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2017~2020)
‘너가튼’ 아빠의 노트: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조차 조심스러운 어둠 속에서 어지러운 거실을 바라보면서
지난 10월 짧은 서평 원고를 청탁받았다. 두 편의 작품을 재량껏 함께 다루면 된다고 했다. 나는 물론 수락했다. 아기를 키우느라 한창 정신없던 때였다(지금도 그렇지만). 아기를 키울 때 필요한 것은 돈과 시간이다. 돈이 아주 많으면 시간은 없어도 된다. 시간이 아주 많으면 돈은 없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돈이 없으려면 시간이 아주 많아야 한다. 사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만…… 그러니 정확하게 말하면 아주 많은 것들이 부족하고 그중에서도 돈과 시간이 부족한 상황. 그럴 때 원고 청탁은 나를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이런 식이다.
청탁을 수락한다 → 시간이 없다(시간을 상쇄할 만큼의 원고료가 아니다) → 망함
청탁을 수락하지 않는다 → 돈이 없다(원고를 쓰지 않는 시간이 부족한 돈을 상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 망함
그럼에도 내가 원고를 쓰기로 한 것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낫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아시스가 〈담배와 술Cigarettes&Alcohol〉에서 노래한 것처럼 평생을 기다릴 수도 있다. 따스한 햇빛 속에서 보낼 나날들을. 그러느니 담배나 술이나 마약이나 뭐 그런 걸 하는 게 낫다는 거다. 하지만 나는 담배를 끊었고 마약은 원래 하지 않고 언젠가부터 술을 잘 마시지 못하게 되었으니 일이라도 하자는 거다. 세상에 뭐 이런 논리가 다 있담?
보시다시피 이게 나의 상황.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진지하게 육아에 임하고 있는 중인 양육자라면 진지하게 글을 쓸 수가 없다. 한마디로, 제정신인 양육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다시 한번. 그럼에도 내가 원고를 쓰기로 한 것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평을 쓰기 위해 새로운 책을 읽을 시간? 물론 없다. 그렇다면 이미 읽은 책으로 서평을 쓰면 될 것 아닌가! 때마침 내게는 아기가 태어난 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여기서 분명 ??? 하는 표정을 짓는 진지한 양육자분들이 계실 걸로 안다. 여기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말하겠다) 틈틈이 읽어온 책들이 있었다. 이런 책들이다.
『엄마, 뱃속이 그리워요』 『똑게육아』 『울리지 않고 아이 잠재우기』 『부모로 산다는 것』 『부모가 된다는 것의 철학』 『아기들은 어떻게 배울까?』 『좀비 육아』 『불량아빠 육아일기』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 『우리 아이의 머릿속』 『베이비 위스퍼』 『인류는 어떻게 아이를 키웠을까』 『엄마는 미친 짓이다』 『네덜란드 소확행 육아』 『프랑스 아이처럼』 『아기 낳는 만화』 『천재가 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드라마』 『애완의 시대』 『내 아이를 위한 감정코칭』 『육아 천재가 된 코믹 아빠』 『우리 아이들』 『부모와 다른 아이들』 『위대한 유산』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 『철없는 부모』 『아홉 살 독서 수업』 『김수연의 아기발달 백과』 『삐뽀삐뽀 119소아과』 『The Bible 육아 소아과 수업 0-12개월』 『임신 출산 육아 대백과』 『(소아청소년과 의사 아빠의 리얼 코칭 닥터오 이유식) 한 그릇 뚝딱 이유식』……
아, 이쯤에서 내 소개를 하자면 나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잡문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결국 그것 때문에 인생의 낙오자가 되었지만, 거기에는 어떤 낭만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라고 말한 폴 오스터를 운 좋은 개자식이라고 생각하는 마흔 살의 서평가다. 언젠가부터 서평을 거의 쓰지 않긴 하지만 여전히 서평가로 불린다. 택시 타기를 좋아해서 『아무튼, 택시』라는 책을 썼고 책이 출간된 이후로는 택시를 거의 타지 않지만 여전히 『아무튼, 택시』의 저자인 것과 마찬가지다. 택시를 타지 않는 건 물론 아기의 탄생과 함께 자가운전을 시작했기 때문이고, 서평을 쓰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맞아 그러고 보니 서평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요즘 내 정신이 이렇다.
(여기서 잠깐. 저 책들을 볼 때면 항상 느끼는 건데 왜 아빠 앞에는 그냥 아빠가 아니라 이런저런 수식어가 붙는 걸까? ‘불량’ 아빠, ‘철학자’ 아빠, ‘코믹’ 아빠, ‘소아청소년과 의사 아빠’…… 나는 잠시 나라면 어떤 아빠라고 해야 할까 생각하다 문득 며칠 전에 트위터에서 본 짤방이 떠올랐다. 아이가 구불구불한 손글씨로 쓴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과편지① / 아빠 너가튼 아빤 / 필요없다고말해서 // 죄송해요”
세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 이건 차라리 시가 아닌가? 둘. 제목이 ‘사과편지①’이라면 ②나 ③도 있는 걸까? 셋. 내가 만약 육아에 관련된 책을 낸다면 ‘너가튼’ 아빠라고 하겠다.)
