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아이가 있다. 곁에는 보호자가 있다. 아이는 정확한 처방과 안전한 실내가 필요하고, 보호자는 아이의 빠른 회복이 간절하다. 여기에 더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일까? 내가 한 일은(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으므로) 그림책 읽어주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그들은 이야기를 필요로 했다. 약을 제때 먹고 잠을 충분히 자는 것만큼.
   몸이 아파 입원한 아이, 감각이 예민해서 힘든 아이, 말이 더디거나 아무와도 말하지 않는 아이…… 출판사에서 어린이병원으로 일터를 옮겨 아이들과 살을 스치고 목소리를 섞으면서 난 새삼 놀랐다. 세상에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에. 그곳은 하루 평균 1천명이 내원하는 2차 병원이었고, 한꺼번에 많은 아이들을 만날 수밖에 없는 특수한 환경이었지만 말이다.
   아이들은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빠져나갔다. 지날수록 그것은 그것대로 좀 이상하게 여겨졌다. 지금껏 어디에서도 그만큼 다양한 아이들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병원 밖에서는 왜 그들을 마주치지 못했을까. 병원에, 학교에, 어린이집에, 키즈카페에 가지 않으면 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골목은 차들이 즐비하고, 놀이터에는 커터칼 들고 다니는 괴한이 있다. 온통 노키즈존 팻말이 내걸렸고, 학교 운동장마저 동네 주민들의 산책로나 주차장, 조기축구회나 동문회 행사장으로 쓰인단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이들이 맞아 죽고, 어린아이와 여성, 노인, 동물 등을 대상으로 한 범죄 뉴스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이웃이 이웃을 내몰고 이웃을 지워가는 사회에서, 아이들은 온몸으로 혐오를 경험하고 있다. 나는, 우리는 무엇을 해볼 수 있을까. 이야기를 위해 동시, 동화, 그림책에서 만난 몇몇 이웃을 이 글에 초대해본다.


   나의 이웃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지만
  분명히
  옆집에 누가 산다.1)


   나의 이웃은 닫힌 현관문처럼 차가웠다. “아프지 않는 엄마가 있고/ 때리지 않는 아빠가 있”(「재투성이 소녀의 인형 놀이」)는 집을 꿈꾸던 어린 나의 이웃은 그랬다. 102호에 사는 가족이 그랬고, 못 이기는 척 찾아온 친척이 그랬고, 신고 전화를 받고 도착한 경찰 아저씨가 그랬다. 벽을 넘지 못하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누가 들어주었겠는가.
   다 자란 내가 그때의 나를 찾아간다면, 손잡고 들려주겠다. 지은아, 나도 “가끔/ 아주 가끔/ 엄마가 죽으면 어떡하나/ 걱정을 한다.”(「나만 그러나」)고, “많은 날/ 아빠를 미워하고 원망하지만,/ 가끔은/ 못 견디게 보고 싶고/ 그 무엇보다 더 아빠가 필요”(「아빠 없는 시간5」)한 마음이 든다고. 너와 같이 “이 세상 멋진 집이란 집”(「엄마랑 나랑은」)을 꿈꾸는 사람이 한 명쯤 여기에 있다고.
   그때 나는 지금의 나를 만나지 못했으므로, 책 속으로 도망쳤던 것 같다. 책은 안전했고 거의 유일했다. 내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방공호였다. 많은 작가들이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 저 닫힌 문 뒤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 글 쓴다. 어쩌면 어린이문학은 가족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외면당한 어린이들의 “고요한 슬픔을 들”어주는(「분신」) 최후의 안전장치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이웃


  “죄송합니다.”
  나영이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나영이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의자를 식탁 아래로 밀어넣었습니다.2)


   자신의 마음이 아무렇지 않게 대해지는 경험을 한 아이들은 말로도 글로도 잘 털어놓지 못한다. 그렇게 남들 모르게 꼭꼭 숨겨둔 아이들 마음에 어린이문학은 청진기를 가져다댄다. 바로 옆에 앉아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들이다. 이를테면 동화 『아름다운 것은 자꾸 생각나』를 펼치면 말을 안 하기 때문에 병원에서 집중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보경이의 조심스러운 속삭임과, 단짝 친구를 영영 잃어버리면 어쩌나 걱정에 빠진 나영이의 마음속 말소리가 들린다. 때론 아름다운 잉어와 멋진 소나무의 말소리까지도.
   혹여 당신은 동화 속 이야기가 오그라드는가, 허황됐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과연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상상이고, 상징일까.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용기를 내라고 하는 마음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이나, “엄마가 머리를 매만져줄 때마다” 슬픔이 씻기는 듯한 기분은 어른에게도 유효한 감정 아닐까. “잉어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물주름이 생”기는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거나, “별들이 떨어질 때마다 하늘에는 검은 구멍이 생”겨나는 신비로운 장면을 목격하는 건 아이들만의 일일까.
   『아름다운 것은 자꾸 생각나』의 홍자 선생님은 다른 이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마법의 목걸이를 지녔다. 덕분에 삶에 깃드는 아름다운 순간을 곧잘 포착한다. 그리고 이런 말도 전한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작게 속삭이는 이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해요. 귀를 기울이지 않아서 그래요.”
   우리는 마법의 목걸이는 없지만 마법의 이야기를 가졌다. 어른들이 미처 들어주지 못한 아이들 속말뿐 아니라 무럭무럭 자라느라 바빴던 어른들 마음도 어루만지는 이야기를, 아름다워서 자꾸자꾸 생각나는 이야기를.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어린이책을 읽는다는 건, 눈에 띄지 않던 이웃들을 만나고, 들리지 않던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 “작고 부드러운 속마음들이 전해질 때의 기쁨을 고스란히 느껴”보는 일일 것이다.



