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수집
3화 전북 익산 · 충북 보은
하얀 돌 노란 흙
최영건영상 〈익산, 미륵사지〉(총 16분 16초, 연출/촬영/편집 김지환, 출연 최영건 양선형 허희정 민병훈, 원작 최영건 「물결 벌레」)
햇빛이 눈부셔서 유적지 한복판에 서 있는 탑들이 새하얗게 보였다. 미륵사지에 도착한 우리는 그늘에 짐을 내려놓고 꽤 긴 시간 동안 프로젝트를 위한 촬영을 했다. 무엇을 촬영했나. 주인에게 돌려줘야 했던 초록색 우산. 내 것이 아닌 내 초록색 책. 가짜라고 부르기 너무 미안한 탑. 어쩌다 탑 속으로 들어가자 돌이 서늘하다는 게 느껴졌다. 미륵사지에 오면 나는 억지로라도 이 장소와 얽힌 내 과거를 떠올려보려고 한다. 내 고향은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때마다 생각나는 게 거의 없다. 미륵사지는 익산 시민들에게 매우 유명한 곳이다. 나는 익산을 잘 알고 있나? 모른다는 말이 뒤에 숨기 좋은 커다란 돌 같았다.
돌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되는데, 그건 미륵사지에 남아 있는 게 돌로 된 탑들뿐이기 때문인 듯하다. 뙤약볕 아래서도 석탑의 내부는 서늘하다. 오래된 돌들―사실은 충분히 오래되지 않은 돌들. 미륵사지에 남은 석탑들은 모두 새로 복원된 것들이다. 백제 무왕 때 지어진 처음의 사찰이 언제 없어져버린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남겨진 것은 아주 조금이다. 너무 조금이라서, 넓은 풀밭 너머 산을 등지고 있는 두 개의 탑을 보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 여러 기억이 겹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처음 미륵사지에 왔던 건 꽤 오래 전인 것 같다.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생 때였거나 그보다 더 전이었던 것 같다. 그때 미륵사지에는 지금보다 더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이 존재한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넓고 황량한 부지가 희미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아마 그때 탑은 복원 중이라 컨테이너 같은 곳에 들어가 있었던 것 아닐까? 박물관에도 별 게 없고, 번듯한 탑도 없고, 절도 없고, 방문객도 없고,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유적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올해 가을의 미륵사지는 그때와 또 달랐다. 여전히 너무 넓어 조금 황량한 인상이 있기는 했지만 잔디밭에는 두 개의 호수가 있었고 두 개의 호수 너머로는 두 개의 탑이 있었다. 방문객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날씨가 너무 더워 입구에서 우산을 빌려 쓰고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부지가 너무 넓어 멀리 있는 사람들이 알록달록한 우산들로만 보였다. 나는 그늘에 앉아 촬영을 위한 대사를 외워보려고 노력했다. 내가 외워야 하는 대사는 작년에 내가 쓴 소설인 「물결 벌레」에 나오는 문장이기도 했는데, 거기 포함된 극락세계라는 말은 발음해볼수록 자꾸 낯설었다.
“극락세계에는, 칠보로 장엄하게 꾸며진, 연못이 있어, 그 안에는, 청정한 물이 가득하다. 불경에서는 그렇게 말한다고 여기 쓰여 있네요. 사찰에서 연못은 극락세계의 상징이래요.”1)
소설에서 인물은 표지판을 가리켜 보이며 이런 말을 한다. 이 말을 다시 외워야 하는 나는 이 문장의 모든 말이 낯설고 부끄러웠다. 덥고 부끄러워 자꾸 머리가 어지러웠다.
