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2017~2020)
작가들을 위한 달리기 길잡이
달리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은 달리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달리는 게 쿨해보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살도 빠질 것 같다. 맞아. 달리면 쿨해지지. 정말 성격이 그렇게 된다. 살도 빠진다. 달리고 나서 폭식하지 않는다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리지 않는다. 보고 부러워할 뿐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시인이거나, 미술가이거나, 창작을 하는 사람은 달리기를 해야 한다. 음, 해야 한다, 는 표현은 폭력적이니까, 하면 좋다, 로 바꾸자. 달리기는 창작에 도움이 된다. 이 글은 작가들을 위한 달리기 지침서다. 너가 뭔데 이런 글을 쓰냐고? 시인이고, 러너다. 일주일에 40km 이상 달린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러닝 매거진 <러너스월드> 한국판의 편집장이다.
당신은 정말 달릴 수 없을까?
내 주변에서 달리기를 하지 않는 사람 중 몇몇은 이렇게 말한다. “무릎이랑 발목이 아파서 달릴 수 없어.” 그럴듯한 이유다. 그럼 나는 묻는다. “도대체 얼마나 빨리 달리려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저딴 건 이유가 되지 못한다. 아프지 않을 만큼 천천히 달리면 되니까. 그것만으로도 운동 효과는 충분하다. 나는 달리기가 명상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달리기를 격한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그게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달릴 필요는 없다.
자신에게 맞는 속도가 있다. 작가가 자신의 고유한 언어를 찾기 위해 노력하듯, 러너도 자신의 고유한 흐름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훌륭한 러닝은 기록을 단축시키는 게 아니라, 내면의 속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러닝이다. 그러니까 러닝은 몸의 작용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아직은 그렇게 이야기해도 동의하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 다시 무릎과 발목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아프지 않을 만큼 느리게 달리자. 그렇게 며칠 반복하다 보면 달릴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나고 속도도 빨라진다. 그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대부분의 러너들이 긴 시간을 달리는 동안 지루함과 싸운다. 이러한 싸움은 작가가 일상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단어 앞에서 다음 단어를 찾기 위해 견디는 시간을 떠올려보자! 이 과정을 거치며 내면의 근육이 형성된다는 것을 우리는, 아니 작가들은 안다. 달리기 역시 그렇다. 달리면서 무릎과 발목 그리고 주변 근육이 발달한다. 그러니까 당신이 아프다면, 그것은 당신이 달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아니라, 달리기를 해야 하는 이유다. 거듭, 이건 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마라톤은 다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에요. 마음과 정신에서 오는 것입니다.” 세계기록 보유자 엘리우드 킵초게가 말했다.
당신은 체력이 약해서 긴 거리를 달릴 수 없을까?
체력이 약해서 마라톤 같은 건 할 수 없다고? 너무 말이 안 돼서 덧붙일 게 없지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굳이 사족을 단다. 달리면 체력이 강해진다, 뭐 이딴 걸 적으려는 게 아니다.
알다시피, 어떤 습작생은 이렇게 말한다. “저는 재능이 없어서 시는 못 쓸 것 같아요.” 하지만 조금이라도 시를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이 틀리다는 걸 안다. 재능이 있다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재능이 없어도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다. 얼마나 사랑하는가에 달려 있다. 축구 선수 손흥민의 말을 빌려 쓰자면, 시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다.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달리면 된다. 달리는 것은 내면의 속도를 찾는 일이고, 그 속도를 찾아가다보면 자연스럽게 멀리 달릴 수 있게 된다. 러너는 자신의 흐름, 자신의 동작, 자신의 목적을 찾아가는 사람이다. 피니시라인은 도로 위에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체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좋아하면 된다. 그리고 반드시 좋아하게 된다. 당신은 이미 미지의 세계에서 고유한 언어를 발견하는 일을 해왔으며, 그 안에서 성취를 이뤄왔기 때문이다. 러닝은 당신이 더 낯선 곳으로 주저하지 않고 여행을 떠날 수 있게, 용기를 준다.
