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오늘
1화 서로가 서로의 주석이 되기 위하여
#1 영화 속 쉽게 희미해진 존재들을 찾아서
‘뜻-밖의 오늘’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안경’의 세 사람은 영화를 다시 읽고 서사를 바꿔 쓰며, 영화 서사의 경계 밖에 밀려나 있는 존재를 상상해본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뜻에서 벗어나 가장자리에 웅크린 존재들, 이제껏 잘못 이름 불린 존재들, 쉽게 희미해지는 존재들. 혹은 아예 재현조차 되지 않았던 존재들은 어디에 있을까?
영화의 스토리를 전개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그 자체로 오롯이 빛나고 있는 존재를 보고 듣기 위해 영화의 스틸 사진을 찬찬히 살펴본다. 스틸 사진에는 영화의 정해진 줄거리와 연출을 잠시간 중지시키고 관객이 쉬이 흘려보낸 이들을 ‘다시 읽을 수 있는’ 틈이 있다고 믿으며. 경계 밖의 세계를 발견하는 여정은 ‘뜻 밖’의 존재들을 길어올려 당혹스럽지만 알록달록한 면면을 마주하는 과정일 테다. 안경의 첫번째 여정은 영화 〈괴물〉(2006)의 엔딩 크레딧에서부터 시작한다. 천만 영화에서 우리가 놓쳤던 주변부 인물을 발견하고 상상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 영화를 되짚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2 발동동 아줌마
희원 : 재밌는 걸 발견했어요. 영화 〈괴물〉에서 ‘발동동 아줌마’가 누구인지 아시나요?
보름, 지율 : 발동동?
희원 : 최근에 〈괴물〉을 다시 보다가 엔딩 크레딧에서 ‘발동동 아줌마’를 발견했어요. 그러곤 잠시 생각했죠. ‘어라, 영화에 이런 사람이 있었던가?’
〈괴물〉(2006) 엔딩 크레딧 사진
보름 : 수많은 사람 중에 하필 ‘발동동 아줌마’가 눈에 띈 이유가 있나요?
희원 : 일단 그 표현이 조금 웃긴다고 생각했어요. 재밌지 않나요? 생각해봐요. 갑자기 어느 날 괴물이 한강에 나타나서 수천 명의 사람을 공격하고 그 일대를 풍비박산 내는데, 그런 날벼락 같은 상황에서 발을 동동거리지 않을 사람이 있었을까요?
지율 : 그러게요. 생각해보니 그런 상황에서 침착한 사람이 더 이상한 거 같아요. 아, 그 헤드폰을 끼고 있어 아무 상황도 모른 채 비교적 평화롭게 괴물한테 끌려간 여자가 나온 장면이 엄청 유명했던 게 기억나요.
보름 : 저도 기억해요. 영화 트레일러에도 나왔던 거 같고 엄청나게 이슈 되기도 했었죠. 그에 반해 ‘발동동 아줌마’라니. 누구일지, 어떤 역할이었을지 상상도 안 돼요.
희원 : 아마 도망가는 사람 중에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고 혹은 발견하지 못하고 흘려보냈을 가능성이 높아요. 왜냐면 영화의 서사 경계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머무르는 존재들이고 그래서 관객들의 기억에서 쉽게 희미해지니까요.
지율 : 맞아요. 엔딩 크레딧을 영화에서 좀처럼 그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은, 그러니깐 시각적으로 사각지대 혹은 심연에 있는 존재들이 드러나는 공간이라고 생각해보는 거예요. 그건 어쩌면 대사가 몇 줄밖에 없는 단역이든가, 주인공들의 서사를 위해 도구적으로 사용되는 풍경 같은 인물들일 수도 있겠죠. 아니면 영화를 만드는 데 함께한 모든 협력자가 포함되어 있을 거예요.
보름 : 오! 재밌는 생각 같아요. 그럼 우리가 한번 영화 속에서 직접 찾아볼까요? 사람들의 도망가는 모습만 보고 ‘발동동 아줌마’가 누구인지 추측해보는 거예요.
