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올리는 것들이 있다. 멀리 있고 닿을 듯 닿지 않는 것. 대체로 집밖으로 나가야 손에 잡거나 다다를 수 있는 것.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로 밖을 나서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35도에 육박하는 불볕에 단 한 발짝도 디디고 싶지 않다. 오늘도 에어컨과 선풍기를 틀어놓고 침대 위에서 뒹굴며 책을 읽을 뿐이다. 가끔 시원한 물 한잔 마시며…….


   수영장

   하수정 그림책 『마음 수영』(웅진 주니어, 2020)


   몇 년 전만 해도 여름철이면 수영장에 가곤 했다. 물속에 들어가 여러 가지 영법을 구사하며 레일을 몇 바퀴씩 돌았다. 지금은, 수영을 어떻게 했던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일단 물속에 들어가면 바로 알 수 있을 텐데.


   그림책은 수영을 하는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사람은 수영에 대해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 어쩌면 인생에 대한 다른 관점 같기도 하다.
   “이제 나도 혼자, 혼자 할 수 있다고.”
   “이젠 팔과 다리도 예전 같지 않아…….”(책 일부)
   각자의 마음이 달라 갈등하기도 하지만, 펼친 두 면에서 작은 그림으로든 큰 그림으로든 딸과 엄마는 함께 등장한다. 무섭고 불안할 때 나란히 같이 있을 수 있는 존재에 대해 떠올려본다.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나란히.”(책 일부)


   레모네이드

   김멜라 소설집 『옥상정원』(O.C Books, 2021)


   땀 흘린 뒤에 시원하고 상큼한 것을 마시고 싶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레몬을 갈아 즙을 낸 뒤 설탕을 넣고 얼음 동동 탄산수에 섞어 마시면 딱 좋을 텐데 집에 레몬이 없다. 대신 산뜻한 문장으로 이뤄진 소설책을 펼친다. 단편 두 개가 실린, 손에 쏙 들어오는 가벼운 책이다.


   첫번째 단편 「어둠 뒤에」에선 옥상정원에 있는 나무 한 그루와 이를 지켜보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주 오래전 나무에서 레몬이 열리면 그 레몬이 레몬을 낳고 레몬이 레몬을 낳고 낳고 낳았다.”(7쪽)
   인물들은 ‘구름 밑’이라든지 ‘강아지 밥그릇’같은 독특한 이름을 갖고 있다. “여기선 모두 가명을 써.”(6쪽) 가면을 쓴 듯한 가명의 인물들처럼, 소설 속 사물 또한 고유의 뜻으로 보기 어렵다. 나무는 물거품처럼 보이며, 레몬은 상실과 결핍, 질병, 때로는 소망처럼 느껴진다.
   두번째 단편 「옥상 토끼」는 딸이 자살하고 아내와 헤어진 후 여자가 되어가는 아버지(나)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나는 여성이 되어가는 가려움을 앓았다.”(74쪽) 그러한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삼호뿐이며 삼호의 딸 안나와 ‘나’는 서로를 이해해보려 한다. 이 이야기는 첫번째 단편에서 등장한 가명의 인물들이 가면을 벗은 이야기처럼 보인다. 비슷하게 겹치는 장면을 보면서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산뜻한 문장을 따라 술술 읽어 내려갔지만 그 안에 담긴 생각의 농도로 멈추게 되는 순간이 많다.
   소설 중간중간 작은 삽화가 있으며(오미순 삽화), 단편마다 영어 번역이 실려 있다.(박주영 번역) 마지막 장의 QR코드로 소설에 영감을 받아 제작한 영상도 확인할 수 있다.(오레오 사진·영상)


   락 페스티벌

   류진 시집 『앙앙앙앙』(창비, 2020)


   단 한 번도 록 페스티벌에 가본 적 없다. 더욱이 지구적 바이러스로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는 마당에 그곳에 갈 수는 없겠지. 집에서 오디오로 음악 틀어놓고 머리를 흔들며 록 공연을 방불케 할 기상천외 쇼를 펼쳐도 혼자 즐기고 끝나겠지. 다만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한다. 이게 바로 록 아닐까. 어쩌면, 같이 읽으면서 그 정신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따귀의 대중에 취향을 때려라!”(「부록 : 어찌하여 나는 비겁하고 치사하며 우아하게 되었는가」, 147쪽)
   단어와 단어의 조합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장은 어떤 기능과 목적에 맞게 관습적으로 쓰이곤 한다. 그런데 단어의 조합부터 관습을 벗어난다면?
   “준비하시고 개미는 응원입니다”(「우르비드캉드의 광기」, 11쪽)
   위와 같은 문장을 보았을 때의 당혹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의미는 이전의 결합과 다른 방식으로 결합하고 단어는 저마다의 리듬을 찾는다. 이때 문장은 관습적인 의미에서 의미 있는 문장이라 할 수 없다. “의미는 그것이 의미이길 원하는 사람에게만 의미이며/ 의미가 없다는 말 또한 의미이므로”(「홍금보」, 93쪽) 고정된 의미를 탈피하는 문장을 통해 록의 정신을 느낀다. 유쾌한 언어의 록 페스티벌에 같이 가실 분?


   겨울

   김엄지 소설 『겨울장면』(작가정신, 2021)


   여름에 질렸다는 사람들은 무모하게도, 여름의 더위보다 겨울의 추위가 낫다고 말한다. 막상 겨울에는 반대의 가정을 들먹일 것이면서. 봄가을을 좋아하는 나는, 그 말에 코웃음 치며 생수병이나 꺼내 마시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연다. 그 순간, 나 또한 추위를 상상한다. 그렇게 겨울을 그리워하는 망상에 빠진다.


   소설은 제목처럼 겨울의 장면을 그린다. 얼음호수로 간 R과 그가 회상하는 기억 혹은 상상을 담았다. R의 아내는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말을 건네기도 한다.
   R은 한 순간, 단 한번에, 여러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29쪽)
   R을 중심으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서술을 읽으며, 이것이 상상인지 꿈속인지 현실인지 과거의 한 장면인지 사후세계인지 분간하는 것은 어렵다. 어떤 장면은 다른 장면과 겹치듯 등장해, 마치 데자뷔 같기도 하다.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이 다른 의미로 다가올 때, 다시 페이지를 뒤적이며 앞장으로 되돌아간다. 읽을 때마다 겨울 장면은 새롭다.
   소설 뒤에는 ‘몇 하루’라는 제목의 에세이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 하나가 「여름장면」인 것이 인상 깊다.

   겨울이 되면 나는 다시 여름을 상상할까.

윤지양

문득 시계를 보았을 때 4시 44분이었다. 새로 산 음반은 네번째 곡을 재생 중이었고 올여름 공포 영화는 보지 않았다. 추천한 책의 제목 모두 네 글자다. 그렇게 무섭지는 않다.

2021/08/31
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