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16회 [연결 13] 사소한 다정함과 강렬한 생경함
기획의 말
2009년 1월 2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의 남일당 건물 점거농성 현장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9년 6월 24일, 농성에 참여했다가 징역형을 살아야 했던 한 철거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10년이 흘렀으나 용산참사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과거의 사건으로 잊혀서는 안 되는 일들을 ‘지금’ 다르게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묻고,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2009년 6월 9일, 188인의 작가들이 모여 “이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6.9 작가선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말하기’를 통해 용산참사에 대한 ‘듣기’를 이어갔던 작가들에게 그날의 선언이 지금 어떤 경험으로 남아 있는지 조심스럽게 질문해보았습니다. 작가들의 과거 연대 경험을 경청하는 일은 그때와 지금을 다르게 연결해주지 않을까요?
6.9 작가선언을 기점으로 10년간의 작가 연대 경험에 대한 아카이빙 연재 기획, ‘연결’을 시작합니다.
6.9 작가선언 무렵의 기록은 이전에 쓰던 컴퓨터에 있는데, 실은 그 기록마저 폴더째로 삭제한 상태였습니다. 원고 문의를 받고 과연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던 중에 옛 컴퓨터를 꺼내와 폴더 복구를 해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손쉽게 폴더와 파일들이 복구된다 싶었는데 웬걸, 정작 문서와 이미지는 겉보기와는 달리 내용이 깨져 하나도 읽히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습니다. 이전의 피상적인 상세함으로 돌아가는 대신 오늘의 느낌을 조금만 간추려보고자 합니다.
그 이전에 한 장면
첫 장면은 2009년이 아니라 80년대 중반 어느 날이었습니다. 대학 학부생이던 제가 수업을 받고 있는데 돌연 누군가 강의실 문을 발로 뻥 차고 들어와 앙칼지게 소리쳤습니다. “야, 너희들이 지금 한가롭게 수업이나 할 때야? 다들 교문 앞으로 나와. 같이 싸워야지.” 총학생회 부회장 여학생이었습니다. 그날도 학교 앞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시위가 벌어졌을 겁니다.
교수님의 반응, 학우들의 반응을 포함해 그 순간에 이어진 시간이 어땠는지는 이상할 만큼 기억에 남아 있질 않습니다. 한편의 학우들이 시위를 하는 동안 도서관에서 ‘자기 공부만 하는 학생들’도 다른 한 범주로 통하던 시절이었으니, 수업하는 교실의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와 호통을 치는 거친 행위의 이유, 맥락 역시 그 시절의 공기 속에는 당연한 것처럼 존재했습니다. 고민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행동을 하지는 않는 회색 지대의 무리는 운동권의 비난과 비판, 경멸을 감수해야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다정함
이와는 다른 억압 없는 ‘관계의 방식’이 제가 젊은 6.9 작가들의 모임에서 발견한 의미였습니다. 우정의 분위기와 존중하는 태도 같은 것이 이미 젊은 작가들 사이엔 있었습니다. 그밖에 모임의 작가들이 주고받는 대화 가운데서 ‘다정함’이라든가 ‘느슨함’ 같은 말들이 저에겐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런 ‘새로움’을 (내색 없이) 세대론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세대는 다르구나!
그런 다름을 신기하게 느끼기도 하고 고마워하며, 또 어쩐지 마음이 놓이는 기분으로 젊은 작가들의 모임 근처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연약한 막의 내부의 온기 있는 한 풍경이었을 겁니다.
