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뷰view 함께 읽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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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현호정, 「라즈베리 부루」
 ─ 《비유》 49호(2022. 1)
 김지연, 「도둑」
 ─ 《비유》 50호(2022. 2)
 문보영, 「베케트의 밧줄 가게」
 ─ 《비유》 54호(2022. 6)

(1편에 이어서)


현호정, 「라즈베리 부루」click

소영현 : 젊은 작가들한테 자기 인식이 몸에 대한 인식, 그리고 성적 정체성과 굉장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요. 박서영의 「매달리는 인간」에서도 잘 확인할 수 있어요. 사회에서 직면하는 어려움이 몸을 망가뜨리고 특히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에 문제를 일으키고요. 현호정의 「라즈베리 부루」는 청소년문학 카테고리 안에 싣는 소설이에요. 그래서 더 흥미롭기도 한데요. 이렇게 노골적으로, 전면적으로 ‘재탄생’ 얘기를 자궁을 중심으로 얘기한 소설이 많지 않아서, 이 소설에 대해 어떠셨는지 얘기 들어보고 싶습니다.

김나영 : 「라즈베리 부루」에는 생물학적으로 젊은 여성과 늙은 여성, 그리고 그 둘을 매개하는 화분이 중요하게 등장하는데요. 동물과 동물의 연대를 동물성을 가진 식물인 ‘부루’를 통해서 그려낸 점이 신선했어요. 여성 혹은 사회적 약자의 연대를 분명하게 그리면서, 그 방법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쪽으로 모색해본 이야기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또 이들은 사회적인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미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그래서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공존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넘어서 어떤 힘으로 재생할 수 있을까, 서로를 다시 살려낼 수 있을까 하고 질문하게 돼요. 돌봄의 차원에서도 약자를 그저 보살피는 단계가 아니라 타자를 살리는 동시에 자신도 지키는 방식의 단계로 상상이 도약한 것 같아서 그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공론화되고 있는 여성의 재생산 문제와 돌봄 윤리에 대한 주장들을 우화적인 방식으로 어렵지 않게 의미화하고 있는 소설이라는 것을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최근 많은 작품이 여성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몸의 고통으로 그려내고 있어요. 이런 경향성의 측면에서도 「라즈베리 부루」가 보여준 문제의식의 선명함이 인상 깊었습니다. 동굴 같은 그들의 보금자리는 그 배경색이 거의 검정에 가까울 것 같고 거기서 피어나는 초록과 빨강의 대비는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잔상으로 오래 남았어요.

이소 : 부루는 ‘나’의 생리혈을 먹고 자라지만 나중에 커진 후에는 반대로 나를 안아주고 돌봐주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엄마이고 누가 자식인지 모호해 보여요. 게다가 생리혈은 임신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더 모호해요. 소중한 내 피를 주었다고 하기에는 버려야 할 피를 쏟았다는 배설의 느낌도 있어서, 생성과 파괴가 역설적으로 뒤섞여 있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원래 생성과 파괴는 섞여 있는 것 같아요. 이건 개인적인 경험인데요, 제가 예전에 한동안 실험실에 있었어요. 유기화학 실험을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계속했는데, 그럴 때 유기화합물은 물이 아니라 클로로포름처럼 유기용매에 녹이거든요. 그런데 우리 몸도 유기물로 이루어져 있어서 실험하는 사람의 몸도 유기용매에 반응을 하거든요. 아, 지금 이야기 어렵나요?

소영현 : 아닙니다. 알아듣습니다.(웃음)

이소 : 뭔가 사람의 몸에 좋은 걸 만들고 싶어서 열심히 실험을 한 건데, 제 호르몬이 교란되는 거예요. 두 달 정도 실험을 하니까 계속 하혈을 했어요. 지도교수님이 ‘너는 숙명적으로 실험이 맞지 않나보다’ 하셨지만, 저에게만 숙명일 리는 없죠. 다른 이의 몸에 반응할 만한 걸 만들려면 제 몸 역시 반응하게 되는 건 당연한 것 같아요. 제가 무언가를 합성하기 위해서는 제가 계속 파괴되어야 하는 거죠. 소설 읽으면서 이 경험이 떠올랐어요. 부루를 단단하게 키워내기 위해서는 내가 계속 피를 흘려야 하고, 그 생리혈이라는 게 재생산 메커니즘 속에 있지만 재생산이 불가능할 때 자궁벽이 허물어지는 거잖아요. 뭔가를 만드는 것과 파괴하는 것이 단단히 얽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점이 저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주기도 했어요. 소설에 등장하는 존재들끼리 계보나 족보로 정리할 수 없는 고리를 나누고 연결되어 가는 점이 흥미롭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했어요. 모성에 관한 묘한 역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이는데, 이 폐곡선을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소영현 : 네 맞아요. 라즈베리 나무를 내가 키우는데, 나중에는 내가 열매가 되죠. 처음에는 내가 자궁이었는데 나중엔 부루가 자궁이 되는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소설이 재탄생을 말하는 것 같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암울해요. 새로운 생명이나 탄생의 느낌보다는 죽음의 이미지가 더 강하기도 하고요. 지하, 굴 같은 축축하고 컴컴한 곳에 마늘과 쑥이 있지만 웅녀, 인간이 되는 게 아니라 거슬러 올라 자궁으로 들어가는 거잖아요. 그래서 죽음의 느낌이 더 강해지고, 그래서 긍정적인 재탄생의 의미만이 아니라, 묘한 걸 다 담게 되는 것 같아요. 탄생 신화에 대한 비틀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이고요.

