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밑 콩
1화 계피와 완두콩
모임도토리의 ‘요 밑 콩’ 프로젝트는 옷으로 표현되는 욕망, 자아와 타인의 시선, 각자의 방식으로 욕망을 소화하는 데서 나타나는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다. 이 문제를 다루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디밴드의 보컬리스트인 나는 무대에 오랜 기간 서오며 옷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해왔다. 나는 대형 매니지먼트사에 소속되지 않았기에 스타일리스트가 따로 없었고 방송이나 공연 전 직접 옷을 구매해왔다. 활동 기간이 길어질수록 공연장에서 입는 옷들을 평상시의 내가 입지 않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활용 목적이 다르니 공연시의 옷과 평상시의 옷은 스타일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내게는 갈수록 옷의 실용적 나뉨이 실용적으로만 보이질 않았다. 옷이 나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네가 공연할 때만 입는 치마는 너에게 무엇을 뜻하는 거야? 치마를 입으면 네 노래의 표현도, 네 멘트도 치마를 입는 거야? 이 옷은 그렇게 화려하지도 않은데 왜 평소에는 절대 입지 않아? 시선을 받을 때와 받지 않을 때 너는 정확히 어떤 이유로 달라지는 거야?
대중 앞에 서는 직업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보여지는 자신과 실제의 자신은 누구나 어느 정도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내 직업의 평가적인 면이 벅찰 때가 많았고 그 때문에 보여지는 자신과 실제의 자신을 꽤 의식적으로 분리해놓고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런데 가장 보여지는 자신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느꼈던 무대에서 역설적이게도 가장 본래의 내가 드러나기도 했다. 노래에 내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노래할 때는 ‘보여지는 나=실제의 나‘라는 공식이 순간적으로 성립했다. 일상에서 다시 분리된 내게 그 공식의 여운이 남았고, 보여지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삐걱거림이 오래 이명처럼 들리곤 했다. 가끔 보컬리스트인 나를 좋아한다는 사람을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감사하긴 하지만, 혼란스러운 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내게 “계피씨 정말 좋아해요”라고 한다. 음악인으로서의 나를 좋아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그도 나도 머리로는 안다. 그러나 음악의 힘은 듣는 이가 ‘나는 이 음악인을 좋아하는 것이지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야’라고 매순간 침착하게 구분할 수 있게끔 만만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음악과 인생의 한순간을 나누었던 그의 감정은 멜로디라는 감각 자극이 아닌 살아 숨쉬는 인간 존재인 나를 향할 때가 많다. 나도 팬일 때는 그렇게 한다. 이해가 된다. 그런데 나로서는 군중 속의 한 명이 아닌 그 개인과 실제적인 상호작용을 해본 경험이 없다. 그의 나에 대한 감정과 나의 그에 대한 감정은 불균형이 있고 나는 곧잘 미안해진다. 나는 누구로서 반응해야 하는가? 보컬리스트로서? 개인으로서? 이 모든 의문이 혼합되어 옷이라는 형태로 내게 말을 걸곤 했다. 너는 왜 이 옷을 선택하는 거니, 하고.
계피가 가진 모든 옷(홈웨어 제외).
계피가 가진 모든 옷 중 공연 의상.
내가 조금 독특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나는 우리 사회에 사는 많은 여성도 어떤 자기를 보여주고 싶고 어떤 자기는 가리려고 하는가의 문제로 크게든 작게든 혼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온라인에 접속하기만 하면 온갖 저렴한 옷이 나비처럼 시야에 날아다니며 구매욕을 자극하는 사회에 살면서, 사람들은 옷을 실용적인 목적 이상의 목적을 위해 구매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적 자기와 그에 따른 새 정체성을 위해 구매하는 측면 말이다. 자신이 어떻게 보이리라는 기대, 자신이 어떻게 보여야만 한다는 심리적 통제가 끊임없는 구매에 한몫하는 것 같다. 쇼핑몰의 모델이 입은 옷을 입는다고 모델 체형이 아닌 내가 모델처럼 보이는 일은 없다. 이 새롭지도 않은 사실을, 구매 버튼을 클릭하며 나는 곧잘 잊곤 한다.
