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래 전 6월에 사민은 집을 떠났다. 인천에는 사민의 개, 사민의 가족, 동물과 사물을 포함하여 20년간 가져온 모든 것이 있었다. 사민은 돌아가지 않았다. 가방 두 개만을 들고 어디로든 옮겨 다녔다.
   가방 하나에는 사민의 셔츠와 바지, 칫솔이 들어 있었다. 다른 가방은 납작한 은색 캐리어인데, 진우가 영화 속 스파이들의 가방 같다며 놀리던 것이었다. 안에 든 물건들은 얼핏 보기에 무던했다. 요령 있게 정리해둔 전선들과 개인용 랩톱, 하드 디스크. 사민은 몇 해 간 그것을 끌고 관사와 회사를 오갔다. 인내심이 필요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결국은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사민은 또 한번 모든 것을 떠났다. 회사와 관사, 그리고 진우.
   사민을 아는 소수의 사람들은 그 일을 신화처럼 나누었다. 막상 본인이 그 일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누구도 몰랐다. 흘러간 일들을 되새기기에 사민은 너무 바빴다. 매일 벌어지는 사건을 기록하고 P의 이미지를 내보내는 일만으로도 매해가 훌쩍 지났다.
   사민은 함께 일한 그 누구보다 P를 아꼈다. 물론 내가 P를 만들었지. 하지만 P는 나보다 나아, 모든 면에서. 사민은 가끔 이야기했다.
   어떤 사람들은 P가 미래에 대해 ‘예언’한다고 말한다. 신처럼 세계를 바라보고 기록하며 내다본다고. 사민은 남몰래 그들을 비웃었다. 예언이라니, 오히려 반대였다. P는 미래를 보호한다. 모호한 이미지들을 통하여 미래를 숨겨준다. 앞날을 내다보고자 하는 발악들 사이에서, 그만이 다가올 시간을 존중하려 애쓰고 있다.
   물론 사민 역시 P를 통째로 알지는 못했다. 지난 새벽, P는 한 장의 이미지를 전송해왔다. 무슨 용도인지는 대관절 알 수 없었다. 다만 이미지가 도착한 시간, 서버실에 남은 사람은 사민뿐이었다.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민은 그렇게 믿었다.
   이미지는 제대로 출력이 되지 않은 듯 부옇고 흐릿했다. 엇비슷한 의미의 형상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분명한 구성은 있었다. 섬과 배, 해안가. 오래 전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이미지들이 반복하여 발생한 적이 있다. 사민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기의 일이었다.
   사민은 이미지를 출력했다. 이번주 P가 내보낸 세 장의 이미지와 함께, 두 개의 가방을 챙겨 서버실을 나왔다. 오전의 빛이 이마로 쏟아졌다.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2

2020년 6월 P의 예언-이미지 첫번째.

