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동민     극작가.
   주영     극작가 겸 연출가.
   하나     극작가.

   때

   추운 어느 겨울.

   곳

   홍대의 어느 카페.

 
테이블 위에는, 머그컵 세 개와 노트북 세 개가 올려져 있다.
 
주영과 하나는 노트북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
 
동민은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며 주영과 하나를 본다.

   동민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주영
솔직히 재밌게 읽었어요. 통통 튀는 에피소드들이 인상적이었어요.
   동민
흠……
   하나
왜요, 왜. 쓰면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나요?
   동민
남자 주인공이 너무 모호하지 않나요? 페미니즘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주인공이 직장 내 여성주의 소모임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뭐랄까……
   주영
너무 작가의 행동이다?
   동민
맞아요! 작가가 하라고 하니까 그 행동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좀더 납득이 가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싶은데…… 인물 만드는 거 왜 이렇게 어렵죠?
   하나
너무 공감해요. 저는 뭐랄까, 작품 쓸 때마다 구하나 미니미를 양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인물이 다 구하나예요. 구하나가 묻고 구하나가 답하고 있어요.
   동민
저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매번 인물을 만들 때마다 그 인물에 맞는 행동이나 말투, 버릇 등을 디테일하게 만들어서 붙여줘야겠다고 생각해요. 근데 막상 한글 파일 앞에 앉으면 머리가 백지장처럼 하얘져요. 이번 남자 주인공도 그랬어요. 결국, 내가 아는 범위의 정보 내에서 모호하게 삼십대 직장인 남성을 묘사하고 말았죠.
   주영
말투를 다르게 한다는 게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서 전 사투리에 기대곤 해요. 이것도 사실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죠. 어떤 일본 작가의 작품에서 읽은 글귀가 떠오르네요. ‘내가 만든 음식은 내 맛이 나서 맛이 없다.’ 그래서 내가 쓴 글이 별로구나 싶고.
 
 
 
세 사람, 웃는다.
 
 
   하나
저 이번에 완성한 작품이 딱 그렇잖아요. 희곡을 다시 읽는데, 인물만 다르고 비슷한 장면을 세 개나 써놨더라고요. 코스 요린데 음식 맛이 다 똑같아. 비슷한 장면이 반복되니까 이야기가 되게 밋밋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동민
뭔지 알 것 같아요. 희곡을 쓸 때마다 상상력의 한계를 느낀다니깐요.
   주영
저는 기존의 연극에서 여성 인물을 소비하는 방식이 늘 답답했어요. 예를 들어 <햄릿>의 ‘오필리어’같은 경우, 전형적인 ‘순수한 소녀’의 역할만 수행하잖아요. 너무 아쉽고 안타깝더라고요. 매력적이고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만들고 싶은데, 늘 어려움을 느껴요. 남성 중심 서사를 배우고 보고 자라왔기에 그 반대를 만드는 것이 낯설고 힘이 들어요. 그래서 재미있기도 하지만요.
   하나
그래서 제가 처음에 쓴 희곡들은 대부분 등장인물이 남자예요. 작가님 말씀처럼 남성 중심 서사를 보고 자라다보니, 저도 모르게 남자 인물만 떠올리게 되더라고요. 무의식이 참 무섭구나 싶었어요. 저는 여성 캐릭터를 만들면서 부딪치는 어려움이, 제가 자꾸 이상한 강박에 빠진다는 거예요.
   주영
강박이라면?
   하나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누구에게도 욕먹지 않을 완벽에 가까운 인물을 만들게 돼요.
   동민
감투만 좋은 인물을 만들어내는 것 같은 느낌?
   하나
네네!
   동민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윤성주스〉라는 희곡에 ‘수환’이라는 인물이 나와요. 자신이 이성적이고 스스로 촉이 좋다고 심하게 오해하는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 캐릭터예요. 이 포인트가 확실히 잡혀 있으니까 희곡 내내 다른 배역들에 비해 아주 날아다니거든요. 반면 쓸데없는 말은 안 하는 ‘수지’라는 여성 캐릭터와 ‘윤성’이라는 퀴어 캐릭터는 대사량이 수환이보다 훨씬 적죠. 분명히 수환이에 비해 더 똑똑하고 점잖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인물인 건 맞는데, 과연 더 매력적인 인물인가는……
   주영
어렵네요. 나름 더 신경써서 인물을 만든 건데, 그게 부작용인 것 같기도 하고.

