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기획의 말
   ‘뜻-밖의 오늘’ 네번째 씨앗은 영화 〈안경〉(감독 오기가미 나오코, 2007)의 요론 섬을 배경으로, 새로운 인물들 ‘우인’ ‘재경’ ‘의선’을 만나봅니다. 영화 속 인물들과 닮은 듯 다른 마음을 지닌 세 사람이 각각 지향하는 공동체와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이들의 저녁에 함께 머무르기로 합니다.

_안경 김지율



   닮고 다른 마음들

   중요한 건, 조급해하지 않는 것.

   우인은 큰일을 앞두고 되새길 법한 다짐을 떠올리며 아침부터 불려놓은 팥의 상태를 살폈다. 동글동글하고 검붉은 색의 팥은 아직 단단했다. 이제 이것을 끓이고 또 끓여 뭉근하게 풀어내면 재경이 도착할 터였다. 서울에서 밀양까지 두 시간 사십 분. 재경을 마중 나가기 전까지 팥을 삶을 시간은 충분했다. 요리에 서툰 우인이 느닷없이 팥죽에 꽂힌 건 커다란 도시에서 홀로 앓았을 재경의 밤들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많은 음식 중 하필 팥죽이었던 이유는 며칠 전 재경과의 통화 중 식탁에 놓인 팥을 발견했기 때문이고…… 늘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우인은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결정이든 아주 사소한 것이 이유가 되는 사람, 그래서 흐르는 대로 대책 없이 사는 듯 보이기도 하는 사람. 길거리 개들을 챙기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도, 그 개들이 눈에 밟혀 대학 진학이 아닌 집 근처 약국 일을 선택한 것도 무심해 보이지만 확고한 결정이었다.1 그 결정들에 재경이 탐탁지 않아 하자 우인의 고모이자 룸메이트인 의선은 짧은 말을 덧붙일 뿐이었다. “쟤가 항상 말한 게 있잖아. 중요한 건 조급해하지 않는 거라고.”

   팥죽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불린 팥을 물과 함께 한 시간 정도 푹 끓인 후 팥을 으깨고 다시 되직하게 삶아주면 끝이다. 냄비를 휘휘 저으며 우인은 괜히 들뜨기 시작했는데, 몇 해 전 재경이 개강을 앞둔 봄에 다녀온 일본의 작은 섬 요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요론 섬은 두 사람이 일 년간 장거리 연애를 하며 애탔던 마음을 달래고 내내 붙어 있기 위해 찾았던 섬으로, 십여 년 전 그곳을 다녀온 의선의 한마디─여자 둘이 할일이라곤 팥빙수 먹는 것밖에 없었어.─에 결정된 장소였다. 당시 의선은 아무것도 없는 그 섬에 가겠다는 두 사람이 의아했으나 그저 느긋하게 쉬기 좋다는 인사로 둘을 배웅했다.2 그리고 정말로, 우인과 재경은 숙소에서 오 분 남짓 떨어진 해변의 간이 가게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빙수를 먹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얇게 갈린 얼음과 팥을 한 입 먹으면 꼭 반짝이는 파도를 삼키는 것 같았던, 그 감각 외에는 오로지 서로에게만 집중했던 섬에서의 나날들.3

팥이 끓고 있는 냄비를 젓고 있는 손. (출처: 〈안경〉 75분 40초 장면 스틸 사진)

   냄비에서 피어오르는 팥의 달큰한 향은 우인에게 하염없이 나른했던 여행을 상기시켰다. 끓는 냄비를 가만히 바라보던 우인은 자신이 빙수를 내어주던 요론의 할머니와 꽤 닮은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 물을 가지러 주방을 갔을 때 마주쳤던 할머니의 모습. 팥을 끓이던 할머니는 우인을 발견하고 이리 오라며 손짓했었다. 그러고선 휴대폰을 열고 번역기를 켠 다음 나직하게 말했다. “다이세츠나노와 아세라나이코도.” 우인은 고작 팥을 삶으며 조급해하지 않기로 되뇌는 모습이 아주 흔하게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인 까닭에 진정성 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곧 그 말은 입버릇이 되었다.4 그토록 간편한 말을 붙잡고 있으면 어떤 상황이든 아직은 괜찮다고 느껴졌고, 어떤 결정이든 이유를 덧붙이지 않아도 그럴듯해졌기 때문이다.

