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수집
6화(최종화) 호주 시드니 · 독일 베를린
Mylo, 〈Sunworshipper〉. Goat the funky 선곡.1)
안녕 친구, 나는 구름을 보고 있어요. 베를린 무슨 광장에 있는 구름과 하늘인데 나는 아직도 그 광장 이름을 외우지 못했습니다. 나는 가본 곳의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가본 적 없는 곳의 이름은 더 쉽게 잊어버리니까요. 베를린이라고 하면 1989년 정도가 먼저 떠올라요. 나는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진 다음 해, 멀리 떨어진 이 분단국에 태어났죠.
거리 뷰 화면에 쓰여 있는 낯선 이름들을 옮겨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말하고도 나는 금세 그 이름을 잊어버릴 거예요. 요즘에는 점점 더 무엇이든 오래 기억하기가 쉽지 않고 기억들이 빠르게 사라집니다. 하지만 화면 속 구름은 사라지지 않네요. 내가 직접 보지 않았고 가본 적도 없는 베를린 무슨 광장의 사진. 구글이 그려주는 민병훈이 걸었던 길들.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가 보는 화면 속의 이 장면은 그대로겠죠. 어느새 새해가 찾아왔는데 여기에는 찾아왔지만 저 사진 속에는 찾아오지 않은 것 같네요. 아니면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구글 지도 속에도 내일은 올까요? 온다면 그건 아마 오늘이 되어버릴 테고, 나는 지도 속에서 늘 정지된 순간만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지금은 어떤 사람들이 분수 옆을 지나가고 있어요. 나는 평생 저 남자와 여자를 직접 바라볼 수 없겠죠. 아마도 저 장면은 다시 되풀이 되지 않을 테니. 하지만 이 의자에 앉아 나는 언제까지고 저 멈춰 있는 사람들, 아주 조그만 얼굴들, 알아볼 수 없는 저 표정들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어요. 이런 것을 응시라고 부를 듯합니다.
밤이 찾아와요. 화면 속은 여전히 낮이에요. 나는 여기 앉아서 내가 몰랐던 길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어요. 내가 종종 우리라고 부르게 되는 사람들. 그들이 걸었던 내가 모르는 길에 대해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생각해보는 일. 그게 우리가 꿈을 수집하고 싶은 방식이었죠. 나는 베를린 아닌 곳에서 베를린을 떠올리고 있고, 앞으로도 이런 꿈은 여러 번 겹쳐질 거예요. 그런 예감이 듭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자꾸만 나에 대해 쓰게 되는 기분이에요. 우리는 글 안에 있는 순간에도 늘 글 밖에 있고 말죠. 나는 계속 이 글을 쓰고 있고, 거리 뷰 속 베를린은 멈춰 있어요. 지금은 밤인데 눈이 부십니다. 방은 어둡지만 화면 속 하루는 밝기 때문일까요.
언제 새해가 되어버렸을까.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나가버린 걸까. 가끔 그게 참 이상해서 많은 것들이 흐려져요. 나는 기억하고 싶은 만큼 잊고 싶기 때문에 자꾸 중요한 것들을 잊게 되는 것 같습니다. _영건
2주 전 희정에게 자신이 살았던 시드니의 집과 다녔던 학교의 주소를 받았어요. 저는 님처럼 시드니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집과 고등학교를 구글 지도에 띄웠지요. Longuevile Road에 위치한 희정의 집과 Glades Reserve 가까이 위치한 Riverside Girls High School 사이에는 두 개의 강이 흘러요. 승용차로 고등학교까지 가기 위해서는 대교 둘을 통과해야 한다는 이야기예요. 걸어서는 1시간 13분이 소요되는 거리네요. 대교의 이름은 Fig Tree Bridge와 Tarban Creek Bridge. 각각 한국어로 번역하면 무화과나무 대교와 타반만 대교쯤이 되겠군요. 시드니의 강들은 삐뚤빼뚤합니다.
