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1)

정윤의 영상 <나는 당신을 만나지 않았어요>의 한 장면.


놀이


정윤
현숙2)의 사진을 보면서 지난번에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요.(4화 참조) 그러다가 사진 속 장소에 찾아가 현숙처럼 우리도 사진 찍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고요. 여러 장소 중에 현숙이 사진을 찍었던 학교 화장실에 실제로 찾아갔는데, 어땠어요?

미선
그 장소에서 정윤씨랑 이야기를 많이 안 나눴어요. 사진 촬영할 때도 거의 대화하지 않았고요.

정윤
거의 숨만 쉬었던 거 같아요.

미선
저는 공간에 울렸던 소리가 인상적이었어요. 조용한 가운데 ‘찰칵찰칵’ 하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났죠.

정윤
그때 미선씨가 되게 집중해서 사진 촬영을 했어요. 그래서 말을 안 시키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죠. 제 기억으로는 카메라 셔터 소리와 일정한 간격으로 돌아가는 보일러 소리가 났어요. 화장실이라서 소리가 많이 울렸던 것 같아요. 또 미선씨 숨소리가 강하게 들렸고……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요.

미선
화장실에서 나는 소리들이 사람의 숨소리는 아니지만, 누군가 거기 있다는 느낌을 주더군요. 그리고 거기에 우리 되게 오래 있었는데 아무도 안 왔어요.

정윤
밖에서 사람 발소리는 간혹 들려왔어요. 저는 누가 들어올까봐 약간 걱정했는데…… 집중을 방해할 것 같아서요.

미선
제 기억 속에는 그곳이 굉장히 눈부신 장소로 남아 있어요.

정윤
거울이 많아서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거울이 사방으로 있었으니까. 그런데 실제로 가봤을 때 현숙의 사진과 다른 점이 있었어요. 사진에서 본 옥색 타일이 연분홍색 타일로 바뀌었죠.

미선
맞아요, 좀 실망했지만 ‘그래도 왔으니까 해보자’ 하는 맘으로 바로 촬영 준비를 했어요.

정윤
저는 화장실 모습이 바뀐 것에 그렇게 실망하진 않았어요. 같은 층에 화장실이 여러 개 있었고, 그중 우리가 들어간 곳이 사진 속 화장실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으니까요.

미선
네. 현숙이 갔던 곳이 맞다고 해도 시간이 지났으니 조금 바뀌었을 것이라고, 예상했죠. 사실 그 세월이면 다 바뀌었을 것 같아요.

정윤
촬영할 때 날씨가 좀 추웠던 거 같아요. 그럼에도 미선씨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어요. 현숙과 같이 입던 옷이죠?

미선
네, 그것만 입고 사진을 찍고 싶었어요. 그렇게 춥게 느껴지진 않았고요. 그때 그곳의 분위기와 기억을 잘 담아 정윤씨가 영상 작품을 만들었잖아요. 공간을 채우던 카메라 셔터 소리와, 누군가 거기 있는 것 같다는 느낌…… 그날의 기록이 영상으로 남아서 너무 다행이고 고마웠어요. 저는 그날 너무 집중해서 기록하는 거 자체를 잊었으니까요.

정윤
그런 미선씨의 모습을 영상에 담아내고 싶었어요. 그날 우리가 나눈 대화가 상세히 기억나지는 않아서, 영상에는 기억나는 말들만 넣었어요.

미선
그런데 정윤씨가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떠올려 영상 작품에 넣은 거잖아요. “셔터 소리가 총소리 같다”고 대화한 장면이나, 제 사진기에 건전지 없었다는 이야기나, “여기가 아닌가?” 하고 다른 화장실을 찾는 이런 장면들이요. 그런 이야기를 나눴다는 걸 잊을 뻔했는데 영상으로 남아 다행스러워요. 저는 사진 촬영이 진행될수록 현숙 너머에서 저를 본 것 같아서, 그 순간이 아직도 인상적으로 남아 있어요. ‘이곳에서 사진을 찍던 현숙은 어땠을까? 현숙을 만나러 간 건데, 내가 여기서 나에게 총을 쏘고 있네.’ 하는 생각들이 스쳐갔거든요. 그때 거울로 저를 보는 순간 눈물이 났어요.

