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님께서 제보하신 일기


   오늘은 충동적으로 필라테스를 등록했다. 오래 미뤄왔던 일을 갑작스레 하게 되는 경위는 뭘까? 온 우주…… 운명…… 일테면 토성과 목성이 겹쳐지며 나의 ‘건강 밸런스’ 영역에 들어와 나의 발걸음을 ‘T.G필라테스’로 이끈 것일까.
   상담 선생님이 필라테스 기구들의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아치형의 목재 구조물과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쇠사슬(?) 그리고 손잡이들을 보곤 겁이 났다. 직관적으로 나의 어디를 걸치고 뭘 붙잡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서, 저걸로 뭘 어떻게 해서 코어근육이라는 것을 튼튼하게 만든다는 건지 전혀 예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괜히 아는 척 하면서 결제했다.
   회원 등록을 끝내고 나서는 반드시 신고 와야만 운동이 가능하다는 필라테스용 양말도 샀는데, 어쩐지 발가락 양말이었다. 심지어…… 발가락의 앞부분이 뚫려 있어서 벌거벗은 발가락 한마디가 빼꼼 고개를 내미는 그런 양말이었다. 발바닥 부분은 미끄럼 방지 처리가 되어 있었다. 그 부분은 이해가 된다. 미끄러지면 안 되니까. 그런데 도대체 왜 일정한 길이로 노련하게 발가락에 구멍이 나 있어야 한단 말이야? 나는 그런 양말은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실로 내 주변을 돌아다니는 회원 모두가 그 양말을 신고 있어서 나는 그 부끄러운 양말이 살짝 기대가 되기도 한다. 이제 내 옷장 속엔 비범한 양말 하나가 숨쉬고 있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그 양말을 신고 직관의 세계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하게 생긴 구조물과 함께 나의 근육을 키워나갈 것이다.
   선생님이 수업 들어올 때 정수기 옆에 있는 노란색 고무 팔찌를 차고 들어오라고 했는데, 그건 신입 회원이라는 표식이라고 했다. 그 클래스의 아기 회원이 되는 것이다. 상냥한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어리둥절하거나 실수를 해도 그 팔찌가 나를 어느 정도 다독여줄 것이다. 필라테스…… 꼭 해보고 싶었던 멋진 운동…… 얼마간은 잘 못해도 좋은 운동. 누군가 내게 무슨 요일에 볼래? 라고 하면 이젠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어? 안 되겠다. 그날은 필라테스가 있어서. 진심 세련되다. 한 번 더 써야겠다. 안 되겠는데? 그날은 필라테스가 있는 날이어서 말이지.


   「게르마늄 건강 팔찌의 제왕」


   서문
   운동 깨나 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선 언젠가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설이 하나 있다. 운동 마니아임에도 불구하고 이 전설을 모른다고 주장할 이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부터 알아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전설의 출처는 불확실하며, 가장 신빙성 있는 가설은 작가 김수한무의 망상에서 이 전설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현대에 가장 많이 읽힌 호러 판타지 『에르데힘의 악령』을 쓴 작가가 아니라, 동명이인일 뿐이니 타당성에 대한 의심은 거두길 바란다.
   아이러니하게도 무명작가였던 김수한무는 습작생 시절부터 체력과 글쓰기의 상관관계에 대한 관심이 깊은 자였다. 규칙적인 운동이 글쓰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으며, 헬스 및 요가, 필라테스 등 온갖 근력운동을 섭렵하였고, 배드민턴이나 풋살을 주 종목으로 삼는 생활체육 동호회에서 주 2회 이상 활동하기도 했다. 결국 김수한무는 운동을 하지 않고선 키보드를 두드릴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 강박증 환자가 되었다. 그 강박의 고통을 덜어내고자 시작된 망상이 바로 이 전설인 것이다.
   혹여 누군가 어떻게 망상이 전설이 될 수 있냐 물을 수 있겠다. 그에 대해선 본디에 망상이란 진언(眞言)과 닮아 있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전설은 모두 진언을 품고 있는 것이라고도.