희원 : 사람들이 다 도망만 가지 발을 동동거리는 인물은 없는 거 같아요.
지율 : 헉, 나 찾은 거 같아요. 저 파란색 후드 집업 입고 있는 여자, 사람들 무리 앞에서 엄청 발을 동동거리는데요?
희원 : 우와, 진짜예요. 다시 앞부분부터 봐봐요. 15분 2초 정도, 처음 등장할 때부터. 맞는 거 같아요.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가지 못하고 튕겨 나와서 한가운데서 빙글빙글 돌면서 누군가를 찾고 있는 거 같아요!
화면 원경에 괴물이 들어간 컨테이너 박스가 있다. 컨테이너 박스가 위아래로 흔들리면서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 괴물의 울음소리가 들린다.1 화면 근경에 컨테이너 박스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있다. 열네 명이나 되지만, 다들 상황을 구경하거나 지켜볼 뿐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2 컨테이너 박스와 사람들 무리의 중간에서 빛바랜 파란색 후드 집업3을 입은 단발머리의 여자가 혼란스러움에 두리번거리며 한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 ‘발동동 아줌마’는 “영호야”를 외치면서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듯하다.4 주인공 박강두를 붙잡고 “우리 남편은 어디 간 거야” 하는 울음 섞인 말을 터뜨리기도 한다.5
보름 : 저 이 영화 굉장히 많이 본 걸로 기억하는데 ‘발동동 아줌마’가 누구인지, 그리고 사람을 찾고 있는지는 처음 알았어요.
희원 : 너무 급속도로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니깐 지금처럼 하나하나 주의 깊게 짚지 않으면 놓쳤을 가능성이 크죠.
보름 : 어, 근데 저 사람 라미란 배우 아니에요? 앞으로 조금만 돌려볼게요.
지율 : 와…… 라미란 맞네. 아니 근데 아까 크레딧에서 못 봤는데? 다시 한번 봐봐요.
〈괴물〉(2006) 엔딩 크레딧 사진
1 모처럼의 여유였다. 그런 것을 보기 전까지는. 그런 것. 미끈미끈하고 커다란 도룡뇽 같은 것. 괴물이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는 것. 이것은 명백한 현실이다. 아이와 남편을 눈앞에서 놓치고 주위의 모든 사람이 다치거나 도망치는데 이것이 꿈일 리가. 꿈이라면 영호는 지금쯤 수업을 들으며 나른함을 이기지 못한 채 잠들어 있겠지. 그애는 자기 아빠를 빼닮아 피하고 싶은 일 앞에선 늘 잠을 택했다. 매일을 치열하게 버텨본 적 없어 가능한 천진한 버릇. 네 아침밥을 차리고 아침밥을 치우고, 저녁밥을 차리기 전후로 이어지는 노동의 시간 속에서 나는 언제든 잘 수 있는 네 버릇이 가장 절실했다. 네 천진함이 원망스럽기도 또 사랑스럽기도 했다. 나의 이름을 지우고 얻은 내 아이. 너는 지금 괴물이 날뛰는 컨테이너에 갇혀 있다. 영호야 졸음이 밀려오지 않니. 깊은 잠에 들어라. 저녁을 차리면 깨우러 갈게.
2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라면. 지금 내 아이가 저 괴물과 함께 컨테이너 박스 안에 있다면. 요동치기 시작한다. 지금의 요동침은 괴물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것과는 다르다. 이 쿵쾅거림에는 절망이 섞여 있다. 영호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현실이 나를 한순간 집어삼킨다. 우리 영호를 도와달라고, 주변을 서둘러 둘러보지만 먼발치 떨어져 공포와 동정의 시선을 던지는 사람들을 마주할 뿐이다. 이 무기력하고 냉담한 응시, 너무나도 익숙하다. 사십삼 년의 삶에서 세상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바로 이 ‘안타까움’이었다. 근데 지금 이 시선이 우리 영호에게로 향해 있다. 어쩌면 영호에게 향한 안타까운 시선이란 것은 없을 수도. 그저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마음만이 이곳에 있을 수도.
