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공동(체)’ 코너에서는 지난 10년 간 작가들이 사회적 사건에 연대하거나 함께한 경험을 되돌아보는 연속 기획 ‘연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연결’에서는 #문단_내_성폭력 고발 사건 이후 변화된 문학계 전반의 상황이 문학을 하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미친 영향과 제기된 질문들에 대해 자유롭게 듣고자 합니다. 우리는 2010년대 중반 sns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단_내_성폭력 고발과 이에 연대하는 움직임이 불러온 사회 변화를 겪었고, 이로 인해 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을 비롯해, 여러 측면에서의 질문들에 봉착했습니다. 건강한 문학 생태계란 어떠해야 하는가와 같은 의문에서부터 독자와 매체, 출판 환경의 변화에 관한 사유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겪고 있고 고민하고 있는 바로 그 문제들과 경험에 대해 묻고자 하는 이번 기획은, 문학이 ‘공동(체)’라는 단어를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단초가 되어줄 것입니다.


   최근 남성인 지인과 성별 간 사회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성차별? 그거 미투 이후로 없어졌잖아.” 마치 지나간 일을 왜 이야기하냐는 투로. 성차별이라는 게 그렇게 단기간 내에 사라질 수 있다고 혹은 사라졌다고 굳게 믿는 그의 태도에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더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플 텐데. 그렇다. 설득은 어렵고 결국 상처를 돌려받는 건 말하는 자다. 그런데도 또 입 아프려고 이러고 있다. 왜냐하면 그에 관한 주제로 청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문단_내_성폭력 고발 사건 이후 변화된 문학계 전반의 상황이 문학을 하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미친 영향과 제기한 질문들. 이것이 내가 받은 주제이다.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내가 겪은 일들을 재차 떠올려야만 하는 고통을 가져다준다. 그런데도 청탁을 수락한 것은 내가 아니면 누가 이것에 대해 더 이야기하려 할까, 싶은 마음과 나도 그간 생각해온 것이 있으니 이 기회에 글로 정리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런데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걸까? 마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처럼 충분히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문단이 자정작용을 거쳤다고 여겨지기 때문일까. 아니면 잊어가고 있어서 다시 상기해야 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일까. 혹은 또다른 이유가 있을까. 내가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어째서 ‘지금’인지 먼저 짚어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2016년 김현 시인이 발표한 「질문 있습니다」라는 글을 시작으로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은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러니 벌써 6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것이다. 6년 동안 문단에서는 무엇이 변했을까. 작년 2021년 5월에는 박진성 시인에게 김현진님이 승소하였고, 하일지 전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가 1심 유죄가 확정되기도 했다. 1년이란 시간.
   여러 고발이 있었고 고발에 대한 결과(꼭 법적인 것만이 결과는 아니겠지만)를 보지 못한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사건들이 더 많은 것 같다. 결국 ‘지금’ 이 이야기를 다시금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 변했는지보다는 ‘무엇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요?’라고 질문해야 할 때라서가 아닐까. ‘지금’ 당신은 어떤 고발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묻고 싶다. 나는 다 기억한다. 낱낱이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고 언제까지나 그러려고 노력한다. 내가 저지른 과오를 포함하여.

   그간의 시 흐름을 분석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시의 판도가 많이 바뀐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시들이 무해하기로 작정하고 무해해지고 무해해졌다. 시는 스스로 무균실로 걸어들어갔다. 그러한 무해한 시들의 장점은 읽을 때 피로감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이 안전지대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무해하기 위해 안전한 것에 대해서만 발화하려고 하는 경향이 과연 시에 있어서 옳은 것일까? 무엇이 안전한가? 스스로의 내면으로 침잠하는 것이다. 대상을 함부로 다루고 소비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지만, 대상 자체를 지우고 그 자리에 ‘나’를 놓아버리는 일. 그것은 시가 가진 미학이 아닌 것 같다. 또 시의 정황이 현실 바깥으로 가버리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 삶에 밀착되어 있을수록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환상적인 정황과 배경을 시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무해하기로 작정한 시들은 별세계에서 ‘나’를 사유하고 ‘나’를 발화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런 것은 별로 재미있지 않다. 그렇다면 시의 재미란 무엇일까? 나는 시의 재미는(단정해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긴장과 낙차와 공백 그리고 미지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는데, 오로지 ‘나’에 몰두하면서 그것들을 가능하게 만들기란 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렇다보니 ‘나’의 이상한 체험, ‘나’의 기묘한 꿈, ‘나’와 ‘너(여기서 너는 나의 또다른 자아 혹은 나와 구별되지 않고 구별될 수 없는 너다)’ ‘내가 나인 것을 견디는 어려움’ 그런 시들이 많아진 것 같다. 물론 이 혐의에서 나도 자유롭지 않다. 그렇기에 더더욱 조심스러워서 자꾸 ‘-것 같다’고 쓰게 되는 것이다. 문단 내 성폭력 고발 이후 달라진 것은 어쩌면 이러한 논의조차도 조심스럽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더 다양한 시들이 쓰이고 읽히고 시의 외연이 확장되어 더 생동감 있어지면 좋겠다. 어려운 일이겠지만 쓰인 시와 시인을 너무 밀착시켜 생각하기를 그만뒀으면 좋겠다. 한번은 내 시에 대한 비평을 잡지에서 읽고 펑펑 운 적이 있다. 백은선은 학교에서는 왕따고 가정에서는 학대를 당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쓴 것이다. 어린 소녀였을 백은선이 불쌍하다. 요약하자면 그런 내용이었다. 시는 늘 1인칭 현재를 기본으로 한다. 시 안에 시인 자신이 어느 정도 투영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시의 화자와 시인을 동일 선상에 두고 시를 독해하고 비평하는 것은 시를 쓰는 시인의 운신의 폭을 좁혀버린다. 나는 무언가를 쓰면 그것이 내 경험으로 여겨질 거라는 것을 감내하며 시를 쓰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점점 별세계로 가게 된다. 우주에서 핵폭탄을 터트리는 나를 보고 진짜 실제로 겪은 일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런데 이런 불안정한 상태를 견디는 작가가 나뿐일까? 아닐 것이다.

