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화부터는 서로의 옷을 따라 입는 코스프레를 진행한다.

   계피▶이응, 이응▶움파, 움파▶계피



   계피가 따라 입는 이응

   _계피

계피가 그린 이응 크로키. 종이를 보지 않고 이응에 눈을 떼지 않은 채 1분 제한을 두고 그렸다. 즉각적인 인상을 포착하기 위해서다. 완성 후 종이를 보고는 우리끼리 대폭소했다. 이응은 갸름하고 긴 턱선에 웃을 때 드러나는 이가 옥수수같다. 오래된 티셔츠의 목은 여지없이 늘어나 있고 팔뚝에는 작은 문신 세 점이 있다.

   이응은 한 번 기억이 묻은 옷은 어지간하면 버리지 않는 빈티지 애호 맥시멀리스트다. 모자에 토끼 귀가 달린 아동용 털 점퍼나 엄마가 제발 버리라고 한다는 미대 시절 물감투성이 항공점퍼가 이응의 외양을 구성한다. 시장 좌판에서 할머니가 강매해서 샀다는 흰색 운동화도 빼놓을 수 없다. 아이들이 학교 복도에서 실내화로나 신을 것 같은 그 멋없는 운동화를 가리키면서 그는 낄낄 웃곤 한다. 이응은 정 많고, 사람 좋아하고, 온갖 별것 아닌 잡동사니도 좋아하고, 잘 웃고, 잘 울고, 괴상한 영화를 좋아하고, 그 괴상한 영화를 같이 보자고 조르는 민폐를 끼치면서도 본인 취향을 놀리면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좋은 동네 친구다.

   이응이 가진 그 많은 옷 중 내 인상에 가장 강하게 남은 옷은 그가 내 앞에서 제일 많이 울던 날 입었던 흰색 티셔츠다. 목이 예술적으로 늘어난 오래된 티셔츠를 입은 그의 눈에서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는 그의 등뒤 벽에 붙어 있던, 눈물의 이유인 사람의 사진도 함께 떠오른다. 나는 사진 속 사람을 욕하며 화를 냈지만 이응은 그날이 지나고도 오래도록 상대를 마음에서 놓으려 하지 않았다. 잊으려고 하지 않았고 미워하려고 하지 않았고 잡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응이 말했다. “저는 기억을 놓고 싶지 않아요. 슬픈 기억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미니멀리스트다. 이응과는 반대의 옷 저장 패턴을 가지고 있다. 물건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미니멀리스트인 데는 꼭 필요한 물건만 소유하고 단정하게 살아간다는 기쁨이라는 명분 말고도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는 점을 알았다. 나는 기억을 분열시키려 옷을 버렸다. 어떤 옷을 입었을 때 생각나는 괴로운 일이 있었고 당연하게도 인생에서 괴로움은 피할 수가 없었으며 온전히 기쁨만을 연상시키는 옷은 많지 않았다. 옷을 버려도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좀 드물게 떠오를 뿐이었다. 온전히 마주하지 못한 기억은 내면에 남아 작은 자극에도 다시 살아나곤 했다. 혹은 깊은 밤 꿈으로 되살아나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런 나는 기억이 깃든 물건은 그게 무엇이든 절대 새어나가지 않게 붙들고 있는 이응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짐을 부인할 수 없었다. 우리는 어쩌면 감당하고 싶지 않은 감정을 회피한다는 같은 목적을 위해 각각 반대의 방식를 취하며 지내왔던 게 아닐까.

   생각 끝에 나는 서로의 외양을 모방하는 이 프로젝트에서 이응의 외양이 아니라 그의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옷을 선택하기로 한다. 내가 가진 옷들 중 가장 오래된 옷과 가장 정서적인 옷이 그것이다.

   10년이 넘은 옷은 두벌이 있다. 하나는 짙은 남색 후드 카디건이다. 10년 전 기억 속의 나는 후드를 눌러 쓴 채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리고 있다. 무색무취함으로 존재하며 가끔씩은 아무에게도 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를 바랐었다. 보컬리스트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내가 마주하는 대중의 시선에 설레는 만큼 겁이 났다. 많은 이들이 나를 좋아해주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나에 대해 쉽게 말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누군가의 구미에 맞게 어떤 식으로 변형되어도 상관없는 물건처럼 느껴졌다. 이 카디건은 내가 심정적으로나마 숨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옷에 대한 일종의 전우애와 지난 시기에 대한 아픈 마음이 동시에 떠오른다.