   “의선 씨, 오 분 뒤에 여기 불 좀 꺼줄 수 있어요? 이따 같이 먹자. 나 다녀올게!”
   우인은 예상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요론이 떠오르자 마침 팥도 있겠다, 재경을 위해 빙수를 해줄 생각이었다. 집 앞 식료품점에서 얼음과 연유도 샀으니 준비는 완료. 우인은 시큰한 바람을 가르며 밀양역에 도착했다. 저기 재경이 온다. 먼저 두 손을 흔들고, 종종걸음으로 서로를 향해, 가볍게 포옹, 등을 쓰다듬고. 왔어? 왔지! 배는? 괜찮아. 얼른 들어가자. 팔짱을 끼고 돌아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다정하게 보였다.

   쿰쿰한 냄새가 얕게 깔린 복도를 지나쳐 도착한 문 앞에서 우인과 재경은 들어가지 않고 멈췄다. 의선 앞에서 보이기 민망한 애정을 나눌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찬바람이 두 사람의 긴 머리칼을 엉키게 만들고, 머리칼을 가림막 삼은 둘은 코를 맞대면서 두꺼운 외투 안으로 몸을 겹쳤다. 얼음이 녹거나 말거나 상관없다. 녹은 얼음이 검은 봉지를 타고 뚝뚝 흐를 때까지. 날씨 탓인지 사람 탓인지 두 볼이 상기될 때까지. 우인은 늘 되새기던 말과 달리 서둘렀고 조급해했다. 재경은 그 모습이 꽤 마음에 든 것 같다. “그러니까 같이 살자니까.”5 재경이 말했다. 우인이 서울에 산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살을 에는 시선과 막막함을 통과해서 도착할 두 사람의 방이 생기는 거다. 문턱 너머 저편 두 사람이 살게 될 그곳에선 우물쭈물하는 시간은 필요 없이 서로에게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재경은 그런 생각을 담은 눈으로 우인을 바라봤다. 말을 덧댈 수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우인이 추울까봐 괜히 걱정되는 마음이 앞섰다.

   들어가자고 말하며 재경의 두 손이 우인의 어깨와 팔꿈치 사이를 쓸어내리고 올리던 와중에, 안쪽에서 문이 열리고 나갈 채비를 한 의선이 보였다. 의선은 무언가 들키기라도 한 듯 무안한 우인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했다.
   “경이씨 왔어? 안 들어오고 뭐해. 물엿 좀 사올 테니 얼른 들어가서 마저 해. 춥네.”
   그러자 재경은 의선에게 두 팔을 벌리고 다가가며 말했다 “고모! 잘 지냈어? 나 보고 싶었지?”
   엉거주춤하게 재경에 안긴 자세의 의선에게 우인이 물었다. “웬 물엿이야? 안에 있을 텐데.”
   의선의 두 눈에 우인을 향한 약간의 황당함이 담겼다.
   “그건 다 썼어. 너 처음 불린 팥물 그대로 끓였지? 들어가서 맛 한번 봐봐. 먹을 수나 있겠어?”
   “진짜? 그래도 일단 들어와. 할 말이 있어.”
   “이따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얼른 다녀와요. 기다릴게요.” 말하며 재경이 먼저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고 우인이 뒤따랐다.

