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
6화 실화, 싸우는 영화
소리의 겨를 줍다
장소 : 영화관
시간 : 한 편의 영화가 끝나고, 또 한 편의 영화가 시작되기 전 사이.
포스터를 보며 영화를 고르는 사람들.
사람들이 영화 장르를 구분하는 법.
실화 영화, 싸우는 영화, 아이언 맨 영화, 공주 나오는 영화.
소리의 겨를 살피다
소리를 채집하는 손.
네, 네네.
(이옹)
엄마.
(이옹, 이옹)
엄마, 자리 나!
(이옹)
아, 아. 어.
(이옹)
백화점에서부터 그 공주 나오는 거?
어.
공주?
어.
그거 한국으로 한다고?
예, 그렇죠.
구층.
구층, 올라가요.
아니, 뭐, 이제.
아이언 맨.
캡틴 아이언 맨 같다, 그지.
아아아앙.
……가세요, ……습니다.
아니, 아니야.
아빠아.
……나왔습니다.
(이옹)
(이옹)
지금 바로 들어가면 됩니다.
아, 어, 어.
너 화장실 간다고 그러지 않았냐.
내용이 괜찮은 거야.
……입니다, ……합니다.
싸우는 영화, 이거는 싸우는 영화야.
액션.
감동 실화. 이게 낫다. 근데 이거 봐도 괜찮겠어?
아직도 봐?
실화.
실화. 응, 실화.
눈이 안 보여. 근데 그거는 싸우는 영화야.
영주야, 우리 차례다.
네.
보고 있어요, 이제.
못 들어가.
(이옹)
아, 아아.
먹어야지 이제.
아니야. 끝나자마자 뭐 사야 되고, 뭐 사면 되고. 음식, 끝나자마자.
여봉봉,
고마워, 여봉봉.
하하, 아, 그거 웃겼어.
언더 더 씨.
내 안의 그……
아, 아직 그거 안 나왔나?
아직 안 나왔어.
진짜.
(으히! 으히!)
들어갔다 나오고, 기다렸다 입장한다. 스크린 앞으로, 철조망 너머로.
겨로 만든 미니 픽션 : 「실화, 싸우는 영화」
이옹.
벨이 울린다.
―네, 아름반입니다. 신우요, 잠시만요. 신우야!
이번에는 신우. 신우네 엄만 언제나 1등.
이옹, 이옹.
또 벨이 울린다. 앞으로 계속 울릴 거다. 그럼 선생님은 전화기를 들고 말할 거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겠지.
―혜주요, 혜주야!
이번에는 혜주. 혜주가 뛰어간다. 지율이가 혜주를 따라간다. 입으로 비행기 소리를 내면서. 부우우우.
나는 낮잠방으로 간다. 파랗고 부드러운 쿠션에 앉아 두 팔을 시옷 모양으로 늘어뜨리고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검은 막대기 두 개가 악어처럼 입을 벌리면 할아버지가 온다. 할아버지는 한 번도 시간을 어긴 적이 없다. 오늘은 할아버지한테 별을 보여달라고 해야지. 그리고 다신 별 얘기를 하지 말아야지. 그건 할아버지와 나의 비밀이니까.
―그래, 신우는 공룡이 무섭구나. 하지만 공룡을 좋아하지? 사람들은 무서워하는 걸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또 말해볼 사람?
선생님은 무서운 꿈이 키를 크게 해준다는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그다음 우리에게 무서워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했다. 다들 자기가 무서워하는 걸 말했다. 티라노사우루스와 티라노사우루스렉스, 파란 집 마당에 미친개, 태권도 사범님, 밥에 들어간 콩(왜냐하면 콩을 먹다 목에 걸리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귀신 나오는 영화, 지하철에 움직이는 계단.
선생님은 그걸 에스커 뭐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냥 움직이는 계단이라고 불렀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인민군이요.
―뭐라고?
―인민군이요.
