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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12월 P의 예언-이미지 첫번째.

   P의 화면은 한동안 일그러진 무늬들로 가득했다. 예언의 이미지는 왜곡된 픽셀로, 조각난 데이터로, 번지고 흐트러진 형상들로 번득이다가 마침내는 백지로 백지마냥 흐릿해졌다.
   노란 트럭은 문을 뚫고 벽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무너진 벽 속의 관으로부터 터져 나온 물이 지하까지 쏟아졌다. 물은 P의 신전, 또한 오래도록 쌓인 예언을 집어삼켰다. 사민은 부서진 벽과 물에 잠긴 바닥을 밤새 지켜보았다. 견딜 수 없을 만큼 몸이 차가워진 뒤에야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는 빈집으로 돌아갔다.
   쌍둥이들이 다시금 그를 찾아왔을 때, 사민은 거실 정중앙의 소파에서 누워 있었다. 팔과 다리가 한 덩어리가 된 듯 꿈틀거렸다. 집은 그들 셋이 살았을 때와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 시간이 응고된 듯 차가운 빛이 벽과 바닥을 흘렀다.
   사민은 어떤 말에도 답하지 않았다. 일과 란은 개의치 않고 말을 걸었다. 처음 사민의 거짓말이 얼마나 가당찮았는지, 그러나 동시에 그가 어찌나 자신들에게 친절했는지. 실상 그것은 그들이 육지에 다다르고 처음으로 겪은 친절이었다고. 그때는 당신이 하나의 문이자 통로로도 보였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오늘 그들은 사민이 문도 무엇도 아님을 알고 있다. 사민은 나무나 쇠 대신 살과 피로 만들어져 있으며, 물렁거리고 불안정하다.
   쌍둥이는 사민을 업다시피 일으켜 세우고, 밖으로 나갔다. 텅 빈 신도시의 공원에는 큼지막한 옥색 호수가 있었다. 그들은 벤치에 앉아 출렁이는 물결을 보았다. 그것은 어디로도 흐르지 않았다. 그곳에서 사민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나한테 계속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어.
   그의 이야기는 군데군데 끊긴 채 이어졌다. 사민은 쌍둥이가 작살 섬을 떠난 뒤로 P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 말했다. 예언은 불투명해지고, 매달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사민에게로 왔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것이 구조 신호였다. P는 지난 몇 달 내내 그의 적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던 것이다.
   ―어쩌면 P는 계속 너희에 대해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이십 년 내내. 어떻게든 너희가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예언을 한 걸지도 몰라.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꼭 사람처럼 말이야.
   사민은 웃었다. 기침 같은 웃음이었다. 쌍둥이가 양쪽에서 그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팔에 기대어 걸어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서 빼앗은 것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2020년 12월 P의 예언-이미지 두번째.

   사람들은 얼마간 떠들썩했다. 평생을 예언이 있는 세계에서만 살아온 이들에게 어떤 미래도 예견되지 않는 나날이란 한없이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아무런 지표도 없는 세상이라니. 사람들은 견디기가 어려워서 길거리에 멈춘 채 엉엉 울었다.
   진우는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진우의 사람들과 함께. 그들은 고층 건물의 꼭대기에 모여 앉아 데이터를 긁어모았다. 그들이 세울 신전은 더 직접적인 것이었다. 기존의 예언, P가 뭉뚱그리던 흐릿한 이미지보다 훨씬 정밀하고 정확한 것. 사람들이 보다 단단히 매달릴 수 있는 것으로.
   그는 재기에 실패했다. 진우와 그의 사람들이 첫 예언을 내보냈을 때, 사람들은 비아냥거림과 조소로 반응했다. 그들이 내세우는 예언의 언어는 기사의 문장처럼 너무나 선명하다. 너무나 직접적이기에 오히려 이해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예언이라기보다 차라리 선동처럼 보인다, 라고.
   그들은 꼭대기 층의 임대를 뺐다. 사업을 취소한 건 아니었다. 형태의 문제일 뿐이지, 사람들은 언제나 예언을 원한다. 정확히 말하면 미래가 있다는 약속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고 나면 언젠가는 또다시 P를 얻게 될 것이라고, 진우는 확신에 찬 어투로 이야기했다.
   그가 쌍둥이들의 신분을 만들어준 건 성탄절 무렵이었다. 그들은 합법적인 존재가 되었다. 본인들이 그 사실을 아는지는 몰랐다. 쌍둥이들은 그날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사민과 함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진우는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신고를 받고 한강변의 무너진 건물을 발견한 날, 그는 물에 잠긴 폐허 위에서 둥둥 떠다니는 몇 대의 부품을 보았다. 액정이며 전선이며 널브러져서 고물이라 할만치 초라해 보였다.
   어쩌면 그들은 영영 자신이 쫓기는 존재라 생각하며 숨어 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더이상 그의 소관은 아니다. 그들이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진우는 자신의 일에, 다시금 신전을 쌓아 미래를 담보하는 일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예언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P가 사라진 이후, 새로운 신전이 들어서기 전까지, 한동안 아무런 약속도 지표도 없는 세계가 들이닥쳤다. 그것은 혼란스럽고 복작거리는 세상이었다. 울던 사람들은 이제 두려움과 약간의 기대에 잠긴 채 일몰과 일출을 바라보았다.