김나영 : 이 소설은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믿는 것들을 아이의 질문에 답하듯이 설명해주잖아요. 특별히 굵은 글씨로 표시하기도 하고요. 가령 ‘나’가 부루에게 밖으로 나가자고 외출을 제안하는데, 부루는 “나는 이미 밖으로 나왔는데?”라고 해요. “여기(‘나’의 집)를 나가면 또다른 바깥이 있어.” “아하, 여기가 네 화분이구나.”라는 둘의 대화가 인상적이에요. 이어진 대화, “너(부루)는 무얼 먹으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돼?” “음…… 마음.” “그건 누가 주는 거야. (…) 내가 줄까?”라는 부분도 단순하지만 울림이 깊은 말들인 것 같아요. 뭘 먹어야 자라고 여기가 아닌 곳, 다른 세계로 나갈 수 있다는 단순하고 명백한 사실을 짚어주면서 청소년소설로서의 역할도 충분히 하고요. 저는 이 소설을 읽고 어떤 탄생이나 성장에는 천지개벽과 같은 사건보다도 조금씩 꾸준히 뭔가를 주고받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에 깊이 공감했어요. 전반적으로 암울한 현실이지만 이들의 말은 현실을 뚫고 나갈 힘을 내장하는 씨앗이나 알처럼 느껴지고, 그런 점에서 새로운 형태의 신화 같다는 생각도 했어요.

이종산 : 사실 이런 이야기는 컬트 쪽에서 많이 있는 얘기고, 보통 식물한테 피를 주면은 식물이 자라나서 인간을 습격하잖아요.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결국 부루가 피를 먹고 자란 이유가 주인공을 돌보기 위해서잖아요. 제가 지금까지 봐왔던 식물 컬트 장르와는 또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어요. 결국은 연대로 가는 거였구나.

이소 : 그게 오히려 무섭지 않아요? “늘 이렇게 하고 싶었어. 그래서 빨리 자라고 싶었지.”(웃음)

이종산 : 기이해요. 기이한 관계인 게 재미있어요.

김나영 : 아이들은 늘 빨리 자라기를 바라잖아요. 자라서 뭘 할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형아가 되고 싶고, 형아가 되어서 어른이 되고 싶고. 그 마음은 뭘까요. 보호자가 자기를 돌보아주듯 나도 그러고 싶은 걸까요, 아니면 내가 권위와 권력을 갖고 싶어서일까요.

이종산 : 제약이 많아서 아닐까요? 어른이 되면 내 맘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소영현 : 성장에 대한 언급들 가운데 “(마음은) 누가 주는 거야. (…) 내가 줄까?” 하는 이 대목이 참 좋아요. 죽음의 이미지가 드리워져 있는 와중에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곳곳에 (성장으로 이끄는) 돌보는 힘이 포진되어 있어요. 가령, 뿌리째 나와 있는 부루를 이불로 둘러싸 주는 것과 같은 장면도 좋은데, 왜 좋은가 생각해보면, 그 장면에 이상하게 옛날의 어떤 경험이 겹쳐지면서 따뜻해지기 때문인 것 같아요.
이런 점과는 별개로, 돌보는 존재에 대한 상상력도 흥미로워요. 부루는 식물에서 나와서 돌보는 존재가 된 건데 식물성의 존재만은 아니고, 동물성의 존재만도 아니고, 비인간이라고 통칭하기에도 아쉽고 이상한, 그렇다고 괴물은 아닌 존재이죠. 무해하거나 유해한 존재가 아니라 중간적인 존재.