나는 안데르센의 동화인 「공주와 완두콩」을 떠올린다. 진정한 공주를 알아보고 결혼하기 위해 왕자가 공주의 12겹 이부자리 밑에 완두콩을 넣어놓고, 공주가 그 이물감을 눈치채는지 시험한다는 내용이다. 일견 이 동화는 권력을 지닌 가부장적 남성이 여성으로 하여금 특수하고 이해할 수 없는 기준에 부합하기를 요구하는 이야기로 보여 많은 이들의 반감을 산다. 나는 융의 분석심리학을 통해 동화를 공주가 꾸는 꿈으로 새롭게 보고 싶다. 분석심리학은 개인이 꾸는 꿈속의 모든 인물, 심지어 물건과 장소까지도 개인의 내면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이 관점에서 왕자와 공주는 한 인물의 내면에 공존하는 무의식적 의지를 나타낸다. 결혼을 원하는 왕자는 공주가 스스로를 알아가기를 촉구하는 힘의 상징이다. 꿈에서 결혼은 자기도 몰랐거나 거부하려던 자기의 모습을 인정하는 일이 성공했음을, 즉 통합이 성공했음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누구인지 온전히 알아가려 하고 있는가? 쌓으면 12겹보다 훨씬 많을 우리 옷장 속 옷들, 그 밑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콩의 이물감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가? 그 콩은 타인의 것인가, 아니면 원래는 내게 속해 있는 것인데 내가 타자화한 것인가? 콩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걸 내면에 소화시킬 수도 있을까?
동네 여성 친구들인 모임도토리의 구성원, 즉 나, 카메라노동자 이응, 기획자인 움파는 평상시에 요리와 독서 모임을 하면서 자주 어울려왔다.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함께 하기로 의기투합한 것은 처음엔 그저 재미있어 보인다는 가벼운 흥미 때문이었지만, 점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우리가 ‘자신을 만들어가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움파는 긴 시간에 걸쳐 의식적으로 외면을 변형시켜온 사람이다. 움파의 이전 사진에서 그는 쉬폰 블라우스에 화려한 탈색 머리, 공작 깃털을 들고 있다. 그때와 지금의 움파는 단절되어 있고, 지금은 최대한 자신이 사회규범적 여성성으로 재단되지 않게끔 의도하는 옷을 주로 입는다. 투블럭컷, 편안한 셔츠, 통 큰 바지 또는 슬랙스가 움파의 현재 일상의 정석 패션이다. 노트북 배낭 맨 차림을 본 움파의 지인이 “구로디지털단지 출근 룩”이라 부른다고 했다. 움파는 헌신적으로 책을 읽고 또 실천하는 지적인 사람으로, 그 책들이 그의 옷을 비롯한 외양에 영향을 미친다.
움파가 가진 모든 옷(홈웨어, 압축팩에 넣어두었기에 꺼내기 힘들었던 패딩옷 한 벌 제외).
나와 움파가 옷과 그와 관련한 시선, 시선의 내면화에 관해 고민해왔다면 이응은 결이 많이 달랐다. 이응은 드물게도 외면 정체성을 외부 시선과 거의 관계없이 형성한 케이스다. 이응은 옛날부터 자신의 신체에 큰 불만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사춘기 시절부터 외모에 예민해지기 시작한 나로서는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 사람이니 그의 옷 또한 타인의 시선과 그에 관련한 자기 이미지의 전시라는 측면에서는 해석되지 않는다. 이응은 옷을 소유함으로써 기억을 소유한다. 이응은 어떤 기억도 놓치고 싶지가 않다. 그렇기에 오래된 옷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물론 그 양은 대량이다. 그 탓에 나는 이응을 알고 지낸 약 1년간 그가 같은 옷을 두 번 입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이응은 나와 움파에 비해서 자유로워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전혀 자유로워 보이지 않기도 한다. 이런 말을 하면 이응은 발끈하기도 하고 빙글빙글 웃기도 한다.
