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2017~2020)
런던의 이방인, 슈퍼마켓에 갑니다
환대
그 해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혐오와 우울감이 내 도시 여기저기에 흩뿌려져 있던 해였다. 서울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부정적인 감정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시간, 조금 비겁하지만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 잠시 떠나기로 했다. 삶의 만족도를 조금 향상시켜 보자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장소는 어디든지 상관없었다. 거창한 목적도 없었으니. 예전에 여행을 하다가 한 번 살아 보고 싶다 생각했던 곳은 오스트리아의 빈Wein,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Starasbourg 그리고 덴마크 코펜하겐Copenhagen이었지만. 넘기 힘든 언어의 장벽과 주변의 우려를 무시할 수 없었다. 도착한 곳은 영국의 런던London. 그 해는 이상기후로 평년보다 조금 더 따뜻했다.
런던에 간다면 악명 높은 세 가지 장애물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런던 히스로 공항 입국 심사대, 날씨 그리고 음식. 주섬주섬 서류를 챙겨 재빨리 입국 심사대 줄에 섰다. 내 앞에 어린아이를 데려온 한 가족의 입국심사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지, 서류가 미비한 건지 입국 심사관의 미간에 주름이 져 있었다. 괜히 걱정이 밀려들어 저절로 착한 얼굴이 되었다.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기. 물어보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기. 그리고 몇 가지 강조할 것들을 되뇌었다. 장기 체류 비자를 가지고 있다, 영국에서 사용할 돈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한국에 하던 일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체류 기간이 지나면 돌아가야 한다. 아까와 달리 마음씨 좋아 보이는 입국 심사원은 내게 질문을 하는 대신 내 여권의 생년월일을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내 비자 위에 웃으며 입국 도장을 찍었다. 난 네 서류상의 나이를 믿지는 않지만, 런던에 온 걸 환영해! 런던 입성의 장애물을 하나 넘었다.
서울에서 11시간 50분가량을 꼬박 날아 도착한 런던의 날씨는 맑음. 매우 맑음. 양손에 허리까지 오는 슈트케이스를 끌고 런던 시내 어딘가에 내렸다. 잠시 그 햇살을 느끼고 싶어서 길 한 구석에 가만히 멈춰 섰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황사와 미세먼지에서 해방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만족도가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곧 흐리고, 이 도시 곳곳에 비가 흩뿌려진다 할지라도. 내 몸속 세포들이 건강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살아있구나 실감나는 순간. 사실 런던은 내 마음속 일 순위가 아니었는데. 내가 이렇게 런던에 오고 싶었던가. 애써 생각했다. 아마 기내에서 본 영화<패딩턴Paddington> 때문일 거야 런던에 대한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 영국관광청이 제작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영화. 그날 런던 날씨는 하루 종일 맑음. 매우 맑음.
마지막 남은 장애물인 음식을 극복하는 데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전에 영국을 방문했을 때, 꽤나 맛있게 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아무거나 잘 먹기 때문인지, 정말로 영국의 음식이 괜찮아서 인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그때 친구와 런던에서 먹었던 음식들은 꽤 괜찮았다. 친구와 나의 가난한 주머니로 갈 수 있는 식당은 한계가 있었을 터인데도 말이다. 심지어 우리는 피쉬앤칩스fish and chips에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던가. 그중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슈퍼마켓에서 파는 ‘레디밀ready meal’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친구와 내 눈이 동그래졌던 것 같다. 런던이 너무 춥고, 우리는 많이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을까. 그때 우리는 런던 2존의 허름한 호텔에서 아침으로 먹었던 체인 슈퍼마켓 ‘막스앤스펜서M&S’의 레디밀을 두고두고 칭찬했었다.
영국 음식
사실 익숙한 곳을 떠나는 것은 낯선 식탁에 앉을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을 선사해 주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곳에서는 하루가 세 끼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평소보다 작아진 것 같은 위장을 탓하며. 내 경우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그랬다. 반면 어떤 곳에서는 음식 때문에 걱정을 하기도 할 테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국이야말로 그런 곳인 것 같다. 지구 반대편 나라의 맥주 광고에 출연했을 만큼 유명한 스타 쉐프 고든 램지Gordon Ramsay 1)의 나라인데도. ‘요리’보단 ‘음식’이라는 단어가 ‘영국’과 더 잘 어울리는 듯도 하다.
‘사랑 없는 결혼Loveless Marriage’. 영국인과 음식의 관계에 대한 농담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심지어 영국인들 역시 ‘이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짧든 길든 영국으로 떠나 본 사람들이라면 익히 들어 보았을 영국 음식과 날씨에 대한 박한 평가들. 나 당분간 영국에 있을 거야. 식도락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지인들은 역시 영국의 음식에 대해 한 마디씩 던졌다. 떡볶이 양념 사가! 혹은, 내가 영국 음식을 그 돈 주고 먹었다니!