이소 : 이 소설은 자신의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다 다르게 읽힐 것 같아요.(웃음)

이종산 :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저는 다른 얘기인데요. 부루의 존재에 대해서는 구체적이고 많은 정보들이 들어 있거든요. 근데 주인공에 대해서는 굉장히 정보가 없어요. 저는 사실 읽다가 주인공이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인가 싶은 대목도 있었어요.

소영현 : 이런 대목이 있잖아요. “할머니도 내가 뒤척이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가 나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을 터였다.” 그 말이 기억에 남았어요. 내가 무엇이기에? 근데 끝까지 아무런 설명은 없어요.

이종산 : 그런데 뒤에 탐폰이 나오니까, 사람 아닌가?

소영현 : 전반적으로 확정할 수 없게 하는 대목들이 있는 것 같아요. 갑자기 사라지는 할머니도 실제 할머니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여성, 약자, 말씀하신 고양이, 어둡고 축축한 곳으로 피해 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생리혈을 계속 먹이다가 다 떨어져서 피를 먹이는 대목이 있잖아요. 그런데 피를 거부해요. 생리혈만 고집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셨나요.

이종산 : 모성 얘기를 하다보니까 상징성을 강하게 담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소영현 : 피 먹으면 드라큘라 되는 건데.(웃음) 생리혈에는 버려진 것, 더러운 것, 폐기물 이런 이미지가 덧붙어 있잖아요. 신선한 피가 아니라는.

이소 : 저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했어요. 왜냐면 다른 피는 그냥 핀데, 생리혈은 대부분 단백질로 이루어졌거든요.

소영현 : 몰랐어요.(웃음) 그런 의미로는 상상 못했어요.

이소 : 부루는 피라기보다 고기를 먹은 거죠.

이종산 : 그래서 알을 낳을 수 있는 거군요, 단백질을 먹어서. 너무 새로운 측면의 이야기네요.

소영현 :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할 듯하고 재밌네요.

김나영 : 알 같은 거네요, 빨간 알.


김지연, 「도둑」click

이종산 : 김지연의 「도둑」에 대해서 얘기해볼게요. 윤성희의 「오늘은 예쁜 것만」이 그랬던 것처럼, 「도둑」도 처음에는 재밌는 이야기 정도로 생각을 했다가 다시 꼼꼼히 읽어봤을 때 시와 소설의 중간에 있는 이야기, 많은 게 숨겨져 있고 재밌는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두 분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소 : 김지연 소설은 하나의 독특한 상황에서 출발하여 희극도 비극도 아닌 방식으로 이어지는데, 마치 재미없지만 멈출 수 없는 농담 같아요. 작품이 재미없다는 얘기는 아니고요. 쓰레기와 쓰레기 아닌 것,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의 경계는 원래 모호하잖아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다 필요 없는 것 같다가도, 남이 갖고 있는 건 반드시 내게 필요한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것이 다 필요하지만 아무것도 필요 없는 듯하고. 소설을 읽다가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불필요하다고 느낀 것들이 실은 ‘불필요’가 아니라 ‘미(未)필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요. 예를 들어 ‘판조’의 허리 디스크는 더이상 쓸 수 없으니 불필요한 쓰레기인가. 하지만 낡았다고 허리를 버릴 수는 없잖아요.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예전에 제가 이십대에 찍어놓은 모든 사진이 들어 있는 하드를 날린 적이 있어요. 처음엔 당황했는데, 금세 너무 시원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더이상 사진이 없다는 것이. 무언가를 버리는 것은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거니까 반드시 없애는 거라고만 말할 수 없잖아요. 저는 물건을 하나 사면 반드시 다른 하나를 대신 버리거든요. 그래서 저는 판조가 이해가 되면서 이것저것 생각하게 됐어요. 그런데 김지연 소설을 읽을 때마다 항상 이러는 것 같아요. 일상의 소극 같아서 그런지 제 경우를 자꾸 생각해보게 돼요.

