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
12회 2020, 정치하는 청소년이 온다
선거 연령 하향 이전, 청소년으로 산다는 것
2019년 12월 27일, 드디어 만 18세 선거 연령 하향을 포함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를 통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전국의 만 18세들은 약 14만 명으로 추산되니, 이 법안 통과가 대한민국의 14만 명의 국민들에게 주권을 돌려준 셈이다. 선거 연령 하향이라는 결과는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의 단체 소통방으로 확인했다. 어느 동료는 눈물이 났다고 말했고, 어느 동료는 믿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나는 끝없는 기자회견도, 끊임없이 벽을 대고 말하는 듯한 기분도 끝이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껏 내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시민’일 수 없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선거철이 다가올 때마다 길거리에서 부지런히 공보물을 나눠주던 분들이 ‘청소년처럼 보이는’ 내가 지나가면 꼭 손을 거두며 딴청을 피웠고, 온 뉴스며 방송이며 선거로 난리법석인 국가에서 나는 어쩐지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어느 길에나 쩌렁쩌렁한 스피커와 함께 오가는 선거 차 역시 소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비유했듯 전 세계를 시끌벅적하게 만드는 올림픽 시즌에, 꼭 나만 상관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랄까. 그뿐인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은 청소년이라는 정체성을 선거철에는 더욱 두드러지게 느껴야 했다. 청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지하는 후보를 밝힐 수 없었고 정당에 입당할 수도 없었다. 이처럼 선거철이면 꼭 찾아왔던 불쾌감과 부끄러움 같은 것들을 여전히 기억한다.
나는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와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의 활동가로, 또 이번 선거 연령 하향으로 투표권을 가지게 된 만 18세로서 청소년 참정권 운동에 동참했다. 물론 그 기간이 길진 않지만, 활동을 하지 않을 때에도 내가 청소년이기에 겪어야 했던 경험들은 말하기를 다시 시작할 힘이 되고는 했다.
말하는 일은 동시에 배우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운동을 시작한 기점인, 작년 9월 이전엔 청소년 참정권은 물론이고 정치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시사는 또래 친구들보다도 몰랐고, 청소년 참정권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 수 없으니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참정권을 박탈당했다는 건, 단순히 권리가 아닌 그 권리에 대해 알 권리조차 박탈당한다는 뜻이었다.
이건 나뿐만이 아닌, 대한민국의 많은 청소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이번 선거 연령 하향에 모두 찬성하지는 않는다. 공식적인 자리를 통해 반대 의견을 밝히는 청소년들도 있었다. 선거 연령 하향을 반대하는 일부 여론은 청소년 당사자들의 반대를 주요한 근거로 삼기도 했다. 그들조차 자신들에게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청소년에게 이렇게 중요한 권리를 줄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선거 가능한 연령이 되는 시점부터 확신을 가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 누가 청소년들에게 참정권이 얼마나 중요한지, 당연하게 행사할 권리인지 제대로 알려주었나.
거듭 말하지만 참정권은 권리다.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것과, 애초에 할 수조차 없는 것 사이에는 너무나 큰 간극이 있다. 언제나 청소년에게, 혹은 나에겐 ‘미성숙하다’ ‘감정적이다’ ‘가정과 학교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한다’라는 증명할 수 없는 관념과 질타만이 따라왔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것은 청소년의 많은 언행을 제지하고 또 금지하는 이유가 되었다. 청소년의 참정권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말을 따를 것이다’ ‘교실이 정치화될 것이다’ ‘정치처럼 중요한 일에 참여하기엔 너무 어리다’라는 말들이 청소년에게마저 나 자신을 민주주의에서 배제하는 것을 정당하고 당연하게끔 느끼게 만든 것이다. 이는 청소년의 ‘판단 능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청소년을 수동적이고 덜 자란 ‘예비 시민’으로 보는 사회의 시각에서 기인한다.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정치 이야기만 할 거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고작 ‘한 살’ 하향된 이번 법안 개정에 따른 많은 우려들은 익히 알고 있다. 교실이 정치화될 것이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공부가 아니라 정치 이야기만 할 것이다, 고3은 예민한 시기다, 청소년은 불안정하고 미성숙하다 등등…… 그 우려들을 줄 세우자면 끝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말들은 단순히 인터넷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 연령 하향 이전 패스트트랙 기간의 국회에서 보수정당의 의원들이 직접 단상에 올라가 발언한 내용이기도 하다.
