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리스트
12회 올해의 예능
당신의 마감을 방해할 X
2020년이 온다. 격변하는 것은 없겠지만 숫자 자체가 주는 환상적인 느낌이 정말 좋다. 2020년의 나에겐 약간의 행운과 인내심, 그리고 수백 개의 케이블 채널 수신기가 달린 커다란 텔레비전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래서 소원을 빌듯이 2019년에 내가 좋아했던 방송들을 기억하며 적었다.
마음이 힘들 땐 처음 보는 노선의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거나 전혀 모르는 동네를 산책하는 게 위안이었다. 지금은 잘 못 한다. 낮엔 시간이 없고 밤엔 지쳐 있다. 동네 이름이 곧 에피소드 제목인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의 목차를 보는 것이 좋다. 연희동, 논현동, 후암동. 어제도 그제도 갔었던 동네의 이름은 반갑고 창녕, 삼척, 예산의 이름은 궁금하다. 골목의 성격이 어떻든 기본적인 템포가 느리고, 왠지 웃긴 이미지였던 김영철은 점잖은 노신사를 연기하고 있는 것 같다. 잠들 때나 밥 먹을 때나 언제 틀어놓아도 좋았다.
급식실 뒤편의 미스터리가 풀리는 과정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쌀 100킬로그램를 한 번에 씻어내는 세미기, 포대 한 자루 분량을 몇 초 만에 갈아버리는 야채분쇄기, 박스째 붓고 돌려도 금세 새하얀 깐 감자들이 굴러나오는 감자탈피기와 대형 수족관 같은 밥솥이 그랬다. 〈고교급식왕〉은 요리를 전공하는 고등학생 참가자들의 놀라운 전문성과 백종원의 급식 멘토링을 앞세운 방송이지만, 열두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가장 진하게 읽히는 메시지는 영양의 균형, 식재료의 단가와 및 관리, 최소 500인분 이상의 대량 조리를 제한된 시간에 해내면서도 끝없이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해야 하는 급식이라는 시스템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찬사다.
〈도레미마켓〉은 퀴즈와 먹방과 케이팝 그리고 과장된 코스튬 쇼가 결합되어 ‘2019년의 한국’을 보여주는 첨단 예능이다. 보고 있으면서도 이게 무슨 난리인지 믿기지 않을 때가 많지만 어쨌든 정말 재미있다. 나는 텔레비전이 유튜브에 추월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도레미마켓〉은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모든 요소를 넣어 대항하자’는 지피지기형 투쟁 방송이다. 편집, 자막, 음악의 활용에서 느껴지는 귀엽고 예민한 감각의 연출이 좋고, 패밀리나 사단을 이루며 친목을 과시하던 기존 예능들과 달리 다양한 나이대와 경력을 가진 진행자들의 조화가 신선하고 재미있다.
친구들은 이사 시즌이 되면 서로 조심한다. 집을 보러 다니는 것은 울고 싶어지는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선 사람이 살기 힘든 엽기적인 구조와 가격의 방이 마치 어떤 장르처럼 시리즈화 됐고, ‘돈을 아무리 모아도 너희(청년)는 집을 살 수 없다’는 거의 저주에 가까운 기사도 십여 년 간 꾸준히 접했다. 〈구해줘! 홈즈〉는 기본적으로 이런 절망적인 정서를 배려하고 있다.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나오지 않던 근사하면서도 가격도 싼 꿈의 집들이 매주 몇 채씩 등장한다. 부동산 앱의 매물을 조회하며 쌓인 근심들이 잠깐이나마 해소된다.
이효리가 바다에서 보드서핑을 하려 했는데 바람이 원하는 대로 불지 않았다. 앉아서 낙담을 하고 있을 때 옥주현이 곁에 앉아서 말을 붙였다.
옥주현 : 우리 왜 더 빨리 함께하지 못했을까?
이효리 : 글쎄…… 때가 아니었겠지.
옥주현 : 지금이 정말 좋은 때인 것 같아.