 
세 사람, 한숨을 쉬며 테이블 위에 있는 머그잔을 들어 음료를 마신다.

   동민
이참에 배우들과 함께 인물을 만드는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요? 배우들을 인터뷰 하고 함께 인물 프로필을 만들어보는 거예요. 지난번 〈윤성주스〉 작업할 때, 배우들이 ‘이런 부분은 이해가 안 된다.’라며 콕콕 집어준 걸 토대로 대본을 수정했는데요, 처음엔 만화 같았던 인물이 현실에 발붙이고 있는 인물로 바뀌는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하나
좋은데요. 저희가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잖아요. 작가도 인물을 창조하는 사람이지만, 배우도 인물을 창조하는 사람이니까 함께 이야기 나눠보면 재밌을 것 같아요.
   주영
저도 좋아요. 저 같은 경우는 배우로 연극 활동을 시작했는데요, 아쉽게도 수많은 작품 중에 제가 맡고 싶은 역할은 많지 않았어요. 내가 사랑해온 연극은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후, 스스로 내가 연기하고 싶은 여성 서사를 만들기 위해 연출 작업과 극작을 시작하게 된 케이스예요. 아마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배우들이 많을 거예요.
   하나
실제로 페미니즘 이슈에 관심 있는 배우 중에 그동안 학습된 것들을 걷어내고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고민하는 분들이 있다고 들었어요. 배우들의 고민과 극작가의 고민이 만나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요?
   동민
완전 기대되는데요. 혹시 인터뷰하고 싶은 배우나 만들고 싶은 인물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야기를 나누며 떠오른 인물이 있기는 한데요.
   주영
동민 작가는 계획이 다 있구나.
   동민
(웃으며) 저는 퀴어 캐릭터를 연기했던 배우와 인터뷰해보고 싶어요. 평소 작품을 볼 때, 퀴어 캐릭터는 어떤 말투를 써도 재현에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해요. 배우가 무대에서 퀴어 캐릭터를 연기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 부분을 함께 고민해보고 싶어요.
   주영
저는 평소에 매체에서 보여주는 중년 여성의 이미지가 한정적이라는 생각을 해왔어요. 가정에 속한 인물이 아닌 사회경제적으로 독립한 중년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현장에서 오랫동안 공연해온 오십대 배우와 인터뷰를 하면서 지금까지 맡아온 배역들이 어떠했는지,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인물을 연기하고 싶은지 물어보고 싶어요.
   하나
이미지가 한정적이라는 말씀을 들으니까 기-승-전-연애로 흐르는 작품들이 생각나네요. 저는 연애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데, 제가 보는 작품의 주인공들은 늘 사랑에 빠져요. 배우 중에도 연애에 관심이 없지만,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어야만 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주영
벌써 머릿속에 배우 한 명이 떠올랐어요.
   하나
악 너무 좋아. 그런 의미에서 저는 인물 프로필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인물들이 등장하는 희곡을 써보면 어떨까 해요.
   동민
저희가 요즘 브런치에 릴레이 연재하는 것처럼요? 좋아요, 좋아요!
   주영
연극에서 관객을 빼놓을 수 없죠. 저희가 쓴 희곡으로 낭독 공연을 올리고, 관객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것 같아요.
   하나
크으. 좋습니다.
   동민
그런데 작가님 막차 시간 괜찮으신가요? 수원까지 가시려면……
   하나
어머, 어머! 큰일 날 뻔했네요.
   주영
그럼 우리 다음번에 만나서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해봅시다!
 
 
 
세 사람, 헐레벌떡 짐을 싸고 카페를 나선다.
 
막.




창작집단 담

구하나, 박주영, 서동민. 세 명의 극작가가 담에 모였습니다. 담담하게 다음을 도모합니다.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담.

2020/06/30
3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