김나영 : 궁극적으로는 나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아닌지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물질적인 것들을 버리고 취하기를 보여주지만 실은 심리적인 쓸모를 비유하는 것들이기도 하겠죠. 가장 친밀한 상대도 모르는, 나만 아는 그것을요. 소설의 말미에 판조의 아내 ‘순임’이 집 안에서 남편을 찾는데 어두운 와중에 베란다 구석의 더 깊은 어둠을 응시하면서 거기에 있냐고 묻고, 결국 텅 빈 딸의 방에서 남편이 나오는 것을 마주하는 장면은 꽤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거기서 ‘과연 없어진 것은 무엇인가, 내 안에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은 결국 타인의 침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역시도 내 안에 있는 다른 존재에 의해서인가’ 하는 질문들을 해보게 됐고요. 일종의 심리적인 결핍 같은 거요. 내 안의 여러 나들이 어떤 필요나 만족감을 두고 갈등하는 상황이 판조라는 인물의 행동으로 잘 비유되는 것 같아요. 판조가 집 안의 물건들을 내다버리기 시작한 게 퇴직 이후잖아요. 퇴직 이후에 할 일이 없어지면서 스스로를 쓸모없는 존재로 느끼게 되고 실제로 몸의 통증으로 증상이 나타나지만 동시에 집 안의 물건들을 밖으로 치워버리는. 이건 몸을 더 아프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고요.

이종산 : 아이러니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소설 같아요. 딸 ‘혜주’의 방만은 도둑이 털지 않고 지켜졌는데 결국은 판조가 문을 열고 방에 있는 물건들을 싹 다 갖다 버려서 결국은 도둑이 턴 것과 같은 상태가 됐다는 아이러니. 그리고 굳이 집 안에 있는 물건을 다 갖다 버리면서 굳이 낡은 책상을 갖고 와서 또 집 안에 넣어버렸다는 아이러니 같은 거요. 작가들이 아이러니 자체를 요즘 잘 안 쓰다 보니까 유행이 지난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김지연 작가가 재미있게 살려낸 것 같아요.

이소 : 한정된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장면 전환도 확실하고, 그 무대에서 인물이 책상을 끙끙대며 끌고 오거나 쓰레기 봉지를 들고 다니며 부산하게 움직이거나, 그런 희극적인 장면들이 연극으로 바꾸면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 소설에서 ‘원인’과 ‘이유’도 구별이 안 되잖아요. 도둑이 원인인지 이유인지 각자 다르게 생각할 것이고, 각자의 사정으로 우왕좌왕하는 느낌이 연극적이고 재미있어요.

김나영 : 시적인 장면들도 많은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앞에서도 말했지만 아내가 남편을 찾으면서 “당신이야? 거기 있어?” 이렇게 물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림자뿐이었다.”라고 하는 장면이요. 한 존재가 ‘아무’라고 지칭되면 그 그림자 또한 ‘무엇의 그림자인가?’보다는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어울리는 대상이 되는 것 같고요. 그런 맥락에서 이 소설은 ‘당신’이라는 평범한 말을 새롭게 마주하고 들여다보게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소영현 : 제일 재미있었던 건 사실 대화였어요.

이종산 : 순임과 판조의 대화가 연극적이었어요.

소영현 : 맞아요. 연극적이라는 말에 저도 전적으로 동의해요. 김지연 소설에는 연극적인 장면들이 많은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굴 드라이브」에서 자동차 장난치면서 말장난하는 장면이 있죠. 「결로」에서의 할머니들의 대화도 있고. 최근 소설들은 대화를 진술문으로 녹여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서, 대화를 잘 살리는 작품들이 드문 편인데, 「도둑」에서는 판조와 순임이 나누는 대화에 맛이 있다고 해야 되나.

이종산 : 말맛이 있죠. “누가 뭣에 쓰던 물건인 줄 알고 함부로 주워 오냐고.” 하는 순임의 말에 “사람이 책상으로 썼겠지!” 하는 판조의 대꾸. 이런 게 연극으로 상상이 잘 되는 대사들이에요.

소영현 : 김나영 선생님이 판조에 동정적이셨는데 저는 싫어하는…… 아니 싫다기보다 너무 문제적인 캐릭터 아닌가 하는 생각이…….(웃음)

이종산 : 그래서 순임이 구박하잖아요. 순임이 엄청 구박을 해주니까 상쇄가 돼요.

이소 : 저는 싫다기보다 안타까워요. 멈출 수 없는 그런 충동이 있잖아요. 판조는 본인이 멈출 수가 없어.

소영현 : 부정적인 캐릭터인데, 소설에서는 수긍 가고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존재로 그려져요.

김나영 : 불쌍하긴 한데 짜증도 나죠.(웃음) 같이 사는 사람들의 말을 너무 안 들으니까.

이종산 : 서술도 코미디 같은 것들이 좀 깔려 있잖아요. “판조는 버리고 싶은 것을 마음껏 버리고 모든 책임을 도둑에게 전가하기로 했다.” 이런 서술이 너무 웃긴 거예요. 김지연 작가의 은근한 유머들이 항상 재미있어요.