사실 제가 다리를 먼저 언급하는 이유는 희정이 월간 윤종신에 썼던 〈내가 죽으려 했던 것은〉이라는 꽁트를 읽었기 때문이에요. 그 소설엔 한남대교를 걸어서 통과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인물은 대교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해요. 물론 그곳은 레인 코브 강이나 타반 강이 아니라 한강이고, 한남대교를 넘으면 한남동이 나올 뿐입니다. 기호 다발로만 존재하는 이 강들을 통과하는 희정의 모습은 막연하고 불투명하게 느껴져요. 제가 잘 알고 있는 강의 풍경은 당산역에서 합정역 방향으로 올라갈 때 넓어지는 시야, 햇볕과 함께 밀려오는 납빛 한강, 또 언젠가의 먼지구름에 짓눌린 황폐하고 검붉은 서울 도심의 인상입니다.
희정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은 북쪽에 있는 Lane Cove Library예요. 도서관 앞에는 피자 가게와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군요. 구글 스트리트 뷰로 옮겨가면 반바지를 입은 할아버지 한 명이 피자 가게에서 내놓은 의자에 개를 데리고 앉아 있어요. 이 얼굴 새빨간 백인 할아버지는 제가 로드뷰를 훑다 우연히 언젠가의 자신을 포착해 이렇게 서술할 만한 대상으로 활용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을까요. 절대로 모르겠죠. 이 모름이 마음에 듭니다.
도서관 근방은 약국과 슈퍼마켓이 밀집해 있는, 역시 희정의 집에서 가까운 마켓 스퀘어가 자리한 장소이기도 해요. 희정의 가족은 언젠가 이곳을 방문했을 거예요. 약국과 슈퍼마켓은 삶에서 꼭 필요한 장소이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매일 먹어야 하며 아플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희정은 이곳 어딘가의 슈퍼마켓에서 산 치즈나 베이컨을 먹고, 이곳 어딘가에서 구입한 약으로 사소한 질병들을 이겨내기도 했겠지요. 구글 맵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어떤 동선과 궤적이 보이는 것만 같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맵핑된 시점으로 관찰된 세계는 그런 착각을 쉽게 불러일으키고 말지요. 그러나 또한 Longuevile Road에 거주하는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Lane Cove Library에서 일주일에, 적게는 달에 한 번 책을 빌리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도서관에는 님이 쓴 책인 『수초 수조』와 제가 쓴 책인 『감상 소설』 또한 존재하지 않겠지요. 그것은 확실합니다. 제가 직접 도서관에 방문해 이 책들을 서가 어딘가에 몰래 은닉하지 않는 이상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시드니라는 도시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방문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Lane Cove Library 근처에는 Pottery Green Oval이 있어요. 구글 맵에서 이 소박한 공원을 누르면 머리가 분홍색인 새 일곱 마리, 불독 두 마리, 훈련하는 초등학교 야구부 단원들, 벤치, 풀밭, 달리기하는 소년들, 유모차를 끌고 가는 대머리 남자가 나타나지요. 세계는 어디에나 편재합니다. 저는 세계의 파편들을 열람하고, 그것은 제 일상 속에 우연히 들어온 다른 장소의 일상이에요. 이렇듯 중첩되는 레이어는 꿈을 생산하는 매우 효과적인 장치이기도 합니다. 세계의 파편에 다른 세계의 파편을 겹쳐놓는 일. 네이버에 이 공원의 이름을 영어 그대로 검색하면 2008년 즈음 한글로 작성된 블로그 일기가 떠요. 이 공원에서 당시 축구 경기가 있었고, 날씨가 매우 싸늘했던 모양입니다. 무지와 비슷하지만 이제부터 무지와 변별되기 시작한 새로운 무지. 저는 그것을 꿈이라고 부릅니다. _선형
안녕 친구, 세상에 웬 이름들이 그렇게 많나요? 레인 코브 라이브러리. 포터리 그린 오벌. 머리가 분홍색인 새 일곱 마리와 불독 두 마리. 리버사이드 걸스 하이스쿨. 이름들이 너무 많아 정작 말해야 할 이름들을 잊게 될 것 같습니다. 이름이라고 하면 요즘에는 사람의 이름을 외우는 일의 어려움과 즐거움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최근에 많은 분들의 이름을 한꺼번에, 아주 짧은 순간에 모두 외워야 할 일이 있었거든요. 이름을 외우는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외우는 일은 어려운데 잊는 일은 왜 이렇게 쉽게 이루어져 버릴까요? 잊는 일은 대개 이토록 쉬운데, 왜 가장 잊고 싶거나 잊어야 할 것들은 잊히지 않는 걸까요?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없이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답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영국 정원을 보고 있어요. 지난번처럼 구글 맵 거리 뷰로.