   전설은 ‘디아이타 구(區)’라는 환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선 세 종족이 칠성(七星)의 가호 아래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쇠질족과 요가족, 필라테스족이 바로 그 세 종족이었다.
   그들은 헬스장과 필라테스 스튜디오와 요가원이라는 각자의 영토 안에서 디아이타 구 건강 역사를 매일같이 갱신하고 있었다.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한 삶이라는 동일한 목표 아래 후대를 교육했고, 상반된 운동 지식을 공유하는 포럼을 열기도 했다.
   세 종족은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맹세가 글귀로 새겨진 전설의 도구를 만들었다. 쇠질족에겐 글로브가, 요가족에겐 매트가, 필테족에겐 토삭스가 주어졌다. 종족의 우두머리가 도구의 주인이 되었다. 주인들은 도구의 힘을 통해 더욱 뛰어난 운동 능력을 지닐 수 있었다.
   글러브의 주인은 삼대 운동1) 무게를 무한대로 올릴 수 있는 능력을 얻었고, 매트의 주인은 삼매의 경지에 오를 수 있게 됐으며, 토삭스의 주인은 절대 다치지 않는 코어근육을 가지게 되었다. 커다란 힘을 얻는 세 종족은 함부로 조화를 파괴하려 들지 않았다. 결속은 강화되었고, 평화가 길었다. 후대는 어김없이 건강했다.
   하지만 전설 속의 평화란 깨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 디아이타 구 바깥, 맹신의 봉우리에서 세 종족의 동맹에 해악을 미치는 또다른 도구가 탄생했다. 맹신의 힘을 담은 게르마늄 건강 팔찌였다. 봉우리 위에 홀로 사는 전(前) 대지건강원의 주인, 사은로가 허상의 골짜기 힘을 빌려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은로는 탐욕스런 성미로 인해 디아이타 구에서 쫓겨난 이였다. 운동을 하지 않아도 건강을 유지해준다는 온갖 물건과 먹거리들을 개발했고, 몇 차례 큰돈을 벌기도 했다. 금세 사기로 판명 났고, 사은로는 다시는 구 안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되었다.
   사은로는 게르마늄 팔찌와 함께 디아이타 구로 돌아왔다. 플라시보의 오라를 후광처럼 이고, 게르마늄의 효능을 외치며 구민들에게 팔찌의 복제품을 팔았다. 팔찌를 구매한 이들은 어쩐지 불성실하게 운동을 했다. 종족의 우두머리들이 게르마늄 팔찌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기나긴 추적 끝에 우두머리들은 사은로를 맞닥뜨렸다. 사은로의 손목에 엮인 게르마늄 팔찌 원형이 자아내는 힘은 대단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우주의 기운으로, 혹은 일대 다수 간 싸움의 당연한 결과로, 우두머리들은 사은로에게서 게르마늄 팔찌를 빼앗을 수 있었다.
   팔찌를 빼앗긴 사은로는 제 신체의 물성을 잃었다. 깊은 어둠의 기운을 지닌 도구란 무릇 주인과 도구 사이의 해괴한 계약관계를 필수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은로는 영혼의 형태로 봉우리를 향해 겨우 돌아갔다.
   우두머리들은 팔찌의 처분에 대해 논의했다. 복제품들은 완전히 사라졌고, 원형만 남겨둔 상태였다. 사은로의 게르마늄 팔찌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강력한 플라시보 오라를 자아냈다. 강한 힘에 현혹되는 이는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팔찌에 깃든 힘에 잠식된 자는 쇠질족의 우두머리였다. 팔찌는 그 자의 손을 타고 굴러 굴러 어딘가로 흘러들었다. 디아이타 구의 평화는 유지됐지만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위험을 품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다. 팔찌의 소멸을 두 눈으로 확인한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운명적으로 팔찌 운반자가 된 건에 대하여2)
   평야와 산맥과, 강물 속을 구르고 구르던 전설의 도구는 결국 주인공의 손에 닿기 마련이다. 여기 전설의 주인공 김유나가 있다. 유나의 다른 이름은 노란 수지 팔찌의 주인이다. 필테족의 초급 수련자라는 뜻이다.
   유나가 게르마늄 팔찌를 주워든 곳은 필테족의 영토 내 수련장에서였다. 그곳에선 수십의 필테족이 더욱 강한 코어를 가지기 위해 5초를 10초처럼 헤아리며 필라테스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유나는 수련장 한쪽 구석에 있었다. 유나의 스승 강달희에게 가르침을 받는 시간이었다. 강달희는 캐딜락 위에서 풀-업 동작을 펼쳐보였다. 유나의 수준에선 지나치게 난이도가 높은 동작이었으나, 강달희는 유나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알아채고 있었다. 강달희는 시범을 끝내고, 유나에게 따라 해볼 것을 권했다.
   유나는 강달희의 도움 없이 머리 위 바를 잡고, 퍼지 안으로 두발을 걸었다. 팔을 굽혀 공중에서 몸을 직선으로 만들었다. 이어서 상체를 뒤로 젖히려는데 문득 눈앞이 반짝거렸다. 유나는 동작을 거두고, 캐딜락 위에서 뛰어내렸다.
   강달희는 유나의 갑작스런 행동을 가만 지켜보았다. 수백의 제자를 상급 지도자로 만들어낸 자인만큼 인내심이 깊었다. 유나는 마루 위에서 무언가를 주워들고 있었다.
   유나가 강달희 눈앞에 내민 것은 매끈한 빛을 발하는 게르마늄 팔찌였다. 강달희는 팔찌가 자아내는 음흉함에 순식간에 기가 질렸다. 특별한 위험함이 이곳 디아이타 구에 펼쳐질 것이었다. 특급 지도자의 날카로운 감각이 그 위험을 예감했다.
   강달희는 대지도자에게 유나를 데리고 갔다.
   “네가 찾아낸 것을 꺼내보거라.”
   강달희의 말에 유나는 망설임 없이 게르마늄 팔찌를 꺼내들었다. 유나의 평온한 모습과 대조적으로 주변에 있던 지도자들이 일제히 탄식을 내뱉었다. 팔찌를 둘러싼 이들의 두 눈에 탐욕과 공포가 동시에 일렁였다. 수십 년 전, 건강 암흑기, 유사과학 같은 말이 오갔다.
   대지도자가 유나를 향해 마른 고목 같은 손을 뻗었다. 정확히는 유나의 손바닥 위 팔찌를 향한 것이었다. 그 행동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팔찌를 바라보는 대지도자의 얼굴 위로 영겁의 번뇌가 스쳐지나갔다.
   “우리 일족에게서 팔찌 운반자의 운명을 가진 자가 나타났구나.”
   “원정대를 모아라.”
   운명은 호명을 통해 강한 힘을 발한다. 대지도자의 단언으로 유나는 순식간에 팔찌 운반자의 운명을 갖게 되었다. 전설 속 주인공다운 출발이었다.