소영현 : 그 대목 저도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도둑이 들었다고 하면 되겠지 하면서 쓸모없는 걸 골라 담다가 어느 순간 쓸모없는 것만 도둑이 가져갔을 리 없으니 쓸모 있는 것들을 막 넣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귀금속까지…… 그래서 말씀하신 것처럼 즐겁게 ‘판조 정말 짜증나네’ 하면서 쭉 따라가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텅 빈 방을 마주하게 되는 거예요. 컴컴한 어둠처럼 남겨놓는 게 섬뜩하기도 했어요.

이소 : 웹진에 실리기 때문에 작가가 이 작품을 더 연극적으로, 또렷하게 읽히게 썼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김지연 작가의 기존 스타일에서 벗어나는 소설은 아니지만, 인물의 행동을 배우처럼 바꿔 떠올리기 쉽고, 장면이 빠르게 전환되고 분량도 짧아서 웹진에 적합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종산 : 쭉 잘 읽히면서도 마지막에 텅 빈 방이 주는 여운이 또 있는 것 같아요.


문보영, 「베케트의 밧줄 가게」click

소영현 : 문보영의 「베케트의 밧줄 가게」는 ‘시인이 쓴 소설’ 특집으로 청탁을 드렸던 작품입니다. 그런 관점에서도 한번 얘기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김나영 : 크게 열한 개의 소제목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각의 부분은 다시 길게 풀어낼 만한 이야기들이 압축되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렇게 여러 편의 짧은 이야기가 묶여 한 편의 소설이 꾸려지는데 그런 점들이, 또 각 부분에 번호가 매겨져 있는 게 한 편 한 편 시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종산 : 맞아요. 그래서 분량에 비해서 읽는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고요.

이소 : 부끄럽지만 저는 시를 잘 못 읽어요. 그래서 시를 읽을 때 종종 시인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이 소설이 ‘소설처럼 쓴 시’이자 ‘시처럼 쓴 소설’이라 평소의 바람이 많이 채워졌어요.

김나영 : 이 소설에 중요하게 쓰이는 게 ‘문’ ‘계단’ 그리고 ‘밧줄’인데요. 문이나 계단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할 때 미리 정해진 방식이잖아요. 이곳으로 오르내려라, 이곳으로 드나들어라 하는 식으로요. 그런 정해진 방식에 저항하고자 하는 마음이 밧줄로 나타난 것 같고요. 소설의 줄기는 ‘나’와 ‘베케트’가 만나기로 한 장소의 묘사와 베케트라는 인물에 대한 소개와 그에 대한 나의 입장들, 그리고 끝내 그와 내가 만나는 일로써 이어지는데요. 그러니 이 이야기 속에서만큼은 나는 베케트로 인해서 존재하는 듯 보여요. 물론 그는 나와 분리된 존재이고 그래서 다 알 수 없는 대상이긴 하지만요. 소설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그러나 그가 어떤 방법을 통해 내게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건 우리가 만났다는 사실이며, 우리는 또 하나의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혼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정신의 밧줄을 얇게 만들기에 우리도 사람이 되어보기 위해 힘을 합쳐 사람을 기다린다.” 사람이라는 것에 함께 도달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베케트는 나의 분신 같은 존재가 아닌가 해요. 둘이 보이지 않는 밧줄로 연결되는 것 같았고요. 저는 작가가 직접 쓴 자기소개도 눈여겨봤는데요, 거기 ‘아기 베케트’라는 표현이 나오잖아요. 거기서 이 소설의 밧줄은 ‘탯줄’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사람은 사람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 그런 마음에서 이런 이야기가 발원한 게 아닐까 싶어요.

이소 : ‘재현’이라든지 ‘실감’이라든지 문학의 핵심적인 문제를 에두르지 않고 다루는 게 흥미로웠어요. 저는 밧줄이 ‘말’과 대비되는 이미지로 읽혔어요. 우리는 밧줄처럼 이어질 수는 없지만, 대신 항상 말을 하고 그 말에 담지 못하는 것들을 아쉬워하죠. 소설에서 창문에 시트지를 발라 문장을 붙여둔 장면이 있었는데, 정작 그 검은 시트지가 햇빛을 막고 있잖아요. 글을 쓴다는 게 이렇게 빛을 가린 다음 이 너머에 빛이 있다고 쓰는 식 같아요. 이런 글쓰기에 관한 이미지들이 계속 등장하니까, 이 소설은 딱히 시나 소설이라기보다 ‘쓰기에 대한 쓰기’라고 느껴졌어요.