이럴 때 나의 일부는 영국 정원에 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선과 생각이 영국 정원과 접점을 맺고 있는 것이죠. 이따금 떠올리는 내가 없는 곳들이 늘 그러하듯이.
이 영국 정원은 영국에 있는 곳이 아니에요. 뮌헨에 있는 곳입니다. 민병훈이 작성한 구글 지도의 가볼 곳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곳이지요. 구글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은 ‘78킬로미터의 자전거 및 조깅 코스, 호숫가의 비어 가든이 있는 광대한 18세기 도시 공원’이라고 합니다. 이런 설명을 읽고 나면 내 머릿속에는 18세기라는 말 정도가 남겨져요. 나머지는 그저 바로 어떤 풍경으로 변하고 맙니다. 말은 사라지고, 문장이었던 설명이 흐려지고, 장면만 남는 것입니다.
온전히 내 것이었던 상상 속의 장면은 거리 뷰의 장면과 충돌하며 어떤 구체적인 모습들로 변합니다. 초록색이 가득한 화면이 펼쳐지죠. 하늘은 파랗고, 넓게 펼쳐진 풀밭에는 연한 푸른색이거나 흰색인 듯한 작은 꽃들이 피어 있어요. 나무들이 많고 가지에는 연두색 잎사귀들이 돋아나 있습니다. 어른은 아무도 없는데 유모차 한 대가 풀밭 한복판에 세워져 있네요. 붉은 머리 꼬마 하나가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고개를 하늘로 들고서 한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무언가 흘러내리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아무도 모르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혼자서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비는 내리지 않고, 하늘은 아주 맑네요.
아이가 무엇을 기다렸는지, 나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예요. 나는 단 몇 번의 클릭으로 시야를 뮌헨의 영국 정원으로부터 베를린 주립 미술관으로 옮길 수 있죠. 미술관 곁에도 나무들이 있어요. 하지만 바닥에는 풀밭이 없네요. 대신 알파벳이 쓰인 노란 타일들이 존재합니다. 아이는 이제 사라지고 없어요. 대신 내가 멈춰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는, 마찬가지로 멈춰 있는 어른 몇몇이 보입니다. 어른들 옆으로는 벽에 기대어 놓은 책들이 보여요. 그림책들 몇 권. 그들은 화면 바깥, 나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이죠. 화면의 경계는 그렇게 나뉩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들. 결코 같은 순간에 공존할 수 없지만, 또 이렇게 함께 있게 되어버리는 것들. _영건
아이 얘기를 하니 구글 지도를 이용해 길을 잃어버린 청소년 희정의 구원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어른이 된 희정을 보니 당시의 희정도 매우 똑똑한 아이였을 확률이 높겠네요. 그러나 한번 길치는 영원한 길치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그런 것 같거든요. 청소년 희정이 사색이 되어 비슷한 자리를 배회하고 있으면 저는 구글 지도를 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까운 경로를 안내합니다. 감격한 희정이 당신은 누구냐고 묻고, 망토를 뒤집어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으하하, 나는 시공의 지배자다. 으하하, 너는 훗날 나와 웹진 《비유》에서 꿈의 수집 프로젝트를 연재하게 될 것이다. 으하하, 이 프로젝트를 연재하지 않으면 운명의 시계가 틀어진단다. 으하하, 오늘을 기억하고 꼭 소설가가 되렴. 으하하, 내게 술도 많이 사고 좋은 말도 많이 던지렴. 으하하, 그때의 나는 우울증이 심하단다. 그러나 희정은 오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제게 돌아와 이렇게 대답할지도 몰라요. 미래랑은 지도가 다른데요, 사기꾼님.
저는 인스타그램에 제가 손가락으로 다닌 지역들, Gladesvill이나 Lane Cove를 검색합니다. Lane Cove에 해시태그를 걸면 6만 건의 게시글이 뜨는데, 한눈에 보면 피자를 찍은 사진과 공원을 찍은 사진, 사람을 찍은 사진이 많이 보이네요. 놀랍지만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습니다. 저는 6만 번의 사진이 찍힌, 이 프로젝트가 아니라면 보지 않았을 Lane Cove의 어느 공간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무감하게 피드를 넘기고 있지요. 이 사진들은 어떤 꿈도 생성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6만 개의 시선이 저와 무관한 장소에서 떠내려오는 기분이에요. 무지에 찍힌 점 하나에 이만큼의 사진이 존재합니다. 저는 요새 제게 필요한 지혜 중 하나가 제가 작다는 사실을 진짜로 아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작습니다. 저는 작기에 제가 작다는 사실을 되풀이해 기억해야 합니다.