   그런 말이 있다. ‘침묵은 동조다’ 그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사건이 있을 때마다 모든 일에 반응하고 발화해야만 하는 역할을 수행해야만 할 것 같았다.(실제로 그러지는 못했지만 그런 책임감에 괴로웠다.) 어떤 사건이 터질 때건 나의 입장을 분명하게 내세워야 할 것 같아 마음이 힘들 때가 많다. 누군가에게 SNS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느냐고 비난의 메시지를 받은 일도 있다. 물론 우리는 끝없이 말하고 생각하고 주장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왕왕 항상 분명한 입장을 고수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무언가 확실한 상태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때로는 내게 지워진 역할이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침묵하는 자들을 미워해놓고 때로 침묵하고 싶어하는 이상한 사람.

   친한 친구에게 물었다. 문단 내 성폭력이 수면 위로 올라온 후에 무엇이 바뀐 것 같은지. 친구는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문단 내 모임들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 (그 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이미 쓴 것들이었다.) 그건 사실이다. 최근에 활동하는 젊은 시인들을 만나면 그들은 내게 말한다. “와, 시인 처음 봐요.” 그러면 나도 말한다. “님도 시인이잖아요. 저도 요즘 활동하기 시작하신 분들 처음 뵙는다구요.” 이렇게 우리는 오로지 지면으로만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문단’이라는 곳은 실체가 없지만 그래도 일 년에 한두 번씩 얼굴을 보고 어제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던 사람들이 많이 사라졌다. 솔직히 한편으로는 속 시끄러울 일이 없어지기도 해서, 자리가 없어진 것이 전혀 달갑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소극적이고 내향적인 작가들끼리 얼굴을 보고 서로의 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사라졌다는 것은 퍽 서운한 일이다. 그런 자리가 사라진 것은 출판사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은’ 일이기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경제적인 부분에서의 이득과 술 취한 작가를 감당해야 하는 시간 외 근무를 하는 편집자들의 고충이 줄어들었으니.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지금 머리를 굴려봐야 좋은 의견이 나오기 어렵겠지만, 자리를 만들면 참여 명단을 미리 작가들에게 공지해도 좋겠다. 당당하게 참여하지 못할 사람들은 그 공지로 얼추 걸러질 것이다. 피하고 싶은 사람들을 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또 일종의 기록으로 남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파악할 수도 있다. 그리고 자리를 일찍 오후 4시쯤 시작하여 9시 이전에 파하면 좋겠다.(아니면 다과회 같은 것을 열어도 좋을 거 같다.) 그것만으로도 우려하는 많은 일 중 대부분의 일들은 사전에 차단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시를 쓰는 일에 대해서는 앞서 말한 것처럼 좀더 다양한 글이 나올 수 있게 작가와 글 사이 거리두기를 하며 독해하는 시선도 필요하다. 근래 SF가 많이 소비되게 된 것에는 이 같은 요인도 있을 것 같다고(물론 나는 SF를 엄청 좋아한다.)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SF가 나쁘다거나 그런 얘기는 절대 아니다. 모두가 별세계로 갈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조금 다른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한국남자들은 ‘남자로서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 없이 그냥 남자로 존재한다. 태어날 때 주어진 천성인 것처럼. 그런데 대부분의 여성은 내가 여성으로서 이런 행동을 해도 옳을까? 늘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어긋나는 자신을 쉽게 손가락질한다. 처음 글을 시작할 때 왜 ‘지금’이냐고 나는 물었다. ‘지금’은 과도기다. 과도기에는 늘 좌충우돌하기 마련이니까. 조금 더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지켜보려는 노력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성의 잘못과 실수에 너그러워질 수 있는 사회에서 더 여러 가지 목소리가 나온다고 믿는다. 실수를 하는 것보다 다시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그게 결국에는 우리의 미래를 바꿔놓을 거니까.

백은선

2012년 《문학과 사회》 신인상을 받으며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가능세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들로 만들어진 필름』 『도움받는 기분』이 있다.

2022/05/31
5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