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내무부 훈령 제 410 호.’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은 내무부 훈령이라는 이름으로 멀쩡한 사람들을 부산 형제복지원에 감금하며 ‘부랑인’으로 낙인찍고 인권을 유린했습니다. 『살아남은 아이』의 저자 한종선씨도 피해 생존자 중 한 명입니다. 시설은 1987년 폐쇄되었고, 한종선씨는 살아남았지만, 아버지와 누나는 정신병동에서 지금도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최근 검찰총장이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을 찾아 국가의 잘못을 사과했지만, 피해 생존자들이 바라는 진상 조사를 위한 특별법 제정은 아직 국회에서 수년째 잠자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공모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곁에서 인간의 인간됨을 실현하고자 국회 앞 농성장에서 400일 넘게 함께하고 있는 임인자 감독의 목격자 기고문을 잘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존엄’한 삶을 위하여. 사람의 권리가 존중되는 인권 대한민국을 위하여.


   한때 나는 개였고 소였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 나 역시 아니 우리 가족 역시 당신들과 같은 가정이 있었던 일반 사람이었다. 사람에서 짐승처럼 되긴 쉽다. 그렇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말로는 쉽지만 사실은 너무나 힘이 든다. 죽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지금 힘들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려 한다. 1)

    처음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게 된 것은 2013년 변방연극제를 준비하면서부터이다. ‘만일 세상이 극장이라면, 그곳에 아무런 역할도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이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고 싶다.’는 장지연 작가로부터 변방연극제에 초대 제안을 받으며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게 되었다. 그해 여름 장지연 작가는 <우리는 난파선을 타고 유리바다를 떠돌았다>라는 작품을 변방연극제에서 올렸다. 작품을 준비하며 작가님이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한종선씨와 함께 한종선씨의 아버지와 누나가 계신 병원에 면회를 가자는 제안을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함께하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려 2013년 7월 말, 변방연극제를 마치고 한종선씨와 함께 아버지, 누나의 병원 면회를 다녀왔다.
   한종선씨는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이다. 그의 아버지와 누나는 1980년대 형제복지원에 수용되었고, 이후 줄곧 병원에 입원해 계신 상태이다. 1987년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이후 한종선씨는 당시 서울 은평에 있는 소년의집으로 전원 조치되었고 가족들과 이별한 상태였다. 2007년경 군산에 있는 미군 부대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친 한종선씨는 회사로부터 산재 처리를 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억울한 마음에 본인의 사연을 인터넷에 올렸다. 그리고 동사무소를 찾아가보라는 누군가의 답글을 보고 동사무소에 갔다가 그곳에서 아버지와 누나의 주소를 찾게 됐고 아버지와 누나가 각각 언양과 부산 근처의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한종선씨는 울분 속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2008년 광우병 집회 때는 아버지와 누나처럼 병원에 있는 수용자가 아무런 정보도 없이 먹을 것을 먹게 된다는 생각에 집회 현장을 찾았고 그곳에서 1인 시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도 약 5년간 생각만 반복하다가, 2012년 5월경 자신이 노예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국회 앞으로 나가게 된다. 그렇게 한종선씨는 2012년 국회 앞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리는 1인 시위를 전개한다.
   1인 시위 도중 그는 허름한 차림의 교수라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시위 팻말에 붙은 한종선씨의 입소 사진을 본 교수는 한종선씨에게 “당신의 언어로 싸우세요.”라는 이야기를 했고, 한종선씨는 그 길로 짐을 싸 자신이 사는 구미로 내려가 형제복지원에서 겪었던 일들을 기록한 『살아남은 아이』라는 책을 펴냈다. 『살아남은 아이』는 어린아이였던 수용자가 성장하여 약 25년간의 침묵을 뚫고 내놓은 기록이자, 1988년 출간된 『형제복지원: 생지옥의 낮과 밤』(당시 브리태니커 영업사원이었던 김용욱씨가 써낸 15일간의 수용 기록) 이후 나온 고발서이다.

