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랩
2화 우리 곁에 남은 조연들을 기억하며
아이는 낮은 대문 위로 기어올라 작은 두 팔로 올리버의 목을 감싸안으며 말했다.
“잘 가, 형! 하느님께서 형을 지켜주실 거야!”
이 축복의 말은 비록 어린아이의 입술에서 나온 것이었지만 올리버에게는 지금까지 받아 본 최초의 축복이었다. 그후 온갖 고통과 시련, 곤경과 변화를 겪으면서 그는 단 한 번도 이것을 잊은 적이 없었다.1)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에는 많은 조연이 등장한다. 디킨스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이름을 부여하고, 그들을 위한 문장을 준비해두었다. 그중 소설의 주인공인 올리버 트위스트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조연이 있다. 그에게 최초의 축복의 말을 던진 ‘딕’이라는 어린아이다.
소설에서 딕은 딱 세 번 묘사된다. 모두 딕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로, 아무리 긁어모아도 한 페이지가 겨우 될까 말까한 분량이다.(영양실조와 질병으로 딕이 곧 죽을 거라는 부분, 그다음은 정말로 죽을 지경이 되었다는 부분, 마지막은 딕이 결국 죽었다는 부분이다.) 하지만 딕에게 부여된 문장이 많고 적음을 떠나, 이 소년이 올리버에게 미친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올리버는 자신을 처음으로 축복해준 딕에게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한다. 그 약속으로 인해 딕은 부재하면서도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된다. 딕은 올리버에게 등대와 같은 존재였으며 선한 의지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는 힘의 근원이었기 때문이다. 올리버의 여정을 관통하는 신념이 극적 사건도 인물도 아닌 스쳐지나가는 한 주변인에게 부여됐을 때, 디킨스가 들여다본 세계의 구석구석이 밝아지게 되는 것이다.
딕의 존재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주인공에게 큰 통찰을 부여하는 인물에 굳이 많은 단어와 설명을 부여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스쳐지나가는 인연이 누군가의 인생에는 커다란 점으로 남을 수 있듯이.
디킨스가 그러했듯 창작자는 작품 속 인물을 창조하면서 고민을 한다. 어떤 인물을 어떤 방식으로 만들고 보여줄 것인지를. 그 고민의 흔적을 찾아내고 인물의 서사와 의미를 떠올려보는 것은 독자의 몫일 것이다.
비하인드 랩 연구소는 독자의 자리에서 그동안 보아온 수많은 텍스트 중 기억에 남는 조연들을 불러 모으는 시간을 가졌다. 누군가는 앞서 언급한 딕을 떠올렸고, 누군가는 단편소설 속에서 스쳐지나갔던 할머니를, 누군가는 영화 속에서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형제를 떠올렸다. 이들은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었는데, 또다른 조연들을 이어서 소개하니 독자 여러분도 이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시길 바란다.
최은영 작가의 단편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는 간첩으로 몰려 감옥살이를 하게 된 한 남자의 아내 ‘순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순애를 기억하고 회상하는 주체는 그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친척 동생 ‘해옥’이다. 이 이야기는 화자인 해옥의 딸이, 해옥이 꺼내놓은 순애에 대한 기억들을 담담하게 전하는 구조로 전개된다.
“언제 언니를 가족으로 생각한 적이라도 있어요? 가족이라는 허울로 이용만 했잖아.”
“그래. 나도 살려고 그랬다. 걔를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러니 너도 이제부터 그렇게 해. 그게 너도 나도 사는 길이야.”
할머니는 일생 동안 인색하고 무정한 사람이었고, 그런 태도로 답답한 인생을 버텨냈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태도를 경멸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 무정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눠 질 수 없다면, 상대의 삶을 일정 부분 같이 살아낼 용기도 없다면 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 것이 나았다. 그게 할머니의 방식이었다.2)
위의 대목은 순애의 남편이 잡혀가고, 순애 역시 살던 곳에서 자취를 감추자 망연자실한 해옥에게 할머니가 “이제 순애는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홀로 곤경에 빠진 순애를 도와주진 못할망정 모르는 척 하라는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가 원망스러운 엄마 해옥. 두 사람의 갈등이 여실히 드러난다.
