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처
19회 (내) 아이가 (나에게) 버려졌다
강경애의 「소금」
그날 밤 비는 좍좍 퍼부었다. 봉염이 어머니는 봉염이가 앓는 것을 보고 가서 도무지 잠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밤중에 그는 속옷바람으로 명수의 집을 벗어났다. 그는 젖유모로 처음 들어갔을 때 밤마다 옷을 벗지 못하고 누웠다가는 명수네 식구가 잠만 들면 봉희를 찾아와서 젖을 먹이곤 하였다. 이 눈치를 챈 명수 어머니는 밤마다 눈을 밝히고 감시하는 채로 달려오는 때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그 밤, 낮에 다녀온 것을 명수 어머니가 뻔히 아는 고로 다시 가겠단 말은 못하고 누웠다가 그들이 잠든 틈을 타서 소리없이 문을 열고 나온 것이다. 사방은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이 어두우며, 몰아치는 바람결에 굵은 빗방울은 그의 벗은 어깨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그리고 눈이 뒤집히는 듯 번갯불이 번쩍이고 요란한 천둥소리가 하늘을 때려부수는 듯 아뜩아뜩 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아무것도 무서운 것이 없었다. 오직 그의 앞에는 저 하늘에 빛나는 번갯불같이 딸들의 신변이 각 일각으로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가 숨이 차서 집까지 왔을 때 문밖에 허연 무엇이 있음에 그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것은 봉염인 것을 직감하자 그는 와락 달려들었다.
“이년의 계집애, 뒈지려고 예 가 누었나?”
비에 젖은 봉염이 몸은 불같았다. 그는 또다시 아뜩하였다. 그리고 간폭을 갉아내는 듯함에 그는 부르르 떨었다. 따라서 젖유모고 무엇이고 다 집어 뿌리겠다는 생각이 머리가 아프도록 났다. 그러나 그들이 방까지 들어와서 가지런히 누웠을 때 그의 머리에는 또다시 불안이 불 일 듯하였다. 명수가 지금 깨어서 그 큰집이 떠나갈 듯이 우는 것 같고, 그리고 명수 어머니 아버지까지 깨어서 얼굴을 찡그리고 자기의 지금 행동을 나무라는 듯, 보다는 당장에 젖유모를 그만두고 나가라는 불호령이 떨어지는 듯, 아니, 떨어진 듯. 그는 두 딸의 몸을 번갈아 만지면서도 그의 손끝이 감촉을 잃도록 이런 생각만 자꾸 들었다. 그는 마침내 일어났다. 자는 줄 알았던 봉희가 젖꼭지를 쥐고 달려 일어났다. 그리고 “엄마!” 하고 울음을 내쳤다. 봉염이는 차마 어머니를 가지 말란 말은 못하고 흑흑 느껴 울면서 어머니의 치마깃을 잡고,
“조금만 더……”
하던 그 떨리는 그 음성―그는 지금도 들리는 듯하였다. 아니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소금」, 『강경애 전집』, 523~524쪽)
남자만 여자를 모르는 게 아니라 여자도 여자를 다 알지는 못한다. 한낱 삼십대 초반 여성의 삶의 한계 안에서 페미니즘을 말하고 그것이 내가 알아야 할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오만의 시간마다 그런 나를 경계하며 되돌아가 읽는 것은 강경애의 소설이다. 그의 소설에는 여성으로서의 신체 외에는 달리 가진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말 그대로 ‘무산계급(無産階級)’1)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그들의 고통과 울분을 무력하게 마주하고 있노라면 최근 펼쳐지고 있는 페미니즘의 이론적 진전과 담론적 활황, 그리고 그에 대한 세간의 각별한 주목과 다양한 반응이 돌연 낯설어진다. 사실 강경애의 소설을 새삼스레 들춰보게 된 것은 올해 초 일어난 한 사건의 영향이다. 이십대 대학생이 광주의 아파트 복도에서 유기된 신생아를 발견해 보호하고 있다고 경찰에 신고했는데 진상을 알고 보니 신고자인 그녀가 바로 아기의 어머니였다. 이 자작극이 언론을 통해 화제가 된 후에야 여대생의 가족은 그녀가 남자친구와의 연락 두절 이후 임신과 출산의 전 과정을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홀로 감당해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족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직접 키우기로 결정하면서 그녀는 다행히 영아유기에 대한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사건 현장 인근에 살고 있는 나는 보도를 접한 이후 주변 아파트들을 유심히 살펴보는 일이 잦아졌고, 황망한 표정의 여성을 볼 때면 어떤 말 못할 사연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 괜히 골똘해지고는 했다. 한파가 매서운 새벽,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몰래 출산한 뒤 탯줄이 그대로 붙어 있는 아기를 안고 숨죽여 울다 ‘아기가 버려졌다’고 수화기 건너편의 사람들에게 외쳤을 그녀, 자기 자신을 고발함으로써 아기를 살리고자 했던 그녀에 대해 나는 여전히 잘 모른다. 다만 그녀의 신체가 나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는 않다는 것을 계속 되새기면서, 내가 읽은 몇 편의 소설을 통해 그녀의 내면을 불완전하게나마 짐작해보려 애쓸 뿐이다. 그러는 동안에만 나는 문학과 더불어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나 자신을 긍정할 수가 있다.