이응의 여름옷 전부(홈웨어 제외). 양이 정말 많기 때문에 옷장에서 꺼내는 것도 일이라, 여름옷만 추려서 찍었다. 이응의 옷은 계피의 옷에 비해 서너 배가량 된다.
이응이 모은 밴드 굿즈 티셔츠.
우리 프로젝트는 스스로의 옷과 외양을 분석하고 그와 관련한 산발적 에피소드들을 하나로 꿰어 정돈된 의미로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즉 우리의 12겹 옷을 만져보고 냄새도 맡고, 제일 밑의 콩을 찾아내고, 요리하고, 먹어서 피와 살이 되게끔 하자는 것이다. 소화가 너무 안 될 듯하면 용기를 내 휴지통에 버리든가. 그 방법으로 우리는 먼저 각자가 스스로를 바라본 다음, 이후엔 서로를 바라보고 어떻게 보이는지 얘기해주기로 했다. 상대가 내 거울이 되어주는 것이다. 어떻게? 최대한 상대처럼 보이는 옷을 입음으로써. 상대를 코스프레함으로써. 단 우리 세 명 다 소비주의에 지쳤고 하니 우리가 가진 옷 중에서 고르자고 의견을 모았다. 내 키와 이응의 키가 20센티미터는 차이가 나기에 아무리 이응처럼 입는다고 해도 내가 이응처럼 보이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스스로가 화보 속 모델의 이미지처럼 보일 거라 순간적으로 믿으며 옷을 사오지 않았던가? 그에 비하면 우리의 놀이가 크게 해로울 것도 없지 않은가? 우리는 불가능을 목표로 함으로써 한껏 낄낄거리고 싶다. 웃음으로서 콩의 이물감에서 벗어나고 싶다. 친구의 옷에 관한 역사를 듣고, 서로가 그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하고, 각자의 프레임으로 해석해 하나의 가능성으로 만들어 친구에게 다시 돌려주고 싶다. 친구가 자신을 해석하는 주체로서 선택할 수 있는 또다른 선택지 말이다. 상대의 역사와 감정을 배제한 거친 프레임 씌우기가 아닌, 신뢰로 시선의 지평을 서로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앞으로 써나갈 일곱 번의 연재 동안, 우리 앞에 어떤 지평이 열릴지 기대가 크다.
대중 앞에 서는 직업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보여지는 자신과 실제의 자신은 누구나 어느 정도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내 직업의 평가적인 면이 벅찰 때가 많았고 그 때문에 보여지는 자신과 실제의 자신을 꽤 의식적으로 분리해놓고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런데 가장 보여지는 자신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느꼈던 무대에서 역설적이게도 가장 본래의 내가 드러나기도 했다. 노래에 내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노래할 때는 ‘보여지는 나=실제의 나‘라는 공식이 순간적으로 성립했다. 일상에서 다시 분리된 내게 그 공식의 여운이 남았고, 보여지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삐걱거림이 오래 이명처럼 들리곤 했다. 가끔 보컬리스트인 나를 좋아한다는 사람을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감사하긴 하지만, 혼란스러운 면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람은 내게 “계피씨 정말 좋아해요”라고 한다. 음악인으로서의 나를 좋아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그도 나도 머리로는 안다. 그러나 음악의 힘은 듣는 이가 ‘나는 이 음악인을 좋아하는 것이지 그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야’라고 매순간 침착하게 구분할 수 있게끔 만만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음악과 인생의 한순간을 나누었던 그의 감정은 멜로디라는 감각 자극이 아닌 살아 숨쉬는 인간 존재인 나를 향할 때가 많다. 나도 팬일 때는 그렇게 한다. 이해가 된다. 그런데 나로서는 군중 속의 한 명이 아닌 그 개인과 실제적인 상호작용을 해본 경험이 없다. 그의 나에 대한 감정과 나의 그에 대한 감정은 불균형이 있고 나는 곧잘 미안해진다. 나는 누구로서 반응해야 하는가? 보컬리스트로서? 개인으로서? 이 모든 의문이 혼합되어 옷이라는 형태로 내게 말을 걸곤 했다. 너는 왜 이 옷을 선택하는 거니, 하고.