알지 못하는 것
그러나 실은 그때 우리가 제각기 어떤 개인의 삶의 맥락과 내면으로부터 걸어나와 공동의 장소와 시간에서 교차하는 만남을 가졌던 것인지는 조금밖에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모를 것입니다. 또 작가선언과 낭독, 시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모임의 정체성에 대한 입장의 차이, 그리고 활동이 외부적으로 수용되는 방식에 대한 불편함의 토로 또한 없지 않았기에, 당시에 대해 돌아볼 때 전체적으로 정리하는 관점을 잡기는 쉽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이를테면, 엉뚱하지만 1815년 유럽의 신성동맹 시기쯤을 살펴보듯 멀리에서 6.9 작가선언을 바라본다면, 시대에 대한 젊은 작가들의 불만과 분노에 대해 간략히 쓰고 말 수도 있을 겁니다. 우연히 그 시대 문학을 조금 가까이 살펴본 적이 있는데 이름 모를 저서들과 팸플릿 속에는 낯선 작가들이 너무나 많았고, 문학사에 등재되지 않은 아우성이 한 걸음만 떨어진 곳에선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는 거시적 적막과 대비되어 이상한 허망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범위를 좁혀 가까이서 들여다본다면, 문학의 위상과 기능이 왜소해지는 추세 속에서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정당화(legitimation)하고자 하는 한 문학 세대의 내적 필요를 자문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과거의 의미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던) 현재를 통해서만 이해될 것이었기도 하고, 특유의 (설령 상대에게 동의하지 않더라도 존중한다는) 원칙적 상호 존중 덕에 우리는 자신들을 표현하고 표명할 수는 있었지만, 자신을 개방한 상태를 유지하는 긴장 속에서 무엇도 확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때 누군가 말했습니다. “모임 게시판에 글을 하나 올리면, 그날 밤에 내가 쓴 글에 대해 번민하는 꿈을 꾼다”고. 불확실한 전체 앞에서 자신을 개방한 상태로 두는 미확정성의 긴장이 그와 같았을 겁니다. 또 누군가 말했습니다. “의견을 묻거나 행동에 대한 제안을 하고 반응이 오기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미확정 상태의 소모가 힘겹다”고. 이런 미확정성은 아마 ‘서로 다름’에 대한 각자의 자제하는 침묵과 예의의 효과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어떤 불일치들이 당연히 존재했습니다. 대사회적인 표명에선 일치되었으나 문학장 내의 사안에서는 의견이 갈리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때 저는 이 글의 첫 장면에서 떠올린 것과는 다른 존중하는 ‘양식’을 발견했고, ‘존중의 세대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위태로웠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가늠하고 헤아릴 수 없는 한 작은 전체를 향해 자기를 열고 선 듯한 모호한 위태로움, 어쩌면 그저 작은 것이었을 그 느낌을 1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잘 기억합니다.
다정한 울타리 너머의 생생한 무의미
이 글 첫머리에서 말한 80년대 한 대학가 강의실에서 제가 경험한 장면으로부터 ‘생생한 생경함’이란 개념을 만들어 가져와보려 합니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강렬하며, 소화되지 않는 그만큼 오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어 보입니다.
6.9 작가선언 당시 용산역 부근에서 일일시위를 하던 젊은 작가들에게서 시민들의 무반응이나 외면에 관한 경험을 듣곤 하였습니다. 그런 체험은 어떤 실망으로 해석되기 전까지는 우선 생생한 생경함 또는 생생한 무의미였을 겁니다. 저 역시 하루쯤은 그런 정경 속에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전해들은 이야기가 더 먼저 떠오릅니다. 우리는 얼마나 낯선 외부적 존재인가, 하는 거의 신체적인 번뇌를 경험한 시간이었을까요. 우리는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사회적인 풍경 속에서 재현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나이 든 세대 일부는 70년대 분위기의 회귀를 민감하게 느꼈으며 뉴타운 광풍의 욕망이 최소한 과반의 시대정신이던 시기에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각자의 막 바깥의 실재와 부대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제출한 한 줄 선언문에 대해서조차 “이런 식으로 고정되어 유통되려던 것은 아니었다”며 당황하던 목소리들도 기억납니다.
생생한 생경함을 가까운 울타리 너머에서 쉽게 맞닥뜨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중요했던 것은 가까이서 느껴지는 다정함의 사적이고―그분들은 민망해하거나 웃겠지만― 문학사적인 새로움의 의미가 중요했습니다. 새로운 다정함(존중)을 알게 된 것이 중요했습니다.
저는 2001년 마지막으로 문학행사에 참석한 뒤로는 ‘문단적인 것’에 거리를 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위계들에 대한 약간의 멀미만으로도 ‘안녕히’ 하고 물러나온 사람인 저에게 이성미 시인이 연락을 준 것은 뜻밖이었고,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때 처음 만난 대여섯 분들을 아직도 마음으로 기억합니다.
