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은재      20대 후반
   수현      20대 후반

   때

   12월 31일의 밤

   곳

   라이브 연주가 흐르는 서울의 어느 펍


     <우아한 유령>을 연주하는 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뒤섞여 있다.
     한 테이블에 앉은 은재와 수현은 서로 떨어진 채로 아무 말이 없다. 이 시간이 매우 불편해 보인다.
     은재가 가방에서 젤리를 꺼낸다.

   은재
드실래요?
   수현
됐어요.
   은재
(젤리를 먹으며) 혼자 있어도 괜찮은데.
   수현
저도 괜찮아요.
   은재
여기서도 잘 보이는구만, 뭘 그렇게 자세히 본다고.
   수현
보는 건 좋은데 왜 지들만 가냐고요. 아니 나는 가방 훔쳐 간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네. 우리나라 그런 거 없지 않아요?
   은재
제 말이요.

     은재와 수현, 맥주를 마시며 음악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은재는 종종 시선을 바닥으로 두고 무언가를 찾는다.

   수현
……뭐 떨어뜨리셨어요?
   은재
아니에요, 그냥.

     잠시 후 연주가 끝이 나고,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들린다.
     은재와 수현도 박수를 친다.

   수현
드디어 끝났네.
   은재
그러게요.

     은재는 허리를 세워 방금 막 라이브 연주가 진행됐던 곳을 본다. 누군가를 애타게 찾듯이. 그러더니 ‘어? 어?’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은재
야 어디가! 김소율!

     은재가 출입문 쪽으로 가더니 무언가를 확인하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온다.

   수현
뭐 해요 둘이?
   은재
담배 피워요.

     은재와 수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다.
그리고는 쾅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는다.

   수현
아주 지들만 신났지 아주.
   은재
오늘은 진짜 그럴 일 없을 거라더니. 그 말을 또 믿은 내가 바보지.
   수현
한두 번이 아닌가 봐요?
   은재
이상하죠? 왜 계속 친구 하나 싶고.
   수현
나도 그런데요, 뭐.
   은재
그쪽, 아니 수현씨도요?
   수현
내가 진짜 친구 욕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은재
어쩐지, 아까 너무 자연스럽더라.
   수현
(목소리를 바꾸며) 너까지 오면 은재씨 혼자 외롭잖아.
아니 그걸 아는 놈이 맨날 나 혼자 두고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고? 어이가 없네.
   은재
담배 피우고 들어오면 어떻게든 둘이 따로 나가려고 하겠죠?
   수현
이기적인 것들.

     수현, 자신의 옆자리에 놓여 있는 가방을 뒤지기 시작한다.

   은재
뭐 하세요?
   수현
언제까지 당하고만 살 거예요.
   은재
못 가게 하려구요?
   수현
근데 지갑이 왜 이렇게, 잠깐만.

     수현,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가 무언가를 확인하고 다시 온다.

   은재
왜요? 없어요?
   수현
갔어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네.
   은재
가방을 지키라고 해 놓고 가방을 놓고 사라졌다고요?
   수현
(한숨) 여기 가자고 했을 때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갔어야 했는데.
   은재
여기가 왜요?
   수현
유명하잖아요. 솔로로 들어와서 커플로 나가는 곳으로. 알고 온 거 아니에요?
   은재
네? 몰랐어요. 저는 다른 일 때문에 온 거라.
   수현
그렇게 싫다고, 연애 관심 없다고 말했는데.
   은재
저도 그 말 한 500번은 넘게 한 거 같은데, 오늘도 이러고 있네요. 진짜 김소율 이럴 때마다 미쳐버릴 것 같아요.
   수현
어떻게 계속 같이 다녀요?
   은재
그거 빼곤 다 괜찮아요. 저도 뭐 소율이 만날 때마다 맨날 떡볶이 먹자고 해서 미치게 하니까 쌤쌤이에요.
   수현
보살이시네요.
   은재
그러는 수현씨도 원호씨랑 계속 같이 다니잖아요.
   수현
저도 보살입니다.

     둘, 웃는다.

   은재
저희는 그럼 여기서 헤어질까요?
   수현
그래요. 일어납시다.
   은재
먼저 일어나세요. 전 여기 뭐 찾으러 온 거라 그거 찾고 가려고요.
   수현
혼자 있게요?
   은재
뭐 어때요. 이 가방은 어떻게……
   수현
그냥 버려버려요. 어차피 버리고 간 거.
   은재
나도 버리고 가야겠다. 그럼.

