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이야기’는 사회 현상이 된 이야기의 형태와 그 의미에 주목해보는 자리입니다. 때로는 이야기라는 렌즈로 우리 주변의 일을 해석해봅니다.

1.

얼마 전 인사동의 어느 카페에 갈 일이 있었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시간이 남은 나는 카페 한쪽에 꽂혀 있는 책들을 둘러보았다.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반 사이에 출간된 책들 위주의 책장을 보고 있으니 잊고 있던 세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렸을 때 어머니 따라서 간 동네 미장원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어머니의 용무가 끝날 때까지 지루한 시간을 보내느라 아무거나 펴들고 읽고는 했던 책들이 거기에 있었다. 박완서, 조선작, 김수현(그 방송 작가 맞음)의 소설. 『자기 앞의 생』 『달라스』 『모모』. 그러나 새삼 놀랐던 건 에세이의 비율이었다. 책장의 절반은 오혜령, 이어령, 김남조, 미우라 아야코 등이 쓴 에세이들이 차지하는 듯했다. ‘아하. 그렇지.’ 구경하는 동안 거기 보이지 않는 다른 책들까지 기억이 났다. 속세를 떠난 비구니들의 수기. 늘 신문 한구석에 신간 광고가 실려 있던 안병욱의 책. 문학에 미련이 많았던 듯한 어느 탤런트의 에세이집. 그리고 늘 무명 필자들의 에세이가 있었다. 물론 나도 몇 권 사다 읽었던, 고전 위주의 범우사의 에세이 문고도 있었다. 아마 그 잠깐의 회상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내가 이 책들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에세이가 붐이라고 한다. 또는, ‘작년까지는’ 붐이었다고 한다. 대체 무엇이 맞는 걸까? 알 수 없다. 진행중이든, 작년까지였든 이 주목할 만한 현상의 경과와 원인에 대한 분석을 보거나 듣게 될 때마다 당혹스러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방금 검색한 20년 전의 한 신문 기사는 ‘올해가 에세이 붐을 이룬 해였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30년 전에도 그런 기사는 있었다. 40년 전도 마찬가지다.
  에세이 붐이 전에도 있었다는 건 문제가 아니며, 각 시기의 독특한 모습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옳은 말이다. 하지만 나는 각 시기에 어떤 독특함이 있을 거라는 테제에 이미 회의적이다. 요즘 사람들의 자기표현 욕구가 증대했다는 식의 말을 듣게 되는데 그때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기분이 된다. 그게 증대가 되는 거였나? 대체 어떻게? 인간의 기본 특성에 속하는 것이 몇 년 사이에 증가한다면 엄청난 격변일 텐데 고작 어떤 책들이 좀 팔린다는 말을 하기 위해 그런 얘기를 꺼내면 비례가 안 맞을 수밖에 없다. 시대별 주제의 차이가 있었는지도 나는 잘 모르겠다. 속세를 떠난 비구니들의 수기집은 1980년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 중 하나였다. 그러나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출가’라는 주제는 수십 년 전으로는 일엽 스님까지 올라가는 것이며, 수십 년 후로는 현각 스님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스님들의 인생론이 늘 출판의 일정한 영역을 차지하는 것은 논외로 해도 말이다. 미우라 아야코라는 이름은 지금 별로 기억되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 여성 작가의 에세이 번역 출간은 명맥이 끊어진 적이 없으며, 시오노 나나미를 거쳐 오늘날 사노 요코와 마스다 미리까지 이어졌다.
  늘 상수로 존재하는 것은 눈에 띄지 않아야 할 것 같은데 어떤 이유에선지 그렇지 않다. 할리우드 코미디에는 사장이 회의 때마다 놀라며 어느 존재감 없는 직원에게 말하는 클리셰가 있다. “어? 자네는 여기 무슨 일인가?” 출판계의 새로운 트렌드에 대한 기사나 담론(늘 새로운 트렌드가 있기 마련이다)을 읽다보면 저 사장의 대사가 귀에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사장님, 놀라실 필요 없어요. 저 사람 옛날부터 여기 있었으니까요.