친구들은 몇 개의 레시피를 보내 주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음식은 영국행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인 듯 보였고, 형편없는 영국 음식에 대해 한 마디씩 언급하는 것은 이미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유머 코드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음식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는 것과는 달리.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이전 런던 여행에서 음식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내가 그다지 까다로운 미식가가 아니고, 어디서나 적응을 잘하는 편이기 때문일까.
척박한 땅에 감자가 주식인 영국인들의 식탁은 바다 건너 프랑스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영국인들은 매 끼니 감자를 튀겨 먹고, 구워 먹고, 으깨 먹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먹는다.2) 어느 인터뷰에서 유럽 대륙의 한 인터뷰이는 영국인과 음식의 관계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영국인들은 좋은 음식을 ‘권리right’라기보다는 ‘특권privilege’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실제로 나를 만나러 영국에 놀러 온 프랑스 친구는 영국 음식을 먹는 것에 지쳤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친구의 아버지가 쉐프라 더욱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지만. 한 집에서 부엌을 함께 사용했던 스페인 출신 존Jon은 영국산 토마토를 플라스틱에 비유하기도 했다. 아무 맛도 안 난다고. 왜 굳이 영국산을 사 왔을까 궁금하긴 하다. 런던에서도 더 맛있고 심지어 더 저렴하기까지 한 스페인산 토마토를 살 수 있는데. 어쨌든. 영국 음식에 대한 그의 불평을 함께 듣던 다른 영국인들은 그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스페인 사람에게 음식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며 특유의 씁쓸한 유머로 받아치곤 했다. 물론 뒤에선 영국 음식이 그렇게까지 못 먹을 음식은 아니지 않냐, 우린 먹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도와줄까?
악명 높은 히스로Heathrow의 입국 심사를 무사히 지나, 가장 먼저 마주친 영국인들은 튜브tube3)의 피커딜리 라인Piccadilly Line에서 내 엄청난 짐들을 기꺼이 들어주고 옮겨주는 이들이었다. 그다지 작지 않은 내 덩치에도 양손 가득한 짐들이 버거워 보였던 걸까, 늦은 오후 이른 퇴근길의 사람들은 먼저 도와줄까? 하며 손을 내밀어 주었다. 아마도 큰 짐을 들고 런던의 대중교통을 이용해 본 이들이라면 뒤에서 스윽 나타나 Can I help you? 하면서 내 짐을 번쩍 들어다 준 후, 바이바이하고 쿨하게 가버리는 런더너들을 만나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그들의 미덕은 도와준 뒤 치근덕거리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중 버스에서 벽에 기대어 놓은 내 짐이 밀리지 않게 슬쩍 잡아주고 있던 소년이 인상 깊었다. 그의 양 볼에 주근깨가 살짝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십 대 후반 즈음 되었을까. 고맙다는 나의 말에 그는 쑥스러운 듯 눈도 못 마주치지 못한 채 싱긋 웃으며, 계속 가만히 내 가방을 잡아 주더라. 내가 내릴 준비를 하느라 부스럭거리자, 그는 말없이 내 짐을 바닥에 내려주고 나서는 미소 지으며 다시 버스에 폴짝 올라탔다. 그 배려에 나는 기분 좋게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영국에서 내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은 아마도 슈퍼마켓이었을 것이다.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은 보냈을까. 낯선 브랜드들이 너무 많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곤 했다. 현명한 소비를 위해. 그곳에서 귀에 가장 많이 들리던 말 역시 도와줄까? 마치 지하철에서 내 짐을 들어 주던 사람들처럼. 결코 거절이라는 것을 모르는 나의 Thank you very much. 라는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동네 사는 아주머니, 할아버지 할 것 없이 이 소스는 어떤 음식에 쓰면 더 맛있다거나 이 푸딩이 괜찮더라며 잠시 수다스러워지기도 했다. 문장 끝에 Lovely, sweetheart, love. 등을 붙여 가면서. 이 사람들 눈에 내가 그렇게 사랑스럽나 잠시 착각했을 정도로. 처음에는 뜨내기로 보이는 나에게 영업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별로인 것도 얘기해주는 걸 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특히 감자 칩 스낵crisps 코너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 맛있는 것을 추천해주며 말을 거는 사람들이 많더라. 잉글리쉬 체더치즈 맛과 블랙페퍼 맛을 가장 많이 추천받았다. 역시 감자는 영국인들의 영혼의 주식인가 보다.
영국에 오기 전에는 영국의 문학이 궁금했는데, 도착하고 나니 영국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당분간 내가 머물기로 한 이곳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매일 슈퍼마켓에 들렀다. 밖에 나갈 때는 물을 한 병 샀고, 집에 들어올 때는 과자 한 봉지라도 손에 들고 들어왔다. 한 달 생활비의 많은 부분을 슈퍼마켓에서 썼던 것 같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엔 동네의 슈퍼마켓의 직원들과 서로 안부를 묻고 주말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었다. 슈퍼마켓에서 제공하는 커피를 마시며 4) 버스를 타기도 하고, 커피가 추출되는 동안에 내 뒤에 서 있는 사람과 커피 맛에 대해 스몰 톡small talk을 나누기도 하고. 슈퍼마켓은 많은 대화를 이끌어내는 소재이기도 했다. 적어도 영국에서는 더욱 그러한 듯 보였다. 물론 날씨 얘기 다음으로.
