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겨를 줍다


   장소 : 어느 초등학교의 운동장
   시간 : 오전의 쉬는 시간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3악장이 들릴 때까지)

   첫번째 ‘겨’는 초등학교의 아이들 소리다. 쉬는 시간의 모래 운동장. 채집자는 아이폰을 들고 아이들 소리를 따라 움직인다. 마치 나침반을 손에 들고 북북서로 배의 키를 돌리는 항해사처럼.
   축구 골대와 정글짐, 줄넘기와 술래잡기. 비명, 호명, 용서를 비는 목소리, 너도 나처럼 사과해달라는 목소리. 그렇게 십 분이 흐르자 연출된 배경음악처럼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곡이 들려온다.
   쉬는 시간, 끝.



소리를 채집하는 손.

   소리의 겨를 살피다



채집에서 가장 많이 나온‘야’ . ‘야’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색을 덧칠해보았다.

   야, 야. 너네가 술래야.
   이노옴, 이노옴! 슈우웃!
   야, 잡아당기니까 그렇지이.
   야, 그렇게 하지 말라고오.
   빨리 빨리.
   야, 멀리 가지 마!
   ‘어’ 하면 치는 거다.
   하나아, 두우우울……
   아직, 아직.
   세에한미이이이이.
   니가 사과해애.
   야, 그럼 정우 술래야.
   야, 튀어!
   야, 잠깐.
   나, 나, 나, 나.
   여기야, 여기이.
   뭐하는 거야아?
   미안해, 너도 이제 사과해주면 안 될까?
   어떡합니까아.
   그렇게 했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왜, 왜, 누가 그랬는데, 누가.
   너 내가 이렇게 했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어.
   안 달라져도 돼, 그냥 사과만 해.
   뭐해애!
   슛, 꼬올!
   야, 그렇게 하면 못 나가게 막아, 너.
   아, 나, 민준아, 갈래.
   민준아, 같이 가.
   줄넘기 숨기지 말고.
   줄넘기 수술해야 한단 말이야!
   지금 몇 시인지 보고 온다.
   야, 빨리 우리 내려가.
   이렇게 이렇게 가야 돼요, 빨리요.
   아이씨.
   아이요.
   슈우웃, 꼬오올!
   박지기 슛!
   미나 스따 골너!
   야, 정오 여쪽으로 온다.
   야, 정오 여쪽으로 오고 있어!
   튀어!
   야, 이성배!
   나 지금 안 온다고오.
   나 지금 술래잡기한다고오.
   야,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사람 수울래.
   나 지금 술래잡기하고 있다고오!
   나 술래잡기 하고 있었다고오.
   야아, 이선제에!
   야, 거기 서지 말라고오!


자전거를 눕혀두고 떠난 자전거의 주인.

   겨로 만든 미니 픽션 : 「야」


   우리는 붉은 벽돌집 앞에서 소리쳤다.
   재수 있어요?
   우리가 소리치면 벽돌집 안에서 귀 먹은 할머니가 나왔다.
   뭐라고?
   귀먹은 할머니가 우리에게 말했다. 우리는 신이 나 소리쳤다.
   할머니! 재수 있어요?
   우리가 찾는 아이는 공재수. 우리는 해질녘이면 동네 공터에서 축구를 했고, 공터로 가기 전 재수네 집에 들러 재수를 불렀다.
   낡고 더러운 축구공을 든 수엽이가 선창했다.
   재수야! 놀자!
   목덜미에 때 국물이 세 줄로 낀 경호가 따라했다.
   재수야! 놀자!
   나는 수엽이와 경호 뒤에서 외쳤다.
   재수야! 놀자!
   우리는 기다렸다. 재수의 할머니가 나오기를, 귀먹은 재수 할머니가 문을 열고 나와 우리에게 외치기를.
   뭐라고?
   할머니가 나왔다. 우리는 소리쳤다.
   할머니! 재수 있어요?
   우리 재수?
   할머니가 물었다. 우리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재수 있어요?
   너희들 누구냐?
   재수 있어요?
   재수 친구냐?
   재수 있어요?
   귀 먹은 할머니가 소리쳤다.
   재수 없다!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재수 없다.’라는 말을 듣기 위해 우리는 매일 재수네 집으로 갔다. 태권도 학원에 다니는 재수가 아직 집에 오지 않을 시간이란 걸 알았지만 우리는 재수네 집 앞에서 재수를 불렀다.
   재수야! 놀자!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학원에서 일찍 돌아온 재수와 맞닥뜨렸다. 흰색 도복에 금색 트로피를 든 재수가 우리들을 보자 복잡한 심정의 얼굴로 다가왔다.
   또 왔냐?
   재수는 우리의 방문을 의심했다. 우리는 함께 놀기 위해 왔다고 했지만 재수는 믿지 않았다. 재수는 우리가 늦은 오후마다 골목이 떠나가도록 자기 이름을 외쳐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너희들은 왜 꼭 나 없을 때만 오냐?
   재수는 다만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귀 어두운 할머니를 이용해 자기를 놀리는 것이 얼마나 파렴치한 행동인지 재수는 표정으로 말할 뿐이었다. 우리는 재수의 반응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우리가 한 말은 고작 ‘재수 있어요?’뿐이기에 우리는 재수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도리어 재수를 더 모욕했다.