2020년 12월 P의 예언-이미지 세번째.


   사민은 쌍둥이에게 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늙은 이야기였다. 남신 하나가 여신 하나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여신은 아이를 가지지만, 남신은 별다른 약속도 없이 떠나버렸다. 전부터 그들의 사랑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신들이 화풀이를 시작했고, 여신은 그들의 분노를 피하여 도망쳤다. 그는 뿌리 없는 섬에 다다라 쌍둥이를 낳았다. 복수자 역할을 맡은 거대한 뱀이 그를 쫓았으나, 묶이지 않은 섬까지는 찾아내지 못했다.
   여신의 쌍둥이는 금세 자랐다. 육지에 찾아온 이들은 그들의 어머니를 괴롭힌 거대한 왕뱀의 목을 자른다. 왕뱀은 죽기 전 자신의 예언 능력을 쌍둥이에게 넘겨주었다. 앞날을 내다보낼 수 있게 된 쌍둥이들은 각자 태양과 달을 맡게 되었다.
   일과 란은 이 이야기를 사민이 건네준 책에서 읽었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은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과거 또는 미래에도, 그들과 비슷한 삶을 받은 이들이 있을 것이다. 벌어진 일들은 입에서 입을 오가며 살아남다가, 마침내는 누군가의 삶을 예지하듯이 번쩍거리는 이야기로 남는다.
   사민은 그들에게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앞으로. 그 말은 낯설게 느껴졌으므로, 일과 란은 어깨를 으쓱였다.
   기록을 먼저 남기자고 제안한 쪽은 일이었다. 란은 얼마 안 되어 기록하는 행위가 새로운 예언을 만드는 일과 다름없음을 느꼈다. 어떤 예언은 그대로 기억이 되고, 누군가의 기억은 한참이 지난 후 다시금 예언이자 대화로서 돌아온다. P의 모든 이미지들이 과거의 케케묵은 사진들로 이루어진 이유를 그들은 그제야 조금쯤 이해했다.
   앞, 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모호했으므로, 그들은 우선 뒤쪽에 남기고 온 일들을 적어두기로 마음먹었다. 섬에서 떠난 밤으로부터, P의 신전에 들어선 낮까지. 그들은 여러 문장을 적었다. 문장만으로 되새기기 어려울 때에는 P가 예언에 쓴 사진 몇 장을 빌려왔다. 한데 모인 예언들은 마치 쌍둥이의 연대기처럼 보였다. 작살 섬과 어머니로부터 올림포스 호텔과 노인들, 대기실을 거쳐서 진우와 사민의 잇따른 방문까지 P가 매달 보내온 예언의 낱장들마다 그들이 지나간 시간이 자욱하게 떠올랐다.
   일과 란이 적은 기나긴 기록 속에서, 그들이 직접 드러난 사진은 한 장뿐이다. 작살 섬에서 남긴 단 하나의 기록이기도 하다. 사진 속의 이들은 아직 어리고, 어색함과 쑥스러움이 가득한 얼굴로 활짝 웃고 있다. 서로가 서로의 앞날이나 과거인 듯 꼭 닮은 얼굴로.
   ―이제 우리 정말로 뭐할까?
   사진을 들여다보던 두 사람 중 하나가 물었다. 남은 하나가 구별하기 어려운 두 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우리는 중얼거렸다. 우리가 앞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앞이 우리에게 찾아오니까.


   2 


이 예언은 실제로 태어나지 않았다. 다만 꿈이나 물속에서 본 잔상처럼 일과 란, 그리고 사민과 진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작업 노트


※스튜디오 풀옵션의 AI는 작년 12월, 구글의 뉴스 데이터를 모조리 빨아들인 뒤 재조립했다. 위의 세 가지 문장은 AI가 수집한 데이터를 완전히 다른 배열들로 새롭게 추출한 것이다. 이는 스튜디오 풀옵션이 본 프로젝트를 제작하는 첫번째와 두번째 단계에 해당한다.(〈P!ng〉의 프롤로그에서 나타나는 첫번째 단계 참고. 바로가기) 우리는 위 문장들을 구글에 던져 건져낸 이미지들을 P의 예언 삼아 7화를 제작하였다. 여기까지, 풀옵션의 AI와 P를 통해 두 세계는 미미하게 연결되어 왔다.




스튜디오 풀옵션

텍스트와 이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번역합니다. 가능한 멀리까지 공놀이를 지속하며 오해를 확장하고자 합니다. 글 쓰는 함윤이와 디자인 하는 김형도가 함께 만들었습니다.

2021/01/26
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