이효리 : 억지로 할 순 없어…… 모든 걸……
이대로 가다간 90년대가 끝없이 추억될 것 같았다. 텔레비전은 이제 정말 할 얘기가 없구나 생각하기도 했고, 소환된 90년대의 것들은 마냥 좋지 않았다. 아무리 미래가 없다고 한들 이렇게 계속 과거 얘기만 붙잡고 있는 것도 미련하게 느껴졌다. 핑클은 지겨웠던 90년대 레트로를 〈캠핑클럽〉을 통해 멋지게 종결시켰다. 핑클 멤버들에게 90년대는 자신들의 영광에 취하거나, 누군가에게 다시 인정받고 싶은 시간이 아니라 그저 지금의 자신들을 만든 지나간 시간 중 하나였다. 그들을 통해 다시 바라 본 90년대는 아름답고 뭉클했다.
리얼리티-관찰 예능에서 제일 질리는 것은 미리 녹화된 영상을 보고 스튜디오에서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중 삼중 자막 위에 관찰자들의 해설까지 듣다 보면 눈도 귀도 지친다. 유재석은 이런 종류의 방송을 맡지 않는다. 그의 별칭이 유느님인 걸 생각하면 누군가를 전지적으로 관찰하지 않는다는 것이 좀 웃긴 일이다. 그의 특기는 모나지 않고, 거칠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재치를 발휘하는 맨투맨 토크다.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그는 거리로 나가 부지런히 걸으며 사람들을 만나고 싹싹하게 인사를 한다. 그러다 실없는 농담을 하거나 웃기고 슬픈 얘기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시대나 유행의 변화에 대한 답변 같지는 않다. 그냥 내가 제일 잘하는 걸 하자. 그렇게 결심한 사람처럼.
〈퀸덤〉은(정확히 말하면 〈퀸덤〉에서 보여준 출연자의 무대들은) 한국 방송이 케이팝을 하나의 장르로 다루기 시작한 지 10년 만에 나온 최초의 케이팝 예능이다. 본격적인 케이팝 태동기의 주역인 박봄부터 황금기의 멤버인 AOA와 마마무, 월드 케이팝 시대의 주연인 오마이걸과 러블리즈, 여자아이들까지. 장기간 케이팝 예능의 대세였던 아마추어 오디션이나 연습생 서바이벌들이 보여준 케이팝의 미숙하고 위축된 모습과는 달리 프로페셔널한 출연자들의 역량을 이용해 케이팝이 왜 가장 인기 있는 장르가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말한다. 이 과정에서 〈퀸덤〉은 케이팝 산업 속 젊은 여성 뮤지션들이 갖는 고민들을 보여주고 응원과 독려를 보낼 수 있게 유도한다. 〈퀸덤〉 속 모든 무대가 짜릿하고 감동적이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아이들의 〈LION〉으로, 소녀가 왕이 된다는 정확한 메시지와 그에 걸맞은 웅장한 무대는 난해한 사랑 이야기나 추상적인 고통만을 얘기하던 케이팝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대략 7, 8년 전부터 방송국들은 모든 방송의 하이라이트만 편집한 유튜브 채널을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있고, 인터넷 송출만 하는 자체 제작 뉴미디어 채널도 활발하게 운영하는 중이다. 〈최신유행프로그램〉 시즌 1, 2는 그런 시류와 판단을 보여주는 기획물이다. 이 방송은 기존 텔레비전 예능을 보듯 한 시간을 온전히 집중해서 보면 맥락도 내용도 없는 이상한 쇼가 되지만, 인터넷에서 우연히 클릭한 하이라이트 클립으로는 낄낄댈 수 있는 짧은 호흡을 갖고 있다. 인터넷 방송을 겨냥한 쇼답게 내용 자체는 십대에서 삼십대가 상주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유행어나 이슈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 쇼를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남초 커뮤니티의 정서에 맞춰져 있던 기존의 콩트물과 다르게 여초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커뮤니티 특성상 합의나 결론 없이 다뤄지는 페미니즘 의제들이 직설적으로 반영되는데 ‘저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인터넷 방송 특유의 언어를 이용해서 생산되는 여성혐오물에 진저리를 치던 사람들에겐 더없는 해방감을 안겨준다.