일상을 여행하기
런던에 도착해 햄스테드Hampstead에 머물렀다. 햄스테드는 센트럴 런던Central London이라고 불리는, 중심지에서는 버스로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2존에 위치해 있는 주거지역이다. 그곳은 작은 정원이 딸린 주택들이 일렬로 늘어선, 전형적인 중산층 영국인들이 사는 동네였다. 지인 중 런던 햄스테드에서 나고 자란 리즈Liz는 이 지역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그녀는 영국인들이 살고 싶어 하는 지역 중 하나가 햄스테드라고 말해주면서 그녀의 어머니가 살던 곳, 자신이 자주 가던 곳들을 알려주었다. 사치스럽지 않으면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 분위기는 확실히 서남부의 사우스 켄싱턴South Kensington과 같은 화려한 부촌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다. 처음 영국 여행을 갔을 때, 서울에서도 강남 중심가에 해당할 법한 사우스 켄싱턴 역 근처 숙소에 머물렀던 탓에 런던의 첫 이미지는 화려한 ‘나이트브리지Knightbridge’5) 였지만. 이번에 첫 밤을 보내게 된 햄스테드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는, 기품이 감춰진 듯 드러나는 동네였다.
길가에 한 집 건너 포르쉐Porche나 레인지로버Range Rover가 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사실 이 지역 런던에서 역시 손꼽히는 부촌이다. 자동차에 대한 지식은커녕 운전면허조차 없는 나는 집에 놀러 온 친구가 이 동네에는 슈퍼카가 많네 라고 얘기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다행히 예산에 맞으면서도 컨디션이 좋은 방을 구해서 기뻤을 뿐. 무엇보다 좋은 동거인flat-mate들도.
나는 삶에서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된 터라 간단한 파스타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대충 나가서 사 먹거나 빵이나 먹지 뭐. 같이 살던 폴Paul과 크리스티나Christina는 장을 보러 갈 때 나를 데려갔고, 저녁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강의 때문에 주중에는 옥스퍼드Oxford에 있었던 크리스티나 대신 폴은 뭘 어떻게 해 먹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곤 했다. 크리스티나와 나는 항상 이것저것 챙기고 확인하는 그를 ‘빅 브라더big brother’라고 불렀을 정도. 실제로 그가 거실에 앉아 있으면, 집이 작아 보이는 효과가 있을 정도로 그는 ‘큰big’ 사람이었다. 처음 요리에 도전한 나는 재료에 욕심을 낸 나머지 음식을 망쳐 버리기도 했다. 소고기를 그렇게 맛없게 만들기도 어려울 게다. 폴은 맛을 한 입 보더니 영국인답게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했다. 버리자. 실패가 이어지자, 요리에 겁먹고 대충 샐러드를 만들어 먹거나 밖에서 밥을 먹고 들어오곤 했다. 내가 점차 부엌을 이용하지 않게 되자, 폴은 이내 눈치채고 내 등을 떠밀었다. 일단 ‘웨이트로즈Waitrose’에 가. 레디밀Ready meal부터 시작해보는 게 어때? 집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일본슈퍼마켓과 한국슈퍼마켓이 있었지만, 한국 음식이라고 잘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과감히 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주거 지역답게 큰길을 따라 막스앤스펜서M&S, 아이슬랜드Iceland, 웨이트로즈와 작은 식료품점들이 즐비했다. 그 중 한 곳에 충성을 다 하기로 마음먹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슈퍼마켓을 쓰다
어디로 떠나든지 나의 여행은 그곳의 슈퍼마켓을 구경하는 것으로 시작하곤 한다. 물론 그날의 식량을 구비하려는 본능적인 이유도 있지만, 한 나라의 언어와 문화, 사람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슈퍼마켓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도 슈퍼마켓을 가는 것은 소비 행위 이상의 즐거움이다. 물론 시장을 구경하는 것도 좋다. 오래된 시장일수록 더 좋다. 각 지역의 재래시장을 구경하면 이것저것 먹을 것을 사는 것만으로도 이곳의 일원이 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왠지 그 나라의 말로 주문을 해야만 할 것 같다. 다만, 시장과 슈퍼마켓은 약간 다른 감각의 공간이다. 시장을 구경하는 것이 일상의 진부함을 잠시 멈추게 하는 즐거운 관광이라면, 슈퍼마켓을 들르는 것은 분명히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함이 있는, 삶 속으로의 산책이라고 할까.