   팥죽에선 떫고 아린 맛이 났다. 둘은 식탁에 앉아 의선을 기다렸다.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볼을 찌르거나 웃음기를 머금고 서로의 눈을 쳐다보면서,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속삭이는 목소리로 “보고싶었어.” 귓속말하고, 두 발을 까딱까딱하며 괜히 다리를 스치면서. 조금 지나 의선이 들어오자 세 사람은 냄비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물엿을 서너 바퀴 두르는 일이 뭐라고 셋이나 달라붙었다. 그리곤 팥죽이 졸여지길 기다리기 위해 셋은 쪼르르 식탁에 가 앉았고, 귀 기울여 듣지 않고 흘려보내도 괜찮을 느슨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졸다가 깨어나도 비슷하게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지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대체 요리를 어떻게 한 거야? 진짜 어이없어서 귀여울 정도야. 너 맛있는 거 해주려 했지. 아침부터 바빴어. 엄청 속상하네. 의선 씨도 미안해. 다음에 다시 해줄게요. 말도 마. 너 요리에는 소질 없어. 재경 씨 오는 데는 별일 없었어? 서울은 눈 왔다던데. 맞아요, 눈 엄청 왔어. 밀양은 춥긴 진짜 추운데 눈은 아직이네요. 추운데 밥 먹고 팥빙수 먹으면 좀 그런가? 웬 빙수야? 그냥, 아까 팥 삶다가 요론 생각도 나서 연유랑 얼음 사왔어. 팥죽 먹고 팥빙수라니. 팥빙수도 아린 거 아냐? 연유 왕창 넣어야겠어. 아, 나 빵도 사왔어. 이번엔 키쉬. 키슈? 서울 빵 둘만 먹지 말고 내 것도 남겨둬. 같이 먹으면 되죠. 난 빙수만 먹고 산책 좀 하려고. 셋이 가요, 고모! 에이, 됐어. 이런 날에 산책을 가? 이 날씨에 빙수나 산책이나 비슷하지 뭐. 난 팥빙수 좋아. 꼭 겨울 공기 삼키는 것 같겠네. 얼음은 어떻게 부수지? 믹서에 돌리면 돼. 믹서 고장 안 날까요? 나도 몰라, 지금 한번 해보지 뭐.

   의선이 일어나서 부엌 아래 선반을 열고 구석에 있는 믹서를 찾으면서 말을 이었다. “맞다 우인아, 아까 할 말은 뭐였어?” 우인은 대답이 없었다. 기껏 물어놓고서 믹서를 찾는 데 열중인 의선을 대신해 재경이 말했다. “왜? 무슨 일인데?” 그러자 우인이 대답했다. “나 서울로 이사 갈까 해.”

   서랍장 냄비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갑자기 뚝, 끊기고 정적. 의선이 믹서를 꺼내들면서 말을 이었다.
   “재경아, 이것 좀 받아줘, 팥죽도 다 됐겠다. 이사는…… 잘 생각했어. 둘이 싸우지 말고 잘 살아봐. 아 방금 말은 취소, 너무 나이 들어 보였지?”
   의선이 멋쩍게 웃고, 재경은 배실배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드디어 함께 사는 걸까, 그토록 바라던 일이 갑작스럽게 이뤄지자 재경은 벅차올랐다.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우인이 대답했다.
   “먼저 혼자 살아볼까 해요. 종로에 약국이 많대. 재경이랑도 가깝고.”
   우인의 말에 더 깊은 정적이 찾아왔다. 재경은 말을 고르느라 침묵이 길어졌다. 우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 꼭 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어.”6
   재경은 나도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똑같이 말했다. 의선은 오늘 밤이 길겠다고, 일단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마침 오늘은 일 년 중 밤이 가장 긴 날. 당혹스러움과 서운함, 섭섭함과 궁금함 같은 마음들을 지나치지 않고 마주해나가기에는 충분했다.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하게 될까. 요론에서 처음 손을 잡았던 날? 누군가는 그날 그곳처럼 아주 작은 공동체를 꾸리고 싶어했고 누군가는 더 많은 사람 앞에서 편안하게 손을 잡고 싶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해방감을 느꼈기에 굳이 꺼내지 않았던 마음들이 있다. 혹은 이야기는 더 거슬러올라갈 수도 있다. 우인은 약국에서 손님들이 했던 무례한 질문들에 화가 났고 언젠가부터 반박하고 싶어졌고 그러기엔 용기가 부족했으며 더 구체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재경이라면, 우인과 의선 사이의 안정된 관계에 질투가 났고 동경했으며 덕분에 삶을 포개어놓는 과정에서도 서로를 충분히 존중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도 재경과 그런 가족이 되고 싶으며 다른 건 모두 제쳐두고 좋아하니까 함께 살고 싶다고, 그런 달콤한 말을 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식사가 끝나면, 우인은 식후 디저트를 꼭 챙기는 재경을 위해 믹서에 얼음을 넣고 갈아본다. 재경은 서울에서 사온 키쉬를 꺼내고 의선에게 한 조각을 건넨다. 슴슴한 빙수 세 그릇을 앞에 두고 잠시 시시한 대화를 주고받는 풍경이 펼쳐지고, 의선이 두 사람에게 묻는다. 그래서 너네, 돈은 얼마나 모았냐고.

