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 남짓 이어진 일상키트가 끝났다. 키-ㅌ 팀은 카페에 모여 그간의 대화록을 돌아보았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여섯 차례 모임을 열어 ‘밤’ ‘눈’ ‘술’ ‘밥’ ‘학교’ ‘문학’을 주제로 일상을 더듬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쌓인 대화를 다시 읽어나가는 과정은 부끄럽기도 하고 새롭기도 했다.
   “와, 우리 이런 말도 했었어요?” “기억 안 나세요? 저는 그날 나눈 대화가 가장 기억에 남는데.” 분명 같은 장소에서 함께 나눈 대화인데도 서로 인상 깊게 기억하는 부분이 다른 것이 당연하면서도 신기했다. “참여자들은 다들 잘 지내시려나요.” 누군가 가볍게 던진 한마디는 다른 팀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우리와 같은 시간을 공유했던 사람들은 그날의 대화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일상키트에 참여해주었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불특정 다수의 모임이었던 만큼 모두와 연락이 닿지는 않았다. 그중 연락이 닿은 이들에게 가장 기억에 남았던 부분을 물어보았다.


   “‘영화는 본인을 드러내지 않고서도 대화할 수 있는 효과적인 소재다.’라는 말이 기억나네요.” _우유(일상키트 ‘밤’)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는 일이 부담스럽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는 대화가 기억에 남아요. 지금껏 타인의 시선을 피하면 무례하게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왔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점이 위안이 되기도 했고 인상에 남았습니다.” _기홍(일상키트 ‘눈’)

   “철저한 익명성 덕분에 일상키트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편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시된 단어 하나를 놓고 각자 개인적인 경험을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었는데, 대화가 끝날 즈음엔 이름을 제외하고는 그 사람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_연복(일상키트 ‘눈’)

   “술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어요. 어떤 사람은 술의 맛을 즐기고 어떤 사람은 취하기 위해서 마시고…… 그런 자리가 아니었으면 나오기 어려운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그때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하는 중이었고 과도기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인간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도 기억에 남아요.” _에비(일상키트 ‘술’)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았던 채식하는 분들도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밥은 소중합니다. 꼭 밥을 챙겨 드세요.” _오리(일상키트 ‘밥’)

   “모르는 사람들과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며 두 시간 동안 밥에 관련된 이야기를 했던 게 재밌었어요. 평소에 제가 생각하지 않았던 개인의 식습관이나 음식 선택, 혹은 밥에 관련된 다양한 질문들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_구녕(일상키트 ‘밥’)

   “학교 제도가 지닌 강압성과 왕따 문제에 대해서 다각도로 접근해볼 수 있어 좋았어요. ‘이유 있는 왕따도 있다.’라는 누군가의 말이 기억에 남네요.” _시리(일상키트 ‘학교’)

   “학교는 사회화의 첫 단계라는 말, 그리고 왕따 얘기를 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학급 전체를 아우르는 건 쉽지 않으니까요. 누군가 학창 시절 친구를 도와주지 못하고 외면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 크다고 한 것도 생각이 나네요. 그리고 요새 미투를 비롯한 여성운동이 활발하다보니, 학창시절 겪었던 교내 성차별 및 희롱에 관한 얘기가 나왔던 순간이 기억에 남아요.” _드림(일상키트 ‘학교’)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문학을 얼마나 좋아하는 지 알 수 있었어요. 더불어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_세오(일상키트 ‘문학’)

   “어떤 분이 문학 전집의 책 번호로 작품을 기억한다고 하신 게 굉장히 기억에 남아요. 그 작품에 대한 애정을 작품에 임의로 부여된 고유 숫자로 기억하고 있다는 게 신기했고, 또 그 작품들을 읽으면서 앞으로 또 새롭게 올 번호를 기대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_정빈 (일상키트 ‘문학’)

   “누군가 주 5일 일하고 이틀 쉬며 살고 있다는 말을 하면서, 주 6일제에서 주 5일제로 바뀔 때 반대했던 사람들 이름을 지금이라도 발굴해야 한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나요. 그리고 안네의 일기는 남의 일기를 읽는 기분이라 양심이 찔려서 읽기가 힘들다고 했던 분도 기억에 남네요.” _맹글(일상키트 ‘문학’)

   오래간만의 연락이었지만 모두가 흔쾌히 기억을 더듬어 감상을 나누어주었다. 같은 날, 같은 대화를 나눈 사이였지만 기억하는 부분이 다르기도, 비슷하기도 했다. 명확히 특정 발화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그날의 분위기나 사람들의 특징을 주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었다.

   올해 초, ‘센시키-ㅌ’ 프로젝트는 ‘왜 어떤 경험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들의 기억과 감성은 서로 같은 값을 가지지 않는 것일까?’라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우리는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문학이란 개인이 일상에 던진 수많은 시선들이 언어의 형태로 모인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웠다. 키-ㅌ 팀은 개인이 일상에 찍는―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는― 방점에 집중하여 개인의 일상과 일상에서 비롯된 문학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키-ㅌ 팀은 사람들의 시선과 방점을 읽는 색다른 방법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이용했다. 우리의 일상 언어에서 흥미로운 정보를 찾아내고 분석하는 실험이었다. 이 실험의 결과는 ‘시선 사전’이라는 낯선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번 화에서는 그동안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분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키-ㅌ 팀원 각자 시선 사전을 만들고 비교해보기로 하였다.


   여섯 차례 대화의 주요 토픽과 연관 단어를 모았고, 각 팀원은 자기만의 정의를 담은 시선 사전을 만들었다.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어쩌면 단상이나 감상에 가까운 부분도 있었지만, 그 역시 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라고 생각하였다.1)

   팀원들이 생각한 단어의 정의는 사전에 적힌 통상적인 뜻과는 달랐다. 또 같은 단어에 대해서도 각기 생각한 바가 매우 달랐다. 아래의 예시는 한 단어에 대한 사회적 정의(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기준으로 했다.)와 팀원 A, B, C의 정의를 나열한 것이다.


   답은 순서대로 ‘서울’ ‘밤’ ‘문학’이다. 사전적인 정의가 나란히 적혀 있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단어에 대한 정의인지 쉽게 맞출 수 있었을까? 같은 대화를 나누고도 기억하는 부분이 달랐듯, 같은 단어를 가지고도 서로 이렇게나 다른 정의를 내렸다. 말하자면 시선 사전은 한 사람이 읽어낸 그만의 일상이다. ‘문학’이란 게 개개인의 수많은 시선이 언어의 형태로 모인 것이라면, 시선 사전도 넓은 의미에서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지 않을까. 시선 사전을 읽는 독자는 시선을 역행해 그 안에 담긴 한 사람의 일상을 읽어낼 수 있을까. 사람들이 시선 사전을 어떻게 읽을지 키-ㅌ 팀에게는 마지막 궁금증이 남았다. 이는 다음 화 「우리의 다음 페이지―두번째」에서 계속해서 풀어나가기로 한다.



    _다음 화에 계속


[시선사전.pdf 다운로드]


키-ㅌ

‘키-ㅌ’는 문학에 관심이 많은 세 사람이 기술을 도구로 문학을 재해석하기 위해 모인 팀이다. 무언가를 조립해서 만들 수 있도록 부품을 모아놓은 세트인 ‘kit’에서 착안하여, ‘키-ㅌ’는 이야기와 이야기,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자 한다.

2018/10/30
11호

1
‘시선 사전’ PDF 파일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