이종산 : 이소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재현이나 실감이라는 주제가 이론적 주제일 수 있잖아요. 소설가들은 이런 주제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접근을 하는 것 같아요. 개념적인 것들을 안으로 감추면서 커다랗게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 익숙한데, 이 소설은 재현이나 실감 같은 개념들을 과감하게 탁탁 던져버린다는 게 재미있었어요.

김나영 : 베케트는 도서관에서 일하는데, 원래 계약상 임무는 어느 방 안에만 있으면 되는 건데 도서관장이 계속 사람들과 접촉을 시키잖아요. ‘만나게 한다’든가 ‘인사를 나누게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데 ‘접촉’이라는 말이 쓰이죠. 결국 이 소설은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 만나고 연결되는, 어떤 관계를 맺는 일에 골몰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이 소설이 제시하듯 소개와 접촉과 연결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사건이죠. 가령 위기감에 있어서도,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지 않을 때 위기에 처해 있다고 느낄 수 있지만 또다른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와 접촉함으로써 위기에 처했다고 인식할 수 있고요. 때문에 “위기에 처한 인간에게 밧줄을 던지고 싶다”는 표현에서 단순히 연결을 통한 구출 행위만을 떠올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거리두기나 다른 방식의 연결을 모색함으로써 서로를 돌보려고 했던 팬데믹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했고요.

소영현 : 저는 길게 쓰인 시로 읽었고, 소설로 읽는다면 어떻게 읽어야 되는지에 대한 질문을 가지고 있어요.

김나영 : 이것을 소설의 확장으로 볼 것인가 하고 질문하셨는데, 저는 바로 그런 의미로 이 이야기가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공유하는 소설의 문법이나 시의 문법이 있는데 그런 일종의 관습 자체에 질문을 던지며 쓰이는 작품들이 종종 있고 그들의 역할과 의미가 또한 있잖아요. 소설에 대한 소설, 혹은 시에 대한 시처럼 메타 소설과 메타 시의 역할을 하면서 그 작품을 읽는 독자가 기존의 독법 내지는 습관대로 읽었을 때 뭔가 어색하고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지는 지점을 오히려 의도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바로 거기서 그 작품의 의미를 찾고 논의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소영현 : 제가 좀더 궁금한 것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간의 소설 독법과는 달라져야 하는 걸까 하는 문제예요.

김나영 : 다르게 읽어야 한다는 말씀일까요?

소영현 : 완전히 새롭게 읽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기존의 소설 독법으로 읽는다는 말에는 어떤 평가 기준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니까. 비평가로서 장르적인 실험의 결과물을 읽는 독법을 개발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는 거죠. 한 단계 더 나가야 하는데 그럼 난 어떻게 뭘 할 수 있지 하는 질문에 스스로 확답을 잘 못 하겠는 거예요. 저의 관습적 독법 안에 이 작품을 밀어 넣고 있는 거죠.

이종산 : ‘시인이 쓴 소설’ 특집으로 청탁을 드릴 때 저는 소설을 보면서 시인의 세계를 좀더 알고 싶다는 기대를 했던 것 같아요. 「베케트의 밧줄 가게」가 그런 면에서 저한테는 좋은 소설이었던 게, 문보영 시인은 지금 우리 시대에 가장 과감한 실험을 하고 있는 시인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때문에 시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은 문보영의 시가 어려울 수 있어요. 끝까지 밀어붙이는 실험을 계속하는데, 소설에서는 좀더 친절해지고 이야기가 들어가면서 그동안 문보영의 세계가 어려웠던 독자들한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지 않았나. 문보영의 시를 읽으면 항상 이게 어떤 의미일까를 많이 생각하게 되고 정답을 찾을 때보다는 사실 모를 때가 많고 그 모르는 것에서 오는 재미 때문에 문보영을 읽기도 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근데 「베케트의 밧줄 가게」는 시들에 비해서는 이해할 수 있는 힌트를 많이 주는 글이라고 생각했어요. 문보영 시인의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글이라는 측면에서 저한테 의미가 있었던 것 같아요.

소영현 : 조심스럽게 덧붙이자면, 저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논의해보자고 말씀드린 것이긴 한데요. 저한테 독법이라는 것은 그 ‘좋은’의 함의에 대한 설명 논리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왜 좋은지를 설명할 때 장르적으로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되었다는 거죠. 좋은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면 나는 참 빈곤한 말밖에 안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요.

