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빙 이미지란 무엇인가? 일단 질문을 던지고 난 뒤, 우리는 (나의 작업실에서) 모였다. 스터디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두 달 남짓한 시간 동안 격주로 만나, 각자 리서치한 “무빙 이미지” 작업에 관한 발제도 하고 무슨 책들도 같이 읽었다. 사상을 검열하는 독재 정권 치하의 비밀 결사가 된 기분이었다. 유독 기억나는 책이 있다면, 잘 모르겠다. 프랭크 커머드의 『종말 의식과 인간적 시간』을 제본해서 불법으로 돌려봤다는 사실이 뒤늦게나마 각별하기는 하다. 왜 하필 커머드를? 우리의 ‘영화적 경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어느 선생님께서 지나가듯 그의 존재를 언급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실명을 거론할 수는 없다. 이제 실명을 둘러싼 불필요한 논쟁에 지쳤으므로.
  커머드가 말하기를, 현실에서 시간은 똑딱하면서 흐른다. 선형적으로. 그러나 허구적 시간, 즉 서사-내-시간은 다르다. 당신이 “무빙 이미지”든 뭐든 서사를 다루는 사람이라면, 바로 그 서사는 똑과 딱 사이의 관계를 다각도로 조명함으로써 허구가 될 것이다. 그 이후의 논지는 까먹었다.
  기억하고 싶지 않다. 우리의 스터디는 가파르게 종말 의식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 무수한 격주의 밤들. 시네필에 대한 자기 부정. 더이상 큰따옴표를 치지 않는, 그럴 수밖에 없는 무빙 이미지. 학술 분과에서의 치열한 논의와 별개로, 무빙 이미지의 존재는 묘연해진다. 이를테면 매체로 특정할 수 없는, 영화계 안팎에서 재/생산되는 모든 ‘이미지’는 움직인다. 빛에 가까운 속도로. 심지어 스마트폰의 액정에 도사리고 있는 ‘이미지’의 경우엔 거의 언제나 발광하고 있다. 나는 올해 들어서야 숏(shorts) 영상에 중독됐다. 이제 똑, 하는 순간 영상은 사라진다. 똑은 거대 서사의 도입부가 아니라, 숏(shot)이라는 최소 단위가 액정을 계속 두드리는 신호다.
  사실 그 정도로 짧지는 않다. 숏폼에서 1분 내외로 지속되는 영상들도 많다. 중요한 것은 나의 뇌가 쇼츠 영상에 절여지면서, 그 이전부터 나를 관객으로서 감시하고 처벌했던 극장과 같은 블랙박스가, 그 속에서 말 그대로 전개되는 관람 경험이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물리적으로 성가시다는 사실이다. 이제 나는 영화적으로 구조화된 시퀀스를 하부 구조부터 산산이 무너뜨리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숏의 리듬으로, 관객이 아닌 콘텐츠 소비자로서 액정을 막론한 세계를 자율 주행하고 싶다. 민중에 빙의한 소비자가 고함치는 인터내셔널. 이미지 정치와의 부조리한 작별.
  때는 2023년 11월, 옵/신 페스티벌에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열병의 방〉이 상연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팔로잉하는 몇몇 계정들이 일순 과열되기 시작했다. 본 작업은 일종의 시네마 퍼포먼스다. 작가는 우리를 영화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는 동굴로 데려간다. 그 동굴은 플라톤적인 환영의 동굴인가? 자문하기도 전에, 무대의 사방에서 안개 아니, 스모그가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어렴풋한 풍경 사이로 화면들이 요동치고, 흔들리고, 나는 거기에 없다. 시적인 비유가 아니라, 나는 〈열병의 방〉을 예매하지도, 예매가 불발되면서 수심에 잠기지도 않았다. 그냥 트위터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관람 후기, 아핏차퐁에게 바치는 찬사가 증식하는 모습을 봤을 뿐이다.
  빈정거리는 게 아니다. 시네필은 자기 부정에 실패할 것이다. 다만 〈열병의 방〉을 관람하지 않은 채 그 작업에 대해서 쓰는 상상을 할 뿐이다. 도대체 왜? 아핏차퐁 특정적인 유령 작가가 되고 싶은 건가?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와 같은 일개 시네필이 누리지 못할 영광이다. 그 대신 소비자가 된다. 콘텐츠에, 나의 뇌를 절이거나 담그는 숏폼의 음모에 다시 사로잡힌다. 아핏차퐁의 영화, 혹은 시네마 퍼포먼스는 불법 촬영자에 의해 숏으로 조각난다. 액정 너머로 유포된다.
  똑과 딱 사이의 무한한 간극 속에서 열병이 번진다.
  “미디어는 마사지다.” 오래전에 송신된 마셜 메클루언의 전언이다. 고쳐 쓰자면, 미디어가 인간에게 종속된 신체 기관을 부드럽게 잡아 늘이면서 비/인간적인 감각이 확장되는 미래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대체로 미래에 도달했다. 심지어 미디어는 마사지고 뭐고, 숏츠 영상을 포함한 음모론의 단상들을 일상 차원에서 주입식으로 교육하고 있다. 감시와 처벌. 감시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고 처벌의 대상 또한 자기 자신인 마조히즘적 마사지, 혹은 마사지하는 (소비자형) 마조히스트. 블랙박스 바깥에서 ‘이미지’에 대한 변태 성욕은 상승세로 너울거린다. 내가 바로 ‘이미지’다. 내가 아핏차퐁이고 그의 유령 작가이며, 아핏차퐁 아닌 온갖 시각 예술가들의 작가주의를 모욕하는 자다.
  통 속의 뇌를 꺼내먹는 식인종이다. 셀피로 기록된 모든 얼굴이다. 스모그다. 한때 키노를 애독했던 이동진이다. 포스트-이동진이기도 하다. 시네필이다. 감독인 동시에 비평적 관객이다. 사실 미술비평가다. 충무로 모처에 있던 영화 아카데미를 다니다, 현장에서 핍박받은 메시아다. 허우 샤오시엔이다. 무엇보다 후기 자본주의에 예속된 우울증 환자다. 정신병자다. 의료 면허를 가지고 있다는 누군가에 의해 검증된 공식 멘헤라다. 바이섹슈얼 퀴어다. 〈카페 뤼미에르〉에 나오는 아사노 타다노부다. 열병의 근원이다. 혼자이자 모든 것이다. 하청의 하청 노동자이자 인플루언서다.
  계속 열거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제 줌으로 레지던시에 입주한 작가님과 미팅을 해야 된다.


