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라는 글자에는 이응이 두 개, 모음 우가 두 개, 마지막으로 자음 리을이 하나 들어 있다. 늘어놓으면 ㅇㅇㅜㅜㄹ. 동그랗게 뜬 눈이 길게 감기면서 눈물을 흘린다. 그 시간이 굽은 길처럼, 휜 마음처럼 옆에 놓여 있다. 혹은 그 상황에 바퀴를 달아 어디론가 밀어주고픈 마음이 수레처럼 곁에 놓여 있다. 올라타기만 하면 스르륵 하고 금방 이동할 수 있다는 듯이.
   뜬금없이 우울에 관해 말하는 이유는 우울이라는 이 감정이 글 쓰는 행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조건 속에 얽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이 글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최근에 읽은 시집 중에서 누군가와 함께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을 고르는 것은 어렵다. 어렵게 고른 그 책들을 다시 펼쳐서 어떤 부분이 그러한가를 설명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 어려운 마음을 단순히 어렵다고만 말하는 일에 들러붙는 자의식을 떨쳐버리며 글을 계속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이렇게 어려움은 다른 어려움을 불러오면서 몸집을 불리기만 한다. 몇 중의 어려움 속에서 이 글은 시작되었고, 그러자니 어디선가 폭풍 같은 우울이 밀려온다. 이래서야 과연 글쓰기와 우울의 상관관계에 관한 설명을 시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빈 방이 되겠습니다.
   아무도 읽지 못하는1)


   『내가 나일 확률』이 출간된 이후 내 책상 위에는 늘 이 시집에 놓여 있었다. 오랫동안 이 시집을 펼쳐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읽어야지, 읽어봐야지, 하던 어느 날 큰 결심을 하고 시집을 펼쳤는데. 우선 내가 그동안 시에 대해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구나, 하는 자기반성이 우르르 몰려왔다. 개인의 감정, 공유하기 어려운 사적인 것들, 사유지에서의 뒤척임. 그런 것들로 가득한 시집을 나는 오래 상상했던 것 같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으로 시집 한 권을 진득하게 읽고 곱씹어보지 못한 나의 게으름 탓이다. 다음으로 이 시인의 담담하고도 당찬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너도 그렇게 느끼니, 아님 말고. 이런 사고의 과정을 따르는 시는 물론 한 편도 수록되어 있지 않지만, 여기에 묶인 작품들을 읽는 내내 나는 이런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많은 작품들에서 만난 화자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확고함을 확인하려는 듯이 말해왔다면, 박세미의 화자들은 ‘없는 나’에 대한 상상을 지금까지 없던 방식으로 풀어내보려고 애쓰는 듯하다. 이 점에서 나는 내 안에 부족한 말을 또 하나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없던 방식으로 없는 나에 대한 상상을 설명하기.



   무엇을 쓴다는 것이 고통을 줄 수도 있다면. 수많은 글자로 가득 찬 이곳에서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는지2)

   한동안 이런 질문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작가가 있었을까. 삶을 쓰는 행위를 통해 지속하는 사람들에게 쓰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시간은 자연히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했을 것이다. 그 시간이 길어지고 또 길어지면서 쓰는 자들의 생각도 길어지고 깊어지고 날카로워졌을 것이다. 굳이 2014년의 봄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느새 죽음 공동체 같은 것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죽음을 떠올리는 일이 대수롭지 않을 때, 죽음이 삶보다 자연스럽게 느껴질 때 우리는 어떤 시간 속을 살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여기가 지옥이 아닐까. 하물며 그런 절망과 비관으로 점철된 머리와 가슴이 과연 좋은 글을 쓰고 읽을 수 있을까.
   이영주의 최근 시집에는 어긋난 마음을 돌보는 마음의 형태가 가득하다. 그래서일까, 시집의 제목인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이라는 기원 혹은 당부도 있는 그대로 읽히지 않는다. 말하자면 반어법으로 쓰인 시집이랄까. 기록하지 말기를 바라는 것은 어떤 사랑이고, 그렇다면 사랑이 아닌 것, 사랑이 될 수 없는 것, 사랑이 되지 못한 것, 사랑할 수 없는 것, 사랑하고 싶은 것을 기록하자고 말하는 것일까. 우리가 기록할 것은 그것뿐이라는 것을 저 허약해 보이는 기원의 문장을 통해서 강조하려는 게 아닐까. 그러니 이영주 시집의 문법 속에서 ‘무엇을 쓴다’는 것과 ‘마음을 쓴다’는 것은 완전히 동일한 일이 되어야만 한다. 당신이 무엇을 쓴다면 그것은 곧 마음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렇게 믿고 싶다는 것을, 그렇게 믿고 썼으면 한다는 것을 기원하며 강조하기.



   사람은 절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사랑은 탄생하라3)


   그러므로 나는 여러 모로 재생(再生)해야 한다. 어떻게? 최근에 새로운 시집을 출간했으므로 벌써 이전 시집이 되어버린 『사랑은 탄생하라』는 그 재생의 방법에 대한 일종의 설명서다. 사람은 절망하고 그로써 사람은 탄생한다. 같은 사람이 절망하고 탄생할 수도 있으나, 그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차원에서 나를 이르는 말로 ‘사람’을 생각하기를 바라는 화자의 마음이 저 명령형 문장에 깃들어 있는 듯하다. 절망 다음에는 희망이 올 수도 있고, 또다른 절망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절망 다음을 기약하는 존재다. 그 ‘다음’은 새로운 존재를 상상하게 하고, 그 상상은 사람의 탄생, 그리고 사랑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사람의 연결이 사랑을 낳고, 사랑은 또다른 절망으로 이어지더라도 그 절망이 어떤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내가 시를 통해 얻은 탄생은 여기까지의 이해에 비롯하므로, 이 다음을 말하기 위해서 나는 좀더 절망하고 탄생해야 할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절망에서도 탄생하는 것들, 그것이 탄생하도록 하는 힘을 믿기.
   이 세 권의 시집이 나에게 준 숙제를 잊지 않으려 여기에 기록해둔다. 맨 처음 적어두었듯 우울이 나의 글쓰기와 착종되어 있는 이유는 이것이 여전히 나에게 숙제로 남아 있을뿐더러, 이 질문을 준 글들도 역시 우울을 통과해 쓰였다고 짐작되기 때문이다. 동그랗게 뜬 눈은 분명하게 바라보고 있다. 물론 이 눈은 자주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이 바라봄과 슬픔은 바퀴를 달고 지금도 굴러가고 있다. 앞으로 뒤로, 그리고 당신의 곁으로. 오래 전에 한 시인은 자다 일어나 한밤중에 듣는 작은 바퀴 굴러가는 소리를 묘사했는데 그렇게 부엌 창문에 달린 작은 바퀴 굴러가는 소리는 누군가로 하여금 마음 밑바닥에 자리한 무엇을 불편하게 마주하게도 한다.


김나영

좋은 책 한 권을 쓰고, 나무 한 그루를 심는 꿈을 꿉니다.

2019/11/26
24호

1
박세미, 「제3의 방」, 『내가 나일 확률』, 문학동네, 2019.
2
이영주, 「이집트 소년」,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문학과지성사, 2019.
3
이원, 「사람은 탄생하라」, 『사랑은 탄생하라』, 문학과지성사,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