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정권이 폭력적인 진압으로 소중한 생명들을 앗아갔던 용산참사. 1년 뒤, 나는 용산이라는 공간을 다시 생각해보기 위한 워크숍에 참여했다. 용산의 재개발을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같은 조 참가자분의 제안으로 미군기지와 용산 재개발의 연관성을 살펴보기로 했다. 기지가 오랫동안 존재했기 때문에 개발에 제한을 받았던 점, 한때 달러벌이로 칭송받았지만, 낙인찍혀진 존재들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그를 위해 용산 남일당에서 미군기지를 지나 이태원의 소위 ‘후커힐(창녀 언덕)’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기지 옆을 걸으며, 서울의 중심가에 이런 대규모의 군사기지가 있다는 사실이 괴이하게 느껴졌다. 메인 거리를 지나 도착한 후커힐은 낮 시간이라 클럽들은 문을 다 닫고 있었고, 겨울이어서 그랬는지 유령도시 같은 느낌도 들었다. 낡은 거리에서 예전의 영화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날의 후커힐의 기억은 이태원이 핫플레이스가 되고 수제맥주집이나 맛집을 찾아다니며 내 뇌리에서 잊혀갔다. 꽤 긴 시간이 흐른 후 나는 당시에는 후커힐에서 만날 수 없었던 나키라는 여성을 이태원 지역 성매매 현장 지원 단체에서 일했던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키를 통해 다시 후커힐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태원의 변신을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이태원(梨泰院)과 이태원(異胎院) 사이


   서울시역사박물관의 <이태원> 자료집에는 이태원의 지명은 배나무가 많아 이태원(梨泰院)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는 지명의 유래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강간당한 여성들과 그 여성들이 낳은 아이가 타국인의 아이라 하여 이태원(異胎院)으로 불렸다고 하는 유래가 나온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항복하거나 귀화한 일본인들이 이태원에 집단 거주하기도 했던 지역이라 이태원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낯선 곳으로서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지역이다. 사실을 알리는 지명과 배제와 혐오의 시선을 보여주는 지명 사이의 간극을 통해 한국사회가 이태원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태원은 용산 미 8군 기지촌으로 성장했다. 1950년대 중반에는 미8군 쇼 무대에 출연하는 연예인과 쇼 단에 지급하는 달러가 당시 한국의 연간 총 수출 금액을 능가했다고 한다. 그만큼 기지촌 경제의 규모와 영향력이 컸다.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성매매산업 역시 급격히 번창하였으며, 1990년대까지도 이태원은 미군들의 유흥지로서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2001년 9월 11일 이후 미 당국이 테러에 대한 자국민 보호규제조치로서 미군 상대 클럽들의 출입금지 업소(Off-limits) 지정을 실시하고, 이후 용산 기지 이전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급격한 불황을 맞았다.
   하지만 이태원은 미군기지에 인접해 있으면서 얻게 된 문화적 이질성 덕에 한국사회 내에서 색다른 유흥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되었다. 성소수자 바(bar)들을 비롯, 다양한 예술가들이 꾸린 작업실 등의 이미지가 더해지며 이태원은 이질성, 다양성, 해방성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다큐멘터리 <이태원>은 이런 이태원에서 40여년의 시간을 살아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엔 나키로부터 시작되었던 다큐멘터리는 <럭키, 나키>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럭키에서 유래했다는 나키라는 이름. 이제는 더이상 기지촌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이태원에서 계속 후커힐 언저리를 맴돌 수밖에 없는 나키의 삶은 기지촌 이태원의 역사 그 자체 같았다. ‘나키는 예전에 과연 럭키했던 것일까?’라는 의문으로 지어진 제목은 이태원에서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이태원>으로 바뀌었다. 40여 년간 미군 대상 클럽을 운영해오면서 이태원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 삼숙, 후커힐을 떠났지만 이태원의 다양성 덕분에 여전히 이태원에 머무는 것이 편안한 화교 출신 영화까지. 세 여성들의 삶을 통해 한국사회가 얼마나 여성들의 삶을 마음대로 이용하고, 마음대로 평가하는지 알게 되었다. 또한 그들의 삶과 이태원의 변화는 서로가 서로를 추동한 동력이었지만, 우리가 알 기회가 없었다는 것도.