Gladesvill에는 그보다 적은 2만 7천 건의 게시물이 뜨는데, 재밌는 것은 그중 판다 사진이 있었다는 거예요. Gladesvill에 판다가 사는 걸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피드를 넘기다 보니 그 사진을 찾을 수도 없네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인 크리스 마르케의 〈태양 없이〉에는 다음과 같은 내래이션이 나와요. 일 드 프랑스에 에뮤가 있다는 사실 알았어? 저는 님께 이 말을 그대로 반복할 수 있습니다. 글의 흐름을 위해 다소 건방지게 서술하는 것을 이해하시길 바라요. 오늘 낮에 우리 집 강아지인 뽀리가 이발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어? 몰랐지. 이 무능하고 작은 시공의 지배자야. 사실 제게 하는 말입니다. 오이와 시루떡. 님이 기르는 강아지와 고양이의 이름이지요. 왜 이름을 그렇게 짓게 되었나요. 대개 강아지와 고양이의 이름은 얼굴을 보면 자연스레 생각나는 발음으로 짓게 되는 것 같습니다. 뽀리, 오이, 시루떡. 입술이 도넛 모양이 되네요.
저는 스트리트 뷰로 Riverside Girls High School에서 Tarban Creek Bridge까지 나갑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해 헤맸지만 얼추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니 강에는 하얀 요트가 가득합니다. 화면 속의 시드니는 풀밭과 공원이 많고, 건물들은 대개 나지막하며 깨끗하게 정리된 연녹색 가로수들이 많이 보여요. 멀리까지 평탄하고, 시야에 걸리적거리는 물체가 없네요. 요트들이 너무 많아 저건 뭘까, 하고 고민하니 수상 택시들 같아 시드니 수상 택시를 네이버에 검색하니 맞네요. 날씨는 봄입니다.
저는 이전 편지에서 꿈에 관해 말했어요. 이번엔 현기증에 관해 말하고 싶습니다. 님이 말했듯 세계는 책상 위에 놓인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의 무한한 중첩입니다. 세계가 제 꿈인 것이 아니에요. 제가 바로 꿈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파편이라는 말은 깨어진 조각을 가리켜요. 파편들을 모두 이어 붙인다고 해도 세계의 전체 모습을 파악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파편들이 다시 꿈을 꾸기 때문입니다. 저는 파편입니다. 저는 거의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고, 정말로 거대한 모두는 제 바깥에 있어요. 저는 파편과 관계하는 파편입니다. 저는 환영이고, 저는 세계가 수집한 꿈의 희박한 조각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며, 저는 사라지지 않고, 저는 누군가의 무지 속에 있어요. 저는 벌써 희정의 집 앞에 도착해 있습니다. 놀이터. 자전거. 아이들. 그네. 팻말. 사람들은 언제나 무엇을 했을까요. 지금이 실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_선형
영상 〈시드니 홈비디오〉(총 3분 49초, 연출·촬영 허원, 편집 허원 김지환, 출연 허희정, 특별출연 조기은). 허희정이 시드니에서 1년 동안 살던 시기에 허희정의 아버지 허원이 촬영한 푸티지와 애니매이션 The Cookie Carnival의 일부 푸티지로 구성한 것이다.
글 바깥에서 편지를 씁니다
안녕 친구, 나는 구름을 보고 있어요. 베를린 무슨 광장에 있는 구름과 하늘인데 나는 아직도 그 광장 이름을 외우지 못했습니다. 나는 가본 곳의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하고 가본 적 없는 곳의 이름은 더 쉽게 잊어버리니까요. 베를린이라고 하면 1989년 정도가 먼저 떠올라요. 나는 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진 다음 해, 멀리 떨어진 이 분단국에 태어났죠.