이소 : 이장욱의 경우 그의 시를 한 편도 안 읽었어도 그의 소설을 읽는 데에는 무리가 없겠지만, 문보영의 소설은 경우가 다른 것 같아요. 저는 얽혀 있는 것을 얽히지 않은 것처럼 생각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사실 우리가 텍스트와 저자를 분리하라고 훈련받지만, 그래도 우리는 글을 읽을 때 늘 저자를 확인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더 깊은 독해도 가능하잖아요. 애초 《비유》에서 문보영 시인에게 소설을 청탁했을 때는 ‘시인이 쓰는 소설’로 기획했겠지요. 그렇다면 저는 이 소설 읽을 때도 시인이 쓴 소설이라는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완전한 소설’이라는 게 따로 존재하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런 경우에는 시인과 소설을 분리해서 소설만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오히려 인위적이고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인이 썼다는 걸 적극적으로 고려하며 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이종산 : 그런 측면에서 또 재밌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런 소설을 볼 때 다시 한번 소설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거잖아요. 시와 소설의 차이는 무엇인가, 소설은 무엇인가, 소설의 구조와 시의 구조는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소설과 시가 다루는 주제는 어떻게 다른가. 「베케트의 밧줄 가게」가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볼 수 있게 하는 것 같아요.


3

소영현 : 지금까지 소설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정리하는 차원에서 최근에 ‘쓰기에서 직면한 어려움’ 같은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이소 : 학위 논문을 쓸 때는, 물론 쓰고 싶은 거 쓰고 있어서 즐거워 죽겠다 그런 마음은 절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내가 쓰고 싶은 주제에 대해 긴 호흡으로 글을 쓸 수 있었는데, 이제 청탁이 들어오는 것에 맞춰 써야 하니까 그게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도 자유 주제나 주제 비평으로 청탁이 들어오면 뭘 쓸지 마음대로 고민할 수 있는데, 리뷰나 해설은 제가 굳이 열심히 쓴 작품에 고춧가루 뿌릴 수도 없고, 쓰고 싶은 게 있어도 그걸 쓸 수 있는 지면 드물어요. 그래서 저번에 자유 주제로 청탁해주셔서 재밌게 잘 썼습니다.

소영현 : 저희도 재밌게 잘 봤습니다.

이종산 : 되게 살아 있는 비평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소 : 하지만 단상 수준이라 다시 이어 쓰고 싶은데 또 그런 기회는 없으니까 잊히고 그러네요. 저는 글을 안 쓰면 깊은 생각을 안 하게 되더라고요. 물론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는 미리 써놓으면 되지 않느냐고도 말하는데 저는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소영현 : 비평이 창작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인 것 같아요. 미리 쓸 수도 없고요. 그때의 존재가 자체가 사유로 전환되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멋있는 말로 포장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이소 : 맞아요. 청탁이 오면 그 무렵의 모든 사유가 깔때기처럼 그 글로 들어가는.

소영현 : 그래서 다가간 사유의 깊이에 스스로 놀라기도 하죠. 미리 써놓을 수 없는 어려움이 있고, 더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자리가 거의 없어서, 《비유》에서 그런 공간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잠시 소개드리자면, 그런 차원에서 《비유》에서는 키워드만 제시한 자유 비평으로 특집을 마련하고 있는데요. 올해에는 ‘돌봄, 노동, 환경’을 키워드로 한 비평 특집이 준비되어 있어요.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웃음)

이소 : 제 차례 돌아오려면 멀었네요.(웃음)

김나영 : 말씀하신 대로 ‘자유 비평 지면이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사실은 내가 정말 쓰고 싶은 게 있는데 못 쓴다는 이유보다는 주문 생산하는 제도 때문에 생기는 욕망인 것 같아요. 저도 그런 불만을 가졌던 때가 있었어요. 늘 촉박하게 쓰고 다 써도 항상 모자란 느낌이 드는 게 괴로웠는데 지나고 나서 보니까 제 역량에 비해 많이 썼기 때문이기도 했던 것 같아요. 출산하고 육아와 일을 병행하면서 한동안 긴 호흡의 글을 쓰지 못했는데요 그러면서 틈틈이 시간에 시달리지 않고 비평이란 걸 생각하다보니 이전의 제가 너무 생활에 대한 감각이 부족한 채로 원고 매수만 채우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었어요. 내가 읽고 써야 하는 작품에만 매몰되어 그 속에서 하는 말만 알아들으려다보니 더 어렵고 또 놓친 게 많았던 것 같아요. 지금은 그때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게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었구나, 혹은 다른 게 더 중요했구나, 이런 생각을 조금 하게 되면서, 비평이란 무엇보다 ‘대화’여야 하는데 그동안의 나는 계속 혼잣말을 해온 게 아닐까 반성도 했고요. 문학평론을 하며 한 사람으로서 충실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기혼 유자녀 여성으로 살면서 이전의 내 세계가 굉장히 좁았구나, 내가 아는 게 많이 부족했구나, 이런 반성을 많이 해요. 또 좌담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내 안의 생각들은 결국 글로 써야 진짜 내 것이 된다는 것도 제대로 깨닫고 있고요.