   -존경받던 외화역군에서 낙인찍혀 소거되는 존재로


   삼숙은 미군 남편과 걸어가다가 ‘늙은 년도 양갈보하네’라는 소리를 듣는다. 달러를 벌어들이라고 추동하던 국가는 더이상 당신이 달러를 벌어들이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 한다. 삼숙의 생애에서 낙인은 그 무엇보다도 민감한 주제이다. 양갈보 소리를 듣고 다시는 남편과 이태원 거리를 걷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을 받았다. 삼숙은 이태원 거리에서 대통령 같은 존재로 늘 카리스마를 자랑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숙에게 ‘양갈보’라는 소리는 그의 행동반경을 제한할 만큼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기지촌 ‘화류계’ 인생에서 미군과 결혼해 미국까지 갔다 돌아왔으니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나키는 이태원에서 일한 여자들은 엉덩이 국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에게 국보는 더이상 그런 존재가 아니다. 외화벌이의 주역으로 치켜세워졌던 그들이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말함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들은 이제 치워버려야 할 존재가 되어버렸고, 이태원이 한남동이나 약수 어디쯤으로 변모할 날이 이제 멀지 않게 느껴진다. 게다가 그들이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있다는 사실 역시 기억되지 않는다.
   기지촌 이태원만 그런 것은 아니다. 다른 기지촌들도, 용산역 앞도, 청량리도, 그렇게 집결지의 기억들은 깨끗하게 지워지곤 한다. 한국사회의 그런 장소들은 재개발 이후 도시의 새로운 얼굴로 등장한다. 그러나 개발의 바람 아래에서 주변화되는 여성들의 목소리나 시간들을 기억하기 위해, 공적 지원을 논의하고자 하면 세금 낭비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국가가 장려했고, 국가가 관리했던 산업에서 착취받은 역사가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것이 그런 공격들의 원인으로 작용하며 도돌이표를 만들어낸다.


   -아는 사이가 된다는 것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세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이태원의 과거와 현재를 만났다. 사실 그 과정은 내 자신의 편견과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 역시 한국사회의 낙인 렌즈가 장착된 채 이 여성들의 삶을 바라보았던 순간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원하는 대답을 상정하고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했었다. 편집을 하면서 화면 속의 나의 부끄러운 모습을 수십 번도 더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는 영화의 방향을 점점 바꾸었다. 영화 속에서는 단지 기지촌여성이 아닌 주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삼숙, 나키, 영화의 삶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 방법이 나의 변화를 조금이나마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 방법을 통해 그 여성들이 내가 아는 사람이 되었을 때, 이들은 그저 지워져도 그만인 존재가 아니게 될 수 있으리라 믿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지속해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동력도 그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2008년부터 여성국극을 다룬 <왕자가 된 소녀들>이라는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면서 알게 되었다. 여성의 이야기는 기록되지 않으면 그대로 잊히기 마련이라는 것을. 그래서 누군가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 그 자체로 우리는 다른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거기서부터 이태원이 아닌 다른 어떤 장소 역시 새롭게 기억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강유가람

강남 은마아파트에서 시작하여, 연남동 그리고 이태원 등의 장소들의 변화에 주목하여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를 페미니스트 시선으로 바라보는 다큐멘터리들을 만들었다. 다큐멘터리 〈이태원〉은 첫번째 장편 다큐멘터리이다. 여성들의 삶과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한 두번째 장편 〈우리는 매일매일〉로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장편 작품상과 서울독립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2020/01/28
2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