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2018년 6월, 500여 명의 난민들이 제주를 통해 입국했습니다. 내전과 강제징집을 피해 자국을 떠난 그들은 대한민국의 과거를 떠올리게 합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제주 4·3사건, 여순 사건 등등, 문화적 유사성은 낮지만 역사적 유사성은 매우 높은 예멘 사람들의 입국 이후, 악성 루머들이 발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이슬람인들은 범죄율이 높다, 정부가 난민의 생계비를 과도하게 지원한다, 난민의 구직활동으로 자국민의 일자리가 줄어든다 등이 대표적입니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동안 난민 범죄는 0건입니다. 난민 지위 인정 사례는 두 명에 불과해서 난민들의 정상적인 구직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물가가 비싼 제주에서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체류비도 만만치 않습니다. 난민이 빈민이 되는데, 고작 몇 달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그 사이 정부는 예멘인들의 추가 입국을 막고, 그들의 거주지를 제주로 제한했습니다. 그들이 우리와 정말로 다른 사람들일까요? 제주에서 살고 있는 김재훈 시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실제 난민들과 어울려 살면서 무엇을 경험하고 목격했는지를. 과연 루머에 가려진 진실은 어떤 모습일까요?


   고백

   고백부터 하자.
   나는 2018년 제주 예멘 난민 이슈 이전에는 예멘인은 물론 아랍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슬림을 만나 얘기를 나눈 적도 없었다. 무슬림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미디어를 통해 생산된 이미지(특히 할리우드 영화들이 묘사하는 무슬림)가 지배적이었다. 내 머릿속에 그런 프레임을 심어두는 데 할리우드 영화 등이 얼마간 성공한 셈이다.
   물론, 아랍 세계 및 무슬림을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다룬 글과 뉴스들도 접해온 만큼 완벽하게 할리우드의 시선에 동화되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낯선 존재라는 점은 틀림없었다. 백인에 비해 얼마간 경계를 해야 하는…… 미디어가 나약한 한 인간의 무의식에 미치는 영향은 꽤나 지대하다.
   기독교 일부 진영이 생산하는, 무슬림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 정보들을 볼 때 아직 종교전쟁이 진행 중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생각은 나 역시 그 종교전쟁의 피해자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근거 없는 편견을 갖고 대상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 근데 그 대상이 바로 인간이라면? 이는 한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은밀하고 심각한 폭력이 아닌가.


   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충분했다

   작년 6월, 제주도로 들어온 예멘인 500명 중 일부가 돈이 떨어져 노숙생활을 하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악을 전공한 하민경씨는 제주시 원도심에 있는 지하 연습실을 숙소로 내줬다. 25명가량이 쉴 수 있었다. 나는 단순히 난민 이슈 취재를 목적으로 그곳을 방문했다. 예멘인들을 만나고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던 무슬림에 대한 혐오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예멘 청년들은 그저 잘 웃고, 외로워하고, 가족과 영상통화를 하며 눈물도 짓는 청년들이었다. 예멘에 남은 가족들의 기둥 노릇도 맡고 있었다. 그들을 처음 만난 날 바로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았다. 예멘인을 대상으로 밤마다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그러했다. 예멘인을 만난 그날부터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난민 혐오 세력의 ‘사회불안 조장운동’

   제주 예멘 난민이 이슈가 된 작년 한해, 난민 반대 세력은 예멘인에 대한 집단 히스테리에 가까운 양상을 보였다. 난민 관련 가짜 뉴스들이 유포되고 지역사회에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단체들이 갑자기 튀어나와 난민 혐오 여론을 주도하기도 했다. 난민 혐오에 앞장 서는 이들은 도가 넘는 불안을 조장하는데 그 모습은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예멘 난민 이슈를 통해 내가 ‘목격’한 것은 예멘 난민이라기보다는 난민 혐오 세력의 ‘인간 혐오 조장운동’이라 말할 수 있다. 예멘 난민과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했지만 난민 혐오 세력과는 상식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사회가 불안하게 느껴진 것은 예멘 난민 때문이 아니라 혐오 세력의 불안 조장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작년 제주에서 여러 건의 사망 사고가 발생했다. 난민 혐오 세력은 그때마다 예멘인을 지목했다. 물론 경찰 조사 결과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예멘인의 선행이 뉴스를 타면 난민 혐오 세력은 ‘난민 인정을 받기 위해서 보기 좋은 모습을 연출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폄훼하기 바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제주에 들어온 예멘인들이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궁지에 몰아 넣다보면 언젠간 사고를 치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예멘 난민들을 돕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 시민들은 난민 혐오 세력의 철저한 야만에 치를 떨었다.