   나는 누구입니까, 짐승에서 사람이 된다는 것
   인간의 존엄에 대해 나는 그동안 무엇을 감각하고 있었을까. 주어진 환경과 질서 속에서 세상의 구조적인 벽과 모순에 부딪히고, 잘못된 질서의 억압에 대해 나는 어떻게 감각하고 있었을까. 한종선씨는 질문하고 있었다. 형제복지원에서 ‘눈동자도 움직일 수 없었던’ 그곳에서의 삶의 고통과 억울함뿐만 아니라, 왜 자신이 잡혀가야 했는지, 왜 인권 유린을 당해야 했는지, 그때까지 국가는 무엇을 했는지, 자신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변방연극제를 기획하면서 최전방이라 외쳤던 변방, 안과 밖의 경계라는 변방의 개념 역시 제도 위에서의 고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낮은 곳에서,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에 대해, 결국 인간의 존엄은 무엇인가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사람에서 짐승이 되긴 쉽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기는 너무 어렵다.’는 그의 외침에 응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은 바람 : ‘부랑인’이라는 배제의 경험으로부터 피해 생존자라는 정체성으로 활동하기까지
   2012년 11월 『살아남은 아이』 책이 출간된 이후, 2013년 3월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리는 첫번째 세미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공저자 전규찬 교수는 “우리 사회에 경제 발전이라는 서사와 민주화라는 거대한 두 가지의 서사가 존재한다면, 여기 대감금의 역사가 있다. 그것이 바로 형제복지원 사건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바로 대감금의 역사 속에 낮은 목소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한종선씨는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인권활동가 및 변호사,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형제복지원 사건 대책 위원회를 함께 주도했고, 2013년 11월에는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실종자·유가족 모임을 결성했다. 그 첫 모임에서 나는 총무 역할을 맡게 되었다. 2014년 3월에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형제복지원 사건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014년 4월에는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실종자·유가족 모임 결성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처음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모임이 결성된 이후, 피해 생존자분들이 한 명 두 명 모이기 시작하여 형제복지원 대책 위원회와 함께 특별법 발의 및 사회적으로 알려가는 일들을 전개했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은 내무부 훈령 제410호에 의해 잡혀갔던 기억 때문에 ‘부랑인’이라는 낙인으로부터 고통을 겪었다. 기준도 이유도 없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잡혀갔고, 사회로부터 배제된 경험은 결국 1987년 형제복지원 폐쇄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계속되었다. 때문에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라는 교육의 경험도 없이 무작정 사회로 나와 부랑인, 고아, 양아치 등의 낙인 속에 사회로부터 배제된 삶이 이어졌다. 이러한 과정 속에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모임이라는 자발적인 모임과 단체를 이어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사회로부터의 배제와 격리의 경험은 세계에 대한 단절과 불신으로 이어졌고, 고통은 함께 파도처럼 전이되었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사람처럼 이들에게 세상은 결코 나은 이상향이 아니었고, 좌충우돌했다. 낮은 바람과 목소리는 작은 어려움에도 휘청일 수밖에 없는 위태한 것이었다.
   그러나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은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마음의 파고와 고통, 실존의 위협 속에서도 결국 세상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 함께 힘을 합쳐 나가기 시작했다.
   2014년부터 1인 시위를 릴레이로 전개했고, 2015년부터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리기 위한 단식 농성, 노숙 농성, 삭발 시위, 그림전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2017년 9월에는 국토대장정을 진행했다. 부산 주례동 형제복지원 터 앞에서 출발하여 청와대 앞까지 이어지는 긴 여정이었다. 힘든 여건과 좋지 않은 신체 조건 속에서도 함께 서로를 독려하며 한 달 넘는 국토대장정을 이어갔다. 그러면서 서로를 좀더 가까이 이해하게 되고, 형제복지원 진상 규명을 위한 의지를 다져나갔다. 사회적 연대도 함께 해나갔다. 2014년에는 세월호 사건 해결을 위한 연대 기자회견을 자체로 조직하였고, 2016년에는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이향직씨 가족이 촛불시위에서 매주 서명전을 이어갔다. 현재는 형제복지원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앞에서 다시 노숙 농성을 이어가고 있으며, 2018년 12월 11일 현재 차가운 거리에서 농성 400일째를 맞이했다.