거리 뷰 화면에 쓰여 있는 낯선 이름들을 옮겨줄 수는 있어요. 하지만 말하고도 나는 금세 그 이름을 잊어버릴 거예요. 요즘에는 점점 더 무엇이든 오래 기억하기가 쉽지 않고 기억들이 빠르게 사라집니다. 하지만 화면 속 구름은 사라지지 않네요. 내가 직접 보지 않았고 가본 적도 없는 베를린 무슨 광장의 사진. 구글이 그려주는 민병훈이 걸었던 길들.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가 보는 화면 속의 이 장면은 그대로겠죠. 어느새 새해가 찾아왔는데 여기에는 찾아왔지만 저 사진 속에는 찾아오지 않은 것 같네요. 아니면 내가 느끼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구글 지도 속에도 내일은 올까요? 온다면 그건 아마 오늘이 되어버릴 테고, 나는 지도 속에서 늘 정지된 순간만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지금은 어떤 사람들이 분수 옆을 지나가고 있어요. 나는 평생 저 남자와 여자를 직접 바라볼 수 없겠죠. 아마도 저 장면은 다시 되풀이 되지 않을 테니. 하지만 이 의자에 앉아 나는 언제까지고 저 멈춰 있는 사람들, 아주 조그만 얼굴들, 알아볼 수 없는 저 표정들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 있어요. 이런 것을 응시라고 부를 듯합니다.
밤이 찾아와요. 화면 속은 여전히 낮이에요. 나는 여기 앉아서 내가 몰랐던 길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있어요. 내가 종종 우리라고 부르게 되는 사람들. 그들이 걸었던 내가 모르는 길에 대해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생각해보는 일. 그게 우리가 꿈을 수집하고 싶은 방식이었죠. 나는 베를린 아닌 곳에서 베를린을 떠올리고 있고, 앞으로도 이런 꿈은 여러 번 겹쳐질 거예요. 그런 예감이 듭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자꾸만 나에 대해 쓰게 되는 기분이에요. 우리는 글 안에 있는 순간에도 늘 글 밖에 있고 말죠. 나는 계속 이 글을 쓰고 있고, 거리 뷰 속 베를린은 멈춰 있어요. 지금은 밤인데 눈이 부십니다. 방은 어둡지만 화면 속 하루는 밝기 때문일까요.
언제 새해가 되어버렸을까.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많이 지나가버린 걸까. 가끔 그게 참 이상해서 많은 것들이 흐려져요. 나는 기억하고 싶은 만큼 잊고 싶기 때문에 자꾸 중요한 것들을 잊게 되는 것 같습니다. _영건
세계의 파편에 다른 세계의 파편을 겹쳐놓는 일
2주 전 희정에게 자신이 살았던 시드니의 집과 다녔던 학교의 주소를 받았어요. 저는 님처럼 시드니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집과 고등학교를 구글 지도에 띄웠지요. Longuevile Road에 위치한 희정의 집과 Glades Reserve 가까이 위치한 Riverside Girls High School 사이에는 두 개의 강이 흘러요. 승용차로 고등학교까지 가기 위해서는 대교 둘을 통과해야 한다는 이야기예요. 걸어서는 1시간 13분이 소요되는 거리네요. 대교의 이름은 Fig Tree Bridge와 Tarban Creek Bridge. 각각 한국어로 번역하면 무화과나무 대교와 타반만 대교쯤이 되겠군요. 시드니의 강들은 삐뚤빼뚤합니다.
사실 제가 다리를 먼저 언급하는 이유는 희정이 월간 윤종신에 썼던 〈내가 죽으려 했던 것은〉이라는 꽁트를 읽었기 때문이에요. 그 소설엔 한남대교를 걸어서 통과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인물은 대교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해요. 물론 그곳은 레인 코브 강이나 타반 강이 아니라 한강이고, 한남대교를 넘으면 한남동이 나올 뿐입니다. 기호 다발로만 존재하는 이 강들을 통과하는 희정의 모습은 막연하고 불투명하게 느껴져요. 제가 잘 알고 있는 강의 풍경은 당산역에서 합정역 방향으로 올라갈 때 넓어지는 시야, 햇볕과 함께 밀려오는 납빛 한강, 또 언젠가의 먼지구름에 짓눌린 황폐하고 검붉은 서울 도심의 인상입니다.