내가 서평 청탁을 받은 것은 저 목록에 부러 적지 않은 두 권의 책 때문이다. 한 권은 아내가 3주 동안 집을 비운 탓에 다섯 살 사내아이와 함께 집에 남게 된 너새니얼 호손이 쓴 육아일기를 폴 오스터(운 좋은 개자식)가 편집한 『줄리언』. 다른 한 권은 도리스 레싱, 엘리자베스 스마트, 실비아 플라스, 마거릿 미드, 수전 그리핀, 제인 라자르, 에이드리언 리치, 틸리 올슨, 앨리스 워커, 앨리샤 오스트리커, 어슐러 르 귄, 사라 러딕, 낸시 휴스턴, 엘런 맥마흔, 조이 윌리엄스, 메리 겟스킬 이렇게 모두 16명의 여성 작가들이 소설이나 에세이 등에서 엄마-됨에 대해 쓴 글들을 모이라 데이비가 뽑아 엮은 『분노와 애정』이다.
먼저 읽은 건 『줄리언』이었는데, 아기가 아직 기어다니기 전에 읽었다. 참고로 이 글을 쓰는 지금 아기는 13개월 하고 보름이 되었고, 약 다섯 걸음 정도를 걸을 수 있다. 혼자서 걷지 못한다뿐이지 벽이나 가구를 짚고서, 의자를 밀면서, 그것도 아니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기어서 어디든 다니기 때문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아기가 잠든 어느 밤, 아내와 함께 거실 식탁에서 예전에 아기 돌아다니지도 않고 늘 누워만 있을 때, 그때도 엄청 힘들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뭐가 힘들었던 걸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의 결론: 언젠가 지금을 돌아보며 있잖아, 예전에 아기 엄마 아빠 맘마 까까 말고는 말도 못하고, 반항도 하지 않고,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했을 때, 그때도 엄청 힘들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뭐가 힘들었던 걸까? 라는 이야기를 하는 날도 오겠지…… 그때가 언제일지, 과연 오기는 올지 모르겠지만…… 요즘 매일 하는 생각은 하루는 너무 긴데 세월은 너무 빠르다는 것. 그러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런데 맞아 『줄리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그때 나는 호손과 아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가슴 찡해지기도 하고, 흐뭇하게 웃기도 하면서 언젠가 나와 아기가 함께 뛰어놀고 대화도 나누며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아이의 말과 행동에 깜짝깜짝 놀랄 날을 그려보았던 것 같다. 줄리언과 함께 길을 가다 지나가던 허먼 멜빌(!)을 만나 인사하고 집에 초대해 하룻밤을 보내는 어느 날의 일기에는 내가 일기를 남긴다면, 그래서 먼 훗날 누군가 그것을 보게 된다면 거기에 등장하는 내 친구들의 이름에 미래의 독자가 느낌표(!)를 떠올릴지 궁금해하기도 했던 것 같고. 자의식 과잉이라는 건 나도 안다. 이상하게도 아기를 키우다보니 점점 더 자의식 과잉이 되고 만다. 아기를 키우면 겸허해진다는 세간의 이야기와는 정반대다. 아마 그건 마트 기저귀 코너 옆에 맥주 코너를 만들었더니 매출이 반 이상 뛰었다는, 빅데이터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와 비슷한 게 아닐까. 아무튼 다시 『줄리언』으로 돌아와서, 몇몇 부분에서는 공감의 미소를 짓기도 했는데 바로 이런 부분이다.
“내가 줄리언을 침대에 눕혔을 때 시계는 저녁 일곱 시를 향하고 있었다.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녀석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처음으로 아이의 세상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낀다. 이보다 좋은 일은 없을 테지.” (23쪽)
하하하. 호손 씨 아무렴요. 당신도 ‘너가튼’ 아빠 클럽의 회원이셨군요…… 내가 궁금한 것: 아기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기만큼 기쁨을 주는 존재도 없는데 왜 우리는 늘 아기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할까? 아기가 잠든 후에 하는 일이 고작 밀린 (집안)일, 그리고 아기 사진을 보는 일이라면 왜 우리는 그토록 아기를 재우고 싶어하는 걸까? (『부모로 산다는 것』에서 제니퍼 시니어는 어린 두 아이를 키우는 친구의 말을 빌려 그 이유를 한마디로 정리한다. “모든 게 기쁨, 그러나 재미는 전혀 없음All Joy and No Fun”)
일요일 저녁. 잠든 아기를 보며 호손은 이렇게 말한다.
“이번만은 진정으로 말하건대, 줄리언은 제게 둘도 없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이며,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주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아이랍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이 아이를 축복해주십시오! 이 아이를 낳아준 피비를 보살펴주십시오! 피비는 이 세상 최고의 아내며 어머니입니다! 제가 보고 싶어 하는 우나도 축복해주십시오! 로즈버드도 축복해주십시오! 피비를 다시 한 번 축복해주십시오! 이 세상에 더 나은 아내와 아이들은 없을 겁니다. 저에게 과분합니다!”
목요일 점심.
“아내가 여기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나는 머릿속으로 오늘 밤이 오기 전에 아내가 와서 내 손에서 줄리언을 완전히 거둬가기를, 주마등처럼 흘러간 지난 삼 주 동안의 시끌벅적함을 보고 즐거워하기를 바랐다. 줄리언은 오늘 엄마의 귀환을 아주아주 고대하지는 않았다. 보통 때처럼 ‘곧 올 거야’라든가 ‘지금 당장’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내비치지 않았다. 내 입장에선, 아내가 오늘 밤에 오지 않는다면 대단히 절망할 것 같다.”
목요일 오후.
“한 시간 안에, 조금 더 걸릴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피비가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떨어져 지낸 지 일 년이나 흐른 것 같다. 지금 바퀴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가 아니었다.