2.

숏은 영화의 발명 전후에 ‘이미지’를 재/구성하기 위한 최소 단위, 혹은 그것을 의미하는 개념적 단어가 됐다. 어떤 개념인가? 숏이라는 단어를 개념화하는 역사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역사에 통달하지 못한 일개 소비자인 나로서는 그저 숏의 연속체로서 영화가 움직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통 속의 뇌를 꺼내 먹는 식인종이다.” 그 사실을 곱씹으면서 수심에 잠기기 전에, 영화를 다시 숏으로 소급하고 싶다. 즉 연속체가 아닌 숏은 영화가 아니다. 움직이지 않는다. 숏의 프레임 속에서 무슨 사건이 벌어지든, 그 사건은 거대 서사에 대한 조짐인 것이다. 이제 곧 대하드라마가 펼쳐질 것이다. 관객은 열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도착하는 순간, 영화는 시작된다.
  쇼츠는 (레토르트) 영화를 선망하지 않는다. 쇼츠는 ‘이미지’ 그 자체다.
  반드시 유튜브가 아니더라도, 쇼츠 그 자체인 ‘이미지’는 어디에나 있다. 나는 사용자(user)로서 스크린에 상시 노출돼 있고, 그 사실을 직감한 채 현실을 소비한다. 사용자와 동기화된 현실. 그것은 2010년대 중반으로 메아리치는 포스트-인터넷에 대한 철 지난 미사여구다. 이제 다른 얘기를 할 필요가 있는데, 내가 속한 세대는 Z가 아니라 밀레니얼이고 나의 이름은 92년생 아무개 씨이며 그렇기 때문에 현상학적인 차원에서 2010년대 중반에 고여있다. 메아리의 근원인 것이다. 나는 당사자성의 원리에 따라, 사용자로서 도태된다. 나의 뇌는 ‘이미지’에 완전히 절여지지 않은, 이른바 시대착오의 소산이다. 현실을 소비하되, 너무 과도하지 않다. 내가 노출되고, 나를 노출하는 스크린은 반투명한 장막이다. 스크린이 투명하다면, 그것을 매개로 현실을 과소비할 수 있을 것이다. 쇼츠 그 자체인 ‘이미지’가 현실 안팎에서의 소비 감각을 제한 없이 규정하는 것이다.
  나이를 거슬러 오르면, 나보다 ‘이미지’가 활성화하는 도파민이 부족한 선생님들이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논조로 말한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시각적 스펙터클에 도취된 마약 사범들이다. 이미지를 그 자체로 독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무엇보다 책을 읽지 않는다. 책을 (비평적으로)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러모로 망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전망이 없다. 미래 공동체를 위한 소명 의식이 없고, 그래서 서로를 혐오로 적대하고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쇼츠 그 자체인 ‘이미지’가 최소한 나는 구원할 수 있다. 물론 민중 개념에 따르자면, 우리는 ‘나’들로 구성된 집단이 아니다. 진정한 우리가 되기 위해선 ‘나’로 우리를 포괄해야 된다. 정말이지, 어쩔티비이고 유튜브다. 왜 하필 나에게 “진정한 우리”를 강요하는가? 나를 다시 블랙박스로 회유해서 비평의 이름으로 각색된 프로파간다 영상을 보여주면, 만사가 해결되는가?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우리를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닌 그들에게 쇼츠 영상을 권유하고 싶다. 억지로라도 도파민의 폭주, 그것으로 말미암은 (민중이 아닌 채로) 성난 군중에 합류할 필요가 있다. 메타 인지가 불가능한 시대 속에서 개인화된 주체 또한 주체적이다. 혹은 주체의 카피캣으로 자신을 정의한다. 자아를 ‘이미지’로 유포한다.
  아비 바르부르크는 1929년 10월 26일에 죽었다. 그가 죽기 전까지 매달렸던 ‘므네모시네’ 프로젝트는 역사에서 불법 도굴한 파편들로 구성된 변증법적인 아틀라스를 구현하고자 했다. 중요한 것은 이때의 파편이 대문자 역사를 부정한다는 사실 내지는 가설이다. 역사는 자신의 의무를 달성하기 전에, 언제나 역사 자체에 미달한 채 시각적으로 폭격당한다. 그 결과로서 드러난 이미지의 참화를 수습하는 대신, 그곳에 처한 개인으로서 자신에게 고유한 역사적인 내러티브를 만든다. 혹은 만들 것이다. 쇼츠는 어떤가? 쇼츠 그 자체인 ‘이미지’는 어떤 형식의 파편인가? 이제 파편은 ‘역사적인 내러티브’를 폭격한다. 달리 말해 대안 서사의 변증법을 부정하면서, 그런 부정의 제스처를 과시한다. 우리는 ‘그것’을 패션으로 걸친다. 파편으로 액세서리를 만든다.
  “짧게. 재밌게. 딱!”
  유튜브 쇼츠의 홍보 문구다. 이제 딱, 하는 순간 영상은 나에게 무한 공급된다.