2.

에세이가 옛날부터 여기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새삼 출판업계에서 주목을 받은 시기는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출판은 에세이가 대세이며 에세이 필자를 확보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대략 6, 7년 전이다. 출판사들이 시인이나 소설가에게 괜찮으니까 에세이부터 먼저 써달라는 요구를 한다고 했다. 이런 소문에는 늘 과장이 섞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십수 년 전 옆자리 편집자가 작가들로부터 소설을 계약해 오지 못하고 ‘에세이 같은 것’만 받아 온다고 무능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던 처지에서 확실히 이건 놀라운 변화였다. 그러나 이런 소식에는 두 가지 난처한 점이 있었다. 하나는 앞에 언급했듯이 에세이는 갑자기 뜬 게 아니라 늘 팔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처음 업계에 들어갔을 때 에세이라고 하면 ㄱ사, ㅂ사, ㅈ사 등을 떠올렸으며, ‘신작 에세이’는 당연히 그들의 영역으로 생각되고 있었다. 돌연 지금 그게 너무나 매력적인 시장으로 여겨지고 너도나도 다급히 뛰어든다는 것은 한 가지밖에 의미하지 않았다. 문학 출판과 인문 출판의 기반이 붕괴됐거나, 되고 있다는 소리였다.
  둘째는 당시 내가 해외문학 전문 출판사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좋아, 에세이 내지 뭐. 가장 쉬운 방법은 단골 해외 작가들의 에세이(그런 건 매우 많았다)를 내는 것이다. 그런데 수십 년의 시행착오로 회사가 알게 된 것은 해외 작가의 에세이는 안 팔린다는 것이었다. 물론 에세이뿐 아니라 단편집도, 시집도, 희곡집도 팔리지 않았다. 팔리는 건 장편소설뿐이었다. 해외문학 출판사는 에세이에 열정을 갖기 어렵다. 물론 앞에서 보았듯이 일본 작가의 에세이는 예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활약을 보면 옛날처럼 여성 작가만 통하는 것도 아닌 듯하다. 한편 중국 작가 위화는 아직 예외에 포함할 정도는 못 된다.
  왜 영미 작가의 에세이는 안 팔리는데 일본 작가의 에세이는 잘 팔리는가? 이것은 극히 흥미로운 물음이며, 에세이의 본질과 닿아 있는 주제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추상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에 개인적인 경험을 한 가지 더 이야기하겠다.
  몇 년 전 신문의 칼럼 필자로 선정되었을 때의 일이다. 소식을 들은 날, 퇴근 후 조지 오웰과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에세이집을 꺼내서 읽어봤다. 매체에 실리는 글을 어떻게 쓰는지 알아보자는 생각으로 말이다. 몇 편 읽고 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들과 비슷한 글을 쓰기 힘든 이유는 많아 보였다. 거기에는 기술적 역량이라는 차원 외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문제가 있었다. 사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어쩌면 하고 싶은 말 역시 어디 쌓여 있는 게 아니라 지어내야 하는 것이고, 그건 픽션을 만드는 것만큼이나 골치 아픈 일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경험의 문제가 있었다. 언론인이었던 히친스는 논외로 하고, 오웰이나 그레이엄 그린의 글에는 왜 이런 것을 소설에 활용하지 않고 에세이로 썼을까 싶은 인상적인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럴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내게는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낙담한 얘기는 이 정도로 마치자. 지금은 왜 그들이 그런 소재를 아깝게 에세이에 넣었는지 짐작한다. 에세이에 넣었을 때만 보존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뿐 아니라 희곡이나 시, 어느 것도 마찬가지지만 그 형식에 적절한 것이 되기 위해 경험은 일정한 수정이 불가피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깎여나갈 부분이 중요한 거라면 어떻게 하는가? 그들은 이를 소설이 아닌 에세이에 넣어 디테일을 보존한다. 에세이는 어떻게 그런 보존이 가능한가? 그 디테일의 보존이 에세이의 목적이며 이를 방해할 어떤 규칙도 없기 때문이다. 즉 에세이는 문학으로 취급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경험의 문학화를 제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만일 운좋게도 작가가 어떤 경험을 디테일 손상 없이 소설에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고 하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등장인물의 경험으로 묘사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본래의 경험과는 다른 맥락을 갖게 된다.
  에세이 출판은 이런 것이다. 작가는 디테일을 보존한다. 독자는 그 디테일을 구입한다. 독자는 자기가 읽게 될 것이 예술(형식이 지배하는 비인간적 공간)이 아니며, 그에 들어갈 수 없어 여기 있게 된 삶의 잉여라는 점을 좋아하는 것이다.
  어쩌면 작가는 에세이를 쓸 때 온전한 자신―소설가나 시인처럼 문학사의 대열에 소집될 수밖에 없는 신분이 아니라―일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3.