     수현과 은재 가볍게 인사한다.
     수현이 밖으로 나가려다 다시 돌아온다.

   수현
뭐 찾는데요?
   은재
네?
   수현
같이 찾아요.
   은재
아니에요, 괜찮은데.
   수현
어차피 지금 가 봐야 집에서 잠만 자요. 뭐 찾는다고요?
   은재
그게……, 돌멩이를 찾고 있는데요.
   수현
돌멩이요?
   은재
네. 여기에 파란빛이 나는 돌멩이가 굴러다닌대요.
   수현
돌멩이가 빛이 나요? 그것도 파란색으로?
   은재
진짜 신기하죠.
   수현
누가 그래요?
   은재
편지에서요.

     은재, 가방에서 꾸깃꾸깃한 편지를 꺼내서 수현에게 보여준다.

   은재
할머니 집 갔다가 발견한 편진데요, 여기 보세요. “돌처럼 생긴 게 푸른 빛을 내며 이리저리 굴러다니지 않겠니? 꼭 누가 마법을 건 것처럼”
   수현
대박. 찾아서 팔면 엄청 비싸게 팔리겠네요? 비쌀 거야. 빛이 나는데.
   은재
팔려고 찾는 건 아니라서.
   수현
나는 왜 한 번도 못 봤지?
   은재
저도 아직 한 번도 못 봤어요. 일부러 시간대도 바꿔가면서 왔는데.
   수현
왜 이렇게 계속 바닥을 보나 했는데, 이것 때문이었네요?
   은재
꼭 찾고 싶었거든요. ……소율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웃던데.
   수현
왜 말이 안 돼요. 나는 너무 있을 것 같은데.
   은재
그쵸!
   수현
이미 본 사람도 있다잖아요. 뭐가 말이 안 되지? 같이 찾아봐요. 재밌겠네.

     은재와 수현, 본격적으로 돌멩이를 찾기 시작한다.

   수현
돌멩이 크기가 어느 정도 돼요?
   은재
검지 손가락 두 마디 정도요.
   수현
(한 손을 펼쳐서 보여주며) 이 정도? 내 손이 너무 큰가?
   은재
(한 손을 펼쳐서 보여주며) 제 손으로는 이 정도.
   수현
(자신의 손을 은재의 손 가까이에 대보고는) 아 그렇구나. 푸른색이면 초록에 가까운 거예요? 파랑에 가까운 거예요?
   은재
그거는 안 적혀 있었어요.
   수현
그럼 내가 초록빛을 찾을게요. 은재씨가 파란빛을 찾아봐요.
   은재
좋아요!

     은재와 수현, 돌멩이를 열심히 찾아보지만 전혀 보이지 않는다.

   수현
평소에도 돌멩이 찾는 게 취미예요?
   은재
좋아해요. 특이한 모양 돌멩이 찾는 거. 학교 다닐 때 교환학생으로 영국에 간 적이 있거든요? 그때 삼촌이 한국을 잊지 말라고, 어디서 한반도 모양의 돌멩이를 찾아서 선물해줬거든요. 그때부터였나? 그리고 귀엽잖아요. 돌멩이 같지 않은데 돌멩이인 거.
   수현
뭔지 알 것 같아요. 저는 구름 보는 거 좋아하거든요. 가끔 보면 신기한 모양일 때가 있어요. 말티즈 구름 본 적 있어요?
   은재
아니요.
   수현
구름이 말티즈예요. 너무 귀여워. 잠깐만요 제가 사진이 있는데……

     수현, 일어나려다 테이블에 부딪힌다.

   은재
괜찮으세요?
   수현
괜찮아요, 괜찮아요.
   은재
엄청 세게 부딪히신 것 같은데.
   수현
(부딪힌 곳을 만지며) 혹 난 건가?
   은재
어떡해. 얼음 좀 달라고 할게요.
   수현
아닌가? 한번 만져볼래요?
   은재
……(수현의 머리를 조심스레 만진다) 괜찮은 것 같긴 한데. 혹시 모르니까 그냥 얼음 좀 받아올게요.