대리 산책 _〈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KBS1)1)
마음이 힘들 땐 처음 보는 노선의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거나 전혀 모르는 동네를 산책하는 게 위안이었다. 지금은 잘 못 한다. 낮엔 시간이 없고 밤엔 지쳐 있다. 동네 이름이 곧 에피소드 제목인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의 목차를 보는 것이 좋다. 연희동, 논현동, 후암동. 어제도 그제도 갔었던 동네의 이름은 반갑고 창녕, 삼척, 예산의 이름은 궁금하다. 골목의 성격이 어떻든 기본적인 템포가 느리고, 왠지 웃긴 이미지였던 김영철은 점잖은 노신사를 연기하고 있는 것 같다. 잠들 때나 밥 먹을 때나 언제 틀어놓아도 좋았다.
급식들의 급식 _〈고교급식왕〉(tvN)2)
급식실 뒤편의 미스터리가 풀리는 과정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쌀 100킬로그램를 한 번에 씻어내는 세미기, 포대 한 자루 분량을 몇 초 만에 갈아버리는 야채분쇄기, 박스째 붓고 돌려도 금세 새하얀 깐 감자들이 굴러나오는 감자탈피기와 대형 수족관 같은 밥솥이 그랬다. 〈고교급식왕〉은 요리를 전공하는 고등학생 참가자들의 놀라운 전문성과 백종원의 급식 멘토링을 앞세운 방송이지만, 열두 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가장 진하게 읽히는 메시지는 영양의 균형, 식재료의 단가와 및 관리, 최소 500인분 이상의 대량 조리를 제한된 시간에 해내면서도 끝없이 새로운 레시피를 개발해야 하는 급식이라는 시스템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찬사다.
텔레비전의 투쟁 _〈도레미마켓〉(tvN)3)
〈도레미마켓〉은 퀴즈와 먹방과 케이팝 그리고 과장된 코스튬 쇼가 결합되어 ‘2019년의 한국’을 보여주는 첨단 예능이다. 보고 있으면서도 이게 무슨 난리인지 믿기지 않을 때가 많지만 어쨌든 정말 재미있다. 나는 텔레비전이 유튜브에 추월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도레미마켓〉은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모든 요소를 넣어 대항하자’는 지피지기형 투쟁 방송이다. 편집, 자막, 음악의 활용에서 느껴지는 귀엽고 예민한 감각의 연출이 좋고, 패밀리나 사단을 이루며 친목을 과시하던 기존 예능들과 달리 다양한 나이대와 경력을 가진 진행자들의 조화가 신선하고 재미있다.
꿈의 부동산 _〈구해줘! 홈즈〉(MBC)4)
친구들은 이사 시즌이 되면 서로 조심한다. 집을 보러 다니는 것은 울고 싶어지는 일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선 사람이 살기 힘든 엽기적인 구조와 가격의 방이 마치 어떤 장르처럼 시리즈화 됐고, ‘돈을 아무리 모아도 너희(청년)는 집을 살 수 없다’는 거의 저주에 가까운 기사도 십여 년 간 꾸준히 접했다. 〈구해줘! 홈즈〉는 기본적으로 이런 절망적인 정서를 배려하고 있다.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나오지 않던 근사하면서도 가격도 싼 꿈의 집들이 매주 몇 채씩 등장한다. 부동산 앱의 매물을 조회하며 쌓인 근심들이 잠깐이나마 해소된다.
Fine Killing Liberty _〈캠핑클럽〉(JTBC)5)
이효리가 바다에서 보드서핑을 하려 했는데 바람이 원하는 대로 불지 않았다. 앉아서 낙담을 하고 있을 때 옥주현이 곁에 앉아서 말을 붙였다.
옥주현 : 우리 왜 더 빨리 함께하지 못했을까?
이효리 : 글쎄…… 때가 아니었겠지.
옥주현 : 지금이 정말 좋은 때인 것 같아.
이효리 : 억지로 할 순 없어…… 모든 걸……
이대로 가다간 90년대가 끝없이 추억될 것 같았다. 텔레비전은 이제 정말 할 얘기가 없구나 생각하기도 했고, 소환된 90년대의 것들은 마냥 좋지 않았다. 아무리 미래가 없다고 한들 이렇게 계속 과거 얘기만 붙잡고 있는 것도 미련하게 느껴졌다. 핑클은 지겨웠던 90년대 레트로를 〈캠핑클럽〉을 통해 멋지게 종결시켰다. 핑클 멤버들에게 90년대는 자신들의 영광에 취하거나, 누군가에게 다시 인정받고 싶은 시간이 아니라 그저 지금의 자신들을 만든 지나간 시간 중 하나였다. 그들을 통해 다시 바라 본 90년대는 아름답고 뭉클했다.
