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1)


미선과 정윤은 세상을 떠난 이들이 남겨두고 간 말과 기억들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미선과 정윤이 들고 다니던 “힘센 기억”들엔 무겁게 먼지가 쌓여만 갔다. 오랫동안 각자 지고 있던 종이 뭉치를 함께 열어보고 싶었다. 둘은 마주앉아 먼지를 후후 불어본다.


미선
아무리 생각해봐도 일단 붙잡을 수 있는 거는 요거밖에 없는 거 같아요. 현숙2) 과 주고받은 글인데 당시 제 홈페이지 게시판에 현숙이 올린 글이에요. 몇 마디 안 되지만 마치 육성으로 울리는 거 같거든요. 그 말이 너무 소중하네요.

정윤
언제쯤 주고받은 글인가요?

미선
현숙이 죽기 전 몇 개월 동안이요. 현숙은 유서가 없었어요. 확실하진 않아요. 가족들에게도 물어보지 못했고요. 현숙의 부고를 들었을 때 저는 파키스탄에 있었고 너무 늦게 집에 도착했어요. 집 안을 아무리 찾아봐도 유서는 없더라고요.

정윤
파키스탄에서 소식 듣자마자 바로 귀국하신 거예요?

미선
네, 듣자마자 바로요. 하지만 한국에 도착했을 때는 현숙이 떠난 지 이미 일주일인가 뒤더라고요. 저는 한동안 망상에 시달렸어요. ‘누가 죽인 거 아닌가? 현숙이 나처럼 어디로 도망간 거 아닌가?’라고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요.

정윤
진짜 믿기 힘들었을 거 같아요. 미선씨가 외국에 있다가 들어와보니 현숙이 지우개로 지우듯이 없어졌으니까……

미선
흔적도 싹 사라졌고, 현숙과 마지막에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기억이 안 났어요. 평소에 현숙이 자기 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어요.

정윤
그때 상황을 미선씨가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매우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요. 소설 속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미선
저도 지금 덤덤하게 이야기하고 있어서 좀 이상해요.

정윤
현숙과 주고받은 게시판 글을 들여다보면서 더 이야기하면 어때요? 당시 두 분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미선
좋아요. 글을 다시 읽어보니 12년 전인데도 요즘 대화 같더라고요. SNS에서 주고받는 글처럼요. 읽으면서 ‘우리 둘이 정말 사이가 좋았구나.’ 생각했어요. 슬프기보다 기쁘네요.

미선의 문자 배열 <말 조각>. 미선은 현숙이 남긴 게시판 글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란히 맞춰본다. 말들은 미선에게 밀려오기를 기다리는 파도 같았다.

정윤
현숙이 쓴 글 제목이 정말 재밌어요.

미선
현숙의 게시글들 제목만 따로 본 적은 없는데, ‘똥 놈’이라는 제목도 있네요.(웃음) 읽을수록 새롭네요. 제목들이 시처럼 읽히고요.

정윤
글을 주고받던 2007년, 현숙이 몇 살이었어요?

미선
스물일곱이고 제가 스물아홉이었어요. 둘 다 실직한 상태였어요. 엄마가 오랫동안 아프셔서 우리 가족들 모두 지친 상태였고……

정윤
가족 모두 몹시 힘들었을 거 같아요.

미선
4월 24일 ‘부디_부디_’라는 제목의 글은 제가 집을 떠나는 날, 현숙이 쓴 거예요. 현숙에게만 이야기하고 몰래 나갔거든요.

정윤
오, 그래요? 가족한테, 아무한테도 이야기 안 하고?

미선
야반도주. 여행지에 도착해서 현숙이 이 글을 썼다는 걸 알았어요. 기록된 시간을 보니까 집 떠나기 전날 제가 잠들었을 때 현숙이 남긴 것 같아요.

정윤
그러네요. “지금 이 시간 이 공간에 같이 있지만 내일 이 시간에 같이 있지 않지만 내가 무슨 말 하고픈지 알지…”라고 내용을 적었군요. 그리고 “부디_부디_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시간이 되길. 부디_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가득 채워서…”라고 미선씨를 향한 마음도 담았고요.