줄리언은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왔으면 좋겠어! 나 엄마 너무 보고 싶단 말이야!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아빠, 로즈가 다 커버리고 나서 엄마 만나는 거 아니야?”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피비는 오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
“아마도 지금쯤 피비는 마을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아내가 오는 중이라고 상상해보았다. 잠깐 실망하고 나서, 확실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리언은 아주 건강해 보인다. 하지만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오늘 줄리언의 머리카락은 피비가 없이 지낸 그 어느 때보다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신경 써서 머리를 꼬불거리게 했다. 줄리언은 양털로 만든 재킷을 입었는데, 왠일인지 지독히 안 어울렸다. 아무리 벗으라고 해도 고집을 부렸다. 엄마가 없는 사이에 줄리언이 괴상망측해졌다고 피비가 생각할 것 같다.”
금요일 밤.
“열 시가 되기 조금 전에 비통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호손의 일기는 토요일에 끝난다.
“오늘 아내가 오지 않으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시계로 거의 여섯 시가 되었는데 아직 오지 않았다! 확실히, 꼭, 반드시, 틀림없이, 오늘 밤에 올 것이다!
위의 글을 쓰고 난 뒤 십오 분도 지나지 않아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왔다. 모두 무사히!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런 결말을 보며 웃지 않기는 불가능하다. 호손은 좋은 아빠가 분명하다. 물론 그는 19세기 사람이고, 시대적이고 개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일례로 그는 집안일을 아내에게 맡긴 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내가 집을 비운 3주 동안에도 집안일은 가정부가 했다. 그렇지만, 모르긴 해도, 도서관에서 호손의 낡은 일기를 뒤지다가 이 부분을 발견해 출간하도록 하고 발문까지 쓴 20세기의 폴 오스터보다는 더 가정적이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물론 여기엔 폴 오스터에 대한 나의 편견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부인할 생각은 없음). 그의 일기를 보면 모를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묻어나오는 애정, 세심함, 사려 깊음 무엇보다 과시하지 않는 태도……
그래, 부모가 된다는 건 이런 거지. 책장을 덮고 팔짱을 낀 채 슬쩍 미소를 지으며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진짜 중얼거렸을까?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 중얼거리는 일이 잦아졌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얼마 후 ‘여성 작가 16인의 엄마됨에 관한 이야기’라는 부제를 가진 『분노와 애정』을 읽은 나는 미소를 거두고 입을 다물어야만 했는데, 이미 제목에서부터 아빠들 특유의(‘불량’ ‘철학자’ ‘코믹’ ‘너가튼’을 막론하고) ‘허허, 이 녀석 참. 그래, 개구쟁이이고 나를 참 피곤하게 하긴 하지만 그래도 세상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는 또 없지. 아!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내인가! 여보? 언제 와?’라는 식의 여유가 들어설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땡땡 엄마’ 같은 수식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그런 여유가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서른여덟 살에 첫 아이를 낳고 위태로운 감정을 느끼던 시절 자신을 다잡은 ‘생명줄’이 되어준 여성 작가들의 글을 다른 엄마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책을 엮었다는 모이라 데이비는 서문에서 이렇게 쓴다.
“엄마들이 자신의 경험을 기록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엄마됨을 다룬 문학 작품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그동안 거듭 되풀이되었다. 수전 그리핀은 에세이 「페미니즘과 엄마됨」에서 엄마됨에 대한 자신의 기록을 레지스탕스의 일기에 비유한다. “잠깐의 깨달음만이 허락되며, 이것마저 방해받지 않는 짧은 틈을 타 빨리 기록해야” 할 정도로 시간이 없다. 또한 제인 라자르에 따르면 엄마가 주체가 되어 직접 서술한 글보다 “아이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엄마”에 대한 글이 더 많다. “하지만 아이들은 우리에게 이야기의 절반만 들려줄 뿐이다.” 시와 소설에서도 엄마로서의 “나”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엄마들의 목소리가 이토록 부족하기에 『분노와 애정』에 실린 작품들은 마치 미지의 영역에서 온 편지처럼 시급하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을 드러내준다.”
실제로 그렇다. 『줄리언』을 읽으면서는 얼마든지 공감과 연민의 웃음을 보낼 수 있었지만 『분노와 애정』을 읽고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머니 이곳은 전쟁터입니다” 같은 농담(혼잣말이랑 비슷한 거다)조차 할 수 없었다. 어느 상황에서건 그런 농담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만 나도 이제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런 농담을 내뱉고 만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저 때는 그런 실없는 농담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와꾸’가 나온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서평가. 아무리 서평을 잘 쓰지 않는다고 해도 나도 모르게 책을 읽으며 자꾸 설계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서평 청탁을 받으며 믿었던 구석은 이런 거였다. 그래, 『줄리언』과 『분노와 애정』을 엮어서 쓰자! 여유로운 아빠들의 육아와 그렇지 않은 엄마들의 육아의 차이에 대해 쓰자! 나는 심지어 페이지가 부족하면 쓸 내 이야기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줄리언』과 『분노와 애정』 사이에 있는 남성-양육자로서의 나”라는 것이었다. 뭐 대단한 아이디어는 아니라고 해야겠지만……
하지만 그 글은 결코 쓰이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감을 며칠 앞두고 본격적인 원고를 쓰기 위해 청탁서를 다시 한번 확인했는데, 거기에는 최근 3개월간 출간된 한국 문학(시, 소설 가리지 않음) 두 편에 대해서 써달라고 써 있었던 것이다! 하하하! 내 정신이 이렇다니까! 결국 나는 부랴부랴 한국 소설 몇 편을 찾아 읽었지만 시간의 부족과 꺾여버린 의욕으로 죄송하지만 원고를 쓸 수 없다는 펑크 메일을 보내야 했다.