황정은의 단편 「양의 미래」에는 다음과 같은 단호하고 충격적인 문장들이 무심하게 나온다. “아무도 없고 가난하다면 아이 같은 건 만들지 않는 게 좋아. 아무도 없고 가난한 채로 죽어.”2) 아르바이트를 멈추면 당장의 생계가 곤란한 이 소설의 주인공은 미래를 기획할 수 없는 자신의 삶에 아이를 들여놓지 않겠다는 일종의 자기선언에 이르는데, 그 태도에는 어떤 결연함이 있다. 결혼과 출산을 단념하는 동시대 청년 여성의 심중에 있을 불안과 공포, 그리고 거기에서 촉발되는 염세적 결단까지를 냉정하게 짚어내는 이 소설의 서늘한 매력을 나는 일찍이 강경애의 소설 「지하촌(地下村)」에서도 본 적이 있다. “글쎄 살지도 못할 것이 왜 태어나서 어미만 죽을 경을 치게 하것니. 이제 가보니 큰년네 아기는 죽었더구나. 잘되기는 했더라면…… 에그 불쌍하지. 얼마나 밭고랑을 타고 헤매이었는지 아기 머리는 그냥 흙투성이더라구나. 그게 살면 또 병신이나 되지 뭘 하것니. 눈에 귀에 흙이 잔뜩 들었더라니, 아이구 죽기를 잘했지, 잘했지!”3) 칠성의 어머니는 이웃집 큰년네 어머니가 출산을 하였으나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는 불운한 소식을 아들에게 전하면서 도리어 잘됐다고 말한다. 흙바닥으로 쏟아져 나온 아기의 상한 몰골이 떠올라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면서도 눈감고도 알 만한 이웃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 편이 오히려 낫다는 것이다. “사는 게 뭔지 큰년네 어머니는 내일 또 김 매러 가겠다더구나. 하루쯤 쉬어야 할 텐데. 이게 이게 어느 때냐, 그럴 처지가 되어야지. 없는 놈에게 글쎄 자식이 뭐냐, 웬 자식이냐.”4) 추위 속에 유기된다면 곧 사망할 신생아를 자신이 정말로 버리기 전에 미리 구조해달라고 요청한 대학생이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외롭고 고단할 게 빤한 아이의 인생을 일찌감치 삭제한 「양의 미래」의 주인공이나, 자식의 죽음을 애도할 새도 없이 내일의 노동을 준비해야 하는 「지하촌」의 여성들은 공통적으로 아이와 함께 살아갈 미래를 기대하지도 낙관하지도 않는다.
이 글 서두에 인용한 「소금」(『강경애 전집』, 이상경 편저, 소명출판, 1999)의 한 장면에는 무산계급 여성이 처한 곤혹스러운 상황이 극적으로 묘사돼 있다. 남편과 사별하고 아들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주인공 봉염 어머니는 지주 팡둥의 살림과 허드렛일을 거들며 그 대가로 그의 집에 딸 봉염과 자신의 몸을 의탁한다. 팡둥의 강간으로 임신을 하게 된 봉염 어머니는 몇 번이나 유산을 시도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임신 사실을 친부에게 통보조차 하지 못한 채 그의 집에서 내쫓기게 된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이 위태로운 헛간에서 빗물을 받아 마시고 파뿌리를 씹어 삼키며 출산한 그녀는 몸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두 딸을 건사하기 위해 명수의 집에 젖유모로 취직을 한다. 갓 태어난 딸 봉희를 먹일 젖을 남의 아이인 명수에게 물리면서 그녀는 보호자 없이 지낼 어린 두 딸이 걱정됐지만 명수 부모의 눈치가 보였고 그들이 해고를 운운할까 겁이 나 자주 들여다볼 수도 없었다. 저희들끼리 방치되다시피 했던 두 딸이 끝내 죽고, 그 죽음의 기운이 자기 자식에게까지 미칠까 싶은 명수 부모가 봉염 어머니를 해고하면서, 이 소설은 결과적으로 양육과 생업 둘 모두에 처참하게 실패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페미니즘 의제들이 공론화되면서 ‘여성’에 대한 기왕의 성차별적 인식과 관습들이 점차 교정되고 있고,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운동을 통해 ‘노동자’의 처우개선과 안정적 고용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전보다 자주 들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강경애 소설이 주목하는 무산계급 여성, 즉 ‘여성-노동자’ 특유의 곤경에 대해 힘주어 말하는 사례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가부장제와 은밀히 공모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노동시장에서 소수 상류층 엘리트 여성을 제외한 대부분의 여성은 가사나 육아와 같은 부불노동을 전담하면서 존재가치를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거나, 서비스직·일용직·임시직에 종사하며 저임금과 고용불안에 상시적으로 시달린다.5) 임신·출산·양육으로 이어지는 소위 ‘여성으로서의 과업’과 남성임금노동자와 경쟁하며 생업전선에서 뛰어야 하는 ‘노동자로서의 과업’을 동시에 떠맡는 그들은 그러므로 두 가지 종류의 불안을 한꺼번에 감당하게 된다. 임신·출산·양육의 가능성 또는 그에 대한 책임감에서 오는 ‘여성의 불안’과 엄혹한 노동환경이 조성하는 ‘생계의 불안’이 그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두 종류의 불안은 서로가 서로를 강화하는데, 봉염 어머니의 경우처럼 두 과업 모두에 실패할지 모른다는 예감 가운데 놓이는 여성은 어느 순간 그 중 하나를 택해 집중하도록 요구받는다. 그러나 이 선택지는 여성의 경제적 취약함을 전제하면서, 그들이 사적영역에 머물게끔 강요하고, 남성임금노동자 본위의 가부장적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마련된 책략이 아닌가. ‘여성이냐 노동자냐’라는 선택지는 여성-노동자로 일생을 살아가는 실제의 삶들을 지워버린다.
