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윤이 웃으면서 눈에 고인 물기를 닦아냈다. 털 한 오라기, 턱수염 한 올, 콧수염 하나하나가 자라나 살을 뚫고 나올 때마다 그애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마나 좋아했을지 눈에 보여서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웃으려고, 그애는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혼자서 싸워왔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희미하게 한번 웃고는 고운 얼굴로 간 엄마도 마찬가지였고.
   오직 자신에게만 들리는 아우성을 속에 품은 채, 진짜와는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보고 듣고 짐작하고 취급하는 세상 속을 계속 걸어가야 하는 괴리감과.
   말하고 싶은데 입을 다물어야 하는 수두룩한 순간들과.
   그런 고립 상태와.
   엄마와 재윤은, 내내 싸워왔던 것이다.
   나는 어떤 것과도 그런 식으로 싸워본 적이 없었다.1)

   바야흐로 한국소설에 여성주의 물결이 거센 지금, 단 하나의 장면을 골라야 한다면 어떤 소설을 ‘캡처’해야 할까. 오래 고민하다가 결국 윤이형을 다시 읽었다. 그가 “저에게 한국문학계의 성별은 남성입니다. ‘문학’을 떠올리면 특정한 성별이 떠오르지 않거나, 각각의 작가와 개별 작품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문단’을 의인화해보면 저에게 그 성별은 분명 남성입니다.” 2)라고 말했던 것이 계속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피클」(《Axt》 2017년 9·10월호) 같은 작품도.3)

   그간 윤이형의 이력을 따라가면서 근작에 이르러 드는 생각은 이 작가가 여전히 치열하게 스스로와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 의심하고, 조금 더 따져보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다시 고민하고, 옳다는 믿음이 혹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고. 지금 페미니즘의 논의가 끊임없이 진행형임을 고려했을 때, 또 각자의 자리에 서서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지 우리가 고민해야 할 수많은 지점들을 생각하면 윤이형의 작업은 소중하고 의미가 커 보인다.
   「마흔셋」은 세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마흔셋’의 ‘나’와 ‘엄마’, 그리고 동생 ‘재윤’까지, 이들은 모두 여성이(었)다. ‘엄마’의 삶을 우선 들여다보자. 두 아이를 성인으로 키워내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후 조용히 홀로 살고 있다. 이 세대의 여성 대부분의 삶이 그러했듯, “엄마는 영민하고 선량한 사람이었지만 자식들의 삶을 위해 지나치게 헌신했고, 아버지와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단호함과 생기와 자존감 대부분을 잃어버렸다.”(128쪽) 그리고 ‘자궁암’에 걸려 항암치료를 거듭하다 생을 마감했다. 그 ‘엄마’에게 큰 상처로 남은 것은 “태어날 때부터 남자의 정신을 갖고 있어서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궁을 들어내겠다는 장기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춰 치밀하게 직장을 구하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돈을 모으는”(128쪽) 둘째 ‘재윤’의 선택이었다.
   ‘재윤’은 “삽십칠 년” 동안 “진짜 내 몸이 없”(124쪽)는 느낌으로 살아왔고, 무수한 고민과 준비 끝에 ‘몸을 바꾸기로’ 결심한다. ‘재윤’은 ‘나’에게 이제 ‘언니’가 아니라 ‘누나’로 부르겠다고 선언하고, ‘엄마’에게도 그 결심을 전한다. 그 이후는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 가능할 것 같다. 집요한 설득의 시간들과 화를 내고 울기도 하면서 자책하던 시간들. 그 시간들 속에 ‘엄마’는 생을 마감했고, ‘재윤’은 수술 후 3년이 지난 지금 마흔의 나이가 되어 ‘누나’와 함께 수영장에 와 있다.
   ‘나’는 어떨까. 평범하게 자라나 이십대 초반 “문화적으로는 톡톡히 혜택”을 받았던 ‘나’는 “평생 어느 곳에도 고이지 않기를”(125쪽) 바란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과 이직을 반복하다가 대학원에 들어가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기도 하면서 결국 “시간강사가 되어 대학에 자리를 얻”(126쪽)었고, 비혼의 삶을 살면서 “내 이름으로 된 두 권의 책”(127쪽)도 갖게 된, 남들이 보기에 ‘나’는 “그럭저럭 괜찮고 멋있는 중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135쪽) 보인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차 중심으로부터 밀려나고 새롭게 무언가를 깨달아가는 일도 뜸하고, 혼자인 것이 편안하기보다 쓸쓸함에 가까워지고, 무엇보다 “통장에 매일이 불안하지 않을 만큼의 잔고”(135쪽) 같은 게 없어 지금의 삶을 지속할 수 있을지, 미래는 어떠할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런 불안과 아득함은 ‘엄마’와 ‘재윤’의 삶에 비추어 봤을 때 차라리 사소하다고 해야 할까? “나는 어떤 것과도 그런 식으로 싸워본 적이 없었”(132쪽)기 때문에?