사실 현대적 공간인 슈퍼마켓은 시장보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더 친절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여행자를 배려해주는 지도 모르겠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아라비아 숫자만 알면, 무언가를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괜찮고, 바가지를 쓰거나, 강매당할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최소한의 부담으로 최대한의 유용성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일 것이다. 특히 이방인에겐.
곳곳에 넘쳐나는 슈퍼마켓들은 비슷해 보인다. 시장보다 조금 덜 특별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차이점들이 보인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면, 특히 언어나 문화가 낯선 곳일수록, 그 차이는 더욱더 커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제품 패키지만으로도 우리는 그 나라의 몇 가지 독특한 음식의 종류와 단어들을 배울 수 있다. 최소한의 삶을 위한 그 단어들은 매우 유용하다. 낯선 공간에 도착한 이방인에게 중요한 것은 최소한의 삶이 아닐까. 심지어 만반의 준비를 하는 대신 발길 가는 대로 그 공간을 즐기고 싶다면.
낯선 곳에서 이방인을 도와주는 것은 평소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존재들이다. 슈퍼마켓에서 낯설디낯선 글씨와 함께 그려진 그림들은 마음 놓고 무언가를 집을 수 있게 한다. 갑자기 내가 알고 있는 언어라는 것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내가 갖고 있는 언어라는 것이, 나아가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알량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지식보다는 직관이 앞서는 순간. 내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물어볼 수도 없는 스스로를 보면서 새삼 겸손해진다. 내 앞의 사람들과 혹은 사물들과 소통할 언어가 없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고, 그 사라짐을 통해 평소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그림들과 그 친절에 감사하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즐거운 일은 그곳의 사람들을 보는 일이다. 그들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언제 그렇게 주변에 있을 익명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던가. 그들이 무엇을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 순간 나는 휴머니스트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잠시 후 다시 앞만 보며 잰걸음으로 거리를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하더라도.
슈퍼마켓에서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관심이 생겨난다. 텅 비어 있는 선반을 통해서 사람들이 무엇을 주로 사는지를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많이 집는 제품을 쇼핑 바구니에 넣어보는 것도 좋다. 재미있는 판촉 행사를 마주칠 가능성도 있다. 심지어 알아듣지 못해서 더욱 즐거울 때가 있다. 괜히 사람들 틈을 기웃거리면서 구경하다 보면,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하고, 못 알아들어 대답을 못 하는 자신이 우스워지기도 한다. 답답함보다는 유쾌함으로. 그러다 보면 내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희미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순간 나는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 속해 있던 누군가가 아닌, 오롯이 순수하게 나 자신으로 서 있는 것 같다. 나의 이름도, 그것을 말할 나의 언어도 필요 없는 그런 자유로운 순간. 일상에서 훌쩍 낯선 곳으로 떠난다고 해도 우리 삶의 여정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여기가 아닌 그 낯선 곳의 슈퍼마켓에도 들러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하루도 슈퍼마켓에 들르지 않는 날을 떠올릴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은 그 어느 곳에 있더라도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활인들에게 슈퍼마켓은 소비하는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지도 모른다. 혹시 슈퍼마켓은 우리의 삶과 생활을 보여주는 공간은 아닐까. 박물관보다 더 생생한 오늘을 전시하는 곳. 우리는 슈퍼마켓에서 식품이 아닌 생활을 산다.
나는 이곳이 궁금해졌고, 슈퍼마켓에 매일 가기로 했다.
*영국 슈퍼마켓을 통해 마주했던 영국인과 영국 문화에 대한 책을 쓰고 있습니다. 선입견 없이, 무례하지 않게, 호기심 많은 이방인으로서 영국을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이 글은 책의 일부를 가져온 것입니다. 『웨이트로즈, 오롯이 영국의 맛』(가제)을 쓰고 있습니다.
그 해는 그 어느 때보다도 혐오와 우울감이 내 도시 여기저기에 흩뿌려져 있던 해였다. 서울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부정적인 감정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시간, 조금 비겁하지만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 잠시 떠나기로 했다. 삶의 만족도를 조금 향상시켜 보자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장소는 어디든지 상관없었다. 거창한 목적도 없었으니. 예전에 여행을 하다가 한 번 살아 보고 싶다 생각했던 곳은 오스트리아의 빈Wein,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Starasbourg 그리고 덴마크 코펜하겐Copenhagen이었지만. 넘기 힘든 언어의 장벽과 주변의 우려를 무시할 수 없었다. 도착한 곳은 영국의 런던London. 그 해는 이상기후로 평년보다 조금 더 따뜻했다.