   필요한 이웃


  눈을 크게 뜬 채로 꿈을 꾸는 사람들,
  다른 이의 행복을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
  세상에 이렇게 쫌 이상한 사람들이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3)


   아이들을 깊게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과연 저절로 자라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다수 성인은 생활 속에서 어린이를 만나지 못한다. 부모나 아이들 대하는 직업이 아니면 가까이서 웃고 울고 뛰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아이들을 대하지 못한다. 어린이를 향한 사랑은커녕 어린이 존재에 대한 이해와 감수성을 노력 없이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어린이책을 한두 권 읽어보는 것에서부터 어린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난 믿는 편이다. 사실 어른이 어린이책을 읽으면 별난 취급을 받는 것 같다. 테이블에 그림책을 꺼내면 옆자리 사람들의 힐긋거리는 시선이 느껴진다. 옆자리에선 취직 이야기, 부동산 이야기, 대출과 펀드 이야기, 연예인 이야기……가 들리는데, 이쪽엔 용이 불을 뿜거나 삐삐가 태연하게 앉아 있다지.
   그래도 신경 쓰지 말자, 좀더 읽어보자. 작고 연약한 이웃들을 향해 열려 있는, 구획을 짓거나 위계 세우는 일에 반대하는 책들을. 그림책 『쫌 이상한 사람들』에서처럼 쫌 이상한 어른들이 세상에 더 많아지면 좋겠다. 아주 작은 것에도 마음 쓰는 어른, 혼자라고 느끼는 이를 얼른 알아채고 다독이는 어른, 함께 걷는 이가 넘어지지 않게 손을 잡아줄 줄 아는 어른이.
   아이들을 껴안고 사랑하는 일이 되레 조금은 이상한 일이 되어버린 씁쓸한 현실 속에서, 부모가 아니라도 선생이 아니라도 한 사람이 성숙한 어른으로 거듭나는 일은 더없이 귀하게 느껴진다. 책 읽기가 꼭 어떤 변화나 계몽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어린이문학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보면 자연히 소망하게 된다. 쫌 이상한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고 모여서 다시 거리에 아이들이 쏟아져나올 수 있기를.




   이웃이라는 감각, 조금은 외롭고 조금은 연약한 주변인들을 느낄 줄 아는 감각을 이 글에 불러오고 싶었다. 우리라는 거대한 말 속에 하나로 뭉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라는 말 속으로 모두를 밀어넣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보호하는 이웃이라는 공동체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가 부족한 말로 무어라 하기 전에 그러기에 맞춤한 책들이 여기 있어 다행이다. 이야기는 이야기 안에만 있지 않다. 독자의 손을 잡고 책 밖으로 걸어나와 삶을 마주할 용기를 준다. 어린이문학이 있어 나는 나의 이웃을 더 잘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남지은

이 원고를 청탁받았을 때 기뻤다. 마음에 남는 좋은 어린이책이 참 많았으니까. 발랄하고 경쾌한 걸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잘 안 됐다. 아마도 4월이었으니까. 다음 기회가 또 있을까. 시가 잘 안 만들어질 때 다정한 이웃이 되어준 그림책들에 고맙다.

2019/04/30
17호

1
김개미, 「옆집 사람」 부분, 『레고 나라의 여왕』, 창비, 2018, 86쪽. 인용은 모두 이 책에서 가져왔고, 괄호 안에 시 제목을 적었다(쪽수 생략).
2
신현이 글·김정은 그림, 『아름다운 것은 자꾸 생각나』, 문학동네, 2018, 17쪽. 인용은 모두 이 책에서 가져왔다(쪽수 생략).
3
미겔 탕코, 『쫌 이상한 사람들』, 정혜경 옮김, 문학동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