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랩
3화 혜현과 래디 엄마
Prologue. 여중생B에 대하여
경기도 한 구석에 박힌 이름조차 흔한 중학교. 그곳에서는 늘 소문이 돌았다. 밴드부 누가 누구랑 사귄다느니, 누구는 고등학생 오빠에게 사탕 바구니를 받았다느니 하는 소문은 특히나 모든 일에 호기심 많던 1학년 사이에서 바람 잘 날 없이 돌았고, 새내기들은 그런 소문을 때로는 부러워하기도 하고, 때로는 질투하기도 했다.
소문의 중심에 그녀가 있었다. 달걀형 얼굴에 키가 조그마하고 검지에 반지 하나를 끼고 다니던 아이, 말수가 많지 않았지만 수업 시간에 발표를 무척 열심히 하던 그애는 학교에서 ‘남자 후리고 다니는’ 아이로 불렸다.
“쟤 걔잖아, 1학년 5반. 3학년 언니들이 ‘졸라’ 싫어하는 애.”
소문이란 참 신기하다. 몇 가지 단어가 그애의 모든 것을 완성해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애는 처음 입학하자마자 들이댄 3학년 선배의 고백을 거절하고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던 동갑내기 남자아이의 고백을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 아이의 선택이었지만, 열네 살이었던 우리는 너무 어렸고, 또 그만큼 잔인했다. 누군가와 사귄다는 것은,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들에게는 ‘공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연애를 한다는 이유로, 그애는 비난을 받아도 감수해야 하는 그런 존재가 됐다.
후리고 다니는. 예쁜 척하는. 싸가지 없는. 재수 없는. 아이들이 그애를 묘사하는 형용사들은 대부분 이런 것이었다. 외모에 대한 묘사는 그보다 더 직접적이었고 시기와 질투가 섞여 있었다. 웃는 걸 봤더니 왼쪽 이빨이 누렇다든지, 날씬한 줄 알았더니 옷 갈아입을 때 옆구리 살이 장난 아니더라는 식으로. 그애는 쉬는 시간만 되면 항상 책상 위에 엎드려 있곤 했는데, 그 누구도 그 모습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쉽게도 그 아이에 대한 기억은 여기까지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말간 아이는 소문의 덩어리로만 남아 있다. ‘여중생A’도 아닌 ‘여중생B’ 정도의 흔한 일화로. 그 시절 잔인했던 우리는 그 누구도, 그 아이에게도 우리와 같은 일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그애의 일상이 소문과는 다를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그녀를 다시 떠올리고, 거북한 죄책감을 느끼게 된 건 이미 다 커버린 후였다. 또다른 여중생B인 ‘혜현’과 ‘래디 엄마’를 만나고부터.
혜현과 래디 엄마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는 능력을 가진 보건교사 안은영과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장편소설이다. 퇴마사이자 심령술사인 안은영은 자신이 보는 것들을 “일종의 액토플라즘, 죽고 산 것들이 뿜어내는 미세하고 아직 입증되지 않은 입자들의 응집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학교를 위협하는 이 응집체들에 비비탄 총과 장난감 칼로 맞서며 학생들을 지켜낸다. 그리고 그 커다란 이야기 속에, 혜현과 래디 엄마가 있다. 두 사람은 스쳐지나가는 조연이지만 온전한 이름 석 자를 부여받은, 자신만의 서사를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혜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머릿속이 투명하게 보인다고 해서 별명이 해파리인 여자애였다. (중략) 이 단순하고 모난 데 없는 사랑스러운 생물은, 불행히도 다른 사람한테서도 가장 좋은 부분만을 발견하는 나머지 누가 고백만 해오면 족족 다 사귀어왔다.
1)
가장 첫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고등학생 혜현은, ‘해파리’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특이한 아이다. 어떤 남자아이가 자신을 부른다는 말을 듣고 ‘또 나도 모르게 물건을 꿀꺽했나. 이어폰이던가. 만화책이던가.’ 하며 스스로의 혐의점을 찾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도벽이 있고, ‘아무나’ 하고 막 사귀고, 해파리 같은 아이지만 이 소설 안에서 아이가 묘사되는 방식은 폭력적이지 않다.
작가는 아무나 고백해오면 족족 사귀는 혜현의 모습을 ‘단순하고 모난 데 없는 사랑스러운 생물’ ‘다른 사람한테서도 가장 좋은 부분만을 발견하는 나머지 그러했다’라고 설명한다. 또한 무언가를 자꾸만 잊어먹고, 자기도 모르게 누군가의 물건을 슬쩍 하는 어두운 습관마저도 그녀를 설명하는 ‘한 부분’으로 넘겨버린다.