런던에 간다면 악명 높은 세 가지 장애물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런던 히스로 공항 입국 심사대, 날씨 그리고 음식. 주섬주섬 서류를 챙겨 재빨리 입국 심사대 줄에 섰다. 내 앞에 어린아이를 데려온 한 가족의 입국심사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의사소통이 안 되는지, 서류가 미비한 건지 입국 심사관의 미간에 주름이 져 있었다. 괜히 걱정이 밀려들어 저절로 착한 얼굴이 되었다.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기. 물어보는 말에 제대로 대답하기. 그리고 몇 가지 강조할 것들을 되뇌었다. 장기 체류 비자를 가지고 있다, 영국에서 사용할 돈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한국에 하던 일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체류 기간이 지나면 돌아가야 한다. 아까와 달리 마음씨 좋아 보이는 입국 심사원은 내게 질문을 하는 대신 내 여권의 생년월일을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내 비자 위에 웃으며 입국 도장을 찍었다. 난 네 서류상의 나이를 믿지는 않지만, 런던에 온 걸 환영해! 런던 입성의 장애물을 하나 넘었다.
서울에서 11시간 50분가량을 꼬박 날아 도착한 런던의 날씨는 맑음. 매우 맑음. 양손에 허리까지 오는 슈트케이스를 끌고 런던 시내 어딘가에 내렸다. 잠시 그 햇살을 느끼고 싶어서 길 한 구석에 가만히 멈춰 섰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황사와 미세먼지에서 해방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삶의 만족도가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곧 흐리고, 이 도시 곳곳에 비가 흩뿌려진다 할지라도. 내 몸속 세포들이 건강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살아있구나 실감나는 순간. 사실 런던은 내 마음속 일 순위가 아니었는데. 내가 이렇게 런던에 오고 싶었던가. 애써 생각했다. 아마 기내에서 본 영화<패딩턴Paddington> 때문일 거야 런던에 대한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 영국관광청이 제작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그 영화. 그날 런던 날씨는 하루 종일 맑음. 매우 맑음.
마지막 남은 장애물인 음식을 극복하는 데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전에 영국을 방문했을 때, 꽤나 맛있게 음식을 먹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아무거나 잘 먹기 때문인지, 정말로 영국의 음식이 괜찮아서 인지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그때 친구와 런던에서 먹었던 음식들은 꽤 괜찮았다. 친구와 나의 가난한 주머니로 갈 수 있는 식당은 한계가 있었을 터인데도 말이다. 심지어 우리는 피쉬앤칩스fish and chips에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던가. 그중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슈퍼마켓에서 파는 ‘레디밀ready meal’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친구와 내 눈이 동그래졌던 것 같다. 런던이 너무 춥고, 우리는 많이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을까. 그때 우리는 런던 2존의 허름한 호텔에서 아침으로 먹었던 체인 슈퍼마켓 ‘막스앤스펜서M&S’의 레디밀을 두고두고 칭찬했었다.
영국 음식
사실 익숙한 곳을 떠나는 것은 낯선 식탁에 앉을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을 선사해 주는 일이기도 하다. 어떤 곳에서는 하루가 세 끼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아쉬워하기도 한다. 평소보다 작아진 것 같은 위장을 탓하며. 내 경우에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그랬다. 반면 어떤 곳에서는 음식 때문에 걱정을 하기도 할 테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국이야말로 그런 곳인 것 같다. 지구 반대편 나라의 맥주 광고에 출연했을 만큼 유명한 스타 쉐프 고든 램지Gordon Ramsay 1)의 나라인데도. ‘요리’보단 ‘음식’이라는 단어가 ‘영국’과 더 잘 어울리는 듯도 하다.
‘사랑 없는 결혼Loveless Marriage’. 영국인과 음식의 관계에 대한 농담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다. 심지어 영국인들 역시 ‘이 말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짧든 길든 영국으로 떠나 본 사람들이라면 익히 들어 보았을 영국 음식과 날씨에 대한 박한 평가들. 나 당분간 영국에 있을 거야. 식도락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지인들은 역시 영국의 음식에 대해 한 마디씩 던졌다. 떡볶이 양념 사가! 혹은, 내가 영국 음식을 그 돈 주고 먹었다니!
친구들은 몇 개의 레시피를 보내 주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음식은 영국행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인 듯 보였고, 형편없는 영국 음식에 대해 한 마디씩 언급하는 것은 이미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유머 코드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음식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는 것과는 달리.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이전 런던 여행에서 음식에 대해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내가 그다지 까다로운 미식가가 아니고, 어디서나 적응을 잘하는 편이기 때문일까.
척박한 땅에 감자가 주식인 영국인들의 식탁은 바다 건너 프랑스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영국인들은 매 끼니 감자를 튀겨 먹고, 구워 먹고, 으깨 먹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먹는다.2) 어느 인터뷰에서 유럽 대륙의 한 인터뷰이는 영국인과 음식의 관계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영국인들은 좋은 음식을 ‘권리right’라기보다는 ‘특권privilege’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실제로 나를 만나러 영국에 놀러 온 프랑스 친구는 영국 음식을 먹는 것에 지쳤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친구의 아버지가 쉐프라 더욱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르겠지만. 한 집에서 부엌을 함께 사용했던 스페인 출신 존Jon은 영국산 토마토를 플라스틱에 비유하기도 했다. 아무 맛도 안 난다고. 왜 굳이 영국산을 사 왔을까 궁금하긴 하다. 런던에서도 더 맛있고 심지어 더 저렴하기까지 한 스페인산 토마토를 살 수 있는데. 어쨌든. 영국 음식에 대한 그의 불평을 함께 듣던 다른 영국인들은 그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스페인 사람에게 음식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며 특유의 씁쓸한 유머로 받아치곤 했다. 물론 뒤에선 영국 음식이 그렇게까지 못 먹을 음식은 아니지 않냐, 우린 먹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도와줄까?