   무지도 혐오다

   무지에 기초한 혐오. 학교 선생님들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여고생이 있는 한 가족은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그 가족은 예멘 난민 이슈가 불거진 초기부터 열아홉 살 예멘 청년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며 몇 달 동안 함께 살았다. 의사소통은 잘 안 됐지만 눈치와 말의 뉘앙스만으로도 웃고 떠드는 사이가 됐다. 아들을 대하듯 했다. 처음엔 서먹해하던 여고생도 먼 나라에서 온 ‘집친구’와 친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여고생은 학교 교사로부터 “예멘인들이 거리에 돌아다니니까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나에게 알려줬다. 이미 한국 청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감수성과 미적 취향, 유머 감각으로 ‘무장’한 친구와 한 가족이 돼 살고 있는데, 정작 학교 교사는 학생들에게 무분별한 불안을 조장하고 있던 것이다. 문제 제기해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그때 그 학생의 표정을 기억한다. ‘풉, 학교가 그렇죠 뭐. 알잖아요?’


   제주4.3과 난민

   예멘 난민 이슈는 제주4·3을 호출했다. 70여 년 전, 제주에 4·3 광풍이 몰아쳤을 때 산으로 피신하는 대신 일본으로 밀항을 택한 제주도민들이 있었다. 4·3 당시 불법 밀항에 나선 도민들은 단속돼 걸리면 부산 등으로 추방당하기도 했지만 일본에 정착해 여태껏 살고 있는 이들도 있다. 김시종 시인의 경우도 그렇다. 1949년 그의 부모는 스무 살 청년이던 김시종 시인을 밀항선에 태워 일본으로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돌아오지 마라. 우리 눈앞에서 죽지 마라. 부모보다 먼저 죽지 마라. 이게 네 운명이니 일본에서 살아라.”
   기나긴 디아스포라의 삶. 김시종 시인은 그 후 49년 뒤에야 비로소 부모의 묘를 찾을 수 있었다. 김시인처럼 당시 일본으로 넘어간 제주도민은 5000명에서 1만 명가량으로 추산된다. 제주에 남아 있다가는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제주를 떠나 일본으로 밀항한 이들에게 일본 정부는 어떻게 대우해야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난민으로 대우해줘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현재 한국의 난민 인정 기준을 볼 때 그들 대부분은 난민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일본에 정착해 디아스포라로 살아온 이들의 삶은 신산스러웠다. 고향과 두고 온 가족의 얼굴을 단 하루라도 잊고 지낸 적이 있었을까. 당시 한국인들이 차별적인 일본인들로부터 당한 멸시는 익히 잘 알려져 있는 바다.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불법 입국한 도민들의 처지는 상상만으로도 아프다. 제주인들을 멸시하던 일부 일본인들의 표정은 어땠을까. 현재 예멘 난민들에 대해 무지에 기초한 혐오 발언을 퍼트리고 있는 이들과 달랐을까?


   앗살라무알라이쿰

   앗살라무알라이쿰. 이슬람권 국가에서 사용하는 인사말이다. 뜻을 풀면 ‘신의 평화가 당신에게’이고, ‘안녕하세요’ 정도의 쓰임새를 갖고 있다. 그들이 매일 주고받는 인사말에 이미 ‘평화’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내전을 겪는 예멘을 떠나 이역만리 제주를 찾은 예멘인들. 그 누구보다 평화가 절실한 이들이었다. 한국전쟁을 겪은 한국인. 하지만 좀처럼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난민 인정 결과가 그렇다. 제주로 들어온 500여 명의 예멘 난민 신청자 중 단 두 명만 난민으로 인정받았다. 한국 정부의 난민 인정에는 직업의 귀천이 있는 모양새다. 둘은 모두 기자였다.

   8000킬로미터

   어느 날 한국어 수업시간에 한 친구가 ‘I love you’가 한국어로 무엇인지 나에게 물었다. 그날 수업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 친구가 어두운 계단에 앉아 영상통화로 가족들에게 ‘사랑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서툴지만 꽤 달콤한 목소리였다. ‘사랑해요’라는 말이 8000킬로미터를 날아 예멘에 있는 가족의 귀로 들어갔다.

   내가 목격한 것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제주 예멘 난민 이슈를 통해 내가 바라본 것은 예멘인이 아니다. 내가 목격한 것은 혐오 세력의 야만이었고, 그 야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한국 정부였고,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나 자신이었고, 어느 밤 8000킬로미터를 날아가는 사랑이었다.

   그리고

   8000킬로미터를 날아온 사랑도 있다. 앞서 예멘인들에게 숙소를 제공했던 하민경은, 올봄 예멘인 아민과 결혼식을 올렸다. 알콩달콩하다.

김재훈

겨울잠 자는 한 마리의 시인

2019/11/26
2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