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y
3회 조언의 결
작은 잡지사에서 처음 책 만드는 일을 배울 때였습니다. 저는 주로 서울 충무로에 있었습니다. 모세혈관같이 구석구석 뻗어 있는 충무로의 작은 골목들에는 출력소와 인쇄소와 제본소 들이 줄지어 있었고요. 그곳에서 제가 했던 일은 인쇄되어 나오는 잉크의 채도가 적절한지 혹은 책의 32페이지 다음에 33페이지가 바르게 제본되는지를 확인하는 일이었습니다.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를 번갈아 맡으며 하루 종일 뛰어다니면서도 저는 스스로를 무용하게만 여겼습니다. 매번 작업 과정에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기에 제가 할 일이 크게 없었던 것입니다.
종이에 인쇄되어 나오는 색은 처음 설정된 색과 다르지 않았고 32페이지 다음에는 33페이지가 그리고 장을 넘기면 34페이지가 사이좋게 놓였습니다. 책의 제작 과정에 사고가 생기지 않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쓸모를 발견할 수 없는 일과가 더없이 지루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조금이나마 유용한 존재임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때는 바로 일을 마치고 저녁밥을 먹는 시간, 혹은 저녁밥을 핑계 삼아 반주로 술을 마시는 때였습니다.
함께 일하던 선배는 충무로 골목 곳곳에 숨어 있는 식당들로 저를 데리고 가주었습니다. 유난히 노포가 많았고 또 어느 집은 간판도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가서야 무엇을 파는지 알 수 있는 식당도 있었습니다. 술잔이 한 순배 돌 듯, 충무로 인근의 식당들을 한 번씩 모두 가보았을 무렵, 저는 머릿속으로 좋았던 식당들의 순위를 매기기 시작했습니다. 일이 끝나면 으레 선배에게 오늘은 어디로 가는 것이 좋겠다 하고 제안을 하기도 했고요.
그 선배는 제게 술도 잘 사주었지만 조언도 잘해주었습니다. 조언 기술자나 조언의 달인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조언이라는 것은 대부분 상대가 나를 위해 해주는 도움의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 끝이 조금 까끌하게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선배의 조언은 결이 달랐습니다. 반발심이나 동요가 일어나는 법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선배의 조언 비법은 간단했습니다. 첫번째, 최대한 짧고 명확하게 한다. 두번째, 조언에 대한 상대의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간단한 원칙은 선배의 조언을 잔소리나 추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으로 만드는 듯했습니다.
“오늘 오전에 인쇄한 책, 사진 설명이 바뀌어 있어서 내가 수정했어. 캡션 부분도 본문처럼 신경을 써야 해.”라고 말하거나, “오늘 표지 종이는 나도 몰랐는데 다른 종이보다 잉크가 더 잘 먹어서 색이 진해지더라고.” 같은 말이었습니다. 지적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그러고는 으레 웃으며 다른 대화로 화제를 돌렸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오늘 아무런 오류나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다 선배 덕분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언을 새겨두었다가 비슷한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은 저의 몫이었고요. 그렇게 선배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일을 배웠습니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말을 들어야 하는 순간이 종종 찾아옵니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 조언은 대부분 듣기 좋은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상대방의 말이 조언인지 충고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하는 비난인지 잘 분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순간에 저는 타인의 말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무엇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 이것이 관건입니다.
첫번째 내가 처한 상황을 세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하는 말들. 이 말은 절반쯤 듣고 절반쯤 듣지 않습니다. 나를 위한 것임이 분명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변화보다는 나의 안정을 우선시하니까. 반만 듣습니다.
두번째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처한 상황을 넓게 이해하고 있고 게다가 나를 좋아해주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하는 말들. 이 말은 거의 들으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그 말들처럼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애쓺이 필요하겠지만. 최대한 듣습니다.
끝으로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하는 말들. 그들의 말은 최대한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영혼 없이 내뱉는 칭찬은 물론이고 조언을 가장한 비난에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런 말들로 상처를 받고 마음을 더럽히기에는 내가 너무 아깝기 때문입니다.
그 선배와 제가 자주 찾던 한 노포가 기억납니다. 도가니찜을 주로 파는 곳이었습니다. 두꺼운 무쇠냄비에 도가니와 국물이 자작하게 담겨나오던. 그리고 냄비 아래에는 숯불이 있었습니다. 직화구이나 훈제도 아닌데 열원으로 숯을 쓴다는 것, 언뜻 생각하면 무용한 일처럼 여겨집니다. 저도 처음 그 광경을 보며 같은 생각을 했고요. 하지만 냄비 바닥을 저어 마지막 한 숟가락의 국물을 넘기며, 어쩌면 지금 당장은 무용해 보일 수 있어도 끝까지 무용한 것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의 제가 그랬던 것처럼. 혹은 마지막으로 떠먹은 한 숟가락의 국물이 여전히 따뜻했던 것처럼. 너무 뜨겁지 않은 세상의 모든 말처럼.