극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극락의 극은 극점, 극한, 극치, 같은 말들에서도 쓰이는 말이고, 극락조(極?鳥)의 극이라는 글자 역시 한자로 적으면 그들과 같은 모양을 지니고 있다. 극락조는 얼핏 극락에 사는 환상의 새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실은 참새목 풍조과의 새다. 수컷은 몸의 빛깔이 화려하고 여러 동작이 뒤섞인 정교한 구애의 춤을 춘다. 하늘에는 극락조자리라고 하는 별자리도 존재한다. 별자리들이 대개 그렇듯, 극락조 자리에 대한 설명 역시 새 모양 그림 안쪽에 새를 연상하기 어려운 네 개의 별들이 동글동글 찍혀 있다. 하늘을 보고 나는 도저히 이 별자리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한편 극락이라는 말은 락이 극에 달한 세계를 의미하여 매우 좋은 뜻을 지니는데, 이때 락은 희노애락 중 마지막인 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와 애가 구분되듯, 희와 락 역시 서로 정확하게 구분될 수 있는 걸까. 기쁨과 즐거움. 둘 다 지니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극희락세계나 극락희세계 같은 말은 이상하다.
나는 결국 극락세계라는 말이 포함되는, 내가 쓴 「물결 벌레」의 대사를 제대로 암기하지 못했다. 첫 문단까지는 대충 암기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자꾸 헷갈렸고 그 뒤는 거의 다 외우질 못했다. 「물결 벌레」는 미륵사지가 등장하는 소설이다. 그 소설에서는 사람이 사라진다. 사라져서 나타나지 않는다. 책도 사라진다.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는다. 소설에 쓰인 미륵사지의 계절은 붉고 어두운 늦가을이었지만 이번에 촬영을 위해 다시 방문한 9월의 미륵사지는 하얗고 환했다. 낮과 밤의 호수 빛깔은 서로 몹시 달랐다.
미륵사지를 방문한지 나흘 뒤, 나는 강연에서 미륵사지에 대해 또 한 번 이야기했다. 미륵사지는 선화공주와 훗날 백제 무왕이 된 서동의 사랑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최근 발굴된 유물에 따르면 백제 무왕의 부인은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왕후였다고 한다. 그럼 선화공주는 어떻게 된 것인지, 나는 이것에 대해 「물결 벌레」가 실린 『집 짓는 사람』이라는 책의 에세이를 통해서도 말한 적이 있다. 이번에 미륵사지에 대해 말할 때에는 이 의문 말고도 촬영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곳의 햇볕이 너무 뜨거웠고 그래서 우산이 필요했다고. 햇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만 농담처럼 되풀이해 말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보다 선연하게 기억나는 건 사실 뙤약볕 아래 기묘할 정도로 서늘했던 석탑 내부의 온도다. 강연 ppt를 준비할 때만 해도 그런 건 기억이 잘 나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서인지 아니면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어서인지 갑자기 그 내부 돌의 차가운 촉감이 생생히 떠오른다. 어릴 때 본 텅 빈 유적지의 흙먼지도 괜히 아주 분명한 것처럼 떠오른다. 돌이 아무리 서늘해도 사실 바깥은 살이 다 타도록 뜨겁고, 어릴 때 밟고 다녔던 것은 흙이 아니라 박물관의 석재 바닥이었던 것 같은데.
악몽을 수집하던 밤들 중의 오늘
민병훈
당신은 외국인이 싫었네 민박집 마당을 기웃거리는 외국인은 특히나 싫었고 민박집 주인이 산에서 주워온 원숭이가 닭장 안에서 우는 것도 싫었네 닭장 안에 닭이 있던 적은 없었고 매나 강아지가 있던 모습은 기억하지만 마음이 편했던 적은 없었고 당신의 마음 당신과 마음 당신은 마음 당신이 마음 마음속 원숭이 원숭이를 보기 위해 닭장 앞을 서성이는 외국인이 좋았네 무릎 부위에 구멍이 난 군복 혹은 작업복일지도 모를 바지의 무늬가 가뭄을 불러올 거라고 그렇게 가뭄이 오면 닭장에 들어가 건초 따위를 호미로 긁어모아 불을 지필 거라고 다짐했다 외국인은 숙박비를 물었지만 외국어를 할 줄 몰라 대답을 미뤘는데 그제야 대문을 열고 호기롭게 등장한 민박집 주인이 영어사전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며 외국인에게 인사했네 농구 골대가 막 설치된 주차장에서 동급생들이 전봇대에 오르고 있었네 이대로 장소를 엇나가는 기분으로 외국인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외국인은 트래킹화를 벗으며 하이파이브를 시도했고 민박집 주인이 멀리서 박수를 쳤네 그레고리 슬링백이 저절로 열리며 입장권이라 적힌 종이가 당신의 시야로 떨어졌고 주워서 읽다보니 하나뿐인 창문이 깨지면서 원숭이가 지나갔고 신문지로 돌돌 말은 식칼을 건네주던 동급생이 누구였는지 기억나질 않았네 주차장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일기장이 느리게 넘어갔네 쇠말뚝을 산에서 주워온 주인은 풍수지리에 대해 외국인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별관은 아무도 들어간 적 없었던 것처럼 조용했고 혹시 저 사람 일본인은 아니겠지 혼잣말을 하며 대문을 닫았네.
