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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회 한 덩이의 맑은 생각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창작자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이럴 때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니 하지 않음조차 하지 않고 널브러져 있어 본다. 그렇다고 계획 없이 늘어져 있기만 한다면 영원히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다. 심연에 가라앉아 있는 생각이 부력을 받아 떠오르게 하려면 정성을 다해 성실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늦은 아침 이부자리에 누운 채로 온 우주의 기운을 끌어모아 ‘환상의 빛’이 나에게 내리는 그 순간을 상상한다. 빛에 홀려 집을 나선다. 인적은 없고 습기만 가득한 길로 골라 걷는다. 공기 중 수분에 굴절되어 흩어지는 빛을 놓치지 않으려 좌로 우로 펄떡대며 쫓는다. 우스꽝스럽게 보여도 발이 아파도 아무렇지 않다. 왔다. 가까이에 빛이 느껴진다.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커튼은 닫혀 있고 누운 채로는 바깥이 보이지 않는데도, 내 주변으로 서름한 빛이 느껴지는 날이 있다. (11쪽)
눈에 보이는 빛이 아니라서 아까 꾸던 꿈이 이어지고 있는가 싶기도 하다. 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그 환상의 빛을 가늠해 보다가 문득 이런 확신에 이른다. ‘뭔가 찾아온 거야!’ (11쪽)
뭔가 찾아온 것 같은 그 느낌을 너무나 사랑한다. 한정원 작가는 산책의 모든 순간을 서정적으로 묘사했고 눈을 감고도 빛이 느껴지는 순간 또한 찬찬히 그려놓았다. 나의 산책은 서정적이기는커녕 헛웃음이 나오는 모습이지만 다행히 결과는 비슷하다. 산책은 항상 옳다는 것. 풀리지 않고 엉킨 것들을 꾸역꾸역 짊어지고 있을 때는 걸으면서 푸는 수밖에 없다. 엉킨 타래를 풀며 끈적한 짐덩이를 한 걸음에 하나씩 내려놓고 나면 자연스레 무언가가 떠오른다.
무언가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면 이제 잠시 멈춰 숨을 돌려도 좋다. 아주 천천히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느린 속도로 숨을 돌려놓자. 숨이 제자리로 돌아가 사뿐히 놓일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주자. ‘느린 시간 속에서 누구보다 선명하게’ 나의 생각을 인지할 수 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영원에 가까운 속도로 입꼬리를 움직이’며 웃어보자. 뭔가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
가슴 부근에서 시간의 거품이 톡 하고 터졌다. 신경 세포들 사이로 파동이 퍼져나갔다. 국지적 시간 거품이었다. 정상에서 몇 번이나 경험했던,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울렁이는 감각의 근원. 분리된 하나의 주머니 우주와 스쳐가는 순간이었다. (320쪽)
시간을 천천히 감각한다는 개념이 짜릿하다. 자의로 이것을 조절할 수 있다면 설레고 기쁜 시간은 최대한 천천히 느끼고 막막하고 괴로운 순간은 최대한 빠르게 지나쳐버릴 것이다. 시간 감각을 편집할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창작자의 고통의 순간은 스킵, 스킵 건너뛰고 싶은 1순위다. 김초엽 작가는 느린 시간의 순간을 시간 거품으로 표현하며 그 안에 오목한 주머니 우주가 생겨난다는 가설에 기반해 소설 「캐빈 방정식」을 풀어간다.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심오한 과학적 개념에 상상으로 행간을 부풀려 나만의 주머니 우주들로 채워 넣으며 읽어내려간다. 