단어에서 단어로
달리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자. 가야 할 먼 곳을 떠올린다. 느리게 달린다. 대부분 초보 러너들은 가까운 어딘가를 목적지로 삼는다. 자신이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뭐, 아무튼 괜찮다. 일단은 그곳에 간다. 힘이 들면 걸어도 괜찮다. 그러다가 다시 달린다. 그렇게 목적지에 도착하면, 의외로 너무 쉽다는 느낌이 든다. 비슷한 방식으로 돌아온다. 내일도 그렇게 달린다. 거리를 조금 늘려도 좋고 약간 빨리 달려도 좋다. 걷기와 뛰기를 병행하면 누구나 5km를 달릴 수 있다. 그렇게 경험을 쌓으면 10km에 도전할 수 있다. 그 이상도 가능하다. 낯선 세계를 찾아가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달릴 때 나는 명상을 하는 기분이 든다. 자연스럽게, 오로지 몸의 상태에만 집중하게 되고, 만족감이 충만해진다. 음, 작품을 쓸 때 단어를 하나씩 찾아 연결하면서 희열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 순간에 이르면 절실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쉽게 구분하게 된다. 하루 종일 나를 지배했던 고민들이 대부분 무용하고 사소한 것이었다는 것도 깨닫는다. 그래서 정말로 ‘쿨’해진다. 몸과 시간을, 조금씩 이겨내면서 용기도 생긴다. 옳은 판단을 하게 되고, 낯선 감각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진다. 먼 거리를, 천천히 달리거나 걸을 뿐인데, 마치 정신이 가야 할 바른길을 찾는 여정처럼 느껴진다. 도로 위를 달리는 게 아니라 내면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마음속의 단어들을 이어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숫자 너머로
달리다보면 먼 거리를 달리고 싶어지고, 빨리 달리고 싶어진다. 그건 별로 힘들지 않다. 누구나 처음보다 먼 거리를 달릴 수 있게 되고, 빨리 달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더 욕심이 생겨서 더 멀리 더 빨리 달리기 위해 노력한다면, 물론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보다 더더 멀리 더더 빨리 달릴 수 있게 되겠지만, 그건 선택의 문제다. (힘들면,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런 선택을 한다. 그게 마음이 이끄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몸과 마음은 충분히 그럴 능력을 갖고 있다. 스마트폰 앱스토어에서 러닝 어플을 다운 받으면 거리와 속도를 체크할 수 있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거나 손에 쥐고 달리면서 수시로 거리와 페이스를 체크해보자. 멀리 달리기 위해선 페이스를 낮춰야 한다. 천천히 달려야 한다는 뜻이다. 페이스를 낮추고 달리면 서서히 몸이 충전되는 느낌이 든다. 그때 속도를 높이자. 더 달릴 수 없다고 느껴질 때, 한 걸음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자. 몸이 지워지는 것 같다. 그러나 마음의 상태는 오히려 견고해진다. 나는 이와 비슷한 느낌을 글을 쓸 때 종종 경험한다. 사과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노트를 펼쳤지만 단어와 문장이 나아갈수록 새로운 의미의 세계들이 펼쳐진다. 그때의 불확정성은 내 손끝과 혀끝을 건드린다. 더 나은 상태로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거리와 페이스를 측정하면 많은 것들이 명확해질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숫자들은 당신이 처음 느끼는 경험의 세계로 이끈다. 좋은 글이 그러하듯 당신만이 느낄 수 있는 경험으로 가득 차 있다. 와, 오늘 2km를 달렸어, 3km를 달렸어, 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곧 10km를 달려보려고, 라고 호기로운 목표를 말할 수도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지겠지만, 그렇게 말할 때 당신은 숫자 너머의 것을 보고 있다. 그게 진짜 멋진 것이다.
