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필 투어 퀘스트 튜토리얼

스텝 1. 가장 자신 있는 사진들로 꾸민 프로필 PPT 파일을 준비해요. 앱으로 보정한 사진 안 돼요. AI 프로필 안 돼요.
스텝 2. A4 사이즈로 출력해요. 출력소는 어느 곳이든 상관없지만, 일반 종이보다는 사진용 인화지를 추천해요. 프로필은 양면 한 장이면 충분해요.
스텝 3. 프로필 접수를 진행중인 제작사의 위치를 확인한 후 이동해요. 네이버 카페 ‘액터길드’를 이용하면 가장 최신의 정보를 얻을 수 있어요.
스텝 4. 프로필 박스를 찾아 출력해온 프로필을 넣어요.

주의사항!
타인의 프로필을 뒤적이거나 훔치면 안 돼요!

어느 제작사 사무실의 문 앞 복도, A4 용지들이 담겨있던 작은 종이박스에 배우 조화인의 얼굴이 전면에 드러난 프로필이 담겨 있다.
상암동 프로필 투어 중, 나의 얼굴을 넣어둔 프로필 박스


다시 만난 프로필 박스

궂은 날씨를 예상하고 방문한 상암동의 날씨는 쾌청했다. 한파를 대비해 목티 위에 껴입은 니트와 패딩 재킷 사이에 땀이 찰 정도였다. 초겨울의 기분 좋은 찬공기를 들이키며 점심시간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의 얼굴도 맑아보였다. 간만에 방문한 제작사의 입구를 찾아헤매던 내 얼굴은 어떻게 보였을까? 당황스러움도 잠시, 안내데스크 직원분의 도움을 받고 찾아간 제작사의 철문 앞에는 한때 A4용지 뭉치들을 품었을 종이박스가 ‘프로필 박스’란 명찰을 달고 그때 그 자리에 놓여있었다. 여전히 그대로,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점심쯤 한 차례 비워졌는지 다른 배우들의 프로필이 한 장도 들어있지 않았다. 괜히 불안한 개척자의 마음으로 빳빳하게 새로 출력해온 나의 프로필 한 장을 박스 안에 넣어두고 다음 장소로 향했다. 그렇게 상암동의 제작사를 여섯 군데 방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작사의 닫힌 문밖에 놓여있는 프로필 박스를 방문했다. 보물찾기하듯이 발견한 상자에 프로필을 넣어두고나면 돌아볼 필요 없이, 분실이나 폐기의 우려도 없이, 지망생에게 주어진 퀘스트는 끝난다.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무력해질 필요도 없다. 노력한 만큼 피드백이 오는 곳이 아니란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까.

어느 사무실 복도 벽면에 “프로필 접수 마감하였습니다”라는 간단한 안내문이 붙어 있다.
프로필 접수 마감을 알리는 안내문

심연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문밖에 소외된 자’의 기분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문 앞을 빠르게 벗어나야 한다. 복도에서,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 안의 사람들’과 마주쳐도 기죽을 필요 없다. ‘저 사람들은 나를 보고 그저 헛수고하며 시간을 죽이는 수많은 배우 중 하나라고 생각하겠지’라고 확신하며 움츠러들던 때도 있었다. 프로필 투어를 열심히 할수록, 매우 느리게 오거나 대부분 영영 오지 않는 피드백에 자신을 잃어가기도 했다. 초대장을 받지 못해 파티장 밖을 배회하는 이방인의 마음으로, 애써 씩씩하게 돌아서던 날들이었다. 언젠가는 내 이름이 쓰인 초대장을 손에 쥐길 간절히 바라면서.