나무 창틀 위 열을 맞춰 놓여 있는 팥빙수 세 그릇. (출처: 〈안경〉 104분 장면 스틸 사진)


1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챙겨주는 애들 사료값을 위해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에 딱히 그만둘 이유가 없기도 하지만 사람을 대하는 이 일이 내가 사는 세계를 받아들이는 데 꽤 도움이 된다. 나는 이곳에서 내게 아무 이유 없이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에 대처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처방전을 건네는 순간에 상대의 온도를 파악하고 그것이 견딜 수 없이 따뜻하거나 차갑거나 상관없이 미지근하게 돌려주는 연습. 아무리 깨끗하게 소독하고 표백한 곳에도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약국처럼 내 세계도 그럴 거란 걸 알고 있다. 그러니까 약국은 내가 있어보아야 했던 곳이다. 의선과 재경이 정제해둔 안전한 세계에서만 살 수는 없을 테니까.

2 우인은 의선의 의도적인 무관심이 가끔 안정감을 준다고 말했다. 가끔뿐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지만 어쨌든 우인이 받아온 애정은 우리 집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날 의선이 우리를 담백하게 배웅했다면 내 가족은 ‘걔’랑은 어떻게 친해졌고 왜 여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며 스물한 살이던 내게 어린애 둘이 어디를 간다는 건지 끈질기게 물었다. 엄마가 결국 ‘걔' 부모님과의 통화를 요구했을 때 나는 앞으로 살면서 가족 같은 건 만들 수 없어도 상관없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물리적으로 멀어진다면 나아질 거라는 생각도 했지만 서울로 대학을 간다고 해서 달라질 건 하나도 없었다. 6호짜리 우체국 박스를 가득 채운 반찬이 다 상해 음식물쓰레기통으로 옮기다보면 가족은 내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만 사랑을 주는 사람들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실 그땐 두 사람의 관계가 샘이 났다. 함부로 방문을 열어젖히지 않는 사이, 늦은 밤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도 한 명이 어슬렁어슬렁 나와 냉장고를 열면 다른 한 명도 슬쩍 나와 맥주잔을 챙기는 호흡이 맞는 사이. 그건 고모와 조카라는 관계를 버리고서야 가능한 관계였다. 그런 고모를 둔 우인에게도, 내 애인과 함께 사는 의선에게도 질투가 났다. 의선을 꼬박꼬박 이름으로 부르는 우인과 달리 내 고모도 아니면서 고모라 부르는 나는 어쩌면 두 사람과 가족이 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3 요론은 기이하게 따뜻한 섬이었다. 숙소 주인과 빙수 가게 할머니, 조식을 함께 먹던 동네 학교 선생님은 모두 외지인인 우리에게, 그리고 서로에게도 질문이 없었다. 둘러앉아 밥을 먹거나 간단히 맥주를 권할 때도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이곳을 오게 되었는지조차 묻지 않았고, 다만 우리는 팥을 삶는 법이나 플라나리아라는 생물이 살아가는 법 같은 심심한 이야기들만 나눌 뿐이었다. 짧은 영어로 한국에선 동지에 팥죽을 먹어요, 라고 말하면 아─ 소우데스까, 하며 대답하는 식의 대화들. 어쩌면 우린 말이 통하지 않았으니 애초에 개인사 같은 건 터놓을 수 없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방으로 돌아가려 일어섰을 때 무심코 우인의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건. 아차 하는 순간에 잠시 사람들 표정을 살폈으나 다들 그대로였다. 지나가는 말로 종종 요론 이야기를 꺼냈던 고모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고모는 이유와 해명이 없어도 되는 곳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구나. 나도 그런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살고 싶었다.