유재석이 가장 잘하는 것 _〈유 퀴즈 온 더 블럭〉(tvN)6)
리얼리티-관찰 예능에서 제일 질리는 것은 미리 녹화된 영상을 보고 스튜디오에서 사람들이 가만히 앉아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중 삼중 자막 위에 관찰자들의 해설까지 듣다 보면 눈도 귀도 지친다. 유재석은 이런 종류의 방송을 맡지 않는다. 그의 별칭이 유느님인 걸 생각하면 누군가를 전지적으로 관찰하지 않는다는 것이 좀 웃긴 일이다. 그의 특기는 모나지 않고, 거칠지 않으면서도 충분한 재치를 발휘하는 맨투맨 토크다.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그는 거리로 나가 부지런히 걸으며 사람들을 만나고 싹싹하게 인사를 한다. 그러다 실없는 농담을 하거나 웃기고 슬픈 얘기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시대나 유행의 변화에 대한 답변 같지는 않다. 그냥 내가 제일 잘하는 걸 하자. 그렇게 결심한 사람처럼.
최초의 케이팝 컨텐츠 _〈퀸덤〉(Mnet)7)
〈퀸덤〉은(정확히 말하면 〈퀸덤〉에서 보여준 출연자의 무대들은) 한국 방송이 케이팝을 하나의 장르로 다루기 시작한 지 10년 만에 나온 최초의 케이팝 예능이다. 본격적인 케이팝 태동기의 주역인 박봄부터 황금기의 멤버인 AOA와 마마무, 월드 케이팝 시대의 주연인 오마이걸과 러블리즈, 여자아이들까지. 장기간 케이팝 예능의 대세였던 아마추어 오디션이나 연습생 서바이벌들이 보여준 케이팝의 미숙하고 위축된 모습과는 달리 프로페셔널한 출연자들의 역량을 이용해 케이팝이 왜 가장 인기 있는 장르가 되었는지를 정확하게 말한다. 이 과정에서 〈퀸덤〉은 케이팝 산업 속 젊은 여성 뮤지션들이 갖는 고민들을 보여주고 응원과 독려를 보낼 수 있게 유도한다. 〈퀸덤〉 속 모든 무대가 짜릿하고 감동적이지만 그중에서도 하나를 꼽자면 아이들의 〈LION〉으로, 소녀가 왕이 된다는 정확한 메시지와 그에 걸맞은 웅장한 무대는 난해한 사랑 이야기나 추상적인 고통만을 얘기하던 케이팝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반가운 시도 _〈최신유행프로그램〉(XtvN)8)
대략 7, 8년 전부터 방송국들은 모든 방송의 하이라이트만 편집한 유튜브 채널을 통해 수익을 올리고 있고, 인터넷 송출만 하는 자체 제작 뉴미디어 채널도 활발하게 운영하는 중이다. 〈최신유행프로그램〉 시즌 1, 2는 그런 시류와 판단을 보여주는 기획물이다. 이 방송은 기존 텔레비전 예능을 보듯 한 시간을 온전히 집중해서 보면 맥락도 내용도 없는 이상한 쇼가 되지만, 인터넷에서 우연히 클릭한 하이라이트 클립으로는 낄낄댈 수 있는 짧은 호흡을 갖고 있다. 인터넷 방송을 겨냥한 쇼답게 내용 자체는 십대에서 삼십대가 상주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유행어나 이슈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 쇼를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남초 커뮤니티의 정서에 맞춰져 있던 기존의 콩트물과 다르게 여초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커뮤니티 특성상 합의나 결론 없이 다뤄지는 페미니즘 의제들이 직설적으로 반영되는데 ‘저래도 되나’ 싶으면서도 인터넷 방송 특유의 언어를 이용해서 생산되는 여성혐오물에 진저리를 치던 사람들에겐 더없는 해방감을 안겨준다.
복길
한국 텔레비전 시청자로, 『아무튼 예능』을 썼습니다.
2019/12/31
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