법안이 통과된 이후에도 만 18세 당사자인 내가 이 우려를 해결하는 답변을 내놓을 거라고 기대하는 인터뷰는 쏟아졌다. 나는 끊임없이 교실의 정치화에 대해, 청소년의 미성숙함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질문에 앞서 우선 나는 묻고 싶다. 교실이 정치화되는 것은 무엇이 문제인가? 정치는 때로는 아주 크고 거대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바로 내 일상과 하루를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크고 작은 여러 모임들에도 정치가 작동하며, 하다못해 청소년 구성원이 가장 많을 학교마저도 내부적인 선거를 실시한다.
지난 2월 12일,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에서 준비한 〈2020년, 정치하는 청소년이 온다〉라는 행사에서 한 청소년은 실제 자신의 학교에서 ‘정치와 법’이라는 이름의 과목을 가르치면서 청소년을 정치와 무관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 웃기지 않느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청소년은 그저 예비 유권자로서 가르침 받는 것에서 멈추고 성년이 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교실의 정치적 중립은 어째서 요구되는가? 우리는 이미 언제나 정치하고 있었다. 청소년 역시 민주주의를 함께 만들었고, 언제나 그것을 위해 함께 싸웠다. 대한민국의 근간을 마련한 역사적 사건인 5.18 민주화 운동, 4.19 혁명, 6월 민주항쟁…… 가장 가깝게는 2014년의 촛불 광장까지 한국의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늘 청소년이 주도하고, 함께했다. 무엇보다 미성숙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도 국민이다. 청소년이라고 미성숙하리라는 법도 없으며, 때로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 가장 미성숙하기도 하다. 정치에 참여할 권리는 개인의 능력과 무관하게 국민의 주권으로서 주어져야 한다. 그런데, 당연한 권리를 이제야 찾아가는 과정인 선거 연령 하향에 대한 그 우려를 왜 만 18세 당사자가 나서서 해명해야 하는가?
우리의 교실은 더욱 정치화되어야 한다. 정치는 중년 남성들만의, 직업 정치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교실은 대학에 가는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다. (물론 모든 청소년들이 교실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역시 짚고 가고 싶다.) 소수자의 정치는 소수자의 삶을 바꿀 가장 중요한 힘이자 권리이다. 우리 모두가 경험하거나 목격했을 학교폭력부터 작년 한 해를 뒤덮었던 스쿨 미투까지, 청소년을 향한 폭력은 보호라는 이름으로 묵인되고 때로는 용인되기까지 한다. 청소년들에게 구시대적이고 폭력적인 교실을 주체적으로 바꿔낼, 청소년에 대한 사회의 대우를 바꿀 권리가 하루빨리 주어져야 한다. 우리를 위한 공약을 만들고, 우리를 위해 말할 정치인을 뽑을 그 당연한 권리가 필요하다.
교복을 입은 학생 유권자를 넘어
2020 총선은 대한민국 역사상 청소년이 투표하는 첫 선거였다. 하지만 나는 4.15 총선날 ‘교복을 입고 투표장으로 걸어 들어오는 새싹 유권자들’ 같은 제목의 기사가 썩 유쾌하지 않다. 그들이 투표를 하는 이유는 ‘학생’이어서가 아니라 권리를 가진 동등한 동료 시민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투표 자체도 기특하고 대단한 일이 아닌 당연한 일이며, 우리는 ‘풋내기 유권자’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로 이미 시민이다.
이제야 나는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표가 우리의 삶을 직접적으로 바꿀 수 있는 정책과 법이 나오는 데에 일조할 거라는 것, 그리고 그 법안들이 우리의 표로 하여금 실현되고, 그 실현된 법들이 내 부모, 교사, 어른이 아니라 내 삶을 바꿀 거라는 기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만 19세에서 만 18세로 선거 연령을 하향하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이는 단순히 선거 연령을 한 살 내리는 것이 아닌 청소년을 시민으로 인정하며, 정당한 우리의 권리를 되찾아나가는 첫 걸음이니 말이다. 2020 총선은 청소년이 처음으로 함께하는 선거라는 점에서 특별했지만, 동시에 나는 청소년의 정치 참여가 특별하거나 유난스러운 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청소년은 대견하거나 기특하지도, 버릇없거나 탈선적이지도 않다. 정치하는 우리의 존재가 당연해지는 세상을 위해 싸우고 싶다.
마지막으로, 투표 진짜 별거 없더라!