   하나는 물 빠진 보이핏 청바지다. 나풀나풀한 치마 밑에 받쳐 입으면 조금 덜 여성성이 부각된다는 점이 좋았다. 치마로 여성성을 나타내되 함께 입은 바지로 중화시키는 당시의 복잡한 태도를 잘 보여준다. 여성 대상으로 시선을 받는 일은 일면 유쾌한 면도 있었지만 내게 점수를 매기는 느낌이 들어 불안했다. 바지를 함께 입으면 활동하기에 더 편안하기도 했다. 여성성이 강한 옷은 보통 내 몸을 안온하게 해주지는 않았다.

   6년 전 결혼하는 해 겨울에 산 모직 코트도 골랐다. 남자 싱글 코트를 줄인 옷이다. 여자 코트의 딱 떨어지는 어깨 재봉선이 불편했다. 남자 코트의 어깨만 줄이고 소매통은 그대로 둔 탓에 벙벙하니 언뜻 보면 북한 인민복 같다. 남편은 수수하기 짝이 없는 옷을 입고서 입을 헤 벌리고 웃고 있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준다. 여러 겨울 동안 우리는 손을 꼭 마주잡고 걸었다.

   분홍색 티셔츠는 작년 동요 앨범 쇼케이스 공연 때 입으려고 산 옷이다. 얼굴을 찡그린 여성이 “아무로, 내 말 들려?(Amuro, do you read me?)”라고 묻는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다. 친구들은 이 단발머리 여자가 나와 꽤 닮았다고 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씩 웃었다. 닮음의 포인트는 단지 단발만이 아니라 짜증인 것 같다. 세상을 온화하게 대하고 싶지 않은 날 이 옷을 입는다.

   고른 김에 옷들을 걸쳐 입고 거리를 나선다. 이 조합으로 입기는 오랜만이다. 옷과 함께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기도 오랜만이다. 의외의 편안함에 놀란다. 좋았든 싫었든 함께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편안할 수 있다는 점이 새삼스럽다. 어쨌거나 나의 역사다. 나는 뭘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 이응 방식의 좋은 점을 이해할 것도 같다. 들어온 까페에서는 Adele이 “나를 잊지 마세요, 당신 말을 난 기억해요.(Don’t forget me, I beg, I remember you said.)”라고 노래하고 있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고 내가 왜 노래를 부르며 살았는지를 떠올린다. 왜 마음을 흘려버리지 않고 다시금 재생해 내 몸 안에서 소리로 만들었는지 다시 떠올린다. 아무 것도 잊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응이 따라 입는 움파

   _이응

이응이 그린 움파. 자신감에 가득 차서 일필휘지로 그려냈는데 놀랍게 닮았다. 집에 있어서 옆으로 쓸어넘긴 짧은 머리와 넓게 벌어져 치아가 보이는 입이 매력 포인트다. 무릎 부근의 동그란 것은 집에서 움파가 잘 입는 세트 잠옷의 오렌지 패턴이다.

   움파와 내가 함께 사는 집에는 세 짝으로 나눠진 붙박이장이 있다. 장을 열면 위아래로 칸이 나누어져 있어 총 여섯 개의 칸을 쓸 수 있는데, 한 칸에는 손님용의 요와 이불 한 세트가 들어 있고, 나머지 칸을 적당히 나누어 옷을 수납하는 데 쓰고 있다.

   말이 ‘적당히’지, 사실 옷장을 전부 활짝 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우리의 차이는 명확하다. 여섯 칸 중 세 칸을 빈틈도 없이 꽉꽉 채우고도 넘치는 나와는 달리 움파는 그 모든 걸 두 칸 안에 넉넉하게 수납하고도 공간이 남는다. 또 좋아하는 스타일도 달라서 나는 비교적 패턴이 있고 색이 강한 곳이 많고 움파는 어두운 민무늬에, 채도 낮은 옷이 많다. 그래서 나란히 서 있으면 흔한 우스갯소리처럼 ‘이응에게 색과 무늬를 모두 빼앗긴 움파’가 된다. 겉으로 볼 때면 참 다르다, 는 생각이 먼저 들기 마련이다.

