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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나’라는 몸, ‘나’라는 젠더
분류를 일탈하는 몸
보르헤스의 소설에 묘사된, ‘중국의 한 백과사전’이 사물을 분류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a) 황제에게 속하는 동물 b) 향료로 처리하여 방부 보존된 동물 c) 사육동물 d) 젖을 빠는 돼지 e) 인어 f) 전설상의 동물 g) 주인 없는 개 h) 이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i) 광폭한 동물 j) 셀 수 없는 동물 k) 낙타털과 같이 미세한 모필로 그려질 수 있는 동물 l) 기타 m) 방금 손잡이 달린 항아리를 깨뜨린 동물 n) 멀리서 볼 때 파리처럼 보이는 동물.(미셸 푸코, 『말과 사물』 서문에서 재인용)
도저히 그 기준과 분류법, 체계와 위계를 알 수 없는 이런 목록으로 백과사전을 만들다니. 개별을 묶는 공통요소를 ‘타고, 타고, 위로, 위로’ 묶여 올라가는 서구의 학문 체계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는 정말이지 천차만별 아닌가요?
얼마 전에 〈로테르담〉1)이라는 연극을 봤습니다. 연극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7년째 동거 중인 레즈비언 커플, 앨리스와 피오나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피오나는 새해를 하루 앞둔 어느 날, ‘사실은 자신이 남자로 스스로를 정체화 하고 있는 트렌스젠더’라는 폭탄선언을 합니다. “나 남자로 살고 싶은 것 같아. 아니, 남자인 것 같아.”
방황하던 앨리스가 에이드리언으로 불리길 바라는, 호르몬을 맞고 있는, 그래서 여성에서 남성으로 향하고 있는, 자신에게는 여전히 피오나지만 동시에 에이드리언인, 도대체 뭐라고 정확하게 정체화 할 수 없는 ‘그’에게 가슴 압박용 속옷을 입혀줍니다. 피오나이자 에이드리언이자 동시에 이 둘을 연기하는 배우 김정은 객석에 등을 돌리고 상의를 탈의하고 브래지어를 벗어 등 뒤로 던집니다.
그 순간 드러나는 벗은 몸은 온전하게 피오나의 몸도, 에이드리언의 몸도, 김정 배우의 몸도 아니었습니다. 피오나가 넉 달 째 호르몬을 맞고 있다고 믿고 있던 관객들에게 그 몸은 완전하게 여자의 몸도, 남자의 몸도 아니었습니다. 물리적으로 허리가 홀쭉하거나 반대로 어깨가 딱 벌어지지도 않은, 그 어떤 ‘교과서적 성징’도 두드러지지 않았던 그 한순간의 몸은 생물학적으로도 젠더적으로도 인식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여자의 것도 남자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피오나의 것도 에이드리언의 것도 김정의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기존의 명명 방식으로는 미처 호명할 수 없는 몸, 기존의 모든 분류 사이에 걸쳐 있는, ‘분류를 일탈한 몸’입니다. 어떤 이름 붙이기로도 채 채워지지 않는, 어떤 분류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그 온전하고 고유한 정체의 눈부신 오롯함.
그 몸을 보고, 나라는 몸, 나라는 젠더를 생각했습니다. 그 어떤 용어로도 다 분류할 수 없는 너무나 미묘하게 모두 다른 성 정체성과 성 지향성, 남성과 여성 사이를 가로지르며 구석구석을 점유하는 무수한 생물학적 성들, ‘종속과목강문계’의 몸들이 아니라 ‘나’라는 고유한 몸들이, ‘나’라는 무수한 젠더들이 존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분류에서 배제되고 이름을 박탈당한 몸들도 있습니다. 요새 〈피어리스 더 하이스쿨 맥베스〉2)라는 작품을 연습 중입니다. 명문대에 가고 싶은 동양인 쌍둥이 여자 고등학생 둘이서 같은 학교에 다니는 백인 남학생을 살해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같은 학교 학생으로 이상한 행동을 일삼는 ‘더티 걸(더러운 애)’이라는 인물로 출연합니다. 이미지를 참고하기 위해 구글 이미지 검색창에 ‘고딩’이라고 썼더니, 온갖 방식으로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학생 이미지가 나왔습니다. ‘고등학생’이라고 검색하자 비로소 건전한, 교복 입은 ‘남녀 고등학생’ 이미지가 나왔습니다. 이어 ‘더티 걸’을 검색했더니, 각종 방식의 더러운 사람이 나올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온갖 외설적인 포즈의 여자 사진이 나왔습니다. 그 이미지 속의 몸들은 ‘고등학생’ ‘여자’라는 공통성의 이름 안으로 분류되어 들어가지 못한, 차별과 배제를 통해 분류 밖으로 밀려난, 속어와 은어로만 존재하는 몸들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로테르담〉처럼 젠더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다음과 같이 발상했습니다. ‘젠더와 관련된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빗겨남으로써, 사회의 규범과 체계에서 자발적으로 일탈한 인물을 그리자.’ 다음은 연습 초반에 인물에 대해 발상했던 몇몇 ‘병맛’ 같은 아이디어의 일부입니다.
이 인물은 다리를 벌리고 앉을까 모으고 앉을까. 다리를 들고 앉자.
이 인물은 머리가 길까 짧을까. 머리를 다 밀어버리자.
이 인물은 화장을 할까 안 할까. 얼굴에 X자를 그리자.
이 인물은 가슴이 나왔을까 아닐까. 가슴을 유니콘처럼 하나로 모으자.
이 인물은 입을 가리며 조용히 웃나 소리내어 웃나. 입은 크게 벌리되 소리만 내지 말자.
이 인물의 목소리 음역은 낮은가 높은가. 엄청나게 높고 낮은 음역 사이를 다 써보자.
이 인물의 목소리는 큰가 작은가. 엄청나게 크고 작은 볼륨 사이를 다 써보자.
이 인물은 치마를 입을까 바지를 입을까. 바지 속에 치마를 입자.
이 인물의 움직임은 직선적일까 곡선적일까. 직선과 곡선의 불규칙한 변형을 이용하자.
이 인물은 배려할까 공격할까. 공격적으로 배려하고 배려하듯이 공격해보자.
이 인물은 변기에 앉아서 소변을 볼까 서서 소변을 볼까. 기마 자세로 본다.
이 인물은 유혹할 때 다리를 걷어올릴까 팔뚝을 걷어올릴까.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배우인 내 몸은 남성과 여성 사이 어디 즈음을 흘러가고 있을까요. 결국 무대 위에서 내 몸에 담길, 관객과 만나게 될 더티 걸이라는 인물은 생물학적으로, 젠더적으로, 인식적으로, 감각적으로 여성과 남성 사이 어디 즈음을 탐험하게 될까요. 공연 보러 오세요!
무지개책갈피(김신록)
모든 퀴어 독자들을 있는 힘껏 응원하는 한국퀴어문학종합플랫폼. 퀴어를 소재로 한 국내외 문학작품을 소개하고, 퀴어의 시각을 담은 비판적 리뷰를 공유하며, 한국퀴어문학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김신록
배우, 창작자, 워크숍 리더
2020/01/28
26호
- 1
- 2019년 12월 19일~29일, 나온씨어터, 존 브리튼 작, 김수아 번역·각색, 진해정 연출, 김정 성수연 이지혜 마광현 출연.
- 2
- 2020년 1월 9일~19일, 세종S씨어터, 박지혜 작, 이오진 연출, 김신록 변승록 부진서 오남영 정대용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