3.

가자,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그러나 만사가 귀찮다. 내가 ‘공식 멘헤라’의 표본으로 구실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의 출생 연도가 19세기 말 즈음이었다면, 지난밤에 전두엽 절제술을 당했을 것이다. 폭력은 게으르다. 혹은 게으른 폭력이 만연하고 있다. 이 모든 건 개인화된 주체에 대한 시대 유감으로 귀결되는바, 전두엽 대신 나를 (사회로부터) 절제하는 게 어떨까 심각하게 고민한다. 이미 그렇게 됐을지도. 생시몽주의자가 빈정대는 소리가 들린다. 저 새끼와 연대할 수는 없어. 심지어 프랑스인도 아님.
  반복재생. 스크롤의 연속. 영화나 드라마만 짧고, 재밌게, 딱 잘라서 이어 붙인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취향을 사로잡기 위해 ‘이미지’가 선정적으로 자가 증식하고 있다. 개인으로서 ‘이미지’를 숙고하는 일은 길티 플레저에 대한 능동적 방어로 무산될 것이다. 밤이 지속된다.
  또 다른 전언이, 비교적 최근에 우리에게 송신된다. “잠의 종말이 도래했다.” 즉 후기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강제하는 주체성의 모델은 잠을 자지 않는, 프리랜서 소비자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감시의 첨탑은 없다. 우리가 스스로 밤을 지속시킨다. 내일을 미루고, 그렇기 때문에 내일은 오지 않을 것이다. 소비의 대가로 노동하기를 포기할 것이다. 여기는 극장이 아니라, DIY로 만든 블랙박스다. 사실 나의 뇌 속이다. 전기가 끊긴 다가구 주택이다. 여기에서 투쟁한다. 우리가 원하는 곳이 바로 여기다. 그렇다. 잠은 종말했다. 아날로그 시계는 장식품에 불과하다. 고가의 빈티지다. 그것을 구매한 적이 없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을 소비하고 있다. 나는 이제 정치적인 강세로 말할 것이다. 이미지의 정치학은 소외된 자들의 몫이 아니다. 우리에겐 오로지 이미지로 현전하는 정치가 있을 뿐이다. 할머니가 문재인이 빨갱이라고 했다. 그렇게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라디오는 찌라시를 ‘지라시’라고 너그럽게 발음한다.
  세대교체는 당신의 사회적인 죽음으로 성사된다. 모든 상징 자본을 스스로 처분하는 것이다. 분서로 갱유한다. 연구 기금을 삭감하기 위한 탄원서에 서명한다. 안타깝지만, 포스트-컨템포러리는 없다.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기약하지 않는다. 우리가 믿는 것은 허구의 리얼리즘이다.


4.

