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쩍 빨리 어두워지고 바람이 차가워져서 코가 다 시리다. 요즘 알게 된 것인데 나는 가을을 탄다. 겨울은 어떨까. 타려나. 기왕 타는 것 겨울도, 내년 봄, 내년 여름도 다 타야겠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시간은 가고.


   윤해서 장편소설 『0인칭의 자리』(문학과지성사, 2019)



   어떤 시간도 공평하게 간다. (199쪽)

   ‘그’의 목소리인 기울임체와 누군가들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등장한다. 이 책에 대해서, 나는 여기까지만 말해야 할 것 같다. 사무치는, 놀라는, 덤덤하게, 깊고 슬픈, 멈추어, 응시(23쪽)하는, 순간과 순간을 내가 이 자리에서 말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아마 제대로 말하지도 못할 것이다. 내 표현을 거치게 되면 이 책은 너무 어둡거나 밝게 소개될 것이다. 다만, ‘어떤’ 시간이 ‘어떻게’ 공평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0인칭의 자리』가 답이 되어준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이 책을 몹시 소설적이고 몹시 시적이라고, 그리고 몹시 철학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철학적’이라는 말을 잘 하지 않고, 어디에서 그런 말이 들려오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0인칭의 자리』는 그렇게 표현하는 게 가장 맞을 것 같다. 참고로 나는 문학보다 철학을 좋아한다. 좋아한다는 건 뭘까.

   아마,
   그냥, (쿵), 무(無),
   응,
(35쪽)


   이런 것일까?
   그런 것 같은데……


   김선재 시집 『목성에서의 하루』(문학과지성사, 2018)



   숲이 흔들리면 바람이 된다
   바람이 된 숲으로 들어가면
   낯선 바람 없이도
   기다릴 줄 알게 된다
   아무것도
   아무려나
   어떻게든
   나무를 열고 들어간다
   열어둔다 (뒤표지 글 전문)


   여행을 갈 때 곧잘 이 책을 챙긴다. 그래서 『목성에서의 하루』는 고성, 삼척, 우도, 문경에 다녀왔다. 언젠가 보았던 페이지를 다시 펼쳐 읽을 때, 처음 보는 얼룩이 거기 있기도 하고. 이 시집이 내가 모르는 나의 시간을 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시집 곳곳에 머무는 바람이, 내 눈앞을 지나는 이 바람이 맞는지 가늠해보기도 한다. 우연히 지나다 오래 머물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기도 하고. 나를 통과한 것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기도 한다. 어려운 건 마음일까.


   전미화 그림책 『어쩌면 그건』(문학과지성사, 2019)



   바람이 부는 것뿐인데
   바다를 본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은 지인에게 선물로 받은 것이다. 『어쩌면 그건』 안에는 바람이 지나는 모습이, 흔들리는 순간에 바람이, 잔뜩 웅크려 멈춘 바람이, 다시 고요하게 흐르는 바람이 담겨 있다. 책에 내내 그려진 옅은 보라와 짙은 초록, 파랑이 좋다. 보라, 초록, 파랑보다 더 많은 색들이 이 책 안에 있다. 페이지를 넘길 때 마다 멀리, 깊게 가라앉고, 오래 머물던 감정이 이제는 다 흩어졌구나, 깨닫기도 한다. 내가 이 책에서 바람을 봤을까? 이 그림책에서 내가 본 그건 어쩌면 바다이거나, 내 안의 맺힌 것일 수도 있다. 오래 지나 잊힌 빛을 기억나게 하고 내가 모르는 고요를 상상하게 한다. 신비하고 아늑한 마음이 된다.


   그림책 『페파의 봄맞이 케이크대회』(펭귄랜덤하우스코리아, 2021)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상품은 뭐예요?”
   페파가 묻는다. (28쪽)


   『페파의 봄맞이 케이크 대회』는 인기 애니메이션 <페파 피그>를 바탕으로 한 ‘페파 피그 사계절 이야기’ 시리즈 그림책 중 하나이다. 봄맞이 케이크 대회에 나간 페파 가족은 어떤 케이크를 만들지 고민하다가 딸기케이크, 당근케이크, 초콜릿케이크를 만든다. 페파는 세 가지 케이크 모두 특별하게 느껴지고, 어떤 케이크를 대회에 가져가야 할지 망설여진다. 그래서 케이크 세 개를 층층이 쌓아올리고 “무지개색 스파클링 토핑을 듬뿍 뿌”린다. 페파 가족은 그 알록달록하고 높은 “거인 스프링클 케이크”를 들고 대회장으로 향한다. 만족스러운 케이크 대회 출전과 결과. 케이크 대회에서 페파 가족이 우승하게 된다. 우승 상품은 바로 페파 가족이 만든, 3층으로 쌓은 그 높은 케이크의 한 조각이다!

   페파는 케이크를 좋아해요. 모두 케이크를 좋아해요! (29쪽)


   이 그림책의 마지막 장에는 높이 쌓은 조각 케이크를 상품으로 받아든 페파의 모습과, 페파 주위에 가족들―페파의 동생, 엄마와 아빠, 토끼 이모 등― 모두가 잔디밭에 누워 웃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물론 페파도 웃고 있다. 나도 웃었다. 재미있어서. 우승 상품이 내가 만든 그것의 일부라니! 나라면 어땠을까? 내 책 세 개를 합쳐서 어딘가 출품한 뒤 우승하고, 상품이 내 책 안의 페이지들, 어느 뭉텅이라면? 내 주위에 모두가 누워 웃고, 나는 내 책 몇 페이지를 들고 있고. 그래. 모쪼록 즐거운 파티가 이어질 것 같다.

김엄지

오늘은 달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림자를 만들었다. 누가? 재인이.
공을 들고, 공 뒤에서 빛을 비추고. 흰 벽에서 천장까지 커지는.

2021/10/26
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