   거슬러 올라가보자. 우리는 친한 듯 안 친한 듯한 대학 동기였다. 같은 학번으로 입학해 비슷한 시기를 함께 보냈지만, 졸업 시기가 서로 달라 두어 해 정도는 거의 마주칠 일이 없었다. 졸업하고, 입사하고 퇴사하고,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시간이 지난 후에 우연이 겹쳐 인연으로 다시 만났다. 어느 날엔가 지하철에서 움파와 마주쳤는데, 나와 움파의 머리색이 똑같은 것이다! 심지어 초콜릿색이나 밝은 갈색도 아닌, 형광펜의 잉크를 뽑아 물들인 것 같은 핑크색이었다. 그냥 색이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똑같아서 몇 마디 이야기를 해보니 같은 염색약을 사용했더라. 꽤나 유명한 회사의 염색약이었는데, 그 색의 이름이 ‘퍼플'이었다. 사실 보라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싶었던 사람들이 쉽게 착각할 만한 이름이지 않은가. 우리는 둘 다 그 이름에 속아 핑크빛 머리를 갖게 된 것이었다. ‘퍼플’이라며! 같은 거짓말에 말려든 동료애 때문만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 이후 종종 맥주잔을 기울이는 사이가 되었다.

   그후로도 벌써 몇 년이나 지났다. 우리는 같이 살고 있다. 나는 여전히 술을 좋아하고, 이제 움파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다. 10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이 지나고 난 뒤 처음 만난 때와는 어느 하나도 같질 않다. 20년 정도면 사람 몸에 있는 세포도 죽고 살기를 반복하여 완전히 새로워진다고 한다. 그의 반밖에 지나지 않은 시간이라고 해도, 학교를 벗어나 망망대해 같은 세상에 던져진 후 사람은 속으로도 겉으로도 많이 바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움파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들 중 특히나 눈에 띄게 외형이 많이 바뀐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움파를 지켜봤으면서도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았을 때에야 인식할 수 있었다. 어깨를 넘는 탈색 머리는 이제 짧은 검은 머리가 되었고, 더이상 입지 않는 하늘하늘한 옷은 나에게 넘겨주었다. 나는 그때보다 한층 더 무늬 많은 옷을 찾고, 흐르듯 부드럽거나, 보송보송한 털이 달려 있거나, 광택이 있거나, 까슬하게 자수가 놓인 것 등 여러 질감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반면 움파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질감이 있다. 부담스럽지 않은 잔잔한 빛깔의 바지와, 사각사각 소리가 날 것 같은 셔츠. 사각사각. 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것 같다.

   움파를 따라 입기 위한 준비에는 이 사각사각한 소리도 포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진 옷 중 가장 칼라가 빳빳한 검은 셔츠를 골라본다. 그리고 모직 재질의 따뜻한 바지를 꺼내 입을 것이다. 이 날씨에 추위를 많이 타는 움파라면 당연히 롱패딩을 꺼낼 것이다. 무늬가 없는 남색의 양말을 신으면 제법 ‘작은 움파’ 같은 이응이 될 수 있겠다.

   움파를 따라 입으려면 겨우 한두 세트 간신히 맞출 수 있을 정도로, 이제 우리는 겹치는 옷이 없다. 뒤섞인 빨래를 널고 걷고 서랍에 넣을 때에도 착각할 일이 없어 편안할 지경이다. 이처럼, 우리는 한 번 겹쳐지곤 각자의 방향으로 가는 선처럼 서로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함께 식탁 앞에 마주앉아 깔깔 웃을 수 있다. 그걸로 충분히 괜찮다.