정윤의 영상 〈나는 당신을 만나지 않았어요〉의 일부(50초).

정윤
미선씨가 사진 촬영을 하다가 갑자기 눈물을 터뜨려서 저는 순간 놀라기도 하고 걱정했어요. 현숙이 다니던 학교, 그 장소를 다시 찾아간 일이 미선씨를 너무 힘들게 한 건 아닌가 하고요.

미선
그곳에서 우리가 한 행위와 일련의 과정이 어떤 경건한 느낌을 주었어요. 지난날의 현숙처럼 제가 제 자신을 사진 찍고, 정윤씨가 그런 저를 사진 찍는 동안이요. ‘자, 의식을 치릅시다’라고 한 건 아닌데 우리 둘 다 암묵적으로 어떤 의식을 행하듯이 집중했어요.

정윤
저도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미선씨와 함께 하는 것들, 가령 시를 써도 드로잉을 해도 대화를 해도, 어떤 행위를 하는 것 자체가 다 의식 같이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그 의식이라는 말이 어떻게 보면 좀 무게가 있어 보이기도 하잖아요.

미선
그렇죠. 어떤 형식도 있어야 할 것 같고요.

정윤
경건한 느낌도요. 그런데 그때, 그 화장실에 갔을 때는 미선씨랑 놀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함께 논다는 생각이요.

미선
우리 소풍 가듯이 갔잖아요.

정윤
애도하는 과정 중에 하나라고 생각을 하는데, ‘애도 놀이’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미선
정윤씨 말에 저도 굉장히 공감! 그 과정이 무겁고 어렵고 경건하기만 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정윤
그런 걸 원하면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지만……

미선
네. 저희가 바란 건 그런 건 아니었어요. 소풍 가듯이 갔고 즐거운 마음으로 설레면서 갔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 둘 다 뭔가 느낀 거잖아요.

정윤
놀이가 주는 힘인 것 같아요.

미선
우리를 몰입하게 했어요.

정윤
놀이가 항상 즐겁지는 않잖아요. 거기서 미선씨랑 촬영했던 그런 행위들이 모두 재밌기만 하지 않았어요. 갑자기 미선씨가 숨을 크게 들이키면서 눈물도 흘리고, 저는 그 순간에 되게 당황했고……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놀이였던 것 같아요.

미선
네. 그리고 그때 그 상황이나 슬픈 감정에서 우린 금방 헤어나왔어요. 자연스럽게 놀이를 마친 것처럼 옷 입고 짐 싸서 “가죠?” 했죠.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신나게 놀다 “인제 그만 집에 가자” 하는 것처럼.

정윤
어렸을 때도 놀이에 굉장히 몰입하다보면 다양한 감정이 생기잖아요. 놀이 역할 중 누군가 죽고 그러면 정말 울기도 하고요.

미선
진짜로 슬프잖아요. 진짜라고 믿고 ‘놀이’하기 때문에요.

정윤
그리고 무게를 덜어내기 위해서 꼭 놀이를 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미선
아이들을 보면 놀이에 어떤 의도가 있으면 놀이가 되지 않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우리가 현숙이 다니던 학교에서 인증 사진 찍은 것도 기록만을 위해서는 아니네요.

정윤
맞아요. 현숙이 다니던 학교 건물에서 나온 다음, 미선씨가 가져온 로모카메라로 서로를 찍어주었죠. 현숙이 졸업 전시회 때 가족이랑 찍었던 장소에서는 지나가는 사람한테 부탁해 함께 찍기도 하고요.

미선
신이 나서 정말 열심히 찍었잖아요.

정윤
현숙의 사진을 우리가 많이 보고 갔기 때문에 “현숙이 사진 찍었던 장소에서 우리도 찍어 볼까?”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장소를 찾아갔던 것 같아요.

미선
보물찾기처럼요.

정윤
‘현숙은 어느 방향으로 사진을 찍었을까? 그뒤에는 어떤 풍경이 있었을까?’ 그런 걸 우리가 다시 한번 기억을 살려내서 현숙이 되어본 거죠.

미선
현숙이 되어보는 놀이.

정윤
그런데 미선씨가 나중에 필름을 잘못 끼운 걸 발견했죠.

미선
네. 필름이 돌아가지 않아서 한 자리에 계속 사진이 찍혔더라고요. 웃긴 상황이었어요.