   6월의 첫날에는 쌍둥이가 섬을 빠져나왔다. 새벽의 어스름 속에서였다. 섬의 유일한 부두에 검은 배가 서 있었다. 우측 상단부에 적힌 흰 글자들이 번득였다. 마운틴 트레인.
   영종도까지는 화물용 상자 속에 웅크린 채로 이동했다. 상자들은 크레인에 매달려 옮겨진 뒤, 서커스처럼 노랗고 파랗게 칠한 창고로 갔다. 네 시간이 지나서야 상자의 뚜껑이 열렸다. 까만 옷을 입은 남자가 땀과 눈물, 노여움에 절은 쌍둥이를 내려다보았다.
   ―인상 풀어. 그가 말했다. 이제 다 왔으니까.
   까만 옷의 남자들은 상자를 번쩍 들었다. 이 사람들, 무게가 거의 안 나가, 감탄하면서. 그들은 영종도 발 전차의 가장 마지막 칸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짐칸이었다.
   전차는 오로지 해저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영종도에서 인천항까지-, 산 속을 뚫은 듯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심해를 통과했다. 짐칸은 항시 어두웠다. 쌍둥이는 상자 속의 두번째 어둠 속에 고였다. 중심을 잃지 않도록 서로 발바닥을 맞대고, 몸은 구부정히 숙였다. 전차가 터널을 지나자, 천장창으로 스민 빛이 상대방의 이마에서 너울거렸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부서져 내려오듯 조각난 빛이었다.
   그들은 종점에서 내렸다. 해안 터미널이었다. 전차 바깥의 세상은 섬을 나오던 때와 마찬가지로 어둑했다. 막 켜진 가로등이 부두의 출입문을 비췄다. 톱니바퀴 모양이었다. 그 너머로는 온갖 크기의 선박들이 출렁였다. 규모와 어울리지 않게 화사한 색깔의 항만 크레인이 중고차들 사이로 서 있었다. 갈매기들이 울음과 똥을 흩뿌렸다.
   쌍둥이는 삐걱거리는 몸으로 부둣가를 걸었다. 몇 차례 발을 구르고, 마른 미역이 달라붙은 바닥을 쓰다듬었다. 인천의 냄새는 섬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새카만 수평선 위로 원형의 빛들이 떠다녔다.
   ―정말 하루밖에 안 걸리네.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그날 거의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목이 갈라지듯 아팠다. 그들은 터미널로 돌아갔다. 텅 빈 대기실 안에는 누더기 같은 사람들만 모여 있었다. 몸들은 주름지고 구부정했다. 그들 중 하나가 쌍둥이를 발견하고 손짓했다. 입모양으로 말했다.
   ―이리 와.
   쌍둥이는 그들 옆에 앉았다. 백 살은 되어 보이는 여자가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뭉개진 김밥 몇 줄이 들어 있었다. 쌍둥이들이 그것을 먹는 동안, 늙은이들은 그들을 지켜보았다.

2020년 6월 P의 예언-이미지 두번째.

   진우를 만나게 된 것은 일주일 뒤의 일이다. 연결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몇 차례 끊긴 신호음, 조만간 연락하겠다는 비서의 대답만 되풀이되다가, 마침내 검고 긴 차가 왔다. 터미널에 숨어 살던 노인들이 큰길까지 나왔다. 쌍둥이를 배웅해주기 위해서였다. 손을 흔드는 얼굴에 눈물이 흘렀다.
   진우는 큼직하고 두꺼운 남자였다. 얼굴의 선 하나하나 문질러 그린 양 짙었고, 목소리에는 울림이 맺혔다. 그는 재차 물었다. 스물한 살 맞아? 너무 작은데. 쌍둥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가 일이고, 제가 란이에요.
   ―얘가 란이고, 제가 일이에요.
   진우는 그들을 호텔로 데려갔다. 인천역 뒤의 새하얀 호텔로, 정문에 ‘올림포스’ 상호가 적혀 있었다. 호텔은 황홀했다. 작살 섬은 물론이고, 부두 근처에서도 이런 곳을 본 적 없었다. 양쪽으로 긴 건물은 신전처럼 높직한 기둥으로 서 있었다. 앞뜰에서는 검은 분수가 두 갈래의 물을 솟구쳐 올렸다.
   쌍둥이는 먼저 몸을 씻었다. 화물칸과 전차 끝자리, 터미널에서 구르며 묻은 먼지들을 벗겨냈다. 그제야 진우는 그들을 호텔 꼭대기의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쌍둥이가 그릇을 깨트릴 듯 허겁지겁 밥을 먹는 동안, 진우는 말했다. 모든 문장이 미리 쓰인 것을 읽은 양 유창했다.
   ―너희 어머니와 나는 오랜 친구야. 몇 년 전, 그러니까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지. 그는 내가 봉사활동을 간 학교에서 일하고 있었어. 대단히 강인한 사람이었어. 서로 아주 존경했다. 언젠가 또 만나기로 했지. 그런데 정말 연락이 온 거야. 한국으로 오는 걸 도와 달라고. 갑작스러운 연락이었어.
   쌍둥이는 서로를 살폈다. 갑작스러운, 이라는 말은 조금 다르게 들렸다. 뻔뻔스러운, 혹은 염치없는. 자신의 그릇을 밀어주는 진우의 눈이 말하는 듯 했다. 심지어 너희는 약속의 당사자도 아니잖아. 난 너희를 몰라. 진우는 말을 이었다.
   ―오래된 약속이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해 줄 생각이야.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사람들은 여전히 낯선 사람들을 두려워해. 매년 수천 명이 난민 신청을 하지만, 그 중 통과되는 사람은 두어 명 정도밖에 없지. 게다가 너희는, 너희는 상황이 좀 복잡해. 어쨌든 한국 영해 안에서 태어난 거긴 하잖아. 난민 심사 자체가 가능할까, 걱정이 되네.
   ―영해가 뭐죠?
   ―한국의 바다라는 뜻이야.
   기본적인 단어인데, 그것도 모르면 안 된다. 진우가 웃으며 말했다. 쌍둥이도 마주 웃었다. 우리는 기본적인 단어들도 모를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 작살섬에는 학교 따위 없고, 아이들은 그들을 포함하여 채 다섯 명도 되지 않았다. 그저 둘러싼 어른들의 말을 통해서 더듬더듬 세상을 알아 나가는 수밖에 전부였다고, 설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둘 다 침묵키로 했다.
   해가 졌을 때 진우는 길고 검은 차로 돌아갔다. 너희를 데리러 올게. 가능하면 다음에는 서울로 가자, 그는 말했다. 쌍둥이들은 올림포스 호텔의 분수대 옆에 서서, 차가 점점 조그만 점으로 변하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여름이었다. 유월인데도. 햇살이 그들을 짓눌렀다. 파란 날개의 파리가 귀 주위에서 윙윙 울었다. 끈끈한 땀이 새 옷에 달라붙으며 둥근 자국을 만들었다. 그들은 문득 짙은 피로를 느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치 백 살이 된 사람처럼.