2019년 12월 27일, 드디어 만 18세 선거 연령 하향을 포함하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이를 통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전국의 만 18세들은 약 14만 명으로 추산되니, 이 법안 통과가 대한민국의 14만 명의 국민들에게 주권을 돌려준 셈이다. 선거 연령 하향이라는 결과는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의 단체 소통방으로 확인했다. 어느 동료는 눈물이 났다고 말했고, 어느 동료는 믿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나는 끝없는 기자회견도, 끊임없이 벽을 대고 말하는 듯한 기분도 끝이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껏 내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시민’일 수 없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선거철이 다가올 때마다 길거리에서 부지런히 공보물을 나눠주던 분들이 ‘청소년처럼 보이는’ 내가 지나가면 꼭 손을 거두며 딴청을 피웠고, 온 뉴스며 방송이며 선거로 난리법석인 국가에서 나는 어쩐지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어느 길에나 쩌렁쩌렁한 스피커와 함께 오가는 선거 차 역시 소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비유했듯 전 세계를 시끌벅적하게 만드는 올림픽 시즌에, 꼭 나만 상관없는 사람이 된 기분이랄까. 그뿐인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할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은 청소년이라는 정체성을 선거철에는 더욱 두드러지게 느껴야 했다. 청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지하는 후보를 밝힐 수 없었고 정당에 입당할 수도 없었다. 이처럼 선거철이면 꼭 찾아왔던 불쾌감과 부끄러움 같은 것들을 여전히 기억한다.
나는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와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의 활동가로, 또 이번 선거 연령 하향으로 투표권을 가지게 된 만 18세로서 청소년 참정권 운동에 동참했다. 물론 그 기간이 길진 않지만, 활동을 하지 않을 때에도 내가 청소년이기에 겪어야 했던 경험들은 말하기를 다시 시작할 힘이 되고는 했다.
말하는 일은 동시에 배우는 일이기도 했다. 사실 나는 운동을 시작한 기점인, 작년 9월 이전엔 청소년 참정권은 물론이고 정치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시사는 또래 친구들보다도 몰랐고, 청소년 참정권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모르고, 또 알 수 없으니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참정권을 박탈당했다는 건, 단순히 권리가 아닌 그 권리에 대해 알 권리조차 박탈당한다는 뜻이었다.
이건 나뿐만이 아닌, 대한민국의 많은 청소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이 이번 선거 연령 하향에 모두 찬성하지는 않는다. 공식적인 자리를 통해 반대 의견을 밝히는 청소년들도 있었다. 선거 연령 하향을 반대하는 일부 여론은 청소년 당사자들의 반대를 주요한 근거로 삼기도 했다. 그들조차 자신들에게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청소년에게 이렇게 중요한 권리를 줄 수 있겠느냐고! 하지만 선거 가능한 연령이 되는 시점부터 확신을 가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 누가 청소년들에게 참정권이 얼마나 중요한지, 당연하게 행사할 권리인지 제대로 알려주었나.
거듭 말하지만 참정권은 권리다. 할 수 있지만 안 하는 것과, 애초에 할 수조차 없는 것 사이에는 너무나 큰 간극이 있다. 언제나 청소년에게, 혹은 나에겐 ‘미성숙하다’ ‘감정적이다’ ‘가정과 학교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한다’라는 증명할 수 없는 관념과 질타만이 따라왔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그것은 청소년의 많은 언행을 제지하고 또 금지하는 이유가 되었다. 청소년의 참정권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말을 따를 것이다’ ‘교실이 정치화될 것이다’ ‘정치처럼 중요한 일에 참여하기엔 너무 어리다’라는 말들이 청소년에게마저 나 자신을 민주주의에서 배제하는 것을 정당하고 당연하게끔 느끼게 만든 것이다. 이는 청소년의 ‘판단 능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청소년을 수동적이고 덜 자란 ‘예비 시민’으로 보는 사회의 시각에서 기인한다.
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정치 이야기만 할 거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고작 ‘한 살’ 하향된 이번 법안 개정에 따른 많은 우려들은 익히 알고 있다. 교실이 정치화될 것이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공부가 아니라 정치 이야기만 할 것이다, 고3은 예민한 시기다, 청소년은 불안정하고 미성숙하다 등등…… 그 우려들을 줄 세우자면 끝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말들은 단순히 인터넷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거 연령 하향 이전 패스트트랙 기간의 국회에서 보수정당의 의원들이 직접 단상에 올라가 발언한 내용이기도 하다.