정윤
필름에 여러 개의 상이 겹쳐져도 이미지가 나오지 않을까요? 이중노출로 촬영한 사진은 본 적이 있는데.

미선
모르겠어요. 현상소 기사님은 사진 망쳤다고 생각해서 아예 이야기도 안 꺼낸 거잖아요. 저는 솔직히 속상하고 맥 빠졌거든요.

정윤
저도요. 사진이 어떻게 나올지 굉장히 궁금했거든요. 저는 로모 카메라로 찍어본 적이 없어서요. 사진 찍을 때 신경 써서 다양한 자세도 취해보고 그랬는데.(웃음)

미선
맞아요. 그날 날이 좋아서 제대로 찍혔으면 잘 나왔을 거예요. 사진관에서 투명하게 현상된 필름을 봤을 때 그 속상함이란…… 허탈하고 바보 같고.

정윤
그래도 제 기억에는 그 장면들이 오랫동안 남을 것 같아요.

미선
기억에는 재밌게 남겠죠? 그 행위가 그날 놀이의 마침표 같네요.

“그날 사진이 안 찍힌 걸 더는 속상해하지 않겠어요. 이 대화로 지금 기억에 그 사진을 찍고 있기 때문에요. 필름에 어떤 형상이 안 남아도 제 기억엔 남을 거예요.”


동행


정윤
현숙의 학교에 미선씨 혼자 갔으면 어땠을 것 같아요?

미선
혼자 갔으면…… 부끄러워하면서 주저주저했겠죠. ‘여기서 사진 찍어도 되나?’ 하면서.

정윤
용기가 안 나서요?

미선
네. 그리고 계속 의심하겠죠. ‘나 미친 짓 하고 있나?’

정윤
같이 허튼짓할 사람이 필요한데.(웃음)

미선
네. 혼자는 그 장소에 아마 안 갔을 거예요. 가더라도 금방 나왔거나 현숙에게 말 걸어보거나 했을 거예요. “현숙아, 잘 있냐? 나 네가 사진 찍었던 그 장소에 와봤다.” 그렇게 말했을 거 같아요. 언젠가 정윤씨가 집 옥상에서 하늘 보면서 문희3) 언니에게 말 걸었듯이. 정윤씨는 만약에 현숙의 학교에 혼자 갔다면 어떠셨을 거 같아요?

정윤
안 갔겠죠. 어딘지 몰라서 못 갔을 거고요.(웃음)

미선
제가 어딘지 알려주고 “정윤씨, 저는 도저히 못 가겠어요.” 하면요?

정윤
저 혼자는 안 가죠. 미선씨의 동생이기 때문에 미선씨가 간다고 하면 같이 가고.

미선
그렇군요.(웃음) 함께 프로젝트를 하면서 정윤씨가 언제부턴가 ‘현숙을 보는 저’를 보게 됐다고 했어요.

정윤
네. 현숙에 대해 애도 작업을 하는데 제 영상에 미선씨가 많이 보이죠. 미선씨를 통해서 현숙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만약 제가 미선씨를 통해 현숙을 알지 못했다면, 현숙이 다니던 학교 화장실에 찾아갔을 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겠죠. 현숙을 보는 미선씨를 통해, 저는 그 화장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촬영하면서 ‘현숙은 사진을 찍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상해볼 수 있었어요.

미선
그런데 그날 정윤씨는 정윤씨 사진을 몇 장 찍지 않았던 거 같아요.

정윤
네, 제 모습을 사진 찍기보다는 미선씨가 사진 찍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영상으로 담았어요. 미선씨가 거울을 보면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보니 초점이 잡히지 않은 이미지가 촬영 모니터에 많이 보였고 인상적이었어요. 처음에는 캠코더로 거울에 비친 저와 미선씨 모습을 담다가, 뒤쪽 탈의실에 있는 거울에 보이는 제 모습도 찍었어요. 미선씨는 사진 촬영에 열중하느라고 제가 뭐하는지 모르더라고요.

미선
전혀 몰랐어요.

