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 더미 탐미
6화(최종화) 음악
휘리의 음악 : 잊고 있던 용기
권나무 1집 수록곡 <어릴 때>를 듣고, 오선지 위에 그린 그림.
친구와 사이가 어색해졌어. 이유는 잘 모르겠어.
그저 우리 사이에 긴 겨울방학이 한 차례 지나갔을 뿐이었는데.
작년엔 같은 반 친구였고, 서로 집에 놀러 가서 어울릴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었어. 그런데 겨울방학이 지나고 복도에서 그 친구와 눈이 딱 마주쳤는데, 어쩌다가 인사를 놓치고 만 거야. 그게 시작이야. 정말로 그게 다였어.
먼저 손 흔드는 게 그때는 왜 이렇게 힘들었던 건지, 한 번 놓친 인사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하기 어려워져서 이제는 정말 인사를 안 하는 사이로 굳어지고 있었지.
한 달쯤 지났을까. 그 친구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어.
아홉 살의 한 달은 길어.
편지를 썼어. 마음이 조급할수록 글씨가 자꾸 비뚤어지고 커지기만 했어.
어렵게 쓴 편지를 근처에 사는 친구네 집 우편함에 넣고,
혹시라도 마주칠까 도망치듯 집으로 뛰어왔어. 콩닥콩닥 가슴이 막 뛰었어.
‘지혜야, 우리가 왜 인사를 못 하게 되었을까.
나는 네가 좋아. 다시 인사하는 친구로 지내고 싶어.’
그 이후로 매일 우편함을 들여다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고 귀여운 편지지가 우리집 우편함에 꽂혀 있었어. 손을 뻗어 다급히 펼친 편지에는
‘안녕 휘리야. 잘 지냈니? 먼저 편지를 보내줘서 고마워.
엄마가 휘리는 참 용감한 아이라고 했어.
이 편지를 읽고 나면 우리 다시 반갑게 인사하자.’
용감한 아이. 그 단어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고 웃음이 막 새어나왔어.
편지를 주고받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다란 복도에서 친구와 드디어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슬며시 웃으며 서로에게 손을 흔들었어.
용기의 첫 기억. 이 오래된 이야기는 우연히 들은
노래 한 곡에서부터……
손 인사 한 번에
그 편지 한 장에
떠나는 버스 창가에
썼다 지웠던 네 이름들이
사실 상관없었어 네가 그 편지를
받지 못했더라도 답장을 하지 않아도 2)
샛별의 음악 : 데칼코마니
도서관에서 일한 적이 있다. 조용한 도서관에서 수십 권의 책을 꽂으며 마마스 앤 파파스(The Mamas & the Papas)의 <California Dreaming>을 떠올렸다. 영화 <중경삼림>의 여주인공인 페이가 패스트푸드점에서 일을 하며 라디오 볼륨을 높여 듣던 음악이다. 그 음악을 떠올리면 봄바람에 펄럭이는 하얀 커튼 너머 양조위가 걸어올 것 같았다. 그날의 공기가 <California Dreaming>을 연주했다. 나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엉덩이를 조금 씰룩이며 아무도 모르는 어설픈 춤을 추며 서가를 정리했다. 교정에 막 피기 시작한 벚꽃이 창문 밖으로 보였다. 나의 양조위는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했지만, 그 이후에도 이 음악을 여러 번 떠올렸다. 홍콩의 오래된 로컬 식당에서 아침 일찍 새우덮밥을 먹을 때, 일인용 침대를 함께 쓰고 싶은 사람이 생길 때, 나는 가끔 영화 <중경삼림>에 다녀왔다.
음악과 나는 포개지고 스며들고 번지며 서로의 기분을 나눴다. 음악과 나는 서로를 어디든지 데려간다. 서로를 기억하고 기다린다. 데칼코마니처럼.
은영의 음악 : 비 내리는 날
<Corcovado>는 브라질의 도시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바위산의 이름으로,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이 작곡을 한 보사노바 곡이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이 노래를 커버하였고, 나는 그중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Oscar Peterson Trio)가 연주한 버전을 가장 좋아한다.
단어 더미 탐미
은영. 일러스트레이터. 마음에 깊이 남아 잊혀지지 않는 것을 담아 기록하고 그립니다.
샛별. 그림책 작가. 건강히 오랜 호흡으로 그림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휘리. 일러스트레이터. 살아 있는 것의 에너지를 표현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2019/04/30
17호
- 1
- 박자, 가락, 음성 따위를 갖가지 형식으로 조화하고 결합하여, 목소리나 악기를 통하여 사상 또는 감정을 나타내는 예술.(출처 표준국어대사전)
- 2
- 권나무 1집 <어릴 때>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