희정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도서관은 북쪽에 있는 Lane Cove Library예요. 도서관 앞에는 피자 가게와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군요. 구글 스트리트 뷰로 옮겨가면 반바지를 입은 할아버지 한 명이 피자 가게에서 내놓은 의자에 개를 데리고 앉아 있어요. 이 얼굴 새빨간 백인 할아버지는 제가 로드뷰를 훑다 우연히 언젠가의 자신을 포착해 이렇게 서술할 만한 대상으로 활용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을까요. 절대로 모르겠죠. 이 모름이 마음에 듭니다.
도서관 근방은 약국과 슈퍼마켓이 밀집해 있는, 역시 희정의 집에서 가까운 마켓 스퀘어가 자리한 장소이기도 해요. 희정의 가족은 언젠가 이곳을 방문했을 거예요. 약국과 슈퍼마켓은 삶에서 꼭 필요한 장소이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매일 먹어야 하며 아플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희정은 이곳 어딘가의 슈퍼마켓에서 산 치즈나 베이컨을 먹고, 이곳 어딘가에서 구입한 약으로 사소한 질병들을 이겨내기도 했겠지요. 구글 맵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어떤 동선과 궤적이 보이는 것만 같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맵핑된 시점으로 관찰된 세계는 그런 착각을 쉽게 불러일으키고 말지요. 그러나 또한 Longuevile Road에 거주하는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는 Lane Cove Library에서 일주일에, 적게는 달에 한 번 책을 빌리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도서관에는 님이 쓴 책인 『수초 수조』와 제가 쓴 책인 『감상 소설』 또한 존재하지 않겠지요. 그것은 확실합니다. 제가 직접 도서관에 방문해 이 책들을 서가 어딘가에 몰래 은닉하지 않는 이상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시드니라는 도시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방문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Lane Cove Library 근처에는 Pottery Green Oval이 있어요. 구글 맵에서 이 소박한 공원을 누르면 머리가 분홍색인 새 일곱 마리, 불독 두 마리, 훈련하는 초등학교 야구부 단원들, 벤치, 풀밭, 달리기하는 소년들, 유모차를 끌고 가는 대머리 남자가 나타나지요. 세계는 어디에나 편재합니다. 저는 세계의 파편들을 열람하고, 그것은 제 일상 속에 우연히 들어온 다른 장소의 일상이에요. 이렇듯 중첩되는 레이어는 꿈을 생산하는 매우 효과적인 장치이기도 합니다. 세계의 파편에 다른 세계의 파편을 겹쳐놓는 일. 네이버에 이 공원의 이름을 영어 그대로 검색하면 2008년 즈음 한글로 작성된 블로그 일기가 떠요. 이 공원에서 당시 축구 경기가 있었고, 날씨가 매우 싸늘했던 모양입니다. 무지와 비슷하지만 이제부터 무지와 변별되기 시작한 새로운 무지. 저는 그것을 꿈이라고 부릅니다. _선형
또 이렇게 함께 있게 되어버리는 것들
안녕 친구, 세상에 웬 이름들이 그렇게 많나요? 레인 코브 라이브러리. 포터리 그린 오벌. 머리가 분홍색인 새 일곱 마리와 불독 두 마리. 리버사이드 걸스 하이스쿨. 이름들이 너무 많아 정작 말해야 할 이름들을 잊게 될 것 같습니다. 이름이라고 하면 요즘에는 사람의 이름을 외우는 일의 어려움과 즐거움이 가장 먼저 떠올라요. 최근에 많은 분들의 이름을 한꺼번에, 아주 짧은 순간에 모두 외워야 할 일이 있었거든요. 이름을 외우는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외우는 일은 어려운데 잊는 일은 왜 이렇게 쉽게 이루어져 버릴까요? 잊는 일은 대개 이토록 쉬운데, 왜 가장 잊고 싶거나 잊어야 할 것들은 잊히지 않는 걸까요?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없이 계속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답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지금 영국 정원을 보고 있어요. 지난번처럼 구글 맵 거리 뷰로.
이럴 때 나의 일부는 영국 정원에 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시선과 생각이 영국 정원과 접점을 맺고 있는 것이죠. 이따금 떠올리는 내가 없는 곳들이 늘 그러하듯이.