법안이 통과된 이후에도 만 18세 당사자인 내가 이 우려를 해결하는 답변을 내놓을 거라고 기대하는 인터뷰는 쏟아졌다. 나는 끊임없이 교실의 정치화에 대해, 청소년의 미성숙함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질문에 앞서 우선 나는 묻고 싶다. 교실이 정치화되는 것은 무엇이 문제인가? 정치는 때로는 아주 크고 거대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바로 내 일상과 하루를 바꾸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크고 작은 여러 모임들에도 정치가 작동하며, 하다못해 청소년 구성원이 가장 많을 학교마저도 내부적인 선거를 실시한다.
지난 2월 12일,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에서 준비한 〈2020년, 정치하는 청소년이 온다〉라는 행사에서 한 청소년은 실제 자신의 학교에서 ‘정치와 법’이라는 이름의 과목을 가르치면서 청소년을 정치와 무관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 웃기지 않느냐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청소년은 그저 예비 유권자로서 가르침 받는 것에서 멈추고 성년이 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교실의 정치적 중립은 어째서 요구되는가? 우리는 이미 언제나 정치하고 있었다. 청소년 역시 민주주의를 함께 만들었고, 언제나 그것을 위해 함께 싸웠다. 대한민국의 근간을 마련한 역사적 사건인 5.18 민주화 운동, 4.19 혁명, 6월 민주항쟁…… 가장 가깝게는 2014년의 촛불 광장까지 한국의 민주주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늘 청소년이 주도하고, 함께했다. 무엇보다 미성숙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도 국민이다. 청소년이라고 미성숙하리라는 법도 없으며, 때로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 가장 미성숙하기도 하다. 정치에 참여할 권리는 개인의 능력과 무관하게 국민의 주권으로서 주어져야 한다. 그런데, 당연한 권리를 이제야 찾아가는 과정인 선거 연령 하향에 대한 그 우려를 왜 만 18세 당사자가 나서서 해명해야 하는가?
우리의 교실은 더욱 정치화되어야 한다. 정치는 중년 남성들만의, 직업 정치인들만의 것이 아니다. 교실은 대학에 가는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다. (물론 모든 청소년들이 교실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역시 짚고 가고 싶다.) 소수자의 정치는 소수자의 삶을 바꿀 가장 중요한 힘이자 권리이다. 우리 모두가 경험하거나 목격했을 학교폭력부터 작년 한 해를 뒤덮었던 스쿨 미투까지, 청소년을 향한 폭력은 보호라는 이름으로 묵인되고 때로는 용인되기까지 한다. 청소년들에게 구시대적이고 폭력적인 교실을 주체적으로 바꿔낼, 청소년에 대한 사회의 대우를 바꿀 권리가 하루빨리 주어져야 한다. 우리를 위한 공약을 만들고, 우리를 위해 말할 정치인을 뽑을 그 당연한 권리가 필요하다.
교복을 입은 학생 유권자를 넘어
2020 총선은 대한민국 역사상 청소년이 투표하는 첫 선거였다. 하지만 나는 4.15 총선날 ‘교복을 입고 투표장으로 걸어 들어오는 새싹 유권자들’ 같은 제목의 기사가 썩 유쾌하지 않다. 그들이 투표를 하는 이유는 ‘학생’이어서가 아니라 권리를 가진 동등한 동료 시민이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투표 자체도 기특하고 대단한 일이 아닌 당연한 일이며, 우리는 ‘풋내기 유권자’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로 이미 시민이다.
이제야 나는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표가 우리의 삶을 직접적으로 바꿀 수 있는 정책과 법이 나오는 데에 일조할 거라는 것, 그리고 그 법안들이 우리의 표로 하여금 실현되고, 그 실현된 법들이 내 부모, 교사, 어른이 아니라 내 삶을 바꿀 거라는 기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만 19세에서 만 18세로 선거 연령을 하향하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이는 단순히 선거 연령을 한 살 내리는 것이 아닌 청소년을 시민으로 인정하며, 정당한 우리의 권리를 되찾아나가는 첫 걸음이니 말이다. 2020 총선은 청소년이 처음으로 함께하는 선거라는 점에서 특별했지만, 동시에 나는 청소년의 정치 참여가 특별하거나 유난스러운 일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청소년은 대견하거나 기특하지도, 버릇없거나 탈선적이지도 않다. 정치하는 우리의 존재가 당연해지는 세상을 위해 싸우고 싶다.
마지막으로, 투표 진짜 별거 없더라!
최유경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의 유경입니다. 청소년 페미니즘 운동을 하며 작은 시민 단체의 상근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2020 총선을 기점으로 청소년 참정권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정치하는 청소년의 존재가 당연해지는 세상을 위해 싸웁니다.
2020/05/26
3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