악명 높은 히스로Heathrow의 입국 심사를 무사히 지나, 가장 먼저 마주친 영국인들은 튜브tube3)의 피커딜리 라인Piccadilly Line에서 내 엄청난 짐들을 기꺼이 들어주고 옮겨주는 이들이었다. 그다지 작지 않은 내 덩치에도 양손 가득한 짐들이 버거워 보였던 걸까, 늦은 오후 이른 퇴근길의 사람들은 먼저 도와줄까? 하며 손을 내밀어 주었다. 아마도 큰 짐을 들고 런던의 대중교통을 이용해 본 이들이라면 뒤에서 스윽 나타나 Can I help you? 하면서 내 짐을 번쩍 들어다 준 후, 바이바이하고 쿨하게 가버리는 런더너들을 만나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남녀를 불문하고 그들의 미덕은 도와준 뒤 치근덕거리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중 버스에서 벽에 기대어 놓은 내 짐이 밀리지 않게 슬쩍 잡아주고 있던 소년이 인상 깊었다. 그의 양 볼에 주근깨가 살짝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십 대 후반 즈음 되었을까. 고맙다는 나의 말에 그는 쑥스러운 듯 눈도 못 마주치지 못한 채 싱긋 웃으며, 계속 가만히 내 가방을 잡아 주더라. 내가 내릴 준비를 하느라 부스럭거리자, 그는 말없이 내 짐을 바닥에 내려주고 나서는 미소 지으며 다시 버스에 폴짝 올라탔다. 그 배려에 나는 기분 좋게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영국에서 내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은 아마도 슈퍼마켓이었을 것이다.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은 보냈을까. 낯선 브랜드들이 너무 많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곤 했다. 현명한 소비를 위해. 그곳에서 귀에 가장 많이 들리던 말 역시 도와줄까? 마치 지하철에서 내 짐을 들어 주던 사람들처럼. 결코 거절이라는 것을 모르는 나의 Thank you very much. 라는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동네 사는 아주머니, 할아버지 할 것 없이 이 소스는 어떤 음식에 쓰면 더 맛있다거나 이 푸딩이 괜찮더라며 잠시 수다스러워지기도 했다. 문장 끝에 Lovely, sweetheart, love. 등을 붙여 가면서. 이 사람들 눈에 내가 그렇게 사랑스럽나 잠시 착각했을 정도로. 처음에는 뜨내기로 보이는 나에게 영업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별로인 것도 얘기해주는 걸 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특히 감자 칩 스낵crisps 코너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 맛있는 것을 추천해주며 말을 거는 사람들이 많더라. 잉글리쉬 체더치즈 맛과 블랙페퍼 맛을 가장 많이 추천받았다. 역시 감자는 영국인들의 영혼의 주식인가 보다.
영국에 오기 전에는 영국의 문학이 궁금했는데, 도착하고 나니 영국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당분간 내가 머물기로 한 이곳이 궁금해졌다. 그래서 매일 슈퍼마켓에 들렀다. 밖에 나갈 때는 물을 한 병 샀고, 집에 들어올 때는 과자 한 봉지라도 손에 들고 들어왔다. 한 달 생활비의 많은 부분을 슈퍼마켓에서 썼던 것 같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엔 동네의 슈퍼마켓의 직원들과 서로 안부를 묻고 주말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었다. 슈퍼마켓에서 제공하는 커피를 마시며 4) 버스를 타기도 하고, 커피가 추출되는 동안에 내 뒤에 서 있는 사람과 커피 맛에 대해 스몰 톡small talk을 나누기도 하고. 슈퍼마켓은 많은 대화를 이끌어내는 소재이기도 했다. 적어도 영국에서는 더욱 그러한 듯 보였다. 물론 날씨 얘기 다음으로.