     은재, 카운터 쪽으로 가서 얼음을 비닐봉지에 받아온다.
     수현, 그런 은재의 모습을 빤히 쳐다본다.

   은재
비닐봉지에 넣어주셨어요.
   수현
고마워요. (얼음 봉지를 머리에 대며) 돌멩이 찾으면 뭐 할 거예요?
   은재
모르겠어요.
   수현
엄청 찾고 싶어했잖아요.
   은재
그냥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게 다예요.
   수현
시시해.
   은재
꼭 뭘 해야 되는 건 아니니까요.
   수현
그래도 보통은 SNS에 올린다거나 하지 않나? ‘세상에 이런 일이’나 ‘진품명품’ 같은 데에 제보해도 괜찮을 것 같고.
   은재
진품명품 오랜만에 듣는다.
   수현
요즘도 하더라고요. 그 정도는 나가줘야 소율씨가 믿지 않을까요?
   은재
그럴까요? 한번 나가봐?
   수현
나가 봐요. 나가 봐.

     수현, 비닐봉지를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수현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아요.
   은재
다행이다. 아까 엄청 놀랬어요. 소리가 너무 커서.
   수현
아 쪽팔려.
   은재
(테이블 위에 있는 젤리를 건네며) 드실래요?

     수현, 젤리를 하나 먹는다. 은재도 하나를 먹는다.

   수현
아까까지만 해도 진짜 최악이었었는데. 오랜만에 같이 술 마시면서 새해를 맞이해보자던 놈이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와 그리고 그 사람이랑 또 사라져.
   은재
끔찍했죠. 그래도 오늘 너무 다행이다. 재밌었어요.
   수현
저도 은재씨를 만나서 다행이에요.
   은재
얘네 다시 안 오겠죠?
   수현
작정하고 갔는데 안 오죠.

     그때, 펍 한쪽에서 TV 켜지는 소리가 들린다.

   은재
어? 벌써 카운트 다운 하나 봐요.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수현
그러게요.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지?

     TV에서 ‘10, 9, 8, 7, 6, 5, 4, 3, 2, 1’ 세는 소리가 들리고 종소리가 들린다.

   은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수현
은재씨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맥주잔을 들며) 짠 할까요?

     은재와 수현, 맥주를 마신다.

   수현
오늘 처음 만났는데, 새해를 이렇게 같이 맞이하네요.
   은재
그러게요. 김소율 덕분에 여러 경험 하네요.
   수현
돌멩이까지 찾았으면 딱인데. 아깝다.
   은재
괜찮아요, 충분해요.
   수현
혹시 괜찮으면 번호 알려 줄래요? 다음에 같이 또 돌멩이 찾으러 와요.
   은재
좋죠. 너무 좋죠.

     은재가 수현의 핸드폰에 번호를 찍는다.

   수현
저……, 은재씨.
   은재
네?

     수현, 맥주를 벌컥벌컥 마신다.