   그렇게 거대하고 절박한 질문은 아니어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떤 막막한 심정은 내게도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그것의 조각들이 내 몸속을 작은 반딧불들처럼 날아다니다 새벽이 되어서야 꺼지는 광경을 느리게 느리게 지켜보곤 했다.(135쪽)


   이 장면에서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는 일에 대해 정확히 두 가지를 알게 된다. 우선 나보다 더 “거대하고 절박한 질문”을 가진 사람이 분명히 있다는 것. 즉 상대방의 고통과 상처를 나의 그것과 굳이 비교하지는 않되 생의 모든 것을 걸고 그 아픔을 이겨내려는 더 큰 싸움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나의 고민과 막막함을 스스로 절대 폄하하지 말 것, 그리고 “사람마다 다르니까”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힘껏 살아 있어야 한다”(135쪽)는 것. 수많은 젠더적 정체성을 단지 당사자성만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그 폭은 얼마나 좁아질 것인가. 하지만 또 “오직 자신에게만 들리는 아우성”(132쪽)을 어떻게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까.
   윤이형의 소설은 홀로 남은 ‘엄마’가 자신의 병, 그리고 ‘재윤’의 선택과 싸워가면서 끝내 죽음에 이르고, ‘재윤’이 트랜스젠더로서의 삶을 결정하는 시간 속에 ‘나’를 서 있게 만든다. 누군가는 자궁의 종양으로 죽음에 이르고, 또 누군가는 자궁을 들어내려고 하는 사건들 속에서 ‘나’의 자궁은(중의적인 의미에서) 연령으로나 젠더로나 애매하게 끼어 있다. 그러나 ‘나’의 삶이 감당해야 했던 몫도 적지는 않음을, 그들 각자가 가진 ‘고립’과 ‘슬픔’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그것을 곁에서 지켜봐왔던, 또 지켜볼 ‘나’ 역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어떤 막막한 심정”(135쪽)이 있었음을 윤이형은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은 읽어가는 동안 여러 번 울컥하게 만들고 계속 멈추게 하는데, 결국 싸울 것도, 그렇다고 버릴 어떤 것도 없는 ‘나’의 삶이 “비어 있지만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139쪽) 생각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엄마’와 ‘재윤’은 그들의 컴퓨터 바탕화면에 각자의 결심이 반영된 사진을 깔아두지만 ‘나’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아무것도 깔아두지 않”(139쪽)았는데, 그래도 “좋을 거라고”(139쪽), ‘걸스카우트’였던 어린 시절 어두운 밤에 산길을 무사히 내려왔던 그 기억처럼, “그때 할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지금도 할 수 있지 않을까”(138쪽) 하고 ‘나’는 생각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지도 못하고, 그래도 서로를 붙들어가면서, 또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혐오와 배제의 시대에서 곁을 내어주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작은 틈을 열어두면 어쩌면 우리 무사히 살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소설이 말하는 것은 거기까지인 것 같은데, 왠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인다.


노태훈

문학평론가.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하는데, 그래도 아는 데까지는 또 말하고 싶어서 이런 걸 쓴다.

2018/12/25
13호

1
윤이형, 「마흔셋」, 《문학동네》 2018년 여름호, 132쪽; 이하 이 책에서 인용할 경우 본문에 쪽수만을 표기한다
2
윤이형, 「나는 여성 작가입니다」, 『참고문헌없음』, 참고문헌없음 준비팀 엮음, 2017, 178쪽.
3
이 지면의 첫 필자였던 소영현이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소영현, 「못 믿을 말들―거짓말, 일기, 꿈, 상상」, 《비유》. http://view.sfac.or.kr/html/epi_view.asp?cover_type=VWCON00003&cover_idx=43&page=1&epi_idx=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