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처
22회 ‘따뜻한’을 빼고 그냥 유머
윤성희의 「어쩌면」
지금은 눈치를 보느라 내적 농담을 하고 혼자만 웃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어릴 때 나는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다. 사실 뭐가 되고 싶은지 생각해본 적이 없으면서도 어른들이 꿈이 뭐냐고 물으면, 그 순간 떠오르는 대답이 있지 않나. 열 살 무렵, 부모님과 함께 아버지의 사 남매들이 모여 사는 시골에 내려갔다가 둘째 고모부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코미디언이 될 거라고 말했다. 나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유머 1번지> <쇼 비디오 자키> <기쁜 우리 토요일> 등을 빠짐없이 보면서 자랐고, 그중 특히 <네로25시> <고독한 사냥꾼> <괜찮아유>의 최양락, <쓰리랑 부부>의 김미화, <영자의 전성시대>의 이영자와 홍진경 등을 정말 좋아했기 때문이다. 기세등등하게 굴다가 형편없이 쭈그러들거나, 상대방을 기분 좋게 쥐락펴락하는 연기를 펼치는 이들이 주던 쾌감을 여전히 기억한다.
어른들의 반응은 생각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잊힐 수 있었을 내 대답이 기억에 남은 까닭은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가 꽤 진지하게 잔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날 내 대답에 무척 당황했다는 인상을 풍기면서, 다음부터 그런 질문을 받으면 모델이라고 대답하라고 말했다. 코미디언과 모델 사이의 거리. 아마 어머니의 그런 반응이 아니었다면 남을 웃기는 일에 대한 나의 은근한 집착이 지금까지 지속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날 이후 내가 좋아하던 이들의 성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계속 관련지어 고민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시간이 나에게 알려준 사실은 단순하다. 여자는 웃기려고 하기보다는 웃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 굳이 웃음의 진화론적 기원을 추적해 들어가지 않더라도 어떤 유머의 공격적 속성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유머란 대상에 공격을 가하면서 자신의 정상성과 정당성을 확인하는 과정이고, 이때 터지는 웃음을 통해 심리적 긴장감이 해소되며 일시적이나마 힘의 평형 상태가 이루어진다. 권력관계를 고려해본다면 아무래도 이는 남성이 추구하기에 쉬운 일이다. 여성에게 자기 비하적인 유머(특히 ‘여성스럽지’ 않은 외모와 성격)가 많은 비중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무대 밖으로 나오면 여성은 비하의 대상으로 삼았던 대상을, 그러니까 자기 자신을 ‘복구’하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내외적 압박을 받게 된다. 이것이 내가 십대 시절 내내 어렴풋하게 품고 있던 고민일 것이다.
이십대에 들어선 이후 나는 <개그 콘서트>나 <웃찾사>와 같은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대신 한국문학을 읽었다. 그런데 가끔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나면 마음이 좀 허전해졌다. 다른 사람이 읽는다면 재미있어하고 웃을 것 같다는 생각부터 먼저 드는 것이었다. 이후 한국문학 편집자로 일하면서 신간 안내문과 해설 등을 접하며 나는 내가 머리로만 웃게 되었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소설을 설명할 때 유머와 위트, 농담 같은 단어는 여간해서 잘 빠지지 않는다. 유머는 한 사람의 지적 능력과 관련되어 있고, 삶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문학에서 어떤 종류의 유머도 없기란 오히려 어렵다. 하지만 ‘능청맞은 이야기꾼’ ‘익살맞은 재담꾼’ ‘포복절도시키는 유머리스트’ 등과 같은 수식어들은 대부분 남성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설명할 때에 사용된다. 그리고 여성의 경우라면 주로 ‘따뜻한’이라는 표현이 유머를 수식하며 그 속성을 제한한다. 물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럿일 것이다. 유머를 구사하는 작가에게도, 또 이를 받아들이는 독자에게도 어떤 제약들이 가해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캡처한 장면은, 윤성희의 단편소설 「어쩌면」(『웃는 동안』, 문학과지성사, 2011)의 일부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그동안 여성 작가들의 유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다. 여러 제약들을 통과해 살아남은 여성 작가의 유머를, 나는 또다시 어떤 제약들 때문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과 함께 이 소설이 떠올랐다. 다시 읽은 이 소설은 시종일관 웃기고 그래서 드물게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소설을 인용하고 이것을 설명하는 일만큼 ‘노잼’인 것은 없고, 나는 자신이 노잼으로 느껴지는 순간을 참을 수 없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이 일밖에 없는 것 같다.