그래도 고개를 들자
이렇다는 사람도 있고 저렇다는 사람도 있다. 달리는 자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신체 능력과 체형이 사람마다 다른데 어떻게 옳은 자세라는 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그 대부분의 의견을 묵살하는 편이다. 자신에게 맞는 자세를 스스로 발견해 나가면 된다. 달리기 자세의 핵심은 안전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지면에 발을 디딜 때 내 자세가 어떠해야 할까? 발뒤꿈치가 먼저 지면에 닿는 게 나을까 아니면 발 중앙 또는 발 앞? 사람마다 다르다. 달리면서 찾아가면 된다. 처음 달릴 때와 달리기가 익숙해졌을 때의 자세 역시 달라질 수 있다. 안전하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상체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래서 팔을 움직인다. 어떤 사람들은 가능한 팔을 몸의 뒤쪽으로 보낸 상태에서 흔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다. 하지만 팔을 몸의 뒤로 보내면 상체 균형을 잡기가 어려워진다. 당신에게 적정한 팔의 위치가 있다. 이런 시가 좋은 시야, 시를 왜 그렇게 써, 따위의 말이 정작 시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작가가 언어를 다루는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가듯 러너 역시 자신만의 자세를 찾아간다. 다른 사람의 말을 많이 들으면 자신만의 러닝을 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적인 지침이 있는데, 땅을 보며 달리지 않는 것이다. 멀리 봐야 한다. 그래야 그곳까지 갈 수 있고, 그래야 직전의 단어에 함몰되지 않는다. 고개를 들자.
이야기 쓰기
봄, 가을에 전국에서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회가 가까운 곳에서 열린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그렇긴 한데 대회에 꼭 나가야 할까? 거부감이 생긴다면 안 나가도 괜찮다. 그렇지만 깨달음을 얻을 소중한 기회를 포기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내가 처음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건 스물여섯 살 때였다. 젊고 힘이 넘쳤다. 하지만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호기롭게 풀코스에 도전했는데 30km 지점에서 포기했다. 10km를 달렸을 때 나를 앞질러 가는 여자들, 특히 엄마 나이 정도 되는 사람들을 보며 당황했다. 이전까진 단 한번도 그들이 나보다 빨리 달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라톤은 성별과 상관없다. 나이도 중요하지 않다. 꾸준히 달린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멀리 빨리 달린다. 대회를 뛰다보면 50~60대를 쉽게 만난다. 70대 노인도 많다. 장애가 있는 사람도 대회에 출전한다. 그들은 모두 ‘러너’다. 빨리 가거나 늦게 갈 뿐이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승선을 지나게 된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날의 주인공이 된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자신 안의 더 멋진 자신을 만난다. 대회에 출전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순간들을 경험할 수 없다. 매번 대회에 나가도 이런 순간이 주는 감동은 새롭다. 당신이 늘 새로워지듯 그들 역시 그렇다. 달리기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당신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새로 써진다. 그들의 이야기 역시 그렇다.
시의 신이 찾아올 때까지
처음엔 실력이 금방 는다. 어느 단계에 이르면 늘지 않는다. 오히려 능력이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라면 누구나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시는 창조할 수 없을 것 같다. 밤을 새워 글을 썼지만 남는 문장이 한두 줄일 때도 있다.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위대한 불안 너머에 무엇인가 있다. 작가도 러너도 도약을 꿈꾼다. 그 순간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러너에게도 작가에게도 가장 어려운 일은 그때까지 묵묵히 견뎌 나가는 것이다. (음, 물론 이런 문장은 일가를 이룬 선생님이 쓰셔야 할 것 같긴 하지만……)
아직도 달리지 못할 핑계를 갖고 있어요?
아이다 킬링은 2016년 미국의 유서 깊은 육상 대회 펜 릴레이(PENN RELAY)에 참가했다. 그녀는 100m 달리기 종목에서 1분 17초 33의 기록을 세웠다. 100m를 너무 오래 달린 걸까? 이 기록은 100~104세 연령대 여성 세계 신기록이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02세였다. 그녀는 작년 여름 <러너스월드>와 가진 인터뷰에서 젊은 러너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강해지세요. 자신을 사랑하고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보다 젊을 것이다. 아직도 달리지 못할 이유가 너무 많다고? 에이, 설마!
이우성
이우성은 최근 무릎을 다쳤다. 그래서 달리기를 쉬고 있다. 하지만 쉬고 있는 기간에도 자신의 달리기에 대해 생각하며, 글쓰기와 달리기의 연관성을 추적하고 있다. 이우성은 달리기란 몸을 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 사이를 유람하며 문장의 미래를 추측하는 것 역시 달리기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그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포털 검색창에 ‘이우성 숫자들의 비밀’을 검색하면 이우성의 뉴욕마라톤 완주기를 볼 수 있다.
2019/02/26
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