정윤
제가 미선씨에게 그곳에 혼자 갔으면 어땠을지 물어본 건, 제가 문희랑 처음 만났던 동물원에 혼자 가서 촬영했던 게 기억나서요. 미선씨랑 프로젝트 시작하기 전 비 오는 날 혼자 동물원에 갔어요. 비가 와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 않아 좋기도 했는데 나 혼자 있으니까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요. 미선씨랑 이 대화도 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모든 걸 혼자 안고 있는 느낌이었어요. 마음도 아주 무겁고 몸에 무언가 가득했던 거 같아요. 문희 생각만 계속하면서 서 있었는데 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동물이었어요.

미선
어떤 위안이었나요?

정윤
주변에 동물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 갇혀 있는 동물을 보고 웃는 소리에 몹시 짜증이 나는 반면, 카메라로 들어오는 동물의 눈망울이나 비에 털이 젖어서…… 빗물을 털어내고 무겁게 걸어가는 다리를 보고 있는데…… 그게 위로가 많이 되었어요.

미선
동물들이 동행자가 되어준 거네요. 동물 친구들 없었으면 마음이 훨씬 무거웠을 거 같아요.

정윤
그곳에 오래 있지 못했을 거 같아요. 거기에 네 시간 정도 머물렀거든요. 자연을 바라보는 게 위안이 되었던 거 같아요.

미선
저도 현숙이 머물던 장소에 혼자 갔으면 금방 나왔을 거예요. 제가 정윤씨에게 그런 위안을 받았어요. 자연의 위안처럼요. 제가 정윤씨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했네요.

정윤
저 혼자는 가지 않겠죠. 아니, 가고 싶지 않겠죠.

미선
가서 계속 의심할 거 같아요.

정윤
네, 뭔가 이유가 없잖아요.

미선
스스로 이해가 안 되니까요.

정윤
내가 만약에 미선씨 어머님의 성묘를 하러 혼자 간다면? 그것도 이상해요.

미선
그렇죠. 제가 이렇게 물어볼 거 같아요. “정윤씨, 거기에 왜 혼자 가셨어요?”

정윤
네, 제가 거기 가서 있다는 게…… 이상하죠. 미선씨 어머니처럼 내가 모르는 사람, 관계가 형성이 안 된 사람을 찾아볼 어떤 이유가 안 생기는 거죠.

미선
찾아갈 용기도 안 나고…… 그 장소에 가서 내가 하는 행위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거 같아요. 제가 만약에 문희 언니 묘에 혼자 찾아가서 말을 걸어요. “제가 프로젝트를 하다보니, 문희 언니를 알게 되었어요. 제가 너무 늦게 왔죠?”

정윤
하하하, 그런 장면 웃기겠어요.

미선
그때 제 마음이 진심이었다고 하더라도요.

정윤
저도 미선씨 이야기 들으면서 상상을 해봤는데, 현숙이 사진 찍었던 화장실에 혼자 들어가서 현숙에게 말을 걸어요. “현숙아, 내가 이렇게 사진 찍으면 어때 보여?”

미선
정윤씨가 함께 그 장소에 가준 게 큰 위안이었네요.

정윤
미선씨가 현숙을 함께 애도하고 싶다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던 게 기억나요. 너무 무겁거나 슬프게만 아니고 기쁘고 즐겁게 애도하고 싶다고. 그런 마음을 서로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우리가 애도를 항상 무겁지만 않고 놀이처럼 즐겁게도 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미선
우리 대화를 날 것으로 기록한 대화록을 보면 웃음 괄호가 많잖아요. 저는 조금 걱정했었거든요. ‘이렇게 심각한 이야기하면서 웃나?’ 하고 사람들이 이해 못하고 비난할까봐. 하지만 상관없어요. 기쁘게 애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대화하면서 웃을 수 있었어요.


두 개의 목소리

안미선은 그림을 그리고, 안정윤은 영상을 만듭니다. 미선과 정윤은 죽음에 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기록합니다. 마치 산책길을 거니는 사람들처럼, 예쁜 돌을 주우면 보여주고 낯선 소리를 들으면 멈춰 서서 같이 귀 기울였다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2019/04/30
17호

1
윤동주, 「병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초판본 미니북), 더스토리, 2017, 156쪽.
2
미선의 동생 안현숙은 1981년 10월 28일 태어나 2007년 10월 15일 스스로 생을 마쳤다.
3
정윤의 친구 강문희는 1975년 5월 14일 태어나 2013년 9월 21일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