   움파가 따라 입는 계피

   _움파

움파가 그린 계피 크로키. 언니는 미니마우스가 그려진 옷이 잘 어울린다. 귀 옆 삐죽 나온 애교머리가 곱슬거린다. 언니는 앞머리가 귀엽고, 눈썹이 확실하고, 얼굴에 부드러운 색 점이 있고, 턱선이 확실한 각을 그리고, 눈매가 또렷하고 깊다. 무엇보다 시선이 예리하다. 대화 중 내가 살짝 말을 돌리려 할 때, 언니의 눈은 깜빡이지도 않고 나를 향해 계속 말해보라고 재촉한다. 그러면 나는 그 사이를 미끄러져 나가 숨어버린다.

   어느 날 언니에게 대답했다. ‘이야기란 결국 출발점으로 회귀하는 서사잖아요.’

   내게 없는 무언가를 찾으러 먼 길 여행을 떠나, 떠났다고 생각하지만 나선형으로 돌고돌아, 결국 출발점과 겹치는 지점에 돌아와 무언가를 발견하는 파랑새 이야기처럼.

   하지만 내 대답이 잘못되었다는 걸 내뱉은 순간 깨달았다. 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 속 주인공도 아니다. 언니는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에 관해 물은 게 아니라, ‘나’에 관해 물은 것이다.

   언젠가 언니가 물었다.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해?” 이후 이어진 언니의 모든 질문들이 내 머릿속에 비상벨을 울렸다. 큰일 났다. 그런 질문들에 대답할 말 같은 걸 살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일상을 살면서 어떠한 종류의 얘기는 어물쩍 넘어가곤 했다. 하지만 언니는 그렇게 돌려 들어간 스몰 토크를 원하지 않았다. “내가 널 어떻게 생각했으면 좋겠어?”

   언니는 왜 나를 파고드는 걸까. 서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꼬리 이은 질문들(언니는 소크라테스의 환생일까?)에 계속 다른 방향으로 대답을 틀어보았지만 더 난감한 질문들이 이어졌고, 코너 끝에 몰려 겨우 나온 대답은, “언니가 나를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나는 왜 늘 괜찮은 척을 할까. 돌려 묻지 않는 질문들은 결국, 내가 이전과는 달라졌고 나아졌으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더 바랄 거 없이 기적이고, 살아 있으면서 어제보다 오늘 약간 더 나아지는 정도면 충분하다고, 그렇게 생각, 아니 그렇게 믿고 싶던 나를 뿌리째 뽑아냈다. 흉내를 내고 있다. 생존을 위해. 전혀 괜찮지 않고, 여전히 가질 수 없는 걸 강하게 원한다.

*

   드라마 촬영용 카메라만큼의 거리를 두어 나를 제3자처럼 이야기하는 데 능숙한 건, 누군가에게 나를 이해시켜야 하는 상황이 많았기 때문이다. 너무 날것의 감정을 드러내면 청중은 짜게 식어 차가워지고, 너무 이성적으로 설명하면 청중은 판단하려 하거나 의심을 하고, 농담을 섞어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청중은 오히려 눈시울을 붉히거나 안쓰러워한다. 관객이란 참 모르겠다. 어쨌든 나를 상황이라는 틀에 맞춰 구워내고 새 이름을 붙여 진열대에 선보이는 건 나와 언니, 여자들에게 너무 쉬운 일이다. 이미 훈련받아왔으니까. 하지만 자의반 타의반 주입된 욕망이라 하더라도, 이왕 한다면 더 잘하고 싶다.

   언니를 따라 입으려면 어떤 걸 포착할지 고민한다. 나는 언니가 무슨 재질과 색깔과 모양의 옷을 입는지 바로 떠올리지 못한다. 왠지 ‘나한테 관심이 있긴 해?’라고 언니의 물음이 메아리치는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간 좋아했던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의 옷에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점에서, 난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관심이 없다.

   그래도 굳이 기억을 뒤집어서, 우선 내 옷을 떠올려보자. ‘요 밑 콩’에 소개할만한 옷이 있다. 오래 전 외국의 전시회를 소개하는 기사를 읽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 당시 입었던 의상을 모았다고 했다. 내게도 그런 옷이 있다. 입지는 않지만 버릴 필요도 없어서 본가에 둔 옷 중 하나다. 옷을 보거나 만진다고 해서 불쾌한 기억이 떠오르진 않기에 놔두고 왔다. 그 옷을 입고 유쾌한 기억도 많았는데, 그렇다고 딱히 그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 안 버린 것도 아니었다.