내가 조금 독특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나는 우리 사회에 사는 많은 여성도 어떤 자기를 보여주고 싶고 어떤 자기는 가리려고 하는가의 문제로 크게든 작게든 혼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한다. 온라인에 접속하기만 하면 온갖 저렴한 옷이 나비처럼 시야에 날아다니며 구매욕을 자극하는 사회에 살면서, 사람들은 옷을 실용적인 목적 이상의 목적을 위해 구매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적 자기와 그에 따른 새 정체성을 위해 구매하는 측면 말이다. 자신이 어떻게 보이리라는 기대, 자신이 어떻게 보여야만 한다는 심리적 통제가 끊임없는 구매에 한몫하는 것 같다. 쇼핑몰의 모델이 입은 옷을 입는다고 모델 체형이 아닌 내가 모델처럼 보이는 일은 없다. 이 새롭지도 않은 사실을, 구매 버튼을 클릭하며 나는 곧잘 잊곤 한다.
나는 안데르센의 동화인 「공주와 완두콩」을 떠올린다. 진정한 공주를 알아보고 결혼하기 위해 왕자가 공주의 12겹 이부자리 밑에 완두콩을 넣어놓고, 공주가 그 이물감을 눈치채는지 시험한다는 내용이다. 일견 이 동화는 권력을 지닌 가부장적 남성이 여성으로 하여금 특수하고 이해할 수 없는 기준에 부합하기를 요구하는 이야기로 보여 많은 이들의 반감을 산다. 나는 융의 분석심리학을 통해 동화를 공주가 꾸는 꿈으로 새롭게 보고 싶다. 분석심리학은 개인이 꾸는 꿈속의 모든 인물, 심지어 물건과 장소까지도 개인의 내면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이 관점에서 왕자와 공주는 한 인물의 내면에 공존하는 무의식적 의지를 나타낸다. 결혼을 원하는 왕자는 공주가 스스로를 알아가기를 촉구하는 힘의 상징이다. 꿈에서 결혼은 자기도 몰랐거나 거부하려던 자기의 모습을 인정하는 일이 성공했음을, 즉 통합이 성공했음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누구인지 온전히 알아가려 하고 있는가? 쌓으면 12겹보다 훨씬 많을 우리 옷장 속 옷들, 그 밑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콩의 이물감을 제대로 느끼고 있는가? 그 콩은 타인의 것인가, 아니면 원래는 내게 속해 있는 것인데 내가 타자화한 것인가? 콩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걸 내면에 소화시킬 수도 있을까?
동네 여성 친구들인 모임도토리의 구성원, 즉 나, 카메라노동자 이응, 기획자인 움파는 평상시에 요리와 독서 모임을 하면서 자주 어울려왔다. 우리가 이 프로젝트를 함께 하기로 의기투합한 것은 처음엔 그저 재미있어 보인다는 가벼운 흥미 때문이었지만, 점점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우리가 ‘자신을 만들어가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움파는 긴 시간에 걸쳐 의식적으로 외면을 변형시켜온 사람이다. 움파의 이전 사진에서 그는 쉬폰 블라우스에 화려한 탈색 머리, 공작 깃털을 들고 있다. 그때와 지금의 움파는 단절되어 있고, 지금은 최대한 자신이 사회규범적 여성성으로 재단되지 않게끔 의도하는 옷을 주로 입는다. 투블럭컷, 편안한 셔츠, 통 큰 바지 또는 슬랙스가 움파의 현재 일상의 정석 패션이다. 노트북 배낭 맨 차림을 본 움파의 지인이 “구로디지털단지 출근 룩”이라 부른다고 했다. 움파는 헌신적으로 책을 읽고 또 실천하는 지적인 사람으로, 그 책들이 그의 옷을 비롯한 외양에 영향을 미친다.