미선
다음 날 제가 한국을 떠나고 현숙의 심정이 어땠을지…… 언제 돌아오겠다는 기약 없이 간 거니까요. 아빠는 저한테 욕을 엄청나게 했대요. 자기 혼자 살겠다고 나갔다고요. 그런데 제가 당시에 그런 걸 생각할 여력이 없었어요.

정윤
그런 미선씨를 현숙은 이해하고 부디 건강해지는 시간을 보내길 기도해주었군요.

미선
게시판 글 중에는 비밀글도 섞여 있는데 거기 아버지 얘기가 몇 번 나와요. 저나 현숙 둘 다 아빠와의 관계를 굉장히 힘들어했어요. “나도 아빠랑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싶다.”고 현숙이 글을 적기도 했네요.

정윤
미선씨를 몹시 그리워했겠어요.

미선
네. 하지만 제가 깊이 헤아리지 못했어요. 게시글에 자기에게 전화하라는 말을 현숙이 많이 했어요. 꿈 이야기도 몇 개 있어요. 현숙은 제가 한국에 도착하는 꿈을 계속 꿨대요. 그런데 그게 너무 실제와 같아서 ‘언니가 정말 오는 건 줄 알았다’고 글을 남겼어요. 지금 다시 읽으니 저에 대한 그리움이 크게 느껴지네요.

정윤
동생 현숙이 미선씨를 원망하거나 그런 식으로 표현한 건 없네요.

미선
없어요.

정윤
아무리 형제라도 힘든 시기에 형제가 집을 떠나버린다면 섭섭하고 원망하는 마음도 들 것 같은데요. ‘너는 그래서 나가서 좋냐?’ 이럴 수도 있고요.(웃음) 근데 현숙은 딱 한 번, 6월 20일에 “미워.”라고 말하고 있네요. 원망보다는 귀여운 투정처럼 느껴져요.

미선
네. 원망도 그리워하는 것도 사랑스럽게 했네요. 또 제가 없는 시간을 현숙이 굉장히 지루해하고 있었네요. 나중에 현숙이 죽고 나서는 그때 나 혼자 신났던 것도 죄스럽고…… 그러다가 ‘왜 신나면 안 되는 거야?’ 억울하고 그랬어요.

정윤
7월 27일 미선씨가 떠난 지 3개월쯤 되었을 무렵에, 현숙이 “올 때 말해.”라고 쓴 것 보니까 동생은 언니가 곧 올 거라 생각했나봐요.

미선
곧 오겠지 했겠죠. 저는 그즈음 인도였는데 비자를 연장해 더 머무를 작정이었어요.

정윤
여행 중에 현숙과 통화했었나봐요. “매우 짧았던 통화”라는 제목을 보면……

미선
네. 몇 번 했던 거 같아요.

정윤
미선씨를 몹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미선
8월 1일 글을 보면 현숙의 그런 기다림이 느껴져요. 꿈에 제가 선물을 잔뜩 들고 멋진 남자들과 집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이에요.

정윤
귀여워. 자매들의 대화는 이렇구나.

미선
현숙이랑 유독 친했어요. 서로 친구들 만나는 데도 같이 가고요.

정윤
서로 의지가 많이 됐구나.

미선
갑자기 현숙이 없어지니까 저는 팔다리 잘린 사람처럼, 어떻게 살아야 하나 했는데…… 사실 웃긴 거죠. 그때의 난 동생을 놔두고 집 나가서 혼자서도 잘살고 있었잖아요.

정윤
그때는 그런 일이 일어날지 미선씨는 상상도 못했을 테니까.

미선
네, 전혀요. 언제나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미선의 그림 <간직>. 미선은 현숙과 함께 했던 기억들을 떠올려본다. 현숙과 함께 있으면 울다가도 장난치며 다시 웃을 수 있었다.