4 지난밤이 생각나 민망한 아침이었다. 그리고 내 민망함에 아무렇지 않은 듯 아침 인사를 건네는 할머니의 눈짓을 슬쩍 피하며 비스듬히 서서 끓는 팥을 바라봤다. 나는 어떤 말을 기다리고 있었고, 두려워했던 것 같기도 하다. 견디기 힘든 말이 나올까봐서였을까. 혹은 그 말이 나오지 않을까봐서였을까. 내가 사는 이곳이 너무나도 평화롭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곳이라면 내 걱정이 우스워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눈치를 보며 갈피를 잡지 못했을 때 들어온 문장이었다. 조급해하지 말라는 건.

5 고모가 십 년을 계약해 들어온 집의 임대가 내년이면 만료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오늘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다. 지난번 흘러가는 말로 고모는 휴게소에서 지원해주는 기숙사로 들어가고 싶다고 했으니 우인도 이사를 염두에 두고 있을 터였다. 서울에서 밀양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할 말을 골랐다.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또 꼭 필요한 질문인가 싶기도 했다. 자주 가던 커피집 앞에 심긴 레몬 나무가 모형이었다는 이야기나 새로 생긴 빵집에 대한 이야기가 차라리 나을지도 몰랐다. 함께 살아야 하는 데에 구구절절한 이유를 붙이고 싶진 않았다. 늘 그랬듯 자연스럽고 싶었다. 서울은 그걸 함께 할 수 있는 언니들이 있었고, 그 외에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해도 무관심한 사람들이 살았다. 그곳에서 우린 서로의 이름을 뒤집어 부르지 않고도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를 부를 수 있을 것이었다.

6 모든 평화를 걷어낸 세계에서도 재경과 함께 할 수 있을지 오래전부터 궁금했다. 사람들 앞에서 처음 손을 잡았을 때 나는 차라리 그들이 못 볼 걸 본 표정을 지었으면 했다. 그땐 그 마음을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유가 없어도 화를 내는 손님들을 무수하게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살던 세계는 아주 작다는 걸. 언젠간 마주해야 하는 세계가 남아 있었다. 누군가는 우리를 다치게 할 것이고 그 순간을 미루고 싶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면 마침 집 계약이 끝났다는 말로 대신하고 이제는 조급하고 싶었다. 다정하게 우리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남기고 나와 비슷한 이유로 불안해해본 이들과 다른 이야기를 짓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제 방식으로 삶을 꾸리려는 사람들, 그리고 재경과 함께 가족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의선씨의 집에서 나와 재경이의 방으로 들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밀양에 남을 의선씨와 서울에 살 내가 여전히 가족인 것처럼. 나는 내 동네가 될 그곳에서 재경과 산책을 한다. 재경의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함께 화를 낸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같은 큰 질문 앞에 두고 금방 지루해져 새로 생긴 빵집을 찾아가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며칠이 채 안 돼서 우리는 같이 살게 될 수도 있겠지만.


   
작업 노트 4.





안경

보름, 지율, 희원은 줄곧 안경을 썼던 고도근시자들로, 비슷한 시기에 시력 교정술을 통해 한 꺼풀의 베일을 벗겨냈다. 세 사람은 선명해진 세계에서 여전히 희미한 존재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인스타그램 : @wescatterseed

2022/12/13
6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