일상을 여행하기
런던에 도착해 햄스테드Hampstead에 머물렀다. 햄스테드는 센트럴 런던Central London이라고 불리는, 중심지에서는 버스로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2존에 위치해 있는 주거지역이다. 그곳은 작은 정원이 딸린 주택들이 일렬로 늘어선, 전형적인 중산층 영국인들이 사는 동네였다. 지인 중 런던 햄스테드에서 나고 자란 리즈Liz는 이 지역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그녀는 영국인들이 살고 싶어 하는 지역 중 하나가 햄스테드라고 말해주면서 그녀의 어머니가 살던 곳, 자신이 자주 가던 곳들을 알려주었다. 사치스럽지 않으면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 분위기는 확실히 서남부의 사우스 켄싱턴South Kensington과 같은 화려한 부촌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다. 처음 영국 여행을 갔을 때, 서울에서도 강남 중심가에 해당할 법한 사우스 켄싱턴 역 근처 숙소에 머물렀던 탓에 런던의 첫 이미지는 화려한 ‘나이트브리지Knightbridge’5) 였지만. 이번에 첫 밤을 보내게 된 햄스테드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는, 기품이 감춰진 듯 드러나는 동네였다.
길가에 한 집 건너 포르쉐Porche나 레인지로버Range Rover가 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사실 이 지역 런던에서 역시 손꼽히는 부촌이다. 자동차에 대한 지식은커녕 운전면허조차 없는 나는 집에 놀러 온 친구가 이 동네에는 슈퍼카가 많네 라고 얘기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다행히 예산에 맞으면서도 컨디션이 좋은 방을 구해서 기뻤을 뿐. 무엇보다 좋은 동거인flat-mate들도.
나는 삶에서 처음으로 혼자 살게 된 터라 간단한 파스타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대충 나가서 사 먹거나 빵이나 먹지 뭐. 같이 살던 폴Paul과 크리스티나Christina는 장을 보러 갈 때 나를 데려갔고, 저녁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강의 때문에 주중에는 옥스퍼드Oxford에 있었던 크리스티나 대신 폴은 뭘 어떻게 해 먹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곤 했다. 크리스티나와 나는 항상 이것저것 챙기고 확인하는 그를 ‘빅 브라더big brother’라고 불렀을 정도. 실제로 그가 거실에 앉아 있으면, 집이 작아 보이는 효과가 있을 정도로 그는 ‘큰big’ 사람이었다. 처음 요리에 도전한 나는 재료에 욕심을 낸 나머지 음식을 망쳐 버리기도 했다. 소고기를 그렇게 맛없게 만들기도 어려울 게다. 폴은 맛을 한 입 보더니 영국인답게 최대한 예의를 갖춰 말했다. 버리자. 실패가 이어지자, 요리에 겁먹고 대충 샐러드를 만들어 먹거나 밖에서 밥을 먹고 들어오곤 했다. 내가 점차 부엌을 이용하지 않게 되자, 폴은 이내 눈치채고 내 등을 떠밀었다. 일단 ‘웨이트로즈Waitrose’에 가. 레디밀Ready meal부터 시작해보는 게 어때? 집에서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일본슈퍼마켓과 한국슈퍼마켓이 있었지만, 한국 음식이라고 잘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과감히 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주거 지역답게 큰길을 따라 막스앤스펜서M&S, 아이슬랜드Iceland, 웨이트로즈와 작은 식료품점들이 즐비했다. 그 중 한 곳에 충성을 다 하기로 마음먹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슈퍼마켓을 쓰다
어디로 떠나든지 나의 여행은 그곳의 슈퍼마켓을 구경하는 것으로 시작하곤 한다. 물론 그날의 식량을 구비하려는 본능적인 이유도 있지만, 한 나라의 언어와 문화, 사람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슈퍼마켓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도 슈퍼마켓을 가는 것은 소비 행위 이상의 즐거움이다. 물론 시장을 구경하는 것도 좋다. 오래된 시장일수록 더 좋다. 각 지역의 재래시장을 구경하면 이것저것 먹을 것을 사는 것만으로도 이곳의 일원이 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왠지 그 나라의 말로 주문을 해야만 할 것 같다. 다만, 시장과 슈퍼마켓은 약간 다른 감각의 공간이다. 시장을 구경하는 것이 일상의 진부함을 잠시 멈추게 하는 즐거운 관광이라면, 슈퍼마켓을 들르는 것은 분명히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함이 있는, 삶 속으로의 산책이라고 할까.
사실 현대적 공간인 슈퍼마켓은 시장보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더 친절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여행자를 배려해주는 지도 모르겠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아라비아 숫자만 알면, 무언가를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괜찮고, 바가지를 쓰거나, 강매당할 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최소한의 부담으로 최대한의 유용성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일 것이다. 특히 이방인에겐.
곳곳에 넘쳐나는 슈퍼마켓들은 비슷해 보인다. 시장보다 조금 덜 특별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이 가지고 있는 특성과 차이점들이 보인다. 익숙한 곳을 벗어나면, 특히 언어나 문화가 낯선 곳일수록, 그 차이는 더욱더 커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제품 패키지만으로도 우리는 그 나라의 몇 가지 독특한 음식의 종류와 단어들을 배울 수 있다. 최소한의 삶을 위한 그 단어들은 매우 유용하다. 낯선 공간에 도착한 이방인에게 중요한 것은 최소한의 삶이 아닐까. 심지어 만반의 준비를 하는 대신 발길 가는 대로 그 공간을 즐기고 싶다면.