디지털미디어의 도시와 아날로그

왜 디지털미디어시티인가? 온갖 종류의 미디어를 제작하고 송출하는 방송국, 제작사가 모여있는 동네이기 때문이다. 도시라고 하기에는 조금 과장된 것 같은 상암 동네. 그 안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발로 뛰는 아날로그 배우들이 있다. 캐스팅을 위해 이메일 프로필 접수를 받기도 하지만 메일함이 가득 차 수신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수개월 동안 혹은 영원히 수신확인이 되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인지 프로필 박스로만 프로필을 받는 곳이 아직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담당자의 입장에서는 수천 개의 메일을 하나하나 열어 파일을 다운받는 것보다 문 앞까지 찾아온 종이 뭉치를 슬슬 넘겨보는 것이 편리할 법도 하다.   발품을 파는 일이 단순히 번거롭다는 문제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거주지가 상암동과 가까운 편임에도, 프로필 투어를 위해 반나절을 온전히 바쳐야 한다. 너덜너덜해진 체력도 함께. 경기도 혹은 그보다 더 먼 곳에 거주하는 지망생들에게는 바쳐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진다. 프로필 출력비와 교통비, 투어 중 에너지를 채우기 위한 진행비까지, 총 발생 비용은 결코 적지 않다. 이런 비효율적이고 괴로운 행위를 지망생들은 반복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보상받지 못해도, 지망생의 의무라 여기며.
  최근에는 프로필 투어를 대신 수행해주는 업체가 많이 생겼다. 시간과 비용을 따져보니 합리적이라서 나도 종종 이용하는데, 상암동 투어만큼은 여전히 직접 하려고 하는 편이다. 상암동에는 다른 지역 프로필 투어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계기’ 같은 것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보물찾기하듯 그것들을 주워온다. 그것들은 다음 퀘스트를 위한 ‘포션’이 되기도 하고, 지도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나는 강남 투어를 싫어하는데, 동네 자체에서 느껴지는 배제의 기운 때문이다. 그곳에는 영상물과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건물에 덩그러니 프로필 박스가 놓여있다. 몇 번을 방문해도 기억에 남지 않는 특색 없는 건물들을 하나씩 찾아다니는 것은 정말이지 진 빠지는 행위다. 때론 과연 이 프로필 박스가 ‘정품’1)일까 하는 엉뚱한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런 생각에 잠기다보면 어느 순간 바삐 지나다니는 강남 사람들 틈에 멍청히 서 있게 된다. 그곳에는 눈빛을 주고받을 얼굴이 없다. 반면에 상암동은 늘 영상매체 관련 종사자들로 활기를 띄며, 이곳으로의 영입을 누구든 환영해줄 것 같은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낸다. 이런 에너지는 희망고문이 되기도 하지만…… 요즘 밈처럼, 희망고문도 희망이지 않은가?

어느 사무실 복도 벽면에 “우편함(안/위)에 배우 프로필 넣지/올려놓지 마세요. 배우 프로필을 제작실에 직접 방문하여 전달하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입니다.”라고 쓰인 안내문이 붙어 있다.
프로필 접수에 관한 한 제작사의 안내문

나는 다양한 형태로 상암동을 겪어왔다. 10여 년 전에는 KGIT건물 휘트니스센터에서 인포메이션 담당자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방송국 사원증을 지닌 사람들과 이름 대신 ‘서프라이즈 걔’2)로 불리던 배우처럼 얼굴은 낯익지만 이름은 떠오르지 않는 연예인들을 매일같이 마주했다. 유명 개그맨을 건물 앞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예능프로그램에서와는 다르게 차분한 얼굴로 조용히 대화하던 그의 모습이 신기했다. 눈 돌리는 곳마다 연예인이 우글대는 이 도시에 내 자리가 있다는 것이 내심 설렜다. 방송국 주변을 배회하며, 나도 곧 자연스럽게 저 문을 드나들 날이 올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유수와 같이 흐른 시간이 두 자리 숫자가 될 줄은 몰랐다.
  배우의 얼굴로 상암동을 방문했던 날도 있었다. 한국영화아카데미의 단편영화에 캐스팅되어 대본리딩을 하던 날이었다. 장소는 프로필 박스가 가장 많이 모여있는 건물인 DMC첨단산업센터의 작은 회의실이었다. 특별할 것 없던 회의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던 그때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단편영화 이후로 배우로서 일이 술술 풀릴 것만 같았다. 익숙한 척 대본리딩을 끝내고 괜히 건물 밖을 서성이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상암동을 다시 방문했을 때, 나는 어느 때보다도 방송국 건물 깊숙이 들어갔다. 분장실을 이용하기도 했고, 스태프들과 직원용 바리케이드를 넘나들기도 했다. 나도 모르는 새에 나는 방송국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방인의 얼굴