   검찰총장의 눈물, 악어의 눈물이 되지 않기를
   촛불 혁명으로 정권이 바뀐 이후, 검찰 과거사 진상 조사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모임, 형제복지원 진상 규명을 위한 대책 위원회, 그리고 당시 형제복지원 사건을 처음 수사한 김용원 검사(현재 변호사)가 함께 모여 수사 탄압에 대한 진상 조사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이후 검찰 과거사 진상 조사 위원회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이 조사되었고, 1987년 당시 정권의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대법원에서까지 무죄로 선고되었던 ‘특수감금죄’에 대한 비상상고가 신청되었다. 그리고 결국 검찰총장이 찾아와 사과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의 의미는 너무 늦게야 과거의 일에 사과하는 것에 대한 회환도 있겠지만, 엄밀히는 과거 정권에서 사법부에 대한 개입으로 좌지우지되었던 국가권력에 대한 잘못을 사과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 내무부 훈령 제410호라는 명목으로, 그리고 사회 정화 사업이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수용하는 인간의 존엄이 사라진 강력한 통제에 시기에 대한 반성이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눈물의 의미는 앞으로의 정부의 실천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형제복지원 진상 규명을 위한 법률적 제도 마련이 절실하다
   현재로서는 공소시효라는 이유로 이 사건에 대해 진상 규명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결국 입법 활동을 통해 진상 조사를 할 수 있는 법적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 끝없는 고통 속에서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이 400일이 넘도록 거리에서 노숙을 하고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기 위해서다. 그래서 왜 잡혀야 했는지, 왜 인권 유린을 겪어야 했는지, 왜 국가 공권력은 자신들을 잡아 가두었는지 이유를 알기 위해서다. 그것을 위해 형제복지원 폐쇄 이후 31년,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사회는 이들을 방치해두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한다. 입법 활동을 해야 할 국회는 여전히 아무런 행동을 취하고 있지 않다. 처음 형제복지원 특별법 입법 제안이 시작되었던 2014년 7월 이후 19대 국회에서는 단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폐기되었고, 20대 국회가 시작되고 나서 2016년 4월 다시 발의되었지만, 여전히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입법을 위해서는 각 상임위의 법안소위와 상임위, 법사위원회와 예결위원회 그리고 본회의까지 거쳐야 하는 관문이 많이 있는데도, 형제복지원 사건을 포함한 과거사 사건은 단 한걸음도 걸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권의 문제는 어떠한 이해와 대립이 없어야 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대립하면서 잠들어 있다.

   다시는 공모자가 되지 않기 위해
   형제복지원 사건을 세상에 다시 알린 『살아남은 아이』의 부제는 ‘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이다.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들이 부산 시내 거리에서, 부산역 앞에서, 용두산 공원 앞에서, 자갈치 시장에서 잡혀갈 때, 누군가는 분명 그것을 목격하였을 것이지만, 그 누구도, 아무도 그것에 문제 제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나 자신의 평안과 안녕을 위해 그 누군가의 사라짐을 감각하지 못했다. 나 역시 누군가를 밟고 딛고 서 있다는 것을 감각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고통과 도움을 요구하는 손길을 외면했다는 것을 감각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공모자가 되었다는, 가해자였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에 대해 반성한다. 시민으로서 예술가로서 나는 구조적인 모순과 억압받은 경계 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방조자였다는 것을 깊이 인식한다. 배제되고 차별의 고통 속에서도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분들을 포함한 사람들의 목소리에 부족하지만 함께 귀 기울이고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은 더이상은 가해자도 공모자도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사실은 고통스럽다. 고통이 전이된다. 슬픔과 고통으로 온몸이 옥죄어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실천하지 않으면 다시는 인간이 돌아갈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오늘도 길 위에서 함께 하고 있다.


임인자

독립기획자, 소년의서 대표. 낮은 바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고 있다.

2018/12/25
13호

1
한종선·전규찬·박래군 공저, 『살아남은 아이』, 도서출판이리, 2012, 126~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