2020년에 발행된 『케임브리지 컴패니언 투 디 에세이』는 첫 장을 아예 ‘에세이의 440년’이라고 하며 이 장르의 출발점을 못 박는다. 1580년. 몽테뉴가 그의 『에세이』를 출판한 해다. 명쾌하지만 이러면 즉각 동양은? 서양 고대는? 이라는 반론이 나오게 된다. 뭐라고 방어할지 나는 모르지만, 몽테뉴의 『에세이』에는 자신을 이전의 것과 구별하는 단절이 명시되어 있다. 이 책은 그 무엇에 관한 책이 아니었다. 제목이 장르명이다. 그 중요성은 그보다 앞서 ‘에세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었다 해도 변하지 않는다.
  ‘시도들’(Essais)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 책에서 몽테뉴는 무엇을 다루는가? 머리말에 적혀 있다. “나 자신.” “내가 이 책의 재료이다.” 대체 무슨 유익을 위해? 유익이 없을 거라는 주의사항이 나온다. “이건 경박하고 헛된 일이니” 너는 굳이 읽으려고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전에도 이런 책이 있었나? 자신의 일대기를 쓴 것도 아니고 후대에 전하고 싶은 자신의 사상을 기록한 것도 아니다. 물론 전하고 싶은 건 있는데, 그건 나중에 지인들이 자기 모습이나 인간성을 제대로 회상하는 데 도움이 될 여러 디테일이며 몽테뉴는 바로 그것을 책에 썼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장르가 탄생한다. 이것은 시나 희곡, 소설 같은 다른 형식을 채택했을 때, 즉 예술이 삶을 재료로 삼켜버릴 때 사라지는 것을 피신시키는 공간이다. 이것은 하나의 형식이지만 반(反)형식이기도 하다. 규칙이 없어야 한다. ‘오직 나에 관해 사소한 일들을 적는다’는 시시한 현안이 뜻밖에도 완전한 무정부 상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시비를 걸지 말게. 이게 대단치 않은 일이라는 건 나도 아니까. 이것은 인생이 사소하고 무의미한 시간 낭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딱히 슬퍼하지 않는 세계관의 산물이다.
  에세이에 대해 말해온 많은 이들이 실은 몽테뉴를 읽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요즘 에세이’의 아쉬운 점으로 거론되는 경험의 시시함이나 경박한 톤, 깊은 사상의 부재 같은 것은 몽테뉴의 매니페스토 안에 이미 들어 있다. 그건 겸손의 표현만이 아니고 그가 사람들의 불평을 뻔히 예상할 수 있었던 지점이기도 했다. 에세이는 형식적인 요구사항이 없으므로 늘 아마추어가 활발히 영입되어 문학 교수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런데 몽테뉴가 아마추어다. 사실 아마추어도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작업이 그가 아는 문학과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면 에세이에 관한 세간의 통념들을 모두 오해와 ‘안 읽음’의 탓으로 돌리면 되는 걸까? 몽테뉴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지 않을까? 자신의 삶이 문학화되지 않고 지인들에게 온전하게 회고되어야 한다는 그의 바람은 생각처럼 간단한 것이 아님이 밝혀진다. 이미 그가 타계한 순간부터 지인들은 『에세이』에 언급된 경험들을 우연이 아닌 운명적인 사건들로 보기 쉬웠을 것이다. 죽음은 에세이의 사업을 좌절시킨다. “서른다섯 살에 죽은 사람은 평생 모든 순간을 서른다섯 살에 죽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며”(벤야민), 디테일은 내러티브로 바뀐다. 지인이 아닌 사람들도 어려움을 겪었다. 몽테뉴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 채 『에세이』를 읽었던 많은 이들은 어떤 부분이 몽테뉴의 특징적인 디테일이라는 건지 분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뒤 그 책에 언급된 사항들 대부분이 역사책에만 존재하는 것이 되었을 때, 『에세이』는 학생들이 공부해서 이해해야 하는 텍스트가 되었다. 인정해야 한다. 지금 몽테뉴를 읽는 것은 그가 고전 작가가 되었기 때문이지, 자기 삶의 디테일을 ‘아 그랬지’ 하고 환기해주겠다는 그의 약속이 지금도 실현 가능한 것이어서가 아니다.