3 혼란과 답답함. 미뤄둔 숙제를 쌓아두고 또 잠들어버린 영호를 향해 못된 말을 쏟아낸 적이 있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빨래 건조대에 탁탁 털어 널며 홧김에 했던 말. ‘내 팔자가 사납다. 팔자가 사나워. 뭐가 좋다고 너를 낳아서.’ 그 말을 들었을까. 그 순간 잠결에 한 도리질이 너를 놓치지 말란 의미였을까.
4 “어떡해, 어떡해, 저 안에 우리 애가 있어요”라는 말이 내 입에서 떨어져나온 순간, 절망의 먹구름은 어느새 확신에 찬 빗줄기를 퍼붓기 시작했다.
5 남편과 아이를 두고 처음으로 외출한 어제저녁을 떠올리니 지금 이 상황은 내가 만든 것 같기도 하다. 나는 그저 하루, 또 하루만을 자유롭고 싶었을 뿐인데, 남편을 재촉하여 휴가를 쓰게 한 건 나인데. 그 오래된 소원이 하필이면 이제야 이루어져서. 모두 놓치고 나 하나만 남아서.
#3 서로가 서로의 주석이 되기 위하여
다시 ‘발동동 아줌마’를 찾는 대화로 돌아가보자. 어쩌면 무심히 지나갔을 수도 있는, 문장 끝에 꼬리처럼 달린 표식을 따라가보자. 그곳에서는 이름 없는 인물의 ‘뜻밖’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석은 사전적으로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쉽게 풀이하는 것을 의미하거나, 본문에 쓰인 문장의 출처를 표기하고 내용의 흐름에 비껴 있는 말을 보탤 때 사용된다. 주석은 바깥으로 떠밀려온 찌꺼기, 지하로 내려앉은 침전물, 쓰였으나 읽히지 않은 글과 말해졌으나 들리지 않은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존재를 입증하는 말이자 설명하는 말, 추상적인 이름에 구체성을 부여하는 말이다. 안경은 희미한 존재의 선명한 주석이 되기로 한다.
‘뜻 밖’의 존재와 ‘뜻밖’의 이야기는 본문과 주석이라는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선’ 하나에 의해 절대 마주칠 수 없는 평행세계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문과 주석의 교차 읽기를 통해 두 세계가 서로 침범하고 얽힐 수 있지 않을까? 본문 속 단일한 중심 서사가 해체되는 자리, 그곳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와 포개어지고, 서로의 시간대가 겹치며 어우러지는 오늘을 꿈꾼다. 이 풍경은 안경이 땅 밑에 심어둔 씨앗들이 스스로 싹을 틔운 ‘오늘’이다.
#4 섬 아닌 군도, 별 아닌 별자리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서, 긴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명의 ‘발동동 아줌마’가 되기도 흥행을 보장하는 잘 알려진 배우가 되기도 한다. 경계의 안에 있기도, 때로는 밖으로 밀려나기도 하는 안팎의 우리. 경계는 단단한 벽돌로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해안에 끝없이 밀려들어오는 파도처럼 유동적인 것, 파편적인 것, 분열하는 것.
안경은 사회 속에서 혐오와 차별을 각자의 방식으로 겪고 있는 이들과 함께 ‘우리’의 외연을 확장해보고자 한다. 안경의 시선은 앞으로 똑바로 전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래로 걸어 내려가는 것, 그리고 옆으로 넓어지기 위한 것이다. 안경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땅 밑, 지하 공간에서 ‘뜻-밖의 오늘’을 읽는 사람들이 잠시나마 고개를 들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시선을 교환하는 순간을 기대한다. 느슨하게 묶인 순간의 우리를 목격하게 된 고독한 섬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위로와 용기가 되어 섬이 아닌 군도를, 별이 아닌 별자리를 이루기를 바라며.
안경
보름, 지율, 희원은 줄곧 안경을 썼던 고도근시자들로, 비슷한 시기에 시력 교정술을 통해 한 꺼풀의 베일을 벗겨냈다. 세 사람은 선명해진 세계에서 여전히 희미한 존재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인스타그램 : @wescatterseed
2022/06/28
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