이 영국 정원은 영국에 있는 곳이 아니에요. 뮌헨에 있는 곳입니다. 민병훈이 작성한 구글 지도의 가볼 곳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곳이지요. 구글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은 ‘78킬로미터의 자전거 및 조깅 코스, 호숫가의 비어 가든이 있는 광대한 18세기 도시 공원’이라고 합니다. 이런 설명을 읽고 나면 내 머릿속에는 18세기라는 말 정도가 남겨져요. 나머지는 그저 바로 어떤 풍경으로 변하고 맙니다. 말은 사라지고, 문장이었던 설명이 흐려지고, 장면만 남는 것입니다.
온전히 내 것이었던 상상 속의 장면은 거리 뷰의 장면과 충돌하며 어떤 구체적인 모습들로 변합니다. 초록색이 가득한 화면이 펼쳐지죠. 하늘은 파랗고, 넓게 펼쳐진 풀밭에는 연한 푸른색이거나 흰색인 듯한 작은 꽃들이 피어 있어요. 나무들이 많고 가지에는 연두색 잎사귀들이 돋아나 있습니다. 어른은 아무도 없는데 유모차 한 대가 풀밭 한복판에 세워져 있네요. 붉은 머리 꼬마 하나가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고개를 하늘로 들고서 한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습니다. 마치 하늘에서 무언가 흘러내리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아무도 모르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혼자서 느끼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비는 내리지 않고, 하늘은 아주 맑네요.
아이가 무엇을 기다렸는지, 나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예요. 나는 단 몇 번의 클릭으로 시야를 뮌헨의 영국 정원으로부터 베를린 주립 미술관으로 옮길 수 있죠. 미술관 곁에도 나무들이 있어요. 하지만 바닥에는 풀밭이 없네요. 대신 알파벳이 쓰인 노란 타일들이 존재합니다. 아이는 이제 사라지고 없어요. 대신 내가 멈춰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는, 마찬가지로 멈춰 있는 어른 몇몇이 보입니다. 어른들 옆으로는 벽에 기대어 놓은 책들이 보여요. 그림책들 몇 권. 그들은 화면 바깥, 나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것이죠. 화면의 경계는 그렇게 나뉩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들. 결코 같은 순간에 공존할 수 없지만, 또 이렇게 함께 있게 되어버리는 것들. _영건
태양 없이
아이 얘기를 하니 구글 지도를 이용해 길을 잃어버린 청소년 희정의 구원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어른이 된 희정을 보니 당시의 희정도 매우 똑똑한 아이였을 확률이 높겠네요. 그러나 한번 길치는 영원한 길치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그런 것 같거든요. 청소년 희정이 사색이 되어 비슷한 자리를 배회하고 있으면 저는 구글 지도를 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까운 경로를 안내합니다. 감격한 희정이 당신은 누구냐고 묻고, 망토를 뒤집어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으하하, 나는 시공의 지배자다. 으하하, 너는 훗날 나와 웹진 《비유》에서 꿈의 수집 프로젝트를 연재하게 될 것이다. 으하하, 이 프로젝트를 연재하지 않으면 운명의 시계가 틀어진단다. 으하하, 오늘을 기억하고 꼭 소설가가 되렴. 으하하, 내게 술도 많이 사고 좋은 말도 많이 던지렴. 으하하, 그때의 나는 우울증이 심하단다. 그러나 희정은 오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제게 돌아와 이렇게 대답할지도 몰라요. 미래랑은 지도가 다른데요, 사기꾼님.
저는 인스타그램에 제가 손가락으로 다닌 지역들, Gladesvill이나 Lane Cove를 검색합니다. Lane Cove에 해시태그를 걸면 6만 건의 게시글이 뜨는데, 한눈에 보면 피자를 찍은 사진과 공원을 찍은 사진, 사람을 찍은 사진이 많이 보이네요. 놀랍지만 아무런 기분도 들지 않습니다. 저는 6만 번의 사진이 찍힌, 이 프로젝트가 아니라면 보지 않았을 Lane Cove의 어느 공간들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무감하게 피드를 넘기고 있지요. 이 사진들은 어떤 꿈도 생성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6만 개의 시선이 저와 무관한 장소에서 떠내려오는 기분이에요. 무지에 찍힌 점 하나에 이만큼의 사진이 존재합니다. 저는 요새 제게 필요한 지혜 중 하나가 제가 작다는 사실을 진짜로 아는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작습니다. 저는 작기에 제가 작다는 사실을 되풀이해 기억해야 합니다.