소영현 : 그러니까 쓰고 싶은 게 있으시다는 말씀인 건데, 그럼 한번 써주시는 것으로.(웃음)

김나영 : 생각 정리를 한번 해보겠습니다.(웃음)

소영현 : 쓰고 싶은 게 있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것 같아요. 모든 창작이 그렇겠지만, 비평 쓰기는 너무 어렵기도 하고 소모되고 마모되는 작업이어서, 언젠가부터 나는 여기서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뭘 하고 있나 그리고 아무도 읽지 않는 비평을 쓰면서 뭐 하고 있나 이런 생각도 많이 하게 되는데요. 비평에 대한 얘기는 다른 자리에서 한 번 더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마지막 질문으로, 오늘 같은 좌담 자리가 유용한가, 좀 위험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던 터라, 어떻게들 생각하셨는지 여쭙니다. 《비유》에 실린 소설들만을 대상으로 한 논의가 어떤 의미를 갖나 하는 생각과 함께 신진 작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는 공간이자 웹 공간이기도 해서 그에 대한 반응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고 있었어요.

김나영 : 새로운 것에 대한 강박은 지금 한국문학에도 있는 것 같아요. 특히 새로운 작가에 대한 갈망이요. 그런데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을 놓고 새로움에 대한 비평적인 논의는 별로 없고요. 작품 활동을 이제 막 시작하거나 얼마 되지 않은 작가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작품을 채워나가는 방식으로 새로움이라는 허울을 만드는 것 같아 아쉬워요. 특히 문학의 경계를 확장하는 새로운 작가와 작품을 주목하는 《비유》에서 정기적으로 비평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많은 작가와 작품들을 소개하면서 새로움에 대한 논의를 지속적으로 해나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새로움에 대한 비평은 단순히 새것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이전의 것을 다시 읽고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겠고요.

이소 : 저도 처음 비평을 쓸 때 피드백이 참 아쉬웠어요. 논문은 심사위원들이라도 코멘트를 주는데, 평론은 누가 내 글을 읽기나 할까 그런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소설도 수상 후보작으로 선정되지 않으면 묻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비유》에 실린 작가 중 상당수가 신인일 텐데, 신인의 지분을 양적으로 얼마만큼 준다는 식이 아니라 그 소설을 향해 다시 말을 건네는 행위가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이유로 이 좌담을 기획하셨구나 생각했고, 그래서 이렇게 《비유》에 실린 작품만 선정해서 얘기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먼저 말을 꺼낸 사람에게 나도 말을 걸어보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응답할 책임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여섯 편밖에 할 수 없었지만.

이종산 : ‘비유-뷰view’ 좌담을 기획하며 좀 설레기도 했지만 저희가 준비를 하면서도 이 자리가 의미가 있을까, 유의미한 얘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거든요. 근데 하기를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여유만 있다면 한 달에 한 번씩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도 여섯 편만 논의하게 된 게 너무 아쉬워요. 실은 모든 소설에 대해서 너무나 얘기를 하고 싶어요. 《비유》에 들어오는 소설들을 항상 첫 독자로서 정말 즐겁게 읽고 있거든요. 그런 면에서 이 자리에서 조금이나마 얘기할 수 있게 된 게 너무 좋고, 같이 얘기하지 못한 다른 소설들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이 또 새삼 드네요.

소영현 : 네, 앞으로 좀더 자주 좌담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아쉬운 마음을 안고 오늘의 자리를 마치겠습니다. 모두 수고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본 좌담은 2022년 8월 25일 목요일 오후 2시 연희문학창작촌(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소재)에서 진행했습니다. 좌담 내용을 총 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김나영, 소영현, 이소, 이종산

김나영: 나의 뾰족한 모서리를 안으로 접어 넣어야 너를 만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읽고 써보려 합니다.
소영현: 문학을 ‘한다’. 주로 읽는다. 가끔 쓰기도 한다.
이소: 글을 읽고 쓰면서 조금씩 조금씩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집니다.
이종산: 질주하는 소설을 쓰고 싶고 읽고 싶다고 생각하는 요즘입니다.

2022/11/08
6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