정윤
글을 보니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현숙이 계속 침울해지고 있는 거 같아요. 8월 23일 “우울의 바다”라는 말을 했고, 9월 17일 “나는 오늘도 울고 있어.”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미선
우울하다는 말이 반복해서 쓰여 있네요. 하지만 얼만큼 우울한지 그 감정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말 같아요. “우울의 바다”라는 말이 너무 아름답게 들리기도 하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정윤
아름답기도 하지만, 엄청난 우울처럼 읽히기도 해요.

미선
그때는 몰랐어요. 지금에서야 그 절박함이 전해져요.

정윤
미처 느끼지 못했던 현숙의 마음을 뒤늦게 알게 된 거군요.

미선
시간의 흐름대로 남겨진 게시글을 현숙의 죽음을 기점으로 거슬러 읽어보면, 현숙의 마음이 좀더 느껴져요. ‘아, 현숙이 죽기 6개월 전에는 이런 마음이었구나. 죽기 5개월 전에는 이런 얘길 하고 있었구나. 죽기 열흘 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구나……’

정윤
“죽고 싶다”는 이야기도 그냥 하는 게 아니었겠구나 싶어요. 음…… 아빠와의 관계, 그리고 주변 상황 때문에 많이 힘들었나봐요.

미선
네. 아마 경제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을 게예요. 동생 통장에 7만원 남짓 남아 있었거든요. 그런 사정도 모르고 저는 돈을 좀 송금해달라고 게시글을 남겼어요. 제가 현숙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에요.

미선의 그림 <2007년 7월 15일 현숙의 일기 중. “이러다 죽으면 어떡하지?”>. 미선은 처음으로 현숙의 일기장을 열어본다. 그녀의 일기장을 들추어봐도 되는 걸까. 현숙은 남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우리는 왜 그 말을 찾으려고 하는 걸까. 혼란스럽기만 하다.

정윤
저도 문희3)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를 아직도 잊지 못하거든요. 문희가 케냐로 떠나기 전 저와 주고받은 말들이요. 문희는 케냐로 가는 게 내키지 않는다고, 두렵다고 했어요. 문희는 남편 일 때문에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지내는 게 힘들어서 한국에 정착해 살고 싶다고 말했는데, 저는 새로운 환경에 가면 좋지 않냐고 새삼 부러운 마음에 가볍게 대꾸했죠. 그러니까 문희는 저한테 자기 상황을 이해 못 한다고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고 저는 너무 당황스러 했는데…… 이게 문희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될지 그땐 전혀 몰랐어요.

미선
현숙의 게시글들이 아주 긴 시간에 걸쳐서 쓰인 유서 같아요. 저한텐 그 글이 현숙의 유서이자 마지막 대화에요. 떠난 사람한테 더이상 들을 수 있는 말은 없고. 남겨진 말에서 뭔가 들을 수 있을까요.

정윤
사실 미선씨가 동생이랑 대화한 거 보면 유쾌한 요소가 참 많아요.

미선
유쾌하면서도…… 슬퍼요.

정윤
남겨진 말에는 마지막으로 주고받던 말뿐 아니라 떠난 이와 함께 주고받던 모든 말에 대한 기억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말들을 떠올리며 기쁘기도 하고 눈물 나기도 하고……

정윤의 시 <파키스탄>. 정윤은 미선과 대화를 나눈 후, 현숙의 부고를 듣기 전 파키스탄의 아름다운 계곡을 바라보고 있는 미선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현숙이 파키스탄 어딘가에 있을 미선을 만나 둘이서 함께 그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거닐 수 있었으면.


두 개의 목소리

안미선은 그림을 그리고, 안정윤은 영상을 만듭니다. 미선과 정윤은 죽음에 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기록합니다. 마치 산책길을 거니는 사람들처럼, 예쁜 돌을 주우면 보여주고 낯선 소리를 들으면 멈춰 서서 같이 귀 기울였다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2019/04/30
17호

1
기형도,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2015, 82쪽.
2
미선의 동생 안현숙은 1981년 10월 28일 태어나 2007년 10월 15일 스스로 생을 마쳤다.
3
정윤의 친구 강문희는 1975년 5월 14일 태어나 2013년 9월 21일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