나와 움파가 옷과 그와 관련한 시선, 시선의 내면화에 관해 고민해왔다면 이응은 결이 많이 달랐다. 이응은 드물게도 외면 정체성을 외부 시선과 거의 관계없이 형성한 케이스다. 이응은 옛날부터 자신의 신체에 큰 불만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사춘기 시절부터 외모에 예민해지기 시작한 나로서는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 사람이니 그의 옷 또한 타인의 시선과 그에 관련한 자기 이미지의 전시라는 측면에서는 해석되지 않는다. 이응은 옷을 소유함으로써 기억을 소유한다. 이응은 어떤 기억도 놓치고 싶지가 않다. 그렇기에 오래된 옷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고, 물론 그 양은 대량이다. 그 탓에 나는 이응을 알고 지낸 약 1년간 그가 같은 옷을 두 번 입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이응은 나와 움파에 비해서 자유로워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전혀 자유로워 보이지 않기도 한다. 이런 말을 하면 이응은 발끈하기도 하고 빙글빙글 웃기도 한다.
우리 프로젝트는 스스로의 옷과 외양을 분석하고 그와 관련한 산발적 에피소드들을 하나로 꿰어 정돈된 의미로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즉 우리의 12겹 옷을 만져보고 냄새도 맡고, 제일 밑의 콩을 찾아내고, 요리하고, 먹어서 피와 살이 되게끔 하자는 것이다. 소화가 너무 안 될 듯하면 용기를 내 휴지통에 버리든가. 그 방법으로 우리는 먼저 각자가 스스로를 바라본 다음, 이후엔 서로를 바라보고 어떻게 보이는지 얘기해주기로 했다. 상대가 내 거울이 되어주는 것이다. 어떻게? 최대한 상대처럼 보이는 옷을 입음으로써. 상대를 코스프레함으로써. 단 우리 세 명 다 소비주의에 지쳤고 하니 우리가 가진 옷 중에서 고르자고 의견을 모았다. 내 키와 이응의 키가 20센티미터는 차이가 나기에 아무리 이응처럼 입는다고 해도 내가 이응처럼 보이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스스로가 화보 속 모델의 이미지처럼 보일 거라 순간적으로 믿으며 옷을 사오지 않았던가? 그에 비하면 우리의 놀이가 크게 해로울 것도 없지 않은가? 우리는 불가능을 목표로 함으로써 한껏 낄낄거리고 싶다. 웃음으로서 콩의 이물감에서 벗어나고 싶다. 친구의 옷에 관한 역사를 듣고, 서로가 그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하고, 각자의 프레임으로 해석해 하나의 가능성으로 만들어 친구에게 다시 돌려주고 싶다. 친구가 자신을 해석하는 주체로서 선택할 수 있는 또다른 선택지 말이다. 상대의 역사와 감정을 배제한 거친 프레임 씌우기가 아닌, 신뢰로 시선의 지평을 서로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앞으로 써나갈 일곱 번의 연재 동안, 우리 앞에 어떤 지평이 열릴지 기대가 크다.
모임도토리
무대에 서는 직업 때문에 옷에 대해 꽤 생각해본 보컬리스트 계피, 빈티지 샵에서 촛대를 고르듯 옷을 사면서 한편으로는 밴드 굿즈 티셔츠를 모으는 이응, 풍선 가슴뽕을 넣고 유치원 수영복 콘테스트에 섰던 움파.
2020/07/28
3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