내가 방송국 바리케이드를 넘을 수 있었던 이유는 현재 나의 직업이 스턴트우먼이기 때문이다. 맞다. 〈시크릿가든〉의 ‘길라임’. 드라마에서처럼 재벌 2세와 연애는 못 했지만 스턴트 액션으로 번 돈으로 카드값도 내고, 밥도 먹고, 월세도 내며 살고 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배우에 대한 갈망을 숨긴 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의 마음으로. 촬영 현장에서 일하는 직업이니 출연 기회가 많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스턴트우먼의 주 역할은 액션 대역이며, 대역으로 참여한 작품은 배우 경력에 한 줄도 쓸 수가 없다. 그래서 내 프로필의 경력란은 여전히 깨끗하다. “출연이요? 수백 번 했어요. 근데 경력은 없어요. 화면에 뒤통수만 나왔거든요.”
  그러다 최근, 드라마에 단역으로 출연할 기회가 있었다. 내 역할은 주인공의 친구인 칠공주패거리 중 하나였고, 그나마도 많은 부분이 편집되어 내 목소리가 나온 대사는 한 마디밖에 없었다. 주변에 출연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는데 많은 지인이 드라마를 보고 연락을 해왔다. 출연 사실을 몰랐던 엄마도 지인들로부터 내가 나온 장면의 캡처 사진을 여러 장 받고 놀라서 새된 목소리로 내게 전화했다. 너 맞냐고.
  이 일로 배우로서 얼굴을 갖는다는 것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배우로서 피드백을 받아서였을까? 들뜬 마음을 들키는 게 부끄럽지만 출연을 기념하고 싶어서 종영 후 개인 SNS에 현장 사진과 함께 게시물을 올렸다. 주절주절 장문의 글을 쓰다가 민망해져서 한 줄로 줄였다. ‘제게도 얼굴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대면으로 마주하는 얼굴들

결국 프로필 투어란 나의 얼굴을 두고 오는 것. 두고 온 얼굴을 누군가 발견해주길 바라며, 발견된 얼굴이 마음에 들길 바라며, 가장 절실한 얼굴로 가장 당당한 얼굴을 두고 오는 것이다. 한 권의 두꺼운 인물백과사전처럼 켜켜이 쌓인 프로필 용지들을 볼 때면 늘 궁금했다.
  ‘이 많은 얼굴들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갔을까? 내가 두고 간 나의 얼굴을 보게 될 또 다른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누가 내 얼굴 위에 자신의 얼굴을 놓고 갈까? 그 얼굴은 어떤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떠날까?’
  투어를 막 시작했던 그때는 프로필 박스에 먼저 놓인 프로필들을 소심하게 훔쳐보면서 왠지 이미 완성된 배우처럼 세련된 그들의 얼굴을 질투하고, 평가하고, 베끼기 바빴다. 답장 없는 러브레터에 익숙해진 지금에서야 그들이 경쟁자가 아니라 전우들로 보인다. 자신이 가진 가장 그럴싸한 얼굴을 내놓고 치열하게 싸우는 전우들. 전우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그날이 오면 담담한 눈빛으로 한 마디 전하고 싶다.
  ‘동지들이여,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여기, 지망의 도시에서.’