   원정대의 목적은 게르마늄 팔찌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팔찌를 파괴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맹신의 봉우리 인근, 허상의 골짜기에 빠트리는 것. 전설의 도구가 다들 그렇듯, 게르마늄 팔찌 역시 제 근원으로 돌아가야만 파괴될 수 있었다.
   원정대는 요가족의 영토에 모였다. 쇠질족의 공아라, 요가족의 이곤석, 필테족의 강달희 선생과 김유나가 일원의 전부였다. 유나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각 종족에서 대표를 선출한 것이었다. 공아라는 삼대 운동 도합 500킬로그램을 너끈히 넘기는 장사였고, 이곤석은 수면 중에도 플라잉요가를 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이였다.
   맹신의 봉우리까지 향하는 길에는 위협보단 유혹이 가득했다. 그 유혹을 견뎌낼 수 있는 철두철미한 운동인들이 여정에 필요했다.
   여정을 시작하기 전, 강달희가 유나를 따로 불러 말했다.
   “우리 뒤에 누군가 따라 붙을 거다.”
   “그럼 그자도 함께 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함께 갈 수 있는 자가 아니다. 팔찌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하는 놈이야.”
   유나는 대답하지 않고, 제 손안에 있는 팔찌만 한 번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놈과의 동행도 운명이라면 운명인 거지.”
   그렇게 유나의 운명에 살이 한 번 더 붙었다.

