마음에 들어. 에스컬레이터 끝에 수북이 쌓여 있는 버려진 헬스클럽 전단지 같은 것을 생각했는데. 우리가 보는 앞에서는 아무도 우리 시를 버리지 않은 게 놀라웠다.


   『온』 시집 표지를 받은 어떤 분이 가던 길을 되돌아 우리에게 다시 왔다. “이거 카페 홍보지인가요? 여기 적힌 ‘창비 카페’가 어디에 있죠?” 그 사람이 가리킨 ‘창비’라는 글자는 시집 표지에 적힌, ‘이 시집은 창비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이라는 정보가 담긴 글자였다. 창비라는 이름이 출판사보다 카페로 더 유명할 수도 있겠구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여긴 망원동이고, 카페 창비가 크게 있으니까. 여기 이렇게 ‘시집’이라고 쓰여 있지만 그것이 우리에게나 시집이지, 다른 사람들에겐 카페에서 하는 이벤트 같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시인으로서의 우리의 일상과 우리의 둘레를 넘어선 시선들, 넘어선 일상들, 넘어선 생활들이 단지 우리가 시를 선물하는 그 일을 통해 우리에게도 전달되었다. 그것이 오히려 우리가 받는 선물 같았다. 선물이라는 것은 역시 그렇지, 주는 사람에게 더 좋은 일이야.


   승일은 쭈뼛쭈뼛하면서 우리 중에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시를 선물했다. 처음엔 “저…… 이거…… 이거 선물인데요……” 했다가, 사람들이 받으려하지 않으니까 멘트가 점점 진화했다. 나중엔 능숙(?)해졌다. “이거 제가 쓴 시인데요, 한번 읽어보세요. 선물이에요.” 그런데 말은 익숙해졌지만, 승일은 계속 웃고 있었다. ‘아, 어색해!’ 하는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승일의 손과 승일의 발이 ‘어쩌지? 저 사람한테 줘야 하나? 받아줄까?’ 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받지 않았다. 선물을 줬는데 선물을 받지 않을 때. 마음을 주었는데, 마음을 거절당할 때. 그 순간의 난처함, 그 순간의 창피함, 그 순간의 어색함이 얼굴 위로 잠깐 활짝 피었다가 사라졌다. 그러고는 다시 선물했다. “이거 하다보니까, 이걸 직접 선물하는 사람만이 알게 되는 것들이 있네! 신난다! 이거 재밌네!” 하는 승일은 아이 같았다.



   은선은 사람들에게 천천히, 친절하게 다가갔다. 사람들은 바쁘고 분주했다. 지하철역에서 나오는 사람들, 어딘가로 가고 있는 사람들은 늘 두 손도 바빴다. 핸드폰을 쥐고 있거나, 커피를 쥐고 있거나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은선은 자신의 템포로 사람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나서도 말이 끝나지 않는 경우들이 있었다. 은선이 주는 시 선물을 받는 사람도 있었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머쓱해진 얼굴로 돌아와 다시, ‘누구에게 주지?’ 하는 눈빛으로 서 있었다.


   미옥은 셋 중에서 직접 나눠주는 것을 가장 못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전봇대에 붙이고, 벽에 붙이고, 차 유리창에 끼웠다. 사실 은근슬쩍 그렇게 자신에게 할당된(?) 시 선물들을 소진시키고 싶었다. 사람이 아니라, 사물에게, 풍경에게 선물하는 것이 더 편하니까. 일대일로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여기 이런 것이 있어요. 선물을 준비했어요, 와서 받고 싶은 사람들은 받고 가세요.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읽고 가세요.’ 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은선과 승일은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직접 줘보라고, 할 수 있다고, 용기까지 불어넣어주었다. ‘아, 정말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친구들이구나.’ 하고 정말 몇 명에게 나눠주었다. 한 사람이 받아줬다.

어떤 아주머니 한 분이 갑자기 우리에게 오셔서 전단지를 주고 가셨다. 전단지 돌리는 사람에게 전단지 돌리는 일을 업으로 삼고 계신 것 같았다.


   은선이 고른 시 중에 「도움의 돌」은 망원동을 산책하고 망원시장을 돌아다니고 그리고 한강까지 걸어갔다온 날에 그런 경험들을 토대로 쓴 시였는데, 그걸 망원동에 와서 나눠주고 있자니 뭔가 신기했다. 시라는 게 쓰이고 활자가 되어 물성을 갖고 그게 또 사람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고 자기의 근원에 어쩌면 조금 미칠 수도 있다는 게. 누군가는 우리 시 읽어봤을까? 어쩌면 집에 돌아가서 우울한 밤에 그걸 읽고 흔들렸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어쩌면 집에 가는 길에 버렸을지도 모르지. 시들이 어디로 어떻게 흘러갔는지 상상해보는 건 조금 슬프고 흥미롭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선물이라는 말을 듣고 받는 사람들에겐 받지 않은 사람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생겨날 것이다. 확실하진 않지만, 어쩐지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엔 그런 것이 많다. 선물인 줄 몰랐는데, 받고 보니 선물 같은 것들. 홍보 전단지 인줄 알고 그냥 받다가, “이거 시예요.”라는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던 사람의 표정이 생각난다. 시가 그런 것이면 좋겠다. 사람들에게 일상의 익숙한 수많은 것들 중 하나가 아니라, 전혀 뜻밖의 무엇. ‘내 일상에 이런 것이 존재했다니?’ 하고 놀라움을 발견하게 해주는 무엇.

버스 정류장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시.


   너무 수줍으니깐 안 되겠다. 우리는 매주 만나서 노니까 노는 거라고 생각하고 하자. 그렇게 시작했는데, 진짜 노는 것 같기도 하고, 여행자 같기도 하고, 그래서 다들 계속 웃었지. 의도대로 되고 있다고. 무슨 일이 닥쳐도 다 의도된 대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처럼. 역시 선물은 주는 사람이 기뻐야 선물이지.

   이런 걸 받았어. 카페에 들어가 친구들에게 신기하고, 촌스럽고, 웃긴 전단지를 보여주는 사람처럼. 이런 걸 받았어. 시를 보여주는 거다. 나는 이런저런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역시 이걸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다음엔 어떻게 줄까. 사람들이 또 받아줄까.

시 하나가 도로로 날아갔는데, 도로 위에 누워서 차에 밟히지도 않고 그대로 계속 있었다. 햇빛에 반사되어 시는 보이지 않았다.



만나서 시 쓰기

안미옥, 백은선, 김승일. 우리는 세 사람이다. 우리는 시인이고 친구들이다. 종종 만나서 밥을 먹었다. 그러다 누가 만나서 밥만 먹지 말고 시도 쓰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만나서 시 쓰기’가 되었다. 밥 먹는 거랑 시 쓰는 거 말고 재밌는 거 뭐 없나. 고민하다가 이걸 하게 되었다. 이건 ‘선물하는 시’다. 시를 선물하는 프로젝트다.

2018/07/31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