낯선 곳에서 이방인을 도와주는 것은 평소에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존재들이다. 슈퍼마켓에서 낯설디낯선 글씨와 함께 그려진 그림들은 마음 놓고 무언가를 집을 수 있게 한다. 갑자기 내가 알고 있는 언어라는 것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내가 갖고 있는 언어라는 것이, 나아가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알량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지식보다는 직관이 앞서는 순간. 내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물어볼 수도 없는 스스로를 보면서 새삼 겸손해진다. 내 앞의 사람들과 혹은 사물들과 소통할 언어가 없는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고, 그 사라짐을 통해 평소라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그림들과 그 친절에 감사하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즐거운 일은 그곳의 사람들을 보는 일이다. 그들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언제 그렇게 주변에 있을 익명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던가. 그들이 무엇을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 순간 나는 휴머니스트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잠시 후 다시 앞만 보며 잰걸음으로 거리를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하더라도.
슈퍼마켓에서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관심이 생겨난다. 텅 비어 있는 선반을 통해서 사람들이 무엇을 주로 사는지를 유추해 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많이 집는 제품을 쇼핑 바구니에 넣어보는 것도 좋다. 재미있는 판촉 행사를 마주칠 가능성도 있다. 심지어 알아듣지 못해서 더욱 즐거울 때가 있다. 괜히 사람들 틈을 기웃거리면서 구경하다 보면,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도 하고, 못 알아들어 대답을 못 하는 자신이 우스워지기도 한다. 답답함보다는 유쾌함으로. 그러다 보면 내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희미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순간 나는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 속해 있던 누군가가 아닌, 오롯이 순수하게 나 자신으로 서 있는 것 같다. 나의 이름도, 그것을 말할 나의 언어도 필요 없는 그런 자유로운 순간. 일상에서 훌쩍 낯선 곳으로 떠난다고 해도 우리 삶의 여정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여기가 아닌 그 낯선 곳의 슈퍼마켓에도 들러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하루도 슈퍼마켓에 들르지 않는 날을 떠올릴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은 그 어느 곳에 있더라도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활인들에게 슈퍼마켓은 소비하는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지도 모른다. 혹시 슈퍼마켓은 우리의 삶과 생활을 보여주는 공간은 아닐까. 박물관보다 더 생생한 오늘을 전시하는 곳. 우리는 슈퍼마켓에서 식품이 아닌 생활을 산다.
나는 이곳이 궁금해졌고, 슈퍼마켓에 매일 가기로 했다.
*영국 슈퍼마켓을 통해 마주했던 영국인과 영국 문화에 대한 책을 쓰고 있습니다. 선입견 없이, 무례하지 않게, 호기심 많은 이방인으로서 영국을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이 글은 책의 일부를 가져온 것입니다. 『웨이트로즈, 오롯이 영국의 맛』(가제)을 쓰고 있습니다.
박구비
‘나’의 비루함을 견디며, 끊임없이 외로운 말 걸기를 시도합니다. ‘나’를 설명할 언어가 없는 나, 그 침묵의 언어가 ‘당신’에게 닿기를. 쉬이 지치지 않기를.
2019/01/29
14호
- 1
- 고든 램지는 한국에서 모 주류 회사의 맥주 광고 모델로 출연했다. ‘영국-음식’과 ‘한국-맥주’의 관계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을까. 하지만 그가 라거 종류의 맥주를 좋아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 2
- 나는 삼시 세끼 감자만 먹을 수 있을 만큼 감자를 좋아했다(과거형 주의). 하지만 영국에서 돌아온 후 한동안은 감자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고구마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특히 튀긴 것이라면 더욱.
- 3
- ‘튜브tube’는 런던의 아주 오래된 지하철의 별명이다. 일반적으로 지하철을 말할 때에는 ‘서브웨이subway’ 대신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런던의 지하철은 폭이 좁아서 ‘튜브’라고 부른다. 서울만큼 넓고 쾌적한 지하철은 아니지만, 공격적으로 느껴질 만큼 빠르고 배차 간격이 짧아서 이용하기에 불편하지 않다(사악한 가격을 제외하고). 그리고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 때면 튜브가 1863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상기하곤 한다. 한국에서는 갑오개혁이 있기도 전이라는 것을. 참고로 서울 지하철 1호선은 1974년에 개통되었다.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출퇴근 시간에는 어마어마하게 붐비지만, 사람들이 서로에게서 떨어지려고 기를 쓰고 벽에 붙어 있는 진풍경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가끔 지하철이 급정거를 하면,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Sorry”도.
- 4
- 영국의 대형 슈퍼마켓 체인인 웨이트로즈Waitrose는 고객들의 즐거운 쇼핑을 위해 고객 카드를 소지한 고객에게 하루에 한 잔 무료 커피나 티를 제공했다.
- 5
- 런던의 부촌 지역으로 고급 백화점인 해롯Harrods이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