선생님은 내 말을 못 알아들었다. 인민군을 모르다니. 나는 인민군이 쳐들어와 사람들이 도망치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얘기를 해주었다.
―할아버지께서 그런 말을 하셨구나. 그래. 전쟁에 나가신 할아버지는 인민군이 무서우실 거야.
―중공군도요.
―뭐라고?
―중공군은 모자에 별이 달렸어요.
―그래, 별.
선생님은 별이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별이 얼마나 무서운 건데. 또 별은 아주 대단한 거다. 빨간 별은 무섭고 금색 별은 대단한데 그 두 개는 주스에 들어간 당근이랑 카레에 들어간 당근만큼이나 다르다.
―서린이 할아버지는 백 살이래요.
―지율이가 말했다.
―백 살 아냐.
―백 살이야. 엄청 늙었잖아. 머리가 하나도 없어. 그리고 이렇게 걸어.
지율이가 몸을 구부리고 바보처럼 걸었다. 나는 선생님을 보았다. 선생님이 지율이를 혼내주길 바라면서.
―중공궁이 뭐예요?
신우가 물었다.
―궁이 아니라 군.
선생님이 말했다. 중공군은 중국의 군인을 부르는 말이라고. 북한의 군인은 인민군, 우리나라의 군인은 국군. 나는 손을 들고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국군이셨고 전쟁에 나가 용감하게 싸우시다 다리에 총을 맞았는데 아직도 비가 오거나 빨리 뛰면 무릎이 아프시다고. 할아버지가 발을 절뚝이는 건 총알을 맞아서고 할아버지가 전쟁 얘기를 해주시는 건 우리가 전쟁을 잊을까봐서고, 또 전쟁은 무섭지만 자랑스러운 건데 자랑스럽다는 건 가슴에 별이 있는 거라고. 우리 할아버지는 용감하게 싸워서 별을 받았고 그 별을 나중에 나한테 준다고 했다고.
―나도 알아. 싸우는 거. 영화에서 봤어.
신우가 끼어들었다.
―영화 아니야. 진짜야.
―영화야. 근데 어른들만 보는 영화지. 우린 보면 안 돼. 피 나오니까.
―피는 영화 맞는데 싸우는 건 영화 아냐.
―아니라고? 선생님, 아니에요?
선생님은 신우가 본 건 영화지만 서린이 할아버지 얘긴 진짜라고 했다. 또 영화는 가짜지만 진짜 있었던 일을 영화로 만들기도 한다고 했다. 신우는 코를 긁었다. 그다음 발바닥을 긁더니 손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공룡은 가지고 놀 수 있지만 전쟁은 가지고 놀 수 없다. 이게 내 비밀이다. 할아버지에게 말해줘야지. 그리고 집에 갈 때 화단 위로 올라가 발자국을 내야지. 눈이 다 녹았을까. 아침에는 눈이 쌓여 있어 좋았는데.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화단에 올라가 큰 나무 아래를 세 바퀴나 돌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발자국을 다 낼 때까지 내 손을 잡고 기다려주었다. 나무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찌찌, 끼끼, 울지 않고 특별하게 우는 새. 피요피요 피.
시계 막대기가 악어처럼 입을 벌렸다. 그런 걸 다섯시라고 한다. 나는 낮잠방에서 나와 두꺼운 옷을 입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지퍼를 올린 다음 어깨에 가방을 멨다. 글씨 연습을 할 때 시옷을 쓰는 것처럼. 천천히, 비뚤어지지 않게.
―서린아, 어디 가니?
선생님이 부른다.
―안 가요.
나는 복도로 걸어간다. 그리고 내 키보다 훨씬 높은 데 있는 전화기 아래에 선다.
이옹.
벨이 울린다. 이번엔 내 차례다. 어떨 땐 벨소리가 새소리 같다.
멜라겨해나
소설가 김멜라와 배우이면서 영상을 만드는 이해나.
둘 다 ‘겨’울에 태어났으며 냉면을 좋아합니다.
2019/03/26
1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