사실 펑크 메일이야말로 이 원고에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나? “잠깐의 깨달음만이 허락되며, 이것마저 방해받지 않는 짧은 틈을 타 빨리 기록해야” 할 정도로 시간이 없다는 수전 그리핀의 말처럼. “죄송합니다. 남성-양육자의 관점으로 바라본 육아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노력했는데,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아서 쓸 수가 없습니다. 더 길고 정성스럽게 사과를 드려 마땅하나 아기가 잠에서 깨어 울고 있어서 이만 줄입니다. 총총.” 뭐 이런 식으로 펑크 메일을 보내는 것이 이 원고를 완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논리를 쌓고 설득시키는 정석적인 글쓰기보다는 수행적performative인 글쓰기를 더 선호하기도 하고. 비록 갑작스런 펑크에 벙찐 담당 편집자와 관계자 몇 분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그걸 (수행적이건 뭐건 간에) 글쓰기라고 해야 하는지, 차라리 글 못 쓰기라고 해야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한 이유, 다시 말해 이 글을 쓰기로 한 이유는 간단하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줄리언』과 『분노와 애정』을 비교하는 서평을 쓰지 못한 것에 대한 일종의 메타-서평. 다른 하나는 꼭 너새니얼 호손을 따라 한 것은 아닌데 지금 그 사실을 밝히면 따라 한다고 밖에는 보이지 않을, 내가 매일 아이폰 메모장에 육아 일기 비슷한 것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래 전자를 반쯤 쓰고, 후자를 이어서(편집해서) 넣을 생각이었는데 벌써 내게 주어진 지면을 채워버렸다. 참고로 일기는 이런 식이다.
사실을 말하면 오늘 마감인 다른 원고(단행본)가 있었고, 펑크 메일은 그쪽에 썼다. 오늘치의 펑크 메일을 다 써버린 것이다. 참고로 메일은 이런 식이다.
그런데 이걸 과연 ‘남성-양육자의 관점에서 본 육아 에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남성이고 양육자지만, 이 글에 청탁한 측에서 요구한 그런 관점perspective이라고 할 만한 게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한 변명을 미리 했다. 진지하게 육아에 임하고 있는 중인 양육자라면 진지하게 글을 쓸 수가 없다. 다시 한번, 제정신인 양육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오네스코를 흉내 내며 이 글을 끝낼 생각이다. 가방을 들고 배의 트랩을 내려오는 이오네스코에게 남미의 저널리스트가 물었다. “삶과 죽음에 관한 당신의 개념은 무엇인가?” 그러자 이오네스코는 가방을 내려놓고 이마의 땀을 닦으며, 그 대답을 위해 나에게 20년이라는 시간을 허락해 줄 것을 부탁했다. 나 역시 같은 부탁을 한다. 그때 내 딸은 22세가 되고 나는 60살이 되겠지. 솔직히 그때가 되어서도 남성-양육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육아 에세이’라는 걸 제대로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무릇 마감이란 늦춰질수록 좋은 것이 아니던가……
청탁을 수락한다 → 시간이 없다(시간을 상쇄할 만큼의 원고료가 아니다) → 망함
청탁을 수락하지 않는다 → 돈이 없다(원고를 쓰지 않는 시간이 부족한 돈을 상쇄하기에는 역부족이다) → 망함
그럼에도 내가 원고를 쓰기로 한 것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낫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아시스가 〈담배와 술Cigarettes&Alcohol〉에서 노래한 것처럼 평생을 기다릴 수도 있다. 따스한 햇빛 속에서 보낼 나날들을. 그러느니 담배나 술이나 마약이나 뭐 그런 걸 하는 게 낫다는 거다. 하지만 나는 담배를 끊었고 마약은 원래 하지 않고 언젠가부터 술을 잘 마시지 못하게 되었으니 일이라도 하자는 거다. 세상에 뭐 이런 논리가 다 있담?
보시다시피 이게 나의 상황.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 진지하게 육아에 임하고 있는 중인 양육자라면 진지하게 글을 쓸 수가 없다. 한마디로, 제정신인 양육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다시 한번. 그럼에도 내가 원고를 쓰기로 한 것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평을 쓰기 위해 새로운 책을 읽을 시간? 물론 없다. 그렇다면 이미 읽은 책으로 서평을 쓰면 될 것 아닌가! 때마침 내게는 아기가 태어난 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여기서 분명 ??? 하는 표정을 짓는 진지한 양육자분들이 계실 걸로 안다. 여기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말하겠다) 틈틈이 읽어온 책들이 있었다. 이런 책들이다.
『엄마, 뱃속이 그리워요』 『똑게육아』 『울리지 않고 아이 잠재우기』 『부모로 산다는 것』 『부모가 된다는 것의 철학』 『아기들은 어떻게 배울까?』 『좀비 육아』 『불량아빠 육아일기』 『철학자 아빠의 인문 육아』 『우리 아이의 머릿속』 『베이비 위스퍼』 『인류는 어떻게 아이를 키웠을까』 『엄마는 미친 짓이다』 『네덜란드 소확행 육아』 『프랑스 아이처럼』 『아기 낳는 만화』 『천재가 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드라마』 『애완의 시대』 『내 아이를 위한 감정코칭』 『육아 천재가 된 코믹 아빠』 『우리 아이들』 『부모와 다른 아이들』 『위대한 유산』 『나는 아기 캐리어가 아닙니다』 『철없는 부모』 『아홉 살 독서 수업』 『김수연의 아기발달 백과』 『삐뽀삐뽀 119소아과』 『The Bible 육아 소아과 수업 0-12개월』 『임신 출산 육아 대백과』 『(소아청소년과 의사 아빠의 리얼 코칭 닥터오 이유식) 한 그릇 뚝딱 이유식』……
아, 이쯤에서 내 소개를 하자면 나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잡문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결국 그것 때문에 인생의 낙오자가 되었지만, 거기에는 어떤 낭만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라고 말한 폴 오스터를 운 좋은 개자식이라고 생각하는 마흔 살의 서평가다. 언젠가부터 서평을 거의 쓰지 않긴 하지만 여전히 서평가로 불린다. 택시 타기를 좋아해서 『아무튼, 택시』라는 책을 썼고 책이 출간된 이후로는 택시를 거의 타지 않지만 여전히 『아무튼, 택시』의 저자인 것과 마찬가지다. 택시를 타지 않는 건 물론 아기의 탄생과 함께 자가운전을 시작했기 때문이고, 서평을 쓰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맞아 그러고 보니 서평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요즘 내 정신이 이렇다.
