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리스트
8회 개
개 옆을 지날 때는 일부러 천천히 걷는다. 마주친 개의 털 색깔과 내가 입은 옷 색깔이 똑같으면 행운의 징조 같다. 장바구니에 음식이 들어 있을 때 개가 마주 오면 일부러 개 쪽으로 든다. 몇 번인가는 개가 냄새에 이끌려 와서 내 발목에 코를 댄 적도 있다. 보호자의 허락을 받고 개와 인사를 나눈 날은 일기를 쓴다.
개를 좋아한다. 개를 키울 수 없는 나는 훗날을 기약하면서 유기견 보호소에 돈을 보내고 개 사진을 모으고 개를 그린다. 그리고 개 이야기를 읽는다. 그러면 그 개들이 가만히 내 옆에 와서 앉는다. 토토, 말라깽이, 윈딕시, 개돌이, 봉자, 치키티토, 악당, 피프케, 덕실이, 누렁이, 총알, 코나……
희수
「나비 때문에」(이원수, 『나비 때문에』, 우리교육, 2003)의 희수는 내가 분명히 어디선가 한 번쯤 마주쳤을 개다. 글에 외양이 자세히 묘사되지 않았는데도 나는 이 개가 어떻게 생겼는지 안다. 화가 이태수도 딱 그렇게 그렸다. 1960년대 골목 안 어느 집에서 마당에 놓아 기르는 개를 달리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희수는 주둥이만 시꺼멓고 몸은 누르스름한, 눈매가 억울하게 생긴 개다. 그리고 희수는 실제로도 억울하다.
희수가 라일락 나무 그늘에서 한가롭게 낮잠이나 자려 하면 방해꾼이 나타난다. 고양이 나비다. 저는 낮잠을 다 잔 모양인지 앞발로 희수 다리를 슬쩍슬쩍 건드린다. 점잖게 모른 척하려던 희수가 못 참고 한 번씩 슬쩍 물어 경고하면 나비는 더 신이 나서 제멋대로 군다. “힘으로 하면 제까짓 것 담박 울고 달아나게 해줄 수도 있지만” 희수는 봐준다. 그러다 조금 사납게 대하면 나비는 번개같이 달아났다가 또 기습 공격을 해온다. 애통하게도 희수는 나비만큼 빠르지 못하다. 분한 마음을 누르고 돌아서면 나비가 또 쫓아오고 그러면 희수는 또 붙들고 그렇게 매일같이 장난을 한다.
문제는 집안 아이들이 나비 편만 드는 것이다. 같이 장난하다 그런 건데, 아이들은 꽃나무를 상하게 했다고 희수만 나무란다. 커다란 희수가 조그만 나비를 못 잡는다고 놀린다. 그러던 어느 날 개집에서 낮잠을 자던 희수는 잠결에 나비의 기척을 느낀다. 어느 샌지 나비가 들어와 곤히 자고 있는 것이다.
“조그만 얼굴, 꼭 감은 눈은 갈매기처럼 양쪽 끝이 위로 치켜 올라간 것이 보면 볼수록 귀여웠습니다.”
희수가 가만히 나비 얼굴을 들여다보는 장면을 나는 백 번 쯤 읽은 것 같다. 끝내 희수의 억울함이 풀리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욱 희수가 마음에 남는다. 나라면 절대 희수를 혼내지도 놀리지도 않을 텐데. 꼭 안아줄 텐데. 희수는 쿰쿰하고 축축하겠지. 내가 귀찮아도 점잖게 참아주겠지.
알록 강아지
“조그만 알록 강아지입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동화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현덕의 「강아지」(『너하고 안 놀아』, 창비, 1995)를 읽을 때면 나는 완전히 노마가 된다. 기동이네 알록 강아지를 바라보기만 하는 노마. 기동이는 저 혼자만 강아지를 데리고 논다. “꼬리 조금만” 만져보겠다는 노마에게는 손도 못 대게 하면서, 굳이 노마 앞에서! 그런데도 노마는 속도 없이 계속 그러고 있다. 나도 그러고 있다.
우연히 강아지를 안게 되었을 때, 강아지도 분명히 좋아했다. 그러나 알록 강아지는 기동이의 강아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제 주인과 노는 모습을 노마는 섭섭하게 구경만 한다. 나도 그런 강아지의 뒷모습을 수백 번 보아서 노마의 기분을 안다. 노마는 어머니에게 가위와 상자갑을 얻어 강아지를 만든다. 그걸 보고 어머니는 더 그럴 듯한 강아지 인형을 만들어주신다. 노마는 새 강아지와 범 사냥을 하며 재미있게 놀지만, 그렇다, 그것이 진짜 강아지는 아니다. 옆에서 진짜 강아지와 노는 기동이 소리를 듣자 노마의 상상도 그만 풀이 죽고 만다.
그렇지만 작가는 현덕이다. 어떻게든 잘 되는 쪽으로 어린이를 밀어준다. 이 동화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노마는 아주 강아지하고 친한 동무가 되었습니다.”
알록 강아지가 내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노마하고만 놀았으면 좋겠다.
보저
『세 친구의 머나먼 길』(실라 번포드, 햇살과 나무꾼 옮김, 시공주니어, 2011)은 두 개와 한 고양이가 가족이 있는 집을 향해서 수백 킬로미터가 넘는 삼림지대를 여행하는 이야기다. 작가는 동물들이 ‘대화’하는 장면 없이, 오로지 그들의 행동을 묘사하고 이유를 설명하는 것으로만 극적인 서사를 끌어간다. 삽화도 없다. 그런데도 세 동물의 몸짓 하나하나가 내 머릿속에 생생하게 재생된다. 읽을 때마다 이렇게 나를 집중시키는 작가의 솜씨에 감탄한다. 특히 보저 부분을 읽을 때.
보저는 불테리어다. 땅딸막한 몸집에 채찍처럼 날렵한 꼬리, 치켜올라간 작은 눈. 보저는 셋 중 나이가 제일 많고, 여행의 피로와 굶주림에 제일 약하다. 그렇지만 장난도 제일 좋아한다. 아이들에게도 제일 다정하다. 아플 때 친구들의 도움을 기꺼이 받고, 즐겁게 회복한다. 제일 뻔뻔하기도 해서, 필요할 때면 사람들의 손길을 잘도 이용한다. 친구를 도와 낯선 개와 싸워 이겼을 때 작가는 보저를 이렇게 표현했다.
“행복한 늙은 전사는 상처 하나 없이 의기양양하게 달리고 있었다. (…) 보저는 오랜 세월 하도 많이 싸우고 하도 많이 지팡이 세례를 받아 봐서인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능적으로 지팡이를 피하고는 신이 나서 둥근 엉덩이를 오만하게 흔들며 느긋하게 뛰어갔다.”
보저가 한 평생을 함께한 어린 주인 피터와 재회하는 순간, 나는 또 속절없이 운다. 인간에게 개란 대체 무엇일까. 나에게 보저는 롤모델이다. 나도 낙천적인 할머니, 활기차고 느긋하고 마음 열린 할머니가 되고 싶다. 이런 말을 하면 아마 보저는 혀를 빼고 웃어 보이겠지. 꼬리로 바닥을 탕탕 치겠지.
김소영
뽐, 데인, 리치, 장미, 설리, 만두, 초코와 한 동네에 삽니다.
2019/09/24
2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