2020년 6월 P의 예언-이미지 세번째.

   그들은 한 통의 전화로 깨어났다. 기계 속의 목소리가 말했다. 찾아오신 분이 있어요. 로비에서 기다리세요. 쌍둥이는 승강기 안에서 속삭여댔다. 며칠 뒤에 온다더니, 금방 왔네. 믿을 만한 사람일까? 나야 모르지. 어쨌든 선택의 여지도 없잖아.
   이른 아침의 호텔은 또 다른 모습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환상을 그럴싸하게 베낀 높은 천장과 기둥들 사이로 아침의 색이 일렁였다. 그들을 본 접수대의 직원이 로비 안쪽을 가리켰다. 통유리 앞 소파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옅은 노랑으로 물든 기둥 사이를 걸어가면서, 쌍둥이는 묘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이상한 날들이 시작될 테며, 그것을 피할 도리도 없겠다. 그들은 겁에 질렸으며, 한편으로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소파에 앉은 사람이 일어섰다. 여자였다. 양손에 가방을 들고 있었다. 어머니보다는 늙었고 진우보다는 젊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은테 안경이 빛을 받아 번쩍였다. 눈 속에는 핏줄이 터진 자국이 붉은 가시처럼 너울져 있었다.
   인천에 온 건 거의 20년 만이에요. 여자가 말했다.


   3

인천에서 돌아온 날, 사민에게 또다른 이미지가 도착한다.

   작업 노트

※스튜디오 풀옵션의 AI는 지난 6월, 구글의 뉴스 데이터를 모조리 빨아들인 뒤 재조립했다. 위의 세 가지 문장은 AI가 수집한 데이터를 완전히 다른 배열들로 새롭게 추출한 것이다. 이는 스튜디오 풀옵션이 본 프로젝트를 제작하는 첫번째와 두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P!ng〉의 프롤로그에서 나타나는 첫번째 단계 참고. 바로가기) 우리는 위 문장들을 구글에 던져 건져낸 이미지들을 P의 예언 삼아 2화를 제작하였다. 풀옵션의 AI와 P를 통해 두 세계는 미미하게 연결되고 있다. 위 모든 과정은 프로그래밍 언어 Python을 통하여 제작되었다.



스튜디오 풀옵션

텍스트와 이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번역합니다. 가능한 멀리까지 공놀이를 지속하며 오해를 확장하고자 합니다. 글 쓰는 함윤이와 디자인 하는 김형도가 함께 만들었습니다.

2020/07/28
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