「어쩌면」은 이야기 전체가 하나의 코미디 프로그램처럼 진행된다. 그리고 작가는 ‘멤버 소개’ ‘보라색 입술을 갖게 된 사연’ ‘우리들의 사주는?’ ‘심심하면 안 돼!’ 등 열두 개의 작은 챕터들을 통해 웃을 수밖에 없는 에피소드를 마련해두었다. 첫 챕터인 ‘멤버 소개’에서는 네 명의 여자 고등학생들이 소개되고 별명의 이유가 설명된다. 나, 압정(머리가 크다), 라디오(60년 된 라디오를 매일 밤 듣는다), 거울(얼굴에 죽은 모기가 붙은지 모를 정도로 거울을 안 본다)은 수학여행을 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 모두 죽는다. 이어지는 ‘보라색 입술을 갖게 된 사연’에서는 곧 귀신이 되어 떠도는 네 명의 입술이 시퍼런 빛을 띠게 된 까닭이 설명된다. 이는 그들이 단지 귀신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죽기 전 휴게소에 들러 죠스바를 사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 “「어쩌면」은 죠스바를 먹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다”(「작가의 말」)고 밝혔다. 이 말은 마치 작가가 웃기는 이야기를 쓰려고 작정했다는 말처럼 느껴진다. 같은 챕터에서는 네 명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 또한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는데, 이중 압정의 사연은 이러한 느낌을 확신하게 만든다. 차 밑에 깔려 있던 압정을 구하기 위해 반 아이들이 힘을 합쳐 버스를 들어올렸다가 그만 힘이 빠지는 바람에 도로 놓쳐서, 그 충격으로 결국 압정이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유머는 계속 시도된다. ‘우리들의 사주는?’은 이렇게 단명한 네 명의 여자아이들이 죽기 전에 보았던 점에 대한 이야기다. 라디오가 손바닥을 펼치자 아주 긴 생명선이 펼쳐지고, 압정의 사주는 이런 식이다. “사주쟁이의 말에 의하면 압정은 오십대에 이름을 날린다고 해. 난 아침밥은 한국에서 먹고, 저녁밥은 뉴욕에서 먹는, 그런 삶을 산다고 했어.” 이처럼 이야기의 맥락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들이 있는가 하면, 슬랩스틱에 대한 시도도 꾸준히 이어진다. ‘심심하면 안 돼!’에서는 귀신이 되어 마땅히 할일이 없는 네 명이 일부러 튀어나온 못을 깔고 앉아 있거나, 잡히지도 않는 상대방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는 시늉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묘사된다. 작가는 귀신이 되어서도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으려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설정을 통해 이들이 다른 귀신을 만나 공중부양을 배우도록 한다. 이들이 공중부양을 배우려는 이유는 “사람들과 같이 길을 걷는 건 힘든 일이야. 사람들이 내 발을 향해 침을 뱉을 때마다 나는 아직도 깜짝 놀라”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중부양을 가르쳐줄 할머니 귀신을 만나 선생님이라 부르며 가르침을 받게 되는데, 바로 이 과정에 내가 캡처한 장면이 있다.
「어쩌면」에서도 작가는 다른 소설에서 그렇게 했던 것처럼, 등장인물 각자에게 그 비중에 상관없이 또렷한 역사를 만들어주고 있다. 이중 라디오는 60년도 더 된 오래된 라디오를 밤마다 듣고 학교에 와서 그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라디오라고 불리고 있다. ‘멤버 소개’에 나오는 별명에 대한 사연은 다소 심심하게 느껴지는데, 몇 챕터를 건너뛰고 나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우리를 날게 하는 말들’에서 공중부양의 달인인 선생님은 공중부양에 앞서 각자가 좋아하는 단어를 생각해보라고 한다. 그러자 라디오는 ‘라디오’라고 말하며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힌다.
라디오는 우리에게 왜 고장 난 라디오를 대대로 간직하고 있었는지 말하고 싶어했지. “그 라디오가 할아버지를 죽였어.” 라디오의 할아버지는 지독한 난봉꾼이었나봐. 할아버지가 술집에 나타나면 술을 먹던 사람들이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자리를 피할 정도였다네. “그래, 술만 마시면 할머니를 엄청 팼나봐. 할머니에게는 라디오 듣는 일이 유일한 위안이었어.” 장마가 시작되던 어느 여름이었다고 해. 라디오의 할아버지는 진흙으로 범벅이 된 신발을 신은 채 안방 문을 걷어찼어. 자고 있는 마누라의 옆구리를 걷어차려는 순간, 갑자기 라디오가 켜지더니 <신라의 달밤>이라는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어. 할머니가 라디오를 집어 검은 그림자를 향해 던졌다고 해.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라디오의 어깨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선생님이 물었어. “라디오가 할아버지의 이마를 맞혔어요. 할아버지는 쓰러지면서 문지방에 머리를 부딪혔는데, 그 자리에서 죽었대요.”
(「어쩌면」, 『웃는 동안』, 27쪽)
웃음은 반전을 통해 지나간 이야기를 재해석하게 만들면서 발생하기도 한다. 이 장면으로 인해 우리는 할머니에서 어머니에게로, 또다시 딸에게로 모계에 따라 라디오가 전해져내려오는 까닭은 물론, 라디오가 주파수가 제멋대로인 고물 라디오를 두고 “내 라디오는 스스로 방송을 선택해”라고 말한 속내를 새롭게 짚어보게 된다. 덧붙여 <신라의 달밤>의 가사는 이렇다.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 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황예인
한국문학 편집자, 평론가, 출판사 스위밍꿀 운영 중……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MBTI 검사를 해보는데, 그때마다 다르게 나와서 더 큰 혼란에 빠지는 사람.
2018/08/28
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