   전지적 사흘 시점3)
   원정대가 맹신의 봉우리까지 도착하기까지 총 세 번의 난관이 있었다. 그에 대해선 아주 간단히 서술하려고 한다. 상세히 모험담을 써내려가게 된다면 아마 이쯤에서 독서하길 멈추는 이들이 대량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절한 분량 조절 실패로 ‘다음 화에 계속……’ 따위와 같이 무책임하게 마무리 짓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본인에게 엄습한 탓도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난관은 이들을 유혹했다.
   ‘과식의 협곡’에선 정량 이상의 식사가 이들의 걸음을 더디게 했고, ‘늦잠의 늪지대’에선 쏟아지는 졸음이 몸을 무겁게 했다. 하필이면 치팅데이였던 공아라가 협곡에서 정체될 뻔했다. 497일째 플라잉 요가를 하면서 잠을 잤던 지라 알게 모르게 수면 부족 상태였던 이곤석이 늪지대에서 허우적댔다.
   마지막 난관에선 예상 밖으로 유나의 스승인 강달희가 원정대의 걸음을 붙잡았다. 그곳은 ‘명예와 인정의 숲’으로, 다음 번 ‘토삭스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 강달희의 심중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달희는 그곳에서 제 눈앞에 아른거리는 토삭스의 환영에 시달렸다.
   여전히 노란 수지 팔찌의 주인일 뿐인, 순박한 우리의 주인공, 김유나는 하급 수련자다운 초심으로 이 모든 난관에 타격을 받지 않았다. 이는 디아이타 구의 하급 수련자들만이 받을 수 있는 축복의 능력 덕분이었다.
   축복의 이름은 ‘작심삼일’이었다. 이 축복을 받은 자들은 3일 동안 외부의 어떤 유혹도 차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대다수의 구민들은 운동을 습관화하기 위해 이 축복을 받는다. 하지만 유나는 여정을 떠나기 직전에 이 축복을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난관이 삼 일 안에 이루어진 것은 참 다행이었다.
   이 모든 난관은 사실 원정대의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엄격한 디아이타 구 환경에서 벗어난 이들은 제 마음 속으로 스멀스멀 차오르는 욕망을 응시할 수 있었다. 어쩌다보니 협곡에서 식탐을, 늪지대에서 수면욕을, 숲에서 명욕을 느꼈던 것이었다. 장소들의 명칭은 이야기가 설화가 되고, 설화가 전설이 되다보니 그럴싸해진 것일 뿐이었다.

   맹신의 봉우리에 가까워지자 유나의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던 팔찌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봉우리를 떠도는 사은로의 영혼에 감응하는 것이었다. 유나는 허벅지에 강한 통증을 느끼며 팔찌를 꺼내들었다. 팔찌의 검은빛이 너무 반짝거려서 윙윙거리는 소리까지 날 것 같았다.
   “그놈이 나타나겠구나.”
   강달희가 암시했다.
   유나는 스승이 일전에 말한 존재가 곧 나타날 것임을 알아차렸다.
   사은로는 육신이 소멸하기 직전, 팔찌에 제 힘을 얼마간 봉인해두었다. 팔찌를 줍는 이가 누가 되든 팔찌에 깃든 사은로의 힘에 영향을 받았다. 더이상 운동하지 않게 되었고, 입만 산 사람이 되었다.
   오래 전, 팔찌의 영향을 받았던 이가 하나 있었다. 그 이름은 고슬이, 팔찌의 힘에 기대어 입말 다이어터로 유구히 이름을 남긴 자였다. 하지만 얼결에 물길에서 팔찌를 잃었고, 결국 팔찌를 되찾고자 영영 떠돌게 되었다고 한다.
   봉우리로 오르는 길 앞에서 유나는 원정대와 떨어졌다. 강달희와 이곤석, 공아라는 봉우리 일대에 남아 있는 사은로의 사념과 흔적들을 지워야 했다.
   “그림자에게 잡아먹히지 않게 조심해라.”
   고슬이에 대한 강달희의 비유적 경고를 끝으로, 유나는 홀로 골짜기를 향해 길을 올랐다.
   “고슬이는 내일부터 운동할 거야.”
   “고슬이는 내일부터 1일 1식이야.”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혼잣말을 무시하며 유나는 골짜기에 도착했다.
   고슬이가 더이상 그림자에 머물지 않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유나가 골짜기에 팔찌를 빠뜨리려는 순간이었다. 유나는 뒤에서 팔찌를 낚아채려는 손길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몸싸움이 이어졌다. 바위 위로 굴렀고, 몸이 많이 아팠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고슬이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팔찌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구르고, 휘청거리느라 시야가 똑바로 유지되지 않았다.
   어느새 골짜기로부터 멀찍이 떨어졌다. 유나는 저도 모르게 팔찌를 두 손으로 꽉 쥐고 가슴팍에 가져다댔다. 물줄기 흐르는 소리만 사위에 가득했다. 고슬이는 보이지 않았다.
   유나에게 내렸던 작심삼일의 축복이 옅어지고 있었다. 팔찌가 내뿜는 플라시보 오라가 유나의 마음을 느리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유나는 그저 팔찌를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유나는 허둥대며 다시 물가로 다가갔다. 골짜기를 흐르는 물은 그 속의 돌덩이들이 다 보일만큼 맑았다. 동시에 유나의 얼굴이 거울처럼 비쳤다. 자신이 짓고 있는 표정을 보고, 유나는 스승이 말한 그림자가 사실 자신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각오보단 두려움이 잔뜩 서린 얼굴이 보였다.
   유나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팔찌를 물속에 빠뜨렸다.
   바로 후회했지만, 팔찌는 이미 유나의 손을 떠난 후였다.