짧은 분량이지만 반복해 읽을 때마다 시간 거품이 풍성해지고 주머니 우주들이 늘어나면서 소설이 확장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내 곁에 빛이 내려오고 생각 한 덩이가 떠오르는 게 느껴졌는데도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없을 때, 답답하다. 벌떡 일어나 아무 방향으로나 팔 다리를 마구 뻗어본다.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나에 대한 다섯 가지 사실’을 무작정 뱉어본다. 팔과 다리가 뻗어간 여러 방향, 나의 대한 은밀한 사실 몇 가지, 이런 것들이 모여 생각이 조금 더 생생해진다. ‘누구랑 비교할 필요가 없는 나의 고유한 모습’으로. 들쭉날쭉한 이상한 생각들에 숨통이 트인다. 이제 무한하게 구체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어린이를 만드는 것은 어린이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는 즐거운 추억과 성취뿐 아니라 상처와 흉터도 들어간다.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어린이의 것이다. 남과 다른 점뿐만 아니라 남과 비슷한 점도, 심지어 남과 똑같은 점도 어린이 고유의 것이다. (91쪽)
사람들이 각자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우주는 활기차다. 서로 달라서 생기는 들쭉날쭉함이야말로 사무적으로 보일 만큼 안정적인 질서다. 그런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게 나는 안심이 된다. 우주가 우리 모두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넓다는 사실도. (92쪽)
어린이를 이해하려 노력할수록 나의 세계도 넓어진다. 내가 어린이일 때 받았던 배려와 다정함들이 기억나서 내가 앉은 자리가 더 오목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에피소드마다 작고 작은 어린이들이 튀어나와 책장 위를 떼구루루 구르기도 하고 다음 장을 넘겨주겠다고 낑낑대기도 한다. 책장을 덮고 나면 어린이를 다정하게 이해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기보다 그저 어린이가 되어 친절한 눈빛의 어른들에게 마구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다. 어린이들이 모든 방식으로 자기다움을 이해받는다는 사실이 내 창작에 강력한 부력이 되어 되어준다.
*
정성이 가닿았는지 심연에 부력이 작용한다. 이제, 떠오른 한 덩이의 맑은 생각에 촘촘하게 빛을 심을 차례다. 그리자. 쓰자.
한정원의 『시와 산책』(시간의 흐름, 2020)
늦은 아침 이부자리에 누운 채로 온 우주의 기운을 끌어모아 ‘환상의 빛’이 나에게 내리는 그 순간을 상상한다. 빛에 홀려 집을 나선다. 인적은 없고 습기만 가득한 길로 골라 걷는다. 공기 중 수분에 굴절되어 흩어지는 빛을 놓치지 않으려 좌로 우로 펄떡대며 쫓는다. 우스꽝스럽게 보여도 발이 아파도 아무렇지 않다. 왔다. 가까이에 빛이 느껴진다.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커튼은 닫혀 있고 누운 채로는 바깥이 보이지 않는데도, 내 주변으로 서름한 빛이 느껴지는 날이 있다. (11쪽)
눈에 보이는 빛이 아니라서 아까 꾸던 꿈이 이어지고 있는가 싶기도 하다. 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그 환상의 빛을 가늠해 보다가 문득 이런 확신에 이른다. ‘뭔가 찾아온 거야!’ (11쪽)
뭔가 찾아온 것 같은 그 느낌을 너무나 사랑한다. 한정원 작가는 산책의 모든 순간을 서정적으로 묘사했고 눈을 감고도 빛이 느껴지는 순간 또한 찬찬히 그려놓았다. 나의 산책은 서정적이기는커녕 헛웃음이 나오는 모습이지만 다행히 결과는 비슷하다. 산책은 항상 옳다는 것. 풀리지 않고 엉킨 것들을 꾸역꾸역 짊어지고 있을 때는 걸으면서 푸는 수밖에 없다. 엉킨 타래를 풀며 끈적한 짐덩이를 한 걸음에 하나씩 내려놓고 나면 자연스레 무언가가 떠오른다.