맺음―증여에 관한 물음
공동체와 연대를 논하기 전에 글이 끝나버리게 되었군요. 지난 작가선언 모임의 전체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최초의 발안자도 아니고 가장 수고한 행위자(일꾼)도 아니었으며 정의로운 대사회적 발언보다는 문학장의 새로운 공동체 방식에 관심을 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관점에서 볼 때 작가선언의 모임에는 어떤 버거운 증여의 몸짓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주는 동시에 줌을 통해 오히려 받는 느낌을 받는다는 내면성이 엄밀한 등가교환의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증여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증여의 몸짓이 거절당하면 심한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까요. 요구받지 않은 풍요를 선사하는 존재인 증여자는 증여를 거부당하면서 내적으로 빈곤해집니다. 당시 작가들이 과연 증여할 수 있는 존재였는지, 어떤 자산을 가진 존재들이었는지는 감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가장 빈한한 주체라도 증여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요? 만일 그렇다면 그 주체는 역설적인 주체일 것입니다. 그리고 역설이 가장 잘 살아갈 수 있는 영역은 바로 문학일 터이고요.
저는 우리가 문학인인가, 시민인가, 라는 당시의 물음에 대해, 그 당시의 모든 것이 문학적인 증여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그런 것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것은 저만의 혹은 일부의 관점이었고, 비교적 명확히 시민 정체성, 운동가 정체성으로 모임에 함께한 분들도 계셨습니다.
어쨌든 저는 문학잡지에 글이 실리고 문학상이 수여되어야만 문학이 아니라, 열정과 선의가 섞여 있는 소망과 소망의 행위 그 자체가 최고의 문학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런 문학의 바탕이 되는 ‘유구한 새로움’이 필요한데, 저는 6.9 작가선언 즈음에 만난 젊은 시인, 작가들에게서 그런 새로움을 발견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2014년의 세월호 사태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2016년의 문학예술계 위계성폭력 고발 때부터 지금까지 작가선언에서 만났던 분들의 활동이 있어왔습니다. 생각하면 크고 작은 모든 헌신이란 그 자체로 최상의 증여입니다. 헌신자들이 고갈되고 좌절하면 사회도 어둡고 빈곤해집니다.
이런 관점, 느닷없게도 느껴질 사적인 시각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나니 민망합니다. 모두가 저 시기를 이해하기 위한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을 듯합니다. 젊은 분들일수록 그 시간이 많을 겁니다.
2009년 1월 2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의 남일당 건물 점거농성 현장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19년 6월 24일, 농성에 참여했다가 징역형을 살아야 했던 한 철거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10년이 흘렀으나 용산참사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과거의 사건으로 잊혀서는 안 되는 일들을 ‘지금’ 다르게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묻고, 무엇을 들어야 할까요?
2009년 6월 9일, 188인의 작가들이 모여 “이것은 사람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6.9 작가선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말하기’를 통해 용산참사에 대한 ‘듣기’를 이어갔던 작가들에게 그날의 선언이 지금 어떤 경험으로 남아 있는지 조심스럽게 질문해보았습니다. 작가들의 과거 연대 경험을 경청하는 일은 그때와 지금을 다르게 연결해주지 않을까요?
6.9 작가선언을 기점으로 10년간의 작가 연대 경험에 대한 아카이빙 연재 기획, ‘연결’을 시작합니다.
6.9 작가선언 무렵의 기록은 이전에 쓰던 컴퓨터에 있는데, 실은 그 기록마저 폴더째로 삭제한 상태였습니다. 원고 문의를 받고 과연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던 중에 옛 컴퓨터를 꺼내와 폴더 복구를 해볼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손쉽게 폴더와 파일들이 복구된다 싶었는데 웬걸, 정작 문서와 이미지는 겉보기와는 달리 내용이 깨져 하나도 읽히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잘 되었다 싶습니다. 이전의 피상적인 상세함으로 돌아가는 대신 오늘의 느낌을 조금만 간추려보고자 합니다.
그 이전에 한 장면
첫 장면은 2009년이 아니라 80년대 중반 어느 날이었습니다. 대학 학부생이던 제가 수업을 받고 있는데 돌연 누군가 강의실 문을 발로 뻥 차고 들어와 앙칼지게 소리쳤습니다. “야, 너희들이 지금 한가롭게 수업이나 할 때야? 다들 교문 앞으로 나와. 같이 싸워야지.” 총학생회 부회장 여학생이었습니다. 그날도 학교 앞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시위가 벌어졌을 겁니다.