   이세계는 스마트 워치와 함께4)
   디아이타 구로 돌아온 원정대는 영웅 대접까지 받진 않았지만, 세 종족 연합으로부터 새로운 도구를 받았다.
   공아라는 영원한 개인용 벤치를 얻었다. 벤치는 쇠질족 모두가 가장 애용하는 도구로, 수련을 할 때마다 사용 대기 인원이 있었다. 공아라는 이제 공용 벤치를 사용하기 위해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곤석은 침묵의 폼롤러를 얻었다. 폼롤러로 스트레칭을 할 때마다 더이상 괴상한 신음을 흘리지 않을 수 있었다.
   강달희는 염원하던 토삭스의 주인이 되었다.
   유나는 새로운 대지도자가 된 강달희로부터 수련자 과정을 생략하고, 바로 지도자 과정을 밟아보지 않겠냐고 제안 받았다. 단번에 무려 다섯 단계의 과정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유나는 완곡히 거절을 표했다. 골짜기 물위로 비쳤던 자신의 표정을 잊지 못한 탓이었다. 유나는 차라리 작심삼일의 축복을 한 번 더 내려달라고 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강달희가 안타까워했다.
   강달희는 욕심이 스스로를 좀먹는 사람이었지만, 유나에게 있어서만큼은 현명한 스승이었다. 유나의 요청을 듣자마자 강달희는 유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대신 근면의 손목시계를 주마.”
   근면의 손목시계는 이웃 나라인 사과국이 친교를 위해 디아이타 구 세 우두머리에게 주었던 보물이었다. 그 손목시계의 특별함은 시간을 정확하게 가리키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시계엔 수십 년 전 사과국을 수호했던 대마법사 시리의 영혼이 빙의되어 있었다. 시리의 임무는 시계의 주인이 규칙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엄청나게 마법 같은 힘을 자아내진 않았지만, 운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유나는 시계를 감사히 받아들였다.
   우리의 주인공, 노란 수지 팔찌의 주인이자, 근면의 손목시계를 가진 자, 김유나의 건강한 삶은 그렇게 계속 되었다.

   후기
   전설의 결말이란 다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글에선 그 다양한 결말이 무엇인지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전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도 않거니와, 재미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첨언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 전설의 진정한 주인, 작가 김수한무에 대한 것이다. 김수한무의 병증 자체였던 이 전설이 시답잖은 농담으로 그치지 않도록,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덧붙여보고자 한다.
   김수한무는 결국 이름을 날렸다. 더이상 무명작가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그토록 염원하던 판타지소설 작가로서 이름을 날린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김수한무의 운동에 대한 집착은 날로 심각해졌다. 매일같이 체육관을 드나들다 못해 집 안에 작게나마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까지 꾸렸다. 지갑사정은 그의 욕망을 뒷받침해주지 못했다. 마이너 플랫폼에 판타지소설을 연재하긴 했지만 인기가 없었다.
   첫째로는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 둘째로는 운동과 글쓰기를 함께 지속하기 위해서, 김수한무는 자신의 판로를 바꿨다.
   에세이 연재 플랫폼 〈아점〉에서 건강일기를 썼다. 글 쓰려고 운동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감성 건강 에세이라는 기이한 장르의 글을 썼다.
   개성 강한 글로 얼마간 주목을 받았다. 에세이집도 한 권 냈다. 그 점에서 이름을 날린 건 사실이었다.
   에세이집은 금세 전설처럼 사라졌지만, 당시를 증명할 수 있는 인터뷰가 하나 남아 있긴 하다. 에세이집 홍보를 위해 진행된 인터넷 매체 인터뷰였는데, 판타지소설을 쓰던 무렵 김수한무의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는 점에서 처절히 실패한 인터뷰였다. 하지만 어디서도 찾지 않는 무명작가 김수한무의 작가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인터뷰이기도 했다.
   구구절절 설명을 이어가기보단, 간단한 몇 마디 문장이 당시의 김수한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 같아 인터뷰의 말미를 그대로 실어본다.