  아마 그 점에서 에세이의 수명은 짧고, 호소력을 갖는 지리적 범위도 매우 제한된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1) 에세이가 전달하는 것은 신화나 내러티브가 아니라 디테일인데, 우리는 낯선 것을 디테일로 알아보기 어렵다. 그것들은 접수되지 않는다. 소설은 줄거리만 알면 그럭저럭 감상이 가능할 수도 있으나, 디테일이 모든 것인 에세이는 그럴 수 없다. 독자들은 다른 문화 다른 시대의 낯선 디테일을 감상하기 위해 공부까지 하지는 않는다. 한국에서 외국 에세이가 일본 것 외에 팔리지 않는 건 그런 사정 때문이다. 에세이는 수명도 한 세대를 넘어가기 어렵다. 그후에는 독자가 ‘아하’하고 알아볼 디테일이 별로 남지 않기 때문이다. 에세이는 진정한 동시대 장르이다.
  경박하고 비문학적이며 아마추어적이고 영속성이 없는 형식으로서 ‘요즘 에세이’의 거의 모든 모습이 몽테뉴의 『에세이』에 이미 선언되어 있다. 무슨 아쉬운 말을 듣든 그게 에세이의 본모습이라고 우리는 말해도 된다. 그러나 아직 문제는 남아 있다. 에세이가 기대고 있는 ‘삶 그 자체’는 현실 그 자체라는 말만큼이나 오해의 여지가 많은 개념이다. 지금 우리는 그런 것이 없거나 그것이 미리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대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어쩌면 ‘나는 이런 사람인데’를 변주하는 몇몇 에세이들이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건 그 시대착오적인 자신감 때문인지 모른다. 자신이 그런 사람인지 어떻게 아는가?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건 어떤 말을 하기 위해서인가?
  에세이에는 규칙이 없으니 모든 에세이가 다 동등하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건 왜 요즘은 몽테뉴나 에머슨처럼 쓰지 않냐는 얘기만큼이나 불합리하다. 좋은 에세이라는 건 있을 것이며 그것을 판별하는 기준은 그리 복잡하지 않을 것 같다. 디테일이 많을 것. 다른 것(문학적 수사나 주의 주장, 아포리즘 등)은 적을 것. 그럴 때 에세이를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에세이는 자유로운 형식이므로, 바람직한 에세이의 모습에 대해서는 너무 열심히 강조하지 않는 편이 좋을지 모른다. 부질없게 규칙을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우리가 몽테뉴의 의도와 지향점이라고 얘기해온, 디테일과 비문학화, 개인성과 회의주의 역시 규칙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외부적인 참조 사항, 하나의 정신적 태도 이상일 수는 없다. 그러나 딱히 이런 태도가 아니라면 굳이 에세이를 써야 할 이유는 없게 된다.

김영준

1968년 서울 출생. 열린책들 편집이사를 지냈다. 올해 에세이집 『작가, 업계인, 철학자, 스파이』(민음사)가 출간되었다.

2023/11/01
64호

1
무라카미 하루키의 거의 모든 소설작품이 영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에세이집은 영어로 출간된 적이 없다. 작가가 출간에 유보적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