교수님의 반응, 학우들의 반응을 포함해 그 순간에 이어진 시간이 어땠는지는 이상할 만큼 기억에 남아 있질 않습니다. 한편의 학우들이 시위를 하는 동안 도서관에서 ‘자기 공부만 하는 학생들’도 다른 한 범주로 통하던 시절이었으니, 수업하는 교실의 문을 발로 차고 들어와 호통을 치는 거친 행위의 이유, 맥락 역시 그 시절의 공기 속에는 당연한 것처럼 존재했습니다. 고민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행동을 하지는 않는 회색 지대의 무리는 운동권의 비난과 비판, 경멸을 감수해야 하는 시절이었습니다.
다정함
이와는 다른 억압 없는 ‘관계의 방식’이 제가 젊은 6.9 작가들의 모임에서 발견한 의미였습니다. 우정의 분위기와 존중하는 태도 같은 것이 이미 젊은 작가들 사이엔 있었습니다. 그밖에 모임의 작가들이 주고받는 대화 가운데서 ‘다정함’이라든가 ‘느슨함’ 같은 말들이 저에겐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런 ‘새로움’을 (내색 없이) 세대론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하였습니다. 이 새로운 세대는 다르구나!
그런 다름을 신기하게 느끼기도 하고 고마워하며, 또 어쩐지 마음이 놓이는 기분으로 젊은 작가들의 모임 근처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아마도 연약한 막의 내부의 온기 있는 한 풍경이었을 겁니다.
알지 못하는 것
그러나 실은 그때 우리가 제각기 어떤 개인의 삶의 맥락과 내면으로부터 걸어나와 공동의 장소와 시간에서 교차하는 만남을 가졌던 것인지는 조금밖에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모를 것입니다. 또 작가선언과 낭독, 시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모임의 정체성에 대한 입장의 차이, 그리고 활동이 외부적으로 수용되는 방식에 대한 불편함의 토로 또한 없지 않았기에, 당시에 대해 돌아볼 때 전체적으로 정리하는 관점을 잡기는 쉽지 않겠습니다.
차라리, 이를테면, 엉뚱하지만 1815년 유럽의 신성동맹 시기쯤을 살펴보듯 멀리에서 6.9 작가선언을 바라본다면, 시대에 대한 젊은 작가들의 불만과 분노에 대해 간략히 쓰고 말 수도 있을 겁니다. 우연히 그 시대 문학을 조금 가까이 살펴본 적이 있는데 이름 모를 저서들과 팸플릿 속에는 낯선 작가들이 너무나 많았고, 문학사에 등재되지 않은 아우성이 한 걸음만 떨어진 곳에선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는 거시적 적막과 대비되어 이상한 허망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범위를 좁혀 가까이서 들여다본다면, 문학의 위상과 기능이 왜소해지는 추세 속에서 자신의 사회적 존재를 정당화(legitimation)하고자 하는 한 문학 세대의 내적 필요를 자문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모든 것이 불확실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과거의 의미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던) 현재를 통해서만 이해될 것이었기도 하고, 특유의 (설령 상대에게 동의하지 않더라도 존중한다는) 원칙적 상호 존중 덕에 우리는 자신들을 표현하고 표명할 수는 있었지만, 자신을 개방한 상태를 유지하는 긴장 속에서 무엇도 확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때 누군가 말했습니다. “모임 게시판에 글을 하나 올리면, 그날 밤에 내가 쓴 글에 대해 번민하는 꿈을 꾼다”고. 불확실한 전체 앞에서 자신을 개방한 상태로 두는 미확정성의 긴장이 그와 같았을 겁니다. 또 누군가 말했습니다. “의견을 묻거나 행동에 대한 제안을 하고 반응이 오기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미확정 상태의 소모가 힘겹다”고. 이런 미확정성은 아마 ‘서로 다름’에 대한 각자의 자제하는 침묵과 예의의 효과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어떤 불일치들이 당연히 존재했습니다. 대사회적인 표명에선 일치되었으나 문학장 내의 사안에서는 의견이 갈리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때 저는 이 글의 첫 장면에서 떠올린 것과는 다른 존중하는 ‘양식’을 발견했고, ‘존중의 세대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위태로웠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가늠하고 헤아릴 수 없는 한 작은 전체를 향해 자기를 열고 선 듯한 모호한 위태로움, 어쩌면 그저 작은 것이었을 그 느낌을 1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잘 기억합니다.
다정한 울타리 너머의 생생한 무의미
이 글 첫머리에서 말한 80년대 한 대학가 강의실에서 제가 경험한 장면으로부터 ‘생생한 생경함’이란 개념을 만들어 가져와보려 합니다. 그것은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강렬하며, 소화되지 않는 그만큼 오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특성이 있어 보입니다.