파를 심은 밭에서 두더지가 기어나와 마루 밑으로 들어가는 동안 당신은 생각했다 지금 문을 열고 나가면 공항에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지 않을까 공항버스를 타고 눈 내리는 동물원 벤치에 앉아 새로운 세기를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여행사 직원이 말하길 바다는 얼어 배가 정박하지 않고 하늘 위 항로는 먼지구름으로 시야가 확보되질 않습니다 계속 걸어주세요 그러자 당신의 몸속에 기름이 쌓였네 민박이 있던 자리는 산사태가 휩쓸고 간 흔적으로 당신의 기억 속에 둥실 떠올랐다가 황금빛으로 반짝였지 당신은 뒷짐을 지고 육교 아래를 어슬렁거렸어 녹슨 쇳물이 도로로 뚝뚝 떨어졌네.
오늘 잃어버린 게 있어 응? 대답해도 안 듣잖아 이게 뭔지 알아? 어제 주운 건데 흔들수록 가벼워진다 켄이라고 부를게 아니면 블랑카라고 부를까 오락실에서 들은 이름이라 아는 게 별로 없어 파란 비닐로 감싼 우산을 들고 별관에서 걸어나와 담벼락 사이에 자리잡은 민들레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비 내리는 속도에 머리를 기대 반란에나 다름없는 표정으로 잠자코 켄 혹은 블랑카 대답해줘 오늘은 오늘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고 평행과 횡행 사이를 이상한 기분으로 통과하지 말고 내가 잃어버린 건 내일 다시 줍거나 켄 블랑카 류 춘리가 주워 마루 아래 두겠지만 야영장에 딱 한 번 텐트를 친 적이 있어 코펠에 라면을 끓여 먹고 잠에 들었는데 새벽에 소리가 들려서 눈을 뜨니까 텐트 밖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손짓하고 있었어 야영장을 지나 산에 가까워지면 철조망이 있고 접근금지구역이 외국어로 적혀 있어 군부대도 없고 국립공원인데 형들에게 말하니까 뭘 주워오라고 해서 가져왔다가 잃어버렸어 농구를 할 때면 구경만 했어 농구공이 없으니까 쓰레기장에서 버너를 분해해 점화기로 오락기를 딸깍거리다 걸리기도 하고 볼이 불에 덴 것처럼 빨개질 정도로 맞았는데 아프지는 않았어 내가 잃어버린 게 있어 그래서 찾을 수가 없어.
꿈의 수집
음악을 만드는 Goat the funky와 영화를 만드는 김지환, 소설을 만드는 민병훈, 양선형, 최영건, 허희정. 여섯 사람이 모여 일곱 장소를 표류합니다. 먼저 출발한 사람들이 걸었던 길을 새로 출발한 사람들이 다시 따라 걷습니다. 이로써 ‘꿈의 수집’은 ‘장소와 장소’ ‘장소와 개인’ ‘개인과 개인’이라는 세 가지 관계의 꿈을 읽어내보려 합니다.
2019/10/29
23호
- 1
- 최영건, 「물결 벌레」, 『수초 수조』, 민음사, 1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