   옷장 정리하다가 그 옷과 마주치면 드는 생각은 ‘레이스가 정교하다’ ‘원피스 치곤 편했지’ 정도다. 흔하지 않은 디자인에 내구성이 좋고 브랜드 이미지가 일관적이며 내 체형과도 잘 어울렸기에, 내가 투블럭을 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더라면 종종 입고 다녔을 것이다. 나의 옷과 기억은 따로 보관되어 있다. 옷은 서랍 속에, 기억은 내 속 어딘가에. 물건은 잘못이 없다. 보온성과 촉감과 디자인이 있을 뿐이다. 물건에 판단을 해야 한다면, 감각적 만족감과 완성도, 가성비를 논하는 정도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늘 사람이 한다. 알게 되면 두렵지 않다. 그래서 늘 알려고 한다. 그 옷이 왜 그렇게 질 나쁘게 만들어졌는데도 잘 팔리고 있는지. 그 옷들에는 어째서 특정 콘셉트의 이미지와 수식어가 붙는지, 그 옷이 얼마나 날 보호할 수 있는지. 그 옷으로는 내가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그런 질문들을 던지고 시험하고 확인하면서, 그런 옷들과 감정적으로 안전히 작별할 수 있었다. 옷을 원하지 않는다. 원하는 건 옷의 물성도, 옷이 자아내는 이미지도 아니다.

*

   이제 언니를 닮은 옷을 떠올려보자. 언니랑 나는 옷의 실용성을 추구하는 태도에서 닮은 점이 많아 보인다. 생각보다 고르는 데 쩔쩔매지 않아도 될 듯하다. 언니는 나보다 골반과 허리 치수 비율 차이가 더 크다. 키도 나보다 더 크다. 그래서일까 신축성이 있는 청바지가 잘 어울린다. 혹시 몰라 한 벌 남겨둔 청바지(불편해서 안 입는)를 꺼낼 때가 왔다. 언니 보고 있나요? 제가 이렇게 언니를 생각합니다.

   언니랑 나는 상의 코디법도 꽤 많이 닮았다는 게 기억난다. 셔츠 단추를 맨 위까지 잠그고(또는 하나만 열고) 니트 티를 그 위에 겹쳐 입는다. 마치 단정 모범생 룩. 근데 이렇게 입으면 그냥 거의 나를 코스프레한 게 아닐까? 좀더 고민해본다. 언니는 미니마우스 티가 있고, 나는 포켓몬스터 티가 있다. 언니는 시계나 염주를 차고 있을 때가 많았다. 언니의 손에서 기억나는 건 약지에 낀 반지다. 내게도 친구가 만들어준 팔찌, 직접 고른 반지가 있다. 그것들을 보관해두고 있었던 게 기억난다. 언니를 떠올렸을 뿐인데 내 많은 것들도 함께 떠오른다.

   언니는 소매가 길지 않고 적당히 핏 되는 반팔을 입곤 했다. 그게 청바지랑도 참 잘 어울렸다. 내게도 그런 옷이 있다. 언니가 이응을 따라 입는 옷에는 ‘DO YOU READ ME?’라고 적혀 있고, 내가 언니를 따라 입을 옷에는 ‘A LONG ASS RIDE’라고 적혀 있다. 소매가 짧기도 하고 몇 가지 이유가 있어 자주 입지는 않는 옷인데, 오랜만에 기억난 김에 입어봐야겠다. 언니는 연못에 퐁당퐁당 돌을 던져서 앙금과 사금파리 모두를 회오리치게 만드는 사람 같다.

영상 <모임도토리 중간보고>(총 11분). 지금껏 우리의 옷을 관찰해 분석하고 서로의 원고를 보며 느낀 점들을 서로 나눠보았다.


모임도토리

무대에 서는 직업 때문에 옷에 대해 꽤 생각해본 보컬리스트 계피, 빈티지 샵에서 촛대를 고르듯 옷을 사면서 한편으로는 밴드 굿즈 티셔츠를 모으는 이응, 풍선 가슴뽕을 넣고 유치원 수영복 콘테스트에 섰던 움파.

2020/12/29
3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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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부터는 서로의 옷을 따라 입는 코스프레를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