위 대사로만 볼 때는 할머니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보일 수 있지만, 최은영 작가는 할머니에 대한 묘사에 두 문장을 덧대었다. “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눠 질 수 없다면, 상대의 삶을 일정 부분 같이 살아낼 용기도 없다면 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 것이 나았다. 그게 할머니의 방식이었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리다고 설파하는 대신 작가는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방식에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방식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다. 우리에게 누군가의 삶의 방식을 함부로 판단할 권리는 없다고 말해주기라도 하듯이.
흔히 조연은 주인공의 행동과 신념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장치로 쉽게 소비되곤 한다. 하지만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에서 할머니라는 조연의 존재 이유는 단순히 서사의 갈등을 증폭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뒤에 바뀔 해옥의 태도와 견주어 독자들에게 여러 생각의 갈래를 더해준다. 순애에게 애정을 쏟아부었던 해옥은 후에 순애의 망가진 모습을 보고, 끝내 그와 데면데면해진다. 그 대목을 읽으며 다시금 앞의 두 문장을 떠올렸다. 어설픈 애정과 무정함 사이에서 무정함을 택했던 할머니의 선택을 결국 비난할 수 없게 된다.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나’의 방식은 과연 어떠한지 되묻고 있노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렇듯,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인물들에게도 작가의 철학과 고민은 충분히 녹아들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에 등장하는 ‘세진’과 ‘세주’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매점에서 물건을 훔치다 괴물에게 잡히는 배고픈 고아 아이들이라고 하면 ‘아!’ 하며 무릎을 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들의 이름이 세진과 세주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세주의 형인 세진은 긴 영화를 통틀어 단 한 번의 시퀀스에 등장하고 괴물에게 죽임을 당한다. 그저 극의 긴장감을 높이고, 괴물의 흉폭성을 더해주는 도구적인 단역으로 사용되고 사라질 수도 있었지만, 봉준호 감독은 이들에게 이러한 대화를 덧대어준다.
“와 돈이다!”
“그건 그냥 놔둬”
“왜? 가질래!”
“그것까지 손대면 절도야 절도. 너 그거 도로 안 꺼내놔? 세주야. 이건 도둑질이 아니야. 우린 지금 매점 서리하는거야 매점 서리. 수박 서리, 참외 서리할 때 서리. 너 근데 서리가 무슨 뜻인지 알긴 아냐? 진짜 모르냐? 아무튼 서리는 배고픈 자들의 특권이 되겠다 이 말이야.”
이 짧은 대화 속에서 관객들은 세진과 세주가 어떤 아이들인지 그들의 ‘인간성’을 느끼게 된다. 일반 사람들이라면 얼씬도 하지 않을 곳을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목숨 걸고 들어왔지만, 그 와중에도 절도만은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세진. 투덜거리지만 형이 시키는 대로 돈을 도로 놓는 세주. 이 짧은 장면이 있기에, 우리는 이름도 몰랐던 이 고아 아이들이 괴물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살아남을 때에 무언의 감정을 투영할 수 있다. 이 아이들도, 주인공 ‘박강두’의 가족처럼 서로에게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해주며, 그들이 살아남길 바라게 되는 것이다.
마음에 오래 남는 조연을 떠올려보라.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아주 적은 문장과 장면이 부여됨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입체적인 인간’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부여된 한 문장, 한 줄의 대사를 통해 그들의 인간성을 느끼고, 상상하며, 그들의 전사와 후사를 궁금해하게 된다.
인물을 ‘인간답게’ 그리는 것에는 그 어떤 정석도, 정해진 법칙도 없다. 그리고 문장의 많고 적음이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앞으로 비하인드 랩은 조연을 다루는 창작자의 태도와 방식이 이들의 묘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피고 더욱 다양한 실험적인 시도들로 연재 지면을 채워나갈 예정이니 부디 기대해주시길.
비하인드랩연구소
김수현, 김원지, 장은진. 창작과 관련된 일을 하는 세 사람이 모여 이야기 속 ‘조연’을 마주한다. 조연을 표현하는 문장과 단어를 아카이빙하고, 조연에게 전사와 후사를 덧입히는 각자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문학이 ‘사람’을 존중하는 방법을 깊이 성찰해나갈 예정이다.
2018/07/31
8호
- 1
- 찰스디킨스, 『올리버 트위스트』, 이인규 옮김, 민음사, 2018, 56쪽.
- 2
- 최은영,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쇼코의 미소』, 문학동네, 2016, 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