(여기서 잠깐. 저 책들을 볼 때면 항상 느끼는 건데 왜 아빠 앞에는 그냥 아빠가 아니라 이런저런 수식어가 붙는 걸까? ‘불량’ 아빠, ‘철학자’ 아빠, ‘코믹’ 아빠, ‘소아청소년과 의사 아빠’…… 나는 잠시 나라면 어떤 아빠라고 해야 할까 생각하다 문득 며칠 전에 트위터에서 본 짤방이 떠올랐다. 아이가 구불구불한 손글씨로 쓴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과편지① / 아빠 너가튼 아빤 / 필요없다고말해서 // 죄송해요”
세 가지 생각이 든다. 하나. 이건 차라리 시가 아닌가? 둘. 제목이 ‘사과편지①’이라면 ②나 ③도 있는 걸까? 셋. 내가 만약 육아에 관련된 책을 낸다면 ‘너가튼’ 아빠라고 하겠다.)
내가 서평 청탁을 받은 것은 저 목록에 부러 적지 않은 두 권의 책 때문이다. 한 권은 아내가 3주 동안 집을 비운 탓에 다섯 살 사내아이와 함께 집에 남게 된 너새니얼 호손이 쓴 육아일기를 폴 오스터(운 좋은 개자식)가 편집한 『줄리언』. 다른 한 권은 도리스 레싱, 엘리자베스 스마트, 실비아 플라스, 마거릿 미드, 수전 그리핀, 제인 라자르, 에이드리언 리치, 틸리 올슨, 앨리스 워커, 앨리샤 오스트리커, 어슐러 르 귄, 사라 러딕, 낸시 휴스턴, 엘런 맥마흔, 조이 윌리엄스, 메리 겟스킬 이렇게 모두 16명의 여성 작가들이 소설이나 에세이 등에서 엄마-됨에 대해 쓴 글들을 모이라 데이비가 뽑아 엮은 『분노와 애정』이다.
먼저 읽은 건 『줄리언』이었는데, 아기가 아직 기어다니기 전에 읽었다. 참고로 이 글을 쓰는 지금 아기는 13개월 하고 보름이 되었고, 약 다섯 걸음 정도를 걸을 수 있다. 혼자서 걷지 못한다뿐이지 벽이나 가구를 짚고서, 의자를 밀면서, 그것도 아니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기어서 어디든 다니기 때문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아기가 잠든 어느 밤, 아내와 함께 거실 식탁에서 예전에 아기 돌아다니지도 않고 늘 누워만 있을 때, 그때도 엄청 힘들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뭐가 힘들었던 걸까?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의 결론: 언젠가 지금을 돌아보며 있잖아, 예전에 아기 엄마 아빠 맘마 까까 말고는 말도 못하고, 반항도 하지 않고, 사랑스럽고 귀엽기만 했을 때, 그때도 엄청 힘들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뭐가 힘들었던 걸까? 라는 이야기를 하는 날도 오겠지…… 그때가 언제일지, 과연 오기는 올지 모르겠지만…… 요즘 매일 하는 생각은 하루는 너무 긴데 세월은 너무 빠르다는 것. 그러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런데 맞아 『줄리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그때 나는 호손과 아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가슴 찡해지기도 하고, 흐뭇하게 웃기도 하면서 언젠가 나와 아기가 함께 뛰어놀고 대화도 나누며 어느새 훌쩍 자라버린 아이의 말과 행동에 깜짝깜짝 놀랄 날을 그려보았던 것 같다. 줄리언과 함께 길을 가다 지나가던 허먼 멜빌(!)을 만나 인사하고 집에 초대해 하룻밤을 보내는 어느 날의 일기에는 내가 일기를 남긴다면, 그래서 먼 훗날 누군가 그것을 보게 된다면 거기에 등장하는 내 친구들의 이름에 미래의 독자가 느낌표(!)를 떠올릴지 궁금해하기도 했던 것 같고. 자의식 과잉이라는 건 나도 안다. 이상하게도 아기를 키우다보니 점점 더 자의식 과잉이 되고 만다. 아기를 키우면 겸허해진다는 세간의 이야기와는 정반대다. 아마 그건 마트 기저귀 코너 옆에 맥주 코너를 만들었더니 매출이 반 이상 뛰었다는, 빅데이터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와 비슷한 게 아닐까. 아무튼 다시 『줄리언』으로 돌아와서, 몇몇 부분에서는 공감의 미소를 짓기도 했는데 바로 이런 부분이다.