6.9 작가선언 당시 용산역 부근에서 일일시위를 하던 젊은 작가들에게서 시민들의 무반응이나 외면에 관한 경험을 듣곤 하였습니다. 그런 체험은 어떤 실망으로 해석되기 전까지는 우선 생생한 생경함 또는 생생한 무의미였을 겁니다. 저 역시 하루쯤은 그런 정경 속에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전해들은 이야기가 더 먼저 떠오릅니다. 우리는 얼마나 낯선 외부적 존재인가, 하는 거의 신체적인 번뇌를 경험한 시간이었을까요. 우리는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사회적인 풍경 속에서 재현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나이 든 세대 일부는 70년대 분위기의 회귀를 민감하게 느꼈으며 뉴타운 광풍의 욕망이 최소한 과반의 시대정신이던 시기에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각자의 막 바깥의 실재와 부대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제출한 한 줄 선언문에 대해서조차 “이런 식으로 고정되어 유통되려던 것은 아니었다”며 당황하던 목소리들도 기억납니다.
생생한 생경함을 가까운 울타리 너머에서 쉽게 맞닥뜨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중요했던 것은 가까이서 느껴지는 다정함의 사적이고―그분들은 민망해하거나 웃겠지만― 문학사적인 새로움의 의미가 중요했습니다. 새로운 다정함(존중)을 알게 된 것이 중요했습니다.
저는 2001년 마지막으로 문학행사에 참석한 뒤로는 ‘문단적인 것’에 거리를 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위계들에 대한 약간의 멀미만으로도 ‘안녕히’ 하고 물러나온 사람인 저에게 이성미 시인이 연락을 준 것은 뜻밖이었고,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때 처음 만난 대여섯 분들을 아직도 마음으로 기억합니다.
맺음―증여에 관한 물음
공동체와 연대를 논하기 전에 글이 끝나버리게 되었군요. 지난 작가선언 모임의 전체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최초의 발안자도 아니고 가장 수고한 행위자(일꾼)도 아니었으며 정의로운 대사회적 발언보다는 문학장의 새로운 공동체 방식에 관심을 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관점에서 볼 때 작가선언의 모임에는 어떤 버거운 증여의 몸짓이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주는 동시에 줌을 통해 오히려 받는 느낌을 받는다는 내면성이 엄밀한 등가교환의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증여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증여의 몸짓이 거절당하면 심한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까요. 요구받지 않은 풍요를 선사하는 존재인 증여자는 증여를 거부당하면서 내적으로 빈곤해집니다. 당시 작가들이 과연 증여할 수 있는 존재였는지, 어떤 자산을 가진 존재들이었는지는 감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가장 빈한한 주체라도 증여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요? 만일 그렇다면 그 주체는 역설적인 주체일 것입니다. 그리고 역설이 가장 잘 살아갈 수 있는 영역은 바로 문학일 터이고요.
저는 우리가 문학인인가, 시민인가, 라는 당시의 물음에 대해, 그 당시의 모든 것이 문학적인 증여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그런 것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것은 저만의 혹은 일부의 관점이었고, 비교적 명확히 시민 정체성, 운동가 정체성으로 모임에 함께한 분들도 계셨습니다.
어쨌든 저는 문학잡지에 글이 실리고 문학상이 수여되어야만 문학이 아니라, 열정과 선의가 섞여 있는 소망과 소망의 행위 그 자체가 최고의 문학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런 문학의 바탕이 되는 ‘유구한 새로움’이 필요한데, 저는 6.9 작가선언 즈음에 만난 젊은 시인, 작가들에게서 그런 새로움을 발견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 2014년의 세월호 사태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2016년의 문학예술계 위계성폭력 고발 때부터 지금까지 작가선언에서 만났던 분들의 활동이 있어왔습니다. 생각하면 크고 작은 모든 헌신이란 그 자체로 최상의 증여입니다. 헌신자들이 고갈되고 좌절하면 사회도 어둡고 빈곤해집니다.
이런 관점, 느닷없게도 느껴질 사적인 시각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나니 민망합니다. 모두가 저 시기를 이해하기 위한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을 듯합니다. 젊은 분들일수록 그 시간이 많을 겁니다.
조원규
시인, 번역가, 독립문예지 《베개》 편집인. 넓은 풍경 속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느낌을 좋아합니다. 적적해서 작은 문예지를 편집, 발행하고 있습니다.
2022/01/25
5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