Gladesvill에는 그보다 적은 2만 7천 건의 게시물이 뜨는데, 재밌는 것은 그중 판다 사진이 있었다는 거예요. Gladesvill에 판다가 사는 걸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피드를 넘기다 보니 그 사진을 찾을 수도 없네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인 크리스 마르케의 〈태양 없이〉에는 다음과 같은 내래이션이 나와요. 일 드 프랑스에 에뮤가 있다는 사실 알았어? 저는 님께 이 말을 그대로 반복할 수 있습니다. 글의 흐름을 위해 다소 건방지게 서술하는 것을 이해하시길 바라요. 오늘 낮에 우리 집 강아지인 뽀리가 이발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어? 몰랐지. 이 무능하고 작은 시공의 지배자야. 사실 제게 하는 말입니다. 오이와 시루떡. 님이 기르는 강아지와 고양이의 이름이지요. 왜 이름을 그렇게 짓게 되었나요. 대개 강아지와 고양이의 이름은 얼굴을 보면 자연스레 생각나는 발음으로 짓게 되는 것 같습니다. 뽀리, 오이, 시루떡. 입술이 도넛 모양이 되네요.
저는 스트리트 뷰로 Riverside Girls High School에서 Tarban Creek Bridge까지 나갑니다. 방향 감각을 상실해 헤맸지만 얼추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니 강에는 하얀 요트가 가득합니다. 화면 속의 시드니는 풀밭과 공원이 많고, 건물들은 대개 나지막하며 깨끗하게 정리된 연녹색 가로수들이 많이 보여요. 멀리까지 평탄하고, 시야에 걸리적거리는 물체가 없네요. 요트들이 너무 많아 저건 뭘까, 하고 고민하니 수상 택시들 같아 시드니 수상 택시를 네이버에 검색하니 맞네요. 날씨는 봄입니다.
저는 이전 편지에서 꿈에 관해 말했어요. 이번엔 현기증에 관해 말하고 싶습니다. 님이 말했듯 세계는 책상 위에 놓인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의 무한한 중첩입니다. 세계가 제 꿈인 것이 아니에요. 제가 바로 꿈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파편이라는 말은 깨어진 조각을 가리켜요. 파편들을 모두 이어 붙인다고 해도 세계의 전체 모습을 파악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파편들이 다시 꿈을 꾸기 때문입니다. 저는 파편입니다. 저는 거의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고, 정말로 거대한 모두는 제 바깥에 있어요. 저는 파편과 관계하는 파편입니다. 저는 환영이고, 저는 세계가 수집한 꿈의 희박한 조각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니며, 저는 사라지지 않고, 저는 누군가의 무지 속에 있어요. 저는 벌써 희정의 집 앞에 도착해 있습니다. 놀이터. 자전거. 아이들. 그네. 팻말. 사람들은 언제나 무엇을 했을까요. 지금이 실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_선형
영상 〈시드니 홈비디오〉(총 3분 49초, 연출·촬영 허원, 편집 허원 김지환, 출연 허희정, 특별출연 조기은). 허희정이 시드니에서 1년 동안 살던 시기에 허희정의 아버지 허원이 촬영한 푸티지와 애니매이션 The Cookie Carnival의 일부 푸티지로 구성한 것이다.
꿈의 수집
음악을 만드는 Goat the funky와 영화를 만드는 김지환, 소설을 만드는 민병훈, 양선형, 최영건, 허희정. 여섯 사람이 모여 일곱 장소를 표류합니다. 먼저 출발한 사람들이 걸었던 길을 새로 출발한 사람들이 다시 따라 걷습니다. 이로써 ‘꿈의 수집’은 ‘장소와 장소’ ‘장소와 개인’ ‘개인과 개인’이라는 세 가지 관계의 꿈을 읽어내보려 합니다.
2020/02/25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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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틀랜드의 전자음악 뮤지션 Mylo의 첫번째이자 마지막 2004년 정규앨범 ‘Destroy Rock & Roll’에 담긴 수록곡이다. 서정적이면서 음울한 Mylo 특유의 음악을 듣고 있자면 왠지 모를 쓸쓸함이 느껴진다. 오랜 시간 들어온 이 곡 특유의 복잡한 감상이 작가들의 글에서 느껴지는 그것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