   수현
있잖아요, 은재씨. 제가 다시 태어난 것 같아요. 새해가 돼서 그런가.
   은재
……네?
   수현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연애에 별 관심이 없거든요, 아니 없었거든요. 그런데 은재씨랑 있으면서 뭐랄까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아요. 그동안 연애에 관심이 없었던 게 은재씨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였나 싶기도 하고.
   은재
아……, 어……
   수현
당황하셨죠. 저도 이 상황이 너무 당황스러워요. 처음에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닐 거야, 아니겠지. 근데 그게 아닌 게 아닌 것 같아요. 차분히 생각해 보니까 저 은재씨 좋아하는 것 같아요. 맞아요, 확실해요.
   은재
……언제부터요? 어떻게 알았어요?
   수현
돌멩이 찾을 때부터……? 아냐 아냐 그전에도 신경이 좀 쓰이긴 했었는데. 아무튼. 근데 아까 은재씨가 제 머리 만질 때 엄청 떨리더라고요. 죽는지 알았어요.
   은재
저도 그때 떨렸어요.
   수현
은재씨도요? 와, 정말. 와. (말을 잇지 못하고 맥주를 마시는데 맥주가 별로 없다) 없, 없네.
   은재
그런데요, 수현씨.
   수현
네.
   은재
그건……, 흔들다리 효과잖아요.
   수현
네? (웃는다)
   은재
왜 웃어요?
   수현
아니 그걸 흔들다리 효과라고 말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떨린 거지 그냥.
   은재
저는 그래요.
   수현
……은재씨 혹시, 연애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은재
그렇긴 한데, 왜요?
   수현
그럼 그럴 수 있어요. 헷갈릴 수 있어요.
   은재
제가요? 제가 아니라 수현씨가 헷갈리시는 것 같은데.
   수현
아니에요. 지금 은재씨 혼란스러운 거예요.
   은재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수현
연애 한 번도 안 해봤다면서요. 생전 처음 겪는 감정이라, 본인도 모르게 그 감정을 부정하고 있는 거예요. 새 신발 사서 신었을 때, 익숙하지 않아서 불편하잖아요? 그거랑 같은 거예요.
   은재
그런 거라구요?
   수현
네. 계속 신다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은재
근데 만약 아니면요?
   수현
네?
   은재
덜컥 신었는데, 시간이 흘러도 흘러도 익숙해지지 않을 수 있잖아요.
   수현
아니 그러면 평생 헌 신발만 신을 거예요?
   은재
세상 모든 신발을 다 신어볼 필요는 없잖아요. 그걸 떠나서 저는 이게 새 신발인지도 모르겠어요. 진짜, 진짜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수현
혹시 제가 별로이신 거면 그냥 별로라고 말씀하셔도 괜찮아요. 이게 더 비참해요.
   은재
별로이지 않아요. 수현씨 좋은 사람이고 더 알고 싶어요.
   수현
그런데 뭐가 문제예요.
   은재
다른 의미로 좋은 거예요.
   수현
좋으면 그냥 좋은 거지 다른 의미로 좋은 건 뭐예요? 아까는 떨렸으면서 또 떨린 게 아니라 그러고. 근데 또 내가 별로는 아니고. 은재씨 너무 어렵네요.
…혹시 두려워서 이러는 거예요? 나중에 버림받을까 봐? 예전에 무슨 일 있었어요?
   은재
예전에?
   수현
과거의 상처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걸 수도 있어요.
   은재
진짜, 그런 거라구요?
   수현
왜 소율씨가 은재씨를 계속 데리고 돌아다녔는지 알겠네요.
   은재
무슨 의미예요?
   수현
친구로서 얼마나 걱정되고 답답했겠어요. 자꾸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은재
속이는 게 아니에요. 수현씨도 연애에 관심이 없다고 했었잖아요.
   수현
나랑 은재씨는 다르죠. 나는 연애 경험이 있지만 은재씨는 아니잖아요. 해본 적도 없는데 자기 마음을 어떻게 알아요.
   은재
그럼 파란 돌멩이를 본 적도 없으면서 왜 존재한다고 믿었어요?
   수현
본 사람이 있다면서요.
   은재
나는요? 수현씨 눈앞에 있는데 왜 믿지를 않아요?
   수현
……사실 파란 돌멩인가 초록 돌멩인가 그거 믿은 적 없어요. 가까워지려고 믿는 척했을 뿐이에요. 돌멩이가 어떻게 빛을 냅니까? 어떻게 돌아다녀요?
   은재
……
   수현
먼저 일어나볼게요.

     수현, 외투와 가방을 챙기고 밖으로 나가려다 멈춰 선다.

   수현
걱정이 돼서 하는 말인데요, 본인의 우물 속에서 이제 그만 나오세요. 더 넓은 세계가 있어요.

     수현, 밖으로 나간다.
     은재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편지를 집는다.
     천천히 편지를 보다가, 그 편지를 꾸겨버린다. 꾸겨진 편지를 한참 바라보다 다시 펼쳐 본다. 그리고 다시 편지를 꾸기고 또 펼치기를 반복한다.

     사이.

     은재가 일어나며 편지를 찢으려고 하는데,
     또르르―. 어디에선가 무언가가 굴러오는 소리가 들린다.
     은재가 바닥을 살핀다. 파란빛을 내는 돌멩이가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다.
     은재, 돌멩이를 주워 손 위에 올려본다.

   은재
진짜였어. 진짜로 있었어.


     막.




구하나

사소한 게 좋다. 별거 아닌 걸로 치열하게 싸우는 게 좋다. 그게 인생이니까. 나는 마음이 문드러질 정도로 절절한데 당신에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것. 그런 이야기를 쓴다.

2020/11/24
3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