종이에 인쇄되어 나오는 색은 처음 설정된 색과 다르지 않았고 32페이지 다음에는 33페이지가 그리고 장을 넘기면 34페이지가 사이좋게 놓였습니다. 책의 제작 과정에 사고가 생기지 않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쓸모를 발견할 수 없는 일과가 더없이 지루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조금이나마 유용한 존재임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때는 바로 일을 마치고 저녁밥을 먹는 시간, 혹은 저녁밥을 핑계 삼아 반주로 술을 마시는 때였습니다.
함께 일하던 선배는 충무로 골목 곳곳에 숨어 있는 식당들로 저를 데리고 가주었습니다. 유난히 노포가 많았고 또 어느 집은 간판도 제대로 적혀 있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가서야 무엇을 파는지 알 수 있는 식당도 있었습니다. 술잔이 한 순배 돌 듯, 충무로 인근의 식당들을 한 번씩 모두 가보았을 무렵, 저는 머릿속으로 좋았던 식당들의 순위를 매기기 시작했습니다. 일이 끝나면 으레 선배에게 오늘은 어디로 가는 것이 좋겠다 하고 제안을 하기도 했고요.
그 선배는 제게 술도 잘 사주었지만 조언도 잘해주었습니다. 조언 기술자나 조언의 달인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조언이라는 것은 대부분 상대가 나를 위해 해주는 도움의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 끝이 조금 까끌하게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선배의 조언은 결이 달랐습니다. 반발심이나 동요가 일어나는 법이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선배의 조언 비법은 간단했습니다. 첫번째, 최대한 짧고 명확하게 한다. 두번째, 조언에 대한 상대의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간단한 원칙은 선배의 조언을 잔소리나 추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으로 만드는 듯했습니다.
“오늘 오전에 인쇄한 책, 사진 설명이 바뀌어 있어서 내가 수정했어. 캡션 부분도 본문처럼 신경을 써야 해.”라고 말하거나, “오늘 표지 종이는 나도 몰랐는데 다른 종이보다 잉크가 더 잘 먹어서 색이 진해지더라고.” 같은 말이었습니다. 지적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그러고는 으레 웃으며 다른 대화로 화제를 돌렸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오늘 아무런 오류나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다 선배 덕분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언을 새겨두었다가 비슷한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은 저의 몫이었고요. 그렇게 선배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일을 배웠습니다.
살아가면서 누군가의 말을 들어야 하는 순간이 종종 찾아옵니다. 문제는 앞서 말했듯 조언은 대부분 듣기 좋은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상대방의 말이 조언인지 충고인지 아니면 그냥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하는 비난인지 잘 분별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순간에 저는 타인의 말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무엇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냐 이것이 관건입니다.
첫번째 내가 처한 상황을 세세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하는 말들. 이 말은 절반쯤 듣고 절반쯤 듣지 않습니다. 나를 위한 것임이 분명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변화보다는 나의 안정을 우선시하니까. 반만 듣습니다.
두번째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처한 상황을 넓게 이해하고 있고 게다가 나를 좋아해주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하는 말들. 이 말은 거의 들으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그 말들처럼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애쓺이 필요하겠지만. 최대한 듣습니다.
끝으로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하는 말들. 그들의 말은 최대한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영혼 없이 내뱉는 칭찬은 물론이고 조언을 가장한 비난에도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런 말들로 상처를 받고 마음을 더럽히기에는 내가 너무 아깝기 때문입니다.
그 선배와 제가 자주 찾던 한 노포가 기억납니다. 도가니찜을 주로 파는 곳이었습니다. 두꺼운 무쇠냄비에 도가니와 국물이 자작하게 담겨나오던. 그리고 냄비 아래에는 숯불이 있었습니다. 직화구이나 훈제도 아닌데 열원으로 숯을 쓴다는 것, 언뜻 생각하면 무용한 일처럼 여겨집니다. 저도 처음 그 광경을 보며 같은 생각을 했고요. 하지만 냄비 바닥을 저어 마지막 한 숟가락의 국물을 넘기며, 어쩌면 지금 당장은 무용해 보일 수 있어도 끝까지 무용한 것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의 제가 그랬던 것처럼. 혹은 마지막으로 떠먹은 한 숟가락의 국물이 여전히 따뜻했던 것처럼. 너무 뜨겁지 않은 세상의 모든 말처럼.
박준
시인.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2020/10/27
3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