   야, 너도 해봐. 무지 재밌어.
   수엽이가 말했다. 낡고 더러운 축구공을 양 손바닥으로 누르며 재수를 자극했다.
   해봐. 무지 재밌어.
   경호가 거들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재수에게 권했다.
   하자, 너도 같이 하자.
   내가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재수가 우리와 함께 놀기를 바랐다.

   재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우리를 보았다. 우리를 한 대 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하얀 도복에 검은 띠를 허리에 맨 재수는 맨 주먹으로 나무 합판 세 개를 박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재수는 한 번도 우리에게 주먹을 쓰지 않았다. 열심히 배우기만 할 뿐 사람에게 손날치기 기술을 쓰지 않았다. 태권도를 배우는 것은 누군가 자기를 때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 했다. 할머니가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재수는 그런 아이였다. 누군가 자신을 위협하면 그 자리에서 세 발자국 뒷걸음질 친 다음, 허공에 대고 발차기를 했다. 이단 옆차기와 뒤 돌려차기를 연달아 보여주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다리를 양쪽으로 찢으며 자기의 유연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재수는 폭력을 쓰지 않았다. 우리는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재수가 왜 폭력을 쓰지 않는지는 몰랐다. 다만 재수에게 할머니는 엄마와 같은 존재이고, 재수네 삼촌이 재수의 머리카락을 잡아 뜯어 재수의 정수리에 오백원짜리 동전만한 땜빵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

   우리는 재수를 무서워하면서도 재수를 놀렸다. 마음 한편으로 차라리 재수가 우리 중 누군가의 광대뼈를 박살내기를 바랐다. 수엽이는 한 대 맞고 싶어하는 아이였다. 우리는 재수가 수엽이를 한 대 때려 우리의 장난을 멈춰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재수는 주먹을 쓰지 않았다. 우리는 재수를 무서워하면서도 재수를 머저리라 생각했다. 그해 겨울, 재수네 할머니가 오토바이 사고로 돌아가시자 우리는 공터에 모여 오토바이 경적 소리가 좀더 컸더라면 할머니가 죽지 않았을 거라는 의견을 나누었다. 그날은 축구를 하지 않았다. 재수네 집에도 가지 않았다. 우리의 장난은 끝이 났다. 얼마 뒤, 재수는 삼촌을 따라 동네를 떠났다.

   내가 재수를 다시 본 것은 노량진의 어느 육교 위였다. 밤새 내린 눈이 얼어붙은 12월, 나는 경찰 공무원 시험을 계속 볼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며 계단을 올랐다. 재수는 내려가는 중이었다. 나는 정수리에 오백원짜리 만한 땜빵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야, 공재수!
   재수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수엽이와 경호의 이름을 말하자 그제야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수는 이름을 바꿨다고 했다. 내가 바꾼 이름을 묻자 재수는 가르쳐줄 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헤어졌고, 그뒤로 나는 두 번 다시 재수를 볼 수 없었다.


멜라겨해나

소설가 김멜라와 배우이면서 영상을 만드는 이해나.
둘 다 ‘겨’울에 태어났으며 냉면을 좋아합니다.

2018/11/27
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