혜현은 자신을 해파리라고 부르는 소년을 향해 진심으로 밝은 웃어줄 줄 아는 소녀다. 그리고 그 소년을 구하기 위해 위험한 순간에 위험한 곳으로 뛰어들 줄 아는 아이다. 혜현의 입체성은 그녀가 선과 악을 모두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에,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의 비결정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에 완성된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래디 엄마. 안은영은 학생 래디의 부탁을 받아 유령을 퇴치하러 래디의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래디 엄마를 만난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자 톱스타 뮤지션인 조슈아 장의 곡에 등장하는 ‘레이디버그 레이디’의 대체자로 밀려난 기분을 느끼며 산다. 조슈아가 교통사고로 죽은 옛 애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레이디버그 레이디>로 큰 인기를 얻으면서, 전 국민이 조슈아의 연인을 래디 엄마가 아닌 조슈아의 죽은 약혼녀로 기억하게 된 것이다.
‘2인자’로 밀려난 본부인. 이 단어만 들었을 때 우리는 아침 드라마에 나올 법한 치정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래디 엄마는 이 치정극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과 태도를 보여준다. 작은 일에 개의치 않는 ‘쿨’한 성격에, 항상 샤워 가운을 입은 채 나른한 모습이다. 또 남편이 <레디이버그 레이디>를 계속 부른다고 해서 미워하거나 비난하지도 않으며 여전히 그를 신뢰하고 사랑한다.
다만 래디 엄마는 ‘레이디버그 레이디’가 유령이 되어 저택에 머무르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어 무기력증에 빠져 있었다. 사실 그녀가 본 유령의 정체는 ‘레디이버그 레이디’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온 그녀가 환영을 본 것일 뿐 유령이 아니었다. 래디 엄마에게는 자신을 2인자로 만든 ‘레이디’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은 남아 있지 않다. 그녀는 집 안에 남아 있던 ‘레이디’의 안경을 보고, “미순씨(레이디의 진짜 이름), 눈이 나빴구나.”라고 쓸쓸히 얘기할 뿐이다. 안은영의 방문 이후, 래디 엄마는 드디어 샤워 가운을 벗고 외출을 시작한다. 어떤 가십도 어떤 편견도 아랑곳하지 않는 당당한 모습으로.
Epilogue. 그녀들의 일상
우리 세계에는 수많은 여중생B들이 있다. 너무 쉽게 속단되고, 너무 쉽게 비판받아 스러져갔던 수많은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오로지 소문과 편견으로 뭉쳐진 이들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을 혜현과 래디 엄마를 통해 풀어보고자 한다. 그녀들이 가질 수 있는 ‘일상의 가능성’을 비하인드 랩의 시선으로 재현해보았다.
양호실에서 잠이 깬 혜현이 봤을 것만 같은 햇빛 조각들. 그녀는 은영을 좋아하여 졸업하고 난 후에도 양호실을 들락날락거리며 애정을 보인다.
혜현이 걸었을 것만 같은 길의 모습. 혜현의 성격상 이곳을 폴짝폴짝 뛰듯 걸어 지나갔을 것 같다. 아니면 사귀었던 남자아이들과 팔짱을 끼고 걸었거나.
진심으로 좋아했던 승권과 헤어졌을 때의 혜현의 분위기. ‘다시는 그런 남자 못 만날거야.’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 자신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승권을 잡지는 않는다. 혜현은 그냥 그런 아이다.
래디 엄마가 언젠가 입었을 것 같은 원피스. 『보건교사 안은영』 안에서 그녀는, 화장을 하면 예쁠 것 같은 희미한 인상을 가진 여성으로 그려진다. 옷장 속에 화려한 원피스가 넘치도록 많지만 샤워 가운만 입는 여자였던 그녀. 유령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자신으로 살 때, 언젠가 이런 파란 원피스를 입지 않았을까.
래디 엄마, 래디, 조슈아 장이 나들이를 갔을 때 보았을 것만 같은 풍경. 건전하고 뽀송뽀송한 그들이 언제고 행복하기를.
래디 엄마가 창밖으로 보았을 것 같은 창문 밖 하늘의 풍경. 그녀가 아직 보지 못했다면, 언젠가 보게 되길.
비하인드랩연구소
김수현, 김원지, 장은진. 창작과 관련된 일을 하는 세 사람이 모여 이야기 속 ‘조연’을 마주한다. 조연을 표현하는 문장과 단어를 아카이빙하고, 조연에게 전사와 후사를 덧입히는 각자의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문학이 ‘사람’을 존중하는 방법을 깊이 성찰해나갈 예정이다.
2018/08/28
9호
- 1
- 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 민음사, 2018, 9~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