“내가 줄리언을 침대에 눕혔을 때 시계는 저녁 일곱 시를 향하고 있었다.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 녀석에게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처음으로 아이의 세상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낀다. 이보다 좋은 일은 없을 테지.” (23쪽)
하하하. 호손 씨 아무렴요. 당신도 ‘너가튼’ 아빠 클럽의 회원이셨군요…… 내가 궁금한 것: 아기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기만큼 기쁨을 주는 존재도 없는데 왜 우리는 늘 아기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할까? 아기가 잠든 후에 하는 일이 고작 밀린 (집안)일, 그리고 아기 사진을 보는 일이라면 왜 우리는 그토록 아기를 재우고 싶어하는 걸까? (『부모로 산다는 것』에서 제니퍼 시니어는 어린 두 아이를 키우는 친구의 말을 빌려 그 이유를 한마디로 정리한다. “모든 게 기쁨, 그러나 재미는 전혀 없음All Joy and No Fun”)
일요일 저녁. 잠든 아기를 보며 호손은 이렇게 말한다.
“이번만은 진정으로 말하건대, 줄리언은 제게 둘도 없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아이이며,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주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아이랍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이 아이를 축복해주십시오! 이 아이를 낳아준 피비를 보살펴주십시오! 피비는 이 세상 최고의 아내며 어머니입니다! 제가 보고 싶어 하는 우나도 축복해주십시오! 로즈버드도 축복해주십시오! 피비를 다시 한 번 축복해주십시오! 이 세상에 더 나은 아내와 아이들은 없을 겁니다. 저에게 과분합니다!”
목요일 점심.
“아내가 여기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나는 머릿속으로 오늘 밤이 오기 전에 아내가 와서 내 손에서 줄리언을 완전히 거둬가기를, 주마등처럼 흘러간 지난 삼 주 동안의 시끌벅적함을 보고 즐거워하기를 바랐다. 줄리언은 오늘 엄마의 귀환을 아주아주 고대하지는 않았다. 보통 때처럼 ‘곧 올 거야’라든가 ‘지금 당장’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내비치지 않았다. 내 입장에선, 아내가 오늘 밤에 오지 않는다면 대단히 절망할 것 같다.”
목요일 오후.
“한 시간 안에, 조금 더 걸릴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피비가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떨어져 지낸 지 일 년이나 흐른 것 같다. 지금 바퀴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내가 아니었다.
줄리언은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왔으면 좋겠어! 나 엄마 너무 보고 싶단 말이야!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아빠, 로즈가 다 커버리고 나서 엄마 만나는 거 아니야?”
말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피비는 오지 않았다!”
금요일 오후.
“아마도 지금쯤 피비는 마을에 도착했을지도 모른다. 아내가 오는 중이라고 상상해보았다. 잠깐 실망하고 나서, 확실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리언은 아주 건강해 보인다. 하지만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오늘 줄리언의 머리카락은 피비가 없이 지낸 그 어느 때보다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신경 써서 머리를 꼬불거리게 했다. 줄리언은 양털로 만든 재킷을 입었는데, 왠일인지 지독히 안 어울렸다. 아무리 벗으라고 해도 고집을 부렸다. 엄마가 없는 사이에 줄리언이 괴상망측해졌다고 피비가 생각할 것 같다.”
금요일 밤.
“열 시가 되기 조금 전에 비통한 마음으로 침대에 누웠다.”
호손의 일기는 토요일에 끝난다.
“오늘 아내가 오지 않으면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시계로 거의 여섯 시가 되었는데 아직 오지 않았다! 확실히, 꼭, 반드시, 틀림없이, 오늘 밤에 올 것이다!
위의 글을 쓰고 난 뒤 십오 분도 지나지 않아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왔다. 모두 무사히!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런 결말을 보며 웃지 않기는 불가능하다. 호손은 좋은 아빠가 분명하다. 물론 그는 19세기 사람이고, 시대적이고 개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일례로 그는 집안일을 아내에게 맡긴 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내가 집을 비운 3주 동안에도 집안일은 가정부가 했다. 그렇지만, 모르긴 해도, 도서관에서 호손의 낡은 일기를 뒤지다가 이 부분을 발견해 출간하도록 하고 발문까지 쓴 20세기의 폴 오스터보다는 더 가정적이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물론 여기엔 폴 오스터에 대한 나의 편견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부인할 생각은 없음). 그의 일기를 보면 모를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묻어나오는 애정, 세심함, 사려 깊음 무엇보다 과시하지 않는 태도……
그래, 부모가 된다는 건 이런 거지. 책장을 덮고 팔짱을 낀 채 슬쩍 미소를 지으며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진짜 중얼거렸을까?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 중얼거리는 일이 잦아졌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얼마 후 ‘여성 작가 16인의 엄마됨에 관한 이야기’라는 부제를 가진 『분노와 애정』을 읽은 나는 미소를 거두고 입을 다물어야만 했는데, 이미 제목에서부터 아빠들 특유의(‘불량’ ‘철학자’ ‘코믹’ ‘너가튼’을 막론하고) ‘허허, 이 녀석 참. 그래, 개구쟁이이고 나를 참 피곤하게 하긴 하지만 그래도 세상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는 또 없지. 아!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내인가! 여보? 언제 와?’라는 식의 여유가 들어설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땡땡 엄마’ 같은 수식어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그런 여유가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서른여덟 살에 첫 아이를 낳고 위태로운 감정을 느끼던 시절 자신을 다잡은 ‘생명줄’이 되어준 여성 작가들의 글을 다른 엄마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책을 엮었다는 모이라 데이비는 서문에서 이렇게 쓴다.