김초엽의 「캐빈 방정식」(『방금 떠나온 세계』, 한겨레출판, 2021)
무언가 떠오르는 느낌을 받았다면 이제 잠시 멈춰 숨을 돌려도 좋다. 아주 천천히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느린 속도로 숨을 돌려놓자. 숨이 제자리로 돌아가 사뿐히 놓일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주자. ‘느린 시간 속에서 누구보다 선명하게’ 나의 생각을 인지할 수 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영원에 가까운 속도로 입꼬리를 움직이’며 웃어보자. 뭔가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
가슴 부근에서 시간의 거품이 톡 하고 터졌다. 신경 세포들 사이로 파동이 퍼져나갔다. 국지적 시간 거품이었다. 정상에서 몇 번이나 경험했던,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울렁이는 감각의 근원. 분리된 하나의 주머니 우주와 스쳐가는 순간이었다. (320쪽)
시간을 천천히 감각한다는 개념이 짜릿하다. 자의로 이것을 조절할 수 있다면 설레고 기쁜 시간은 최대한 천천히 느끼고 막막하고 괴로운 순간은 최대한 빠르게 지나쳐버릴 것이다. 시간 감각을 편집할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창작자의 고통의 순간은 스킵, 스킵 건너뛰고 싶은 1순위다. 김초엽 작가는 느린 시간의 순간을 시간 거품으로 표현하며 그 안에 오목한 주머니 우주가 생겨난다는 가설에 기반해 소설 「캐빈 방정식」을 풀어간다.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심오한 과학적 개념에 상상으로 행간을 부풀려 나만의 주머니 우주들로 채워 넣으며 읽어내려간다. 짧은 분량이지만 반복해 읽을 때마다 시간 거품이 풍성해지고 주머니 우주들이 늘어나면서 소설이 확장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사계절, 2020)
내 곁에 빛이 내려오고 생각 한 덩이가 떠오르는 게 느껴졌는데도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없을 때, 답답하다. 벌떡 일어나 아무 방향으로나 팔 다리를 마구 뻗어본다.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나에 대한 다섯 가지 사실’을 무작정 뱉어본다. 팔과 다리가 뻗어간 여러 방향, 나의 대한 은밀한 사실 몇 가지, 이런 것들이 모여 생각이 조금 더 생생해진다. ‘누구랑 비교할 필요가 없는 나의 고유한 모습’으로. 들쭉날쭉한 이상한 생각들에 숨통이 트인다. 이제 무한하게 구체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어린이를 만드는 것은 어린이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는 즐거운 추억과 성취뿐 아니라 상처와 흉터도 들어간다.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어린이의 것이다. 남과 다른 점뿐만 아니라 남과 비슷한 점도, 심지어 남과 똑같은 점도 어린이 고유의 것이다. (91쪽)
사람들이 각자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우주는 활기차다. 서로 달라서 생기는 들쭉날쭉함이야말로 사무적으로 보일 만큼 안정적인 질서다. 그런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게 나는 안심이 된다. 우주가 우리 모두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넓다는 사실도. (92쪽)
어린이를 이해하려 노력할수록 나의 세계도 넓어진다. 내가 어린이일 때 받았던 배려와 다정함들이 기억나서 내가 앉은 자리가 더 오목하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에피소드마다 작고 작은 어린이들이 튀어나와 책장 위를 떼구루루 구르기도 하고 다음 장을 넘겨주겠다고 낑낑대기도 한다. 책장을 덮고 나면 어린이를 다정하게 이해하는 어른이 되고 싶다기보다 그저 어린이가 되어 친절한 눈빛의 어른들에게 마구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진다. 어린이들이 모든 방식으로 자기다움을 이해받는다는 사실이 내 창작에 강력한 부력이 되어 되어준다.
정성이 가닿았는지 심연에 부력이 작용한다. 이제, 떠오른 한 덩이의 맑은 생각에 촘촘하게 빛을 심을 차례다. 그리자. 쓰자.
하수정
계속 변하는 날씨 같은 사람이 될 거라 생각했다. 지금은 그냥 유쾌한 그림책 만들며 상쾌하게 살고 있다.
2021/12/28
4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