   Q. 판타지소설을 쓰던 때가 그립지 않으신가요?
   A. 조금 비참한 게 영혼에는 좋아요.5)

   그 말은 김수한무가 언젠가의 광명을 위하여 오랫동안 고르고 골랐던 말이었다.

   작가노트_강아


   10년 전쯤, 친구들과 외딴 섬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오직 뱃길로만 들어갈 수 있는 섬이었고, 커다란 부처상이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높은 산의 암벽 전면에 돋을새김돼 있는 부처상의 크기와 위용은 대단했다. 불자가 아님에도 꼭 절을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당시의 나는 방법도 잘 모르면서 두어 번 합장을 했을 거다.
   그 부처상을 떠올릴 때면 늘 한 가지 기억이 더 따라온다. 암벽의 부처상 아래엔 작은 절이 하나 있는데, 그곳은 기도값을 적어둔 표지판을 외벽에 걸어두었다.
   수능 기도 200만원…… 사업 기도 500만원…… 아주 정확하고 적나라하게 쓰인 가격표는 신성과 속세의 놀라운 융합 그 자체였다. (사실 금액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모든 종류의 기도값이 수백만원 대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불현듯 마주친 신성한 속세에 거부감이 들기보단, 짐짓 재밌어하고 말았던 것 같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끼리도 잘 어울릴 수 있다, 하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에 잠깐 빠졌을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소설을 쓰며 당시의 감각을 다시 떠올려본 것이다. 운동과 판타지…… 판타지와 운동…… 어울릴 수 있을까? 어울리게 해볼까? 장난과 진지함이 반쯤 섞인 채로, 건강 판타지 우화를 써내려가보았다. 쓰다보니 깨달은 새로운 사실은 운동과 판타지 사이엔 어느 정도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성장이라는 미명하에 두 세계의 질서는 맞닿아 있는 지점이 많았다.
   이 글의 뻔뻔함을 유지하는데 김유나님이 제보해주신 일기의 힘이 컸다. 정말이지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일기로, 특유의 분위기를 소설에도 잘 옮겨보고 싶었는데…… 이게 잘된 건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할 몫은 아닌 것 같다.



월과월과월

매주 월요일(月)에 모여,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를 넘나들며(越), 문장(문장의 최소 단위를 뜻하는 우리말 ‘월’)을 쓴다는 목표 아래 모인 창작 동인이다. 만화 시나리오 작가 강아는 좋아하는 만화와 소설 앞에선 조금 상기되는 편이다. 대학원생 박몽은 동경에 거주중이고 사주에 역마살이 있다. 단 한 해도 학교를 쉰 적 없는 학교 덕후다. 생활체육인 이문경은 책을 만들며 시와 소설을 읽고 쓴다.

2020/11/24
36호

1
웨이트 트레이닝의 대표 운동인 스쿼트, 벤치프레스, 데드리프트를 총칭하는 용어다.
2
후세 글, 밋츠바 그림,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 도영명 옮김, ㈜소미미디어, 2015.
3
싱숑, 『전지적 독자 시점』, 문피아, 2019.
4
후유하라 파토라 글, 우사츠카 에이지 그림, 『이세계는 스마트폰과 함께』, 문기업 옮김, ㈜영상출판미디어, 2016.
5
세스, 『약해지지만 않는다면 괜찮은 인생이야』, 최세희 옮김, 애니북스, 2012, 1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