“엄마들이 자신의 경험을 기록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엄마됨을 다룬 문학 작품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는 그동안 거듭 되풀이되었다. 수전 그리핀은 에세이 「페미니즘과 엄마됨」에서 엄마됨에 대한 자신의 기록을 레지스탕스의 일기에 비유한다. “잠깐의 깨달음만이 허락되며, 이것마저 방해받지 않는 짧은 틈을 타 빨리 기록해야” 할 정도로 시간이 없다. 또한 제인 라자르에 따르면 엄마가 주체가 되어 직접 서술한 글보다 “아이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엄마”에 대한 글이 더 많다. “하지만 아이들은 우리에게 이야기의 절반만 들려줄 뿐이다.” 시와 소설에서도 엄마로서의 “나”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엄마들의 목소리가 이토록 부족하기에 『분노와 애정』에 실린 작품들은 마치 미지의 영역에서 온 편지처럼 시급하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을 드러내준다.”
실제로 그렇다. 『줄리언』을 읽으면서는 얼마든지 공감과 연민의 웃음을 보낼 수 있었지만 『분노와 애정』을 읽고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어머니 이곳은 전쟁터입니다” 같은 농담(혼잣말이랑 비슷한 거다)조차 할 수 없었다. 어느 상황에서건 그런 농담은 하지 않는 게 좋겠지만 나도 이제 나이가 나이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런 농담을 내뱉고 만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저 때는 그런 실없는 농담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와꾸’가 나온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서평가. 아무리 서평을 잘 쓰지 않는다고 해도 나도 모르게 책을 읽으며 자꾸 설계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내가 서평 청탁을 받으며 믿었던 구석은 이런 거였다. 그래, 『줄리언』과 『분노와 애정』을 엮어서 쓰자! 여유로운 아빠들의 육아와 그렇지 않은 엄마들의 육아의 차이에 대해 쓰자! 나는 심지어 페이지가 부족하면 쓸 내 이야기도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줄리언』과 『분노와 애정』 사이에 있는 남성-양육자로서의 나”라는 것이었다. 뭐 대단한 아이디어는 아니라고 해야겠지만……
하지만 그 글은 결코 쓰이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마감을 며칠 앞두고 본격적인 원고를 쓰기 위해 청탁서를 다시 한번 확인했는데, 거기에는 최근 3개월간 출간된 한국 문학(시, 소설 가리지 않음) 두 편에 대해서 써달라고 써 있었던 것이다! 하하하! 내 정신이 이렇다니까! 결국 나는 부랴부랴 한국 소설 몇 편을 찾아 읽었지만 시간의 부족과 꺾여버린 의욕으로 죄송하지만 원고를 쓸 수 없다는 펑크 메일을 보내야 했다.
사실 펑크 메일이야말로 이 원고에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나? “잠깐의 깨달음만이 허락되며, 이것마저 방해받지 않는 짧은 틈을 타 빨리 기록해야” 할 정도로 시간이 없다는 수전 그리핀의 말처럼. “죄송합니다. 남성-양육자의 관점으로 바라본 육아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노력했는데,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아서 쓸 수가 없습니다. 더 길고 정성스럽게 사과를 드려 마땅하나 아기가 잠에서 깨어 울고 있어서 이만 줄입니다. 총총.” 뭐 이런 식으로 펑크 메일을 보내는 것이 이 원고를 완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논리를 쌓고 설득시키는 정석적인 글쓰기보다는 수행적performative인 글쓰기를 더 선호하기도 하고. 비록 갑작스런 펑크에 벙찐 담당 편집자와 관계자 몇 분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겠지만…… 무엇보다 그걸 (수행적이건 뭐건 간에) 글쓰기라고 해야 하는지, 차라리 글 못 쓰기라고 해야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게 하지 않기로 한 이유, 다시 말해 이 글을 쓰기로 한 이유는 간단하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줄리언』과 『분노와 애정』을 비교하는 서평을 쓰지 못한 것에 대한 일종의 메타-서평. 다른 하나는 꼭 너새니얼 호손을 따라 한 것은 아닌데 지금 그 사실을 밝히면 따라 한다고 밖에는 보이지 않을, 내가 매일 아이폰 메모장에 육아 일기 비슷한 것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래 전자를 반쯤 쓰고, 후자를 이어서(편집해서) 넣을 생각이었는데 벌써 내게 주어진 지면을 채워버렸다. 참고로 일기는 이런 식이다.
나윤이 잠깐 내려놓고 설거지하는데 전화가 와서 받았다. 연희문학창작촌 담당자가 웹진 비유 청탁. 남성 양육자의 관점에서 본 에세이를 써달라고. 거절하기도 그래서 하겠다고 했는데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나윤이. 내가 다시 설거지하러 가니까 찡찡거려서 핸드폰을 달라고 그러나? 하지만 핸드폰은 줄 수 없지 하고 블루투스 마이크를 꺼내줬는데 처음에는 재밌어하면서 관심을 보이더니 어느 순간부터 무섭다는 듯? 인상을 쓰면서 내게 마이크를 넘겼다. 불이 반짝거려서 그런가? 하고 끄고도 줘보고 아예 소리 안 나게 전원을 끄고도 줘봤는데 계속 비슷한 반응... 급기야 울기 시작해서 어쩔 수 없이 핸드폰 꺼내줬는데 핸드폰을 봐도 울기만 했다. 화면이 어두워서 그런가? 하고 사진 앱을 켜서 줬는데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왜 그렇지 아가... 일단 설거지를 마저 할 게 그동안 좀 생각해보고 있어라... 하는 마음으로 설거지하는 내내 우는 나윤이. 한 오분? 그리고 안아서 달래는데 좀처럼 그치지 않다가 겨우 그쳐서 내려놓으려고 하면 또 울려고 하고, 또 울려고 하고... 그러다 외할아버지한테 영상통화 왔는데 관심 없다는 듯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띡띡띡 소리 나니까 고개를 휙. 엄마가 와서 엄마 품으로...