기획의 말

‘서울시 상암동’하면 지금의 하늘공원이 자리한 난지도와 함께 ‘넝마주이의 서사’가 언급되곤 한다. 넝마주이는 1978년부터 1993년까지 15년간 운영되어온 난지도 매립지에서 주로 활동해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서울에서 나온 쓰레기로 쌓아 올려진 ‘쓰레기 산’이라 불린 구역에서 쓸 만한 물건을 찾아 팔며 생계를 유지해왔다. 이주민이란 인식이 강했던 넝마주이는 쓰레기를 따라온 사람들이라며 때론 상암동 토박이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 더불어 정부가 추구하는 산업적 성장 계획 차원에서 골칫거리였던 쓰레기 처리 문제를 실현하는 대원으로 소모되며, 어렵사리 생존을 이어갔다.
  뒤이어 2000년 4월, 상암동 새천년 신도시 계획이 발표됐다. 오늘날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를 있게 한 이 구상은 향후 ‘방송가 사람들의 서사’가 만들어질 시초였다. 언론은 각종 매체를 통해 자신의 터전이었던 여의도 시대의 마감을 알리며, ‘상암동 시대가 온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미디어·엔터테인먼트 기업을 비롯해 IT 회사, 연구소 등이 입주하기 시작했고 상암동은 빌딩 숲을 이루었다. 지난날 쓰레기에서 발생하는 가스로 호흡기 질환에 시달려온 주민의 기록은 영상편집실에 상주하며 화면을 오래 본 탓에 뻑뻑한 눈을 보호할 인공눈물을 수시로 사야 하는 방송국 근로자, ‘주변 사람들은 연예인 맨날 구경해서 부럽겠다고 하지만, 정작 이 동네에 있다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며 덤덤해하는 방송계 종사자의 일기로 대체되어갔다.
  그리고 여기 ‘지망생의 서사’가 있다. 비록 예전 같지 않은 열기라지만 고시생을 포함해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지망생이 모인 상징적인 동네로는 신림 혹은 노량진이 손꼽힌다. 그런데 상암동과 지망생이라니, 의아할지도. 하지만 유튜브에 들어가 ‘배우 프로필 투어’라고 입력하면,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에 위치한 방송국과 드라마·영화 제작사를 돌아다니며 회사 문 앞에 자신의 이력과 프로필 이미지가 담긴 문서를 놓고 가는 ‘뚜벅이 배우 지망생’의 브이로그를 쉽게 볼 수 있다. 배우 지망생들은 강남과 홍대 내 연예기획사, 영상 제작사를 들렀다가 버스를 타고 상암DMC에 도착해 역할을 따내고 싶은 회사 앞에 프로필 자료를 두고 가는 일을 반복한다. 그러는 동안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타들어 가는 속마음, 수없이 반복되는 제출 가운데 쌓인 피로감과 공허함을 토로한다. 출연하고 싶은 작품 속 배역을 맡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 기약 없음을 드러내는 브이로그 영상마저도 멋들어진 작품처럼 만들어 올리는 수고로움까지 감내하면서. 허나 그 같은 수고로움엔, 자신처럼 언젠가는 전업 연기자로 살아가고자 발품 팔기를 아끼지 않으려는 또 다른 배우 지망생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려는 ‘요령의 스토리텔링’이 두드러진다. 오늘은 어디에서 배역을 모집하는지 화면 속 커뮤니티에서 수시로 정보를 공유하는 배우 지망생들은 화면 밖에선 직접 프로필 투어를 돌며 관련 팁을 친절히 알려주는 영상을 기꺼이 만들어 이타심과 동료애를 은은하게 나눈다.
  이상의 맥락을 감안하며 《비유》는 상암동 근처에 살면서 프로필 투어를 경험해온 스턴트우먼 조화인 씨의 이야기를 준비했다. 그는 촬영장에서 오래간 대역 연기자로 활약해왔으나 줄곧 촬영지 바깥을 맴도는 기분을 느끼며 ‘배우인 동시에 배우 지망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생활을 해왔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상암DMC를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아온 ‘지망생의 서사가 있는 공간’으로 인식하고, 그럼으로써 지망하는 삶의 불안을 떠안은 채 하루하루를 겪어가는 사람들이 모인 서울을 ‘지망의 도시’로 생각해보고 싶었다.

김신식
웹진 《비유》 편집위원, 감정사회학자


조화인

1992년생. 현직 스턴트우먼. 그리고 배우 지망생. 관객들 앞에서 혹은 카메라 앞에서 목소리를 내고 싶은 사람.

만년 배우 지망생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나에게 자존심 상하고 창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와 같이 주눅든 배우들에게 작은 응원을 전하고 싶어서 글을 썼다. 같은 처지에서 고민하고 움직이는 동료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될 때가 있으니까. 이 글이 훗날 ‘배우 조화인’의 무명시절 에피소드가 되어 재발견 되길…

2024/03/20
66호

1
‘프로필 박스에 담긴 프로필이 담당자에게 온전히 전달되는 것일까’에 대한 비유.
2
배우 이중성. 실제로 내가 근무했던 센터의 회원이었다. 라커 키를 넘겨줄 때마다 성함을 묻는 게 왠지 미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