최근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의 위헌여부를 심리하면서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중 어느 쪽이 더 우선돼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새로 일고 있다. 그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가치들의 충돌과 이분법적 선택지를 지켜보면서 종종 허탈해지는 것은 그 논쟁에서 낙태를 고려하거나 경험하는 여성의 신체와 그 신체가 붙박여 있는 현실에 대한 진단, 그리고 그 신체와 현실을 한 순간도 떠날 수 없는 여성의 삶은 충분히 살펴지지 않기 때문이다. 임신중절은 그 자체로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의료적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불법인 탓에 여성들은 건강과 안전을 배려받기 어려운 시술과 처치 환경에 놓이게 된다. 이 경우 임신중절을 결심하는 여성은 죽음에 육박하는 어떤 절단의 사건을 각오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실제의 임신중절이란 태아의 생명권에 반해 여성이 자기결정권을 경솔하게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태아와의 동반자살을 감행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다른 삶으로 나아가려는 자기 파괴적 결단에 가깝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앞서 언급했던 아이를 버릴 수도 없지만 아이와 함께 살 수도 없어 결국 아이를 버릴 마음을 먹은 자기 자신을 고발해버린 여대생의 분열과 혼란을 이해해볼 수 있다. 그녀의 세상을 향한 ‘(내) 아이가 (나에게) 버려졌다’는 외침에는 임신·출산·양육이 초래하는 여성의 불안과 가부장제 바깥에서 고작해야 임시직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지방대 출신의 미혼모를 짓누르는 생계의 불안, 그 이중의 불안을 감내할 수 없다는 절규가 담겨 있다. 아이를 마음으로는 버리고 실제로는 유기하지 않은 그녀의 사례는 모성을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내세우는 이기적인 모성’과 ‘태아의 생명권을 지키기 위해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는 모성’으로 구분하고 대비시키는 것이 논쟁을 위한 프레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성의 신체와 현실로부터 터져나온 그녀의 절규가 낙태죄 존치/폐지 논란에서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대립시키는 기왕의 구도를 지양하고 시민권의 관점을 취하려는 여성들 모두의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태아와 여성 양자가 인간적 존엄과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동등한 참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시민권의 주인으로서 사유될 때, 우리는 여성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저 기만적 선택지를 버릴 수 있다. 강경애의 소설이 쓰인 일제강점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한 세기 전부터 이어져온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여기의 여성은 주어진 선택지 바깥에 있는 삶의 진실과 그 어느 때보다 더 치열하게 부딪히는 중이다.
신샛별
여성-청년-시민이라는 세 겹의 정체성이 이끄는 대로 작품을 읽고 비평을 씁니다.
2018/07/31
8호
- 1
- 가사노동, 돌봄노동, 성노동에 종사하면서 주로 사적영역에 거주하는 강경애 소설 속 여성들은 남성임금노동자를 일차적으로 연상시키는 ‘노동자’라는 개념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 글은 강경애 소설 속 여성들이 수행하는 노동을 총체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무산계급 여성’이라는 보다 확장된 개념을 사용한 배상미(?식민지시기 무산계급 여성들의 사적영역과 사회변혁-강경애 문학을 중심으로?, 『상허학보』 44, 상허학회, 2015)의 제안을 따르고자 한다.
- 2
- 황정은, 「양의 미래」,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 61쪽.
- 3
- 강경애, 「지하촌」, 『강경애 전집』, 이상경 편저, 소명출판, 1999, 612~613쪽.
- 4
- 같은 책, 613쪽.
- 5
- 이에 대해서는 낸시 프레이저, 『전진하는 페미니즘』(임옥희 옮김, 돌베개, 2017), 특히 3부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