왜 엄마 껌딱지가 되어버린 건지 모르겠네. 옷 갈아입고 잠깐 화장실 가는 사이에도 엉엉. 그렇다고 엄마랑 같이 있으면 기분이 막 좋은 것도 아니고 엄마 품에 안긴 채로 계속 칭얼칭얼... 칭얼칭얼...
어쨌든 지은이가 빨리 와준 덕분에 냉장고에 있던 양배추와 새우를 가지고 볶음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재료 다듬어놓고 지은이가 나윤이 이유식 먹이는 동안 가습기 씻고 안방 환기하면서 청소기 돌리고 작은방 치우고 목욕물 받았다. 나윤이 목욕하는 동안에는 설거지하고.
나윤이 옷 입기를 어찌나 싫어하는지 뒤로 그냥 누워버림... 요즘 싫은 게 너무 많아서 다 싫은 것 같다. 그래 나윤아 아빠도 그랬어... 네 나이 때는 어땠는지 기억 안 나지만 30대까지 그랬어... 사실 지금도 그럴걸... 생각할 일이 없어서 그렇지...
왜 엄마 껌딱지가 되어버린 건지 모르겠네. 옷 갈아입고 잠깐 화장실 가는 사이에도 엉엉. 그렇다고 엄마랑 같이 있으면 기분이 막 좋은 것도 아니고 엄마 품에 안긴 채로 계속 칭얼칭얼... 칭얼칭얼...
어쨌든 지은이가 빨리 와준 덕분에 냉장고에 있던 양배추와 새우를 가지고 볶음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재료 다듬어놓고 지은이가 나윤이 이유식 먹이는 동안 가습기 씻고 안방 환기하면서 청소기 돌리고 작은방 치우고 목욕물 받았다. 나윤이 목욕하는 동안에는 설거지하고.
나윤이 옷 입기를 어찌나 싫어하는지 뒤로 그냥 누워버림... 요즘 싫은 게 너무 많아서 다 싫은 것 같다. 그래 나윤아 아빠도 그랬어... 네 나이 때는 어땠는지 기억 안 나지만 30대까지 그랬어... 사실 지금도 그럴걸... 생각할 일이 없어서 그렇지...
사실을 말하면 오늘 마감인 다른 원고(단행본)가 있었고, 펑크 메일은 그쪽에 썼다. 오늘치의 펑크 메일을 다 써버린 것이다. 참고로 메일은 이런 식이다.
안녕하세요 금정연입니다.
오늘이 2차 마감일이네요.
미리 말씀드리면, 아직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쉬엄쉬엄 놀면서 하는 것도 아니고 특히 최근 며칠은 아내와 아가를 친정에 보내고 작업실에서 밤새우면서 작업했는데 아직 완성하지 못했어요.
대충 쓸 내용들은 정해진 상태인데 그걸 글로 옮길 물리적인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네요.
아기가 정말 빨리 자라서, 이제 익숙해진 것 같다,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생각하는 순간 아가는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가 있고 부모는 또 그걸 따라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 부랴부랴 뒤를 쫓는 일의 반복이 바로 육아라서 아무리 노력하고 쥐어짜도 시간이 늘 부족해요. 변명이지만...
다시 한번 마감을 어기게 되어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오늘이 2차 마감일이네요.
미리 말씀드리면, 아직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쉬엄쉬엄 놀면서 하는 것도 아니고 특히 최근 며칠은 아내와 아가를 친정에 보내고 작업실에서 밤새우면서 작업했는데 아직 완성하지 못했어요.
대충 쓸 내용들은 정해진 상태인데 그걸 글로 옮길 물리적인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네요.
아기가 정말 빨리 자라서, 이제 익숙해진 것 같다,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생각하는 순간 아가는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가 있고 부모는 또 그걸 따라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 부랴부랴 뒤를 쫓는 일의 반복이 바로 육아라서 아무리 노력하고 쥐어짜도 시간이 늘 부족해요. 변명이지만...
다시 한번 마감을 어기게 되어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걸 과연 ‘남성-양육자의 관점에서 본 육아 에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남성이고 양육자지만, 이 글에 청탁한 측에서 요구한 그런 관점perspective이라고 할 만한 게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에 대한 변명을 미리 했다. 진지하게 육아에 임하고 있는 중인 양육자라면 진지하게 글을 쓸 수가 없다. 다시 한번, 제정신인 양육자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오네스코를 흉내 내며 이 글을 끝낼 생각이다. 가방을 들고 배의 트랩을 내려오는 이오네스코에게 남미의 저널리스트가 물었다. “삶과 죽음에 관한 당신의 개념은 무엇인가?” 그러자 이오네스코는 가방을 내려놓고 이마의 땀을 닦으며, 그 대답을 위해 나에게 20년이라는 시간을 허락해 줄 것을 부탁했다. 나 역시 같은 부탁을 한다. 그때 내 딸은 22세가 되고 나는 60살이 되겠지. 솔직히 그때가 되어서도 남성-양육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육아 에세이’라는 걸 제대로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무릇 마감이란 늦춰질수록 좋은 것이 아니던가……
금정연
아가가 왜 어느 날은 일어나자마자 앉아서 웃고 어느 날은 울면서 일어나는지 궁금해하는 14개월 된 아빠. 그전에는 서평가였다. 지은 책으로 『서서비행』 『난폭한 독서』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아무튼, 택시』 『문학의 기쁨』(공저) 등이 있다. 지어야 할 책으로 『담배와 영화』 『조지 오웰』 『일상생활의 모험(가제)』 등이 있다.
2020/02/25
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