얼마 전에 국내에서 성황리에 개인전을 치른 이시 우드가, 글로벌한 미술 시장에서 자신의 회화 작업을 꾸준하게 판매한 돈으로 뉴욕에서 아파트를 샀다느니 하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비평가로서, 그녀가 나와 국적은 다르지만 하여튼 동세대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뉴욕 아파트는, 그게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미술이 실천할 수 있는 가성비를 대변하는 우상이다. 크롬으로 도금된 허수아비인 것이다. 이시 우드 특정적인 회화는 (인스타그램) 사용자의 관점에서 일상의 스냅을 소묘한다. 빠르고, 작가 입장에서 마냥 즐겁지는 않겠지만 최대한 많이. 스냅이 미술의 맥락에서 사치품이 되는 순간이다. 그럼으로써 이시 우드가 완성된다. 작업의 이해관계로 현전한다.
  나는 그녀가 부럽다. 여러모로. 반드시 뉴욕 아파트가 아니더라도, 내가 쓴 글들을 담보 삼아 집을 자가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베란다 창문에서 한강 뷰가 보인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너무 세속적인가? 그러나 세속마저 없다면, 어떻게 나의 욕망에 불을 지를 수 있을까? 20세기 중반 이후로 혁명의 불씨는 타오른 적이 없다. 좌파, 아니 진보 세력은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하는 혁명으로 자본을 무산시키려고 한다. 리비도 차원에서 파산했다. 성적인 불능감에 시달린다. 마르크스가 AI 합성 이미지로 구현된 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제야 폭주할 것이다. 혹은 그것을 깃발에 출력한 뒤, 성난 군중들 틈에서 찬란하게 나부낄 것이다.
  무슨 상관인가? 그들은 혁명 페티시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가속하라. 그러나 앞선 문장에 (동명의 저서처럼) 해시태그를 달지 않는다. 미적인 차원에서 너무 구리기 때문이다. 나는 좌파가 아니고 우파도 아니며, 자유주의자는 더더욱 아니다. 금융 시장이 나의 생계를 자유롭게 몰수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냥 주의력 분산에 시달리는 보편적인 개인이다. 자기 분열적이다. 오늘도 쇼츠 영상을 감상하듯, 지식과 이론의 잔여를 수소문할 것이다. 영화를 볼 것이다. 전시 관람은 외출을 무릅써야 하기 때문에 당분간 유보할 것이다. 날씨가 흐리다. 이런 나의 일상을 요약 정리한 브이로그는 팔리지 않을 것이다.


5.

자크 랑시에르가 대신할 수 있다. 가난은 고역을 선택하기의 불가능함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인용 부호를 다는 것은 귀찮다. 만사가 그러하듯이. 작업이든 콘텐츠든, 내가 웹의 공유 자산에서 훔친 소비재를 비평적으로 독해하는 것은 고역이다. 비평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가난하다.
  조건 없는 경제적인 후원을 받기에는 너무 부유하다. 그렇게 가성비의 제1원칙은 수포로 돌아간다. 근본적인 진리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여기에서, 처절하게 살아간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익명의 사용자들과 함께 소비를 모색한다. 어차피 ‘이미지’는 듀티 프리다. 그러므로 가자.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우리만의 스웨그가 넘쳐흐르는 그곳으로. 뉴욕 아파트의 소음이 ASMR로 들린다. 참고로 내 유튜브 계정은 프리미엄이 아니라는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싶다. 이미 탄로났지만.
  그 사이에 프리미엄 구독료가 대폭 인상, 나는 주변 사람들의 푸념이 성가시다. 누군가 말한다. 국내가 아닌 IP 주소로 우회하면, 1만원 안팎으로 구독을 지속할 수 있다. 신속한 답변 처리에 감사를 표하며, 아멘. 그러나 가상 차원에서 머무른 자리, 지리적 영토의 끝자락으로 내몰린 데이터 치외법권이 지난 오후 전쟁의 참화가 됐다면, 헝클어진 대로변 배회하는 (시네마틱한) 난민과 시체들 위에 드리운 누군가의 전능한 손가락, 화약 냄새로 이글거리는 하늘을 광고 없이 무료로 스와이핑. 여기를 광섬유적으로 초월한 누군가에 의해 다음 ‘현장’이 센트럴파크 모처에 도사린 카페에서 상연되는바, 오늘도 세계는 주름진 스크린처럼 무사하다네.
  다윗의 별이 함께 하기를. 유사 한병철처럼 ‘디지털 아멘’ 외우면서 지샌 나날들. 우리 모두가 가난하다. 쇼윈도 너머 목줄을 맨 주인 따라 늙어버린 비숑 새끼가 지나가고. “Swag.”

권시우

a.k.a 흔들리는 죠. 미술 비평가. 오늘이 되기 전까지 쓴 글들 전부 무단 투기한 뒤, 업계에서 탈출할 방법을 궁리하는 중이다.

2024/02/21
6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