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공동(체)’ 코너에서는 지난 10년 간 작가들이 사회적 사건에 연대하거나 함께한 경험을 되돌아보는 연속 기획 ‘연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연결’에서는 #문단_내_성폭력 고발 사건 이후 변화된 문학계 전반의 상황이 문학을 하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미친 영향과 제기된 질문들에 대해 자유롭게 듣고자 합니다. 우리는 2010년대 중반 sns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단_내_성폭력 고발과 이에 연대하는 움직임이 불러온 사회 변화를 겪었고, 이로 인해 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을 비롯해, 여러 측면에서의 질문들에 봉착했습니다. 건강한 문학 생태계란 어떠해야 하는가와 같은 의문에서부터 독자와 매체, 출판 환경의 변화에 관한 사유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겪고 있고 고민하고 있는 바로 그 문제들과 경험에 대해 묻고자 하는 이번 기획은, 문학이 ‘공동(체)’라는 단어를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단초가 되어줄 것입니다.


   팬데믹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다. 어느 청소년 독자로부터 만나줄 수 있겠냐는 연락을 받았다. 학교에서 수행하고 있는 과제와 관련해 몇 가지 질문을 하고 답변을 듣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그 편지에서 정중한 문장 뒤에 놓인 긴박한 느낌을 읽었고 고심하다가 그와 약속을 정했다. 아동이나 청소년 독자와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은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는 편이어서 요청에 응한 일이 없었다. 그런데 상황이 조금 다르다고 느낄 만한 단서 몇 가지가 편지 안에서 감지되었다. 기숙사에 있는 청소년이었는데 외출 일정을 묻고 주말 한낮에 번화한 거리의 빵집에서 그를 만났다.
   청소년은 유쾌한 사람이었고 앞으로 연구자로서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미리 간명한 질문지를 보내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답을 들려주면서 예정된 만남의 목적을 마무리했다. 나는 불필요한 예측을 했다고 후회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그때 그가 말을 꺼냈다.
   “괜찮으시다면 제 이야기를 잠시 들어주시겠어요. 가까이에는 이 문제를 의논할 만한 분이 없어서요.”
   익숙한 말이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가까이에는 이 문제를 의논할 만한 분이 없어서요.’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봉인이 열린 ‘그 문제’들은 아주 가까운 곳에 주소지를 두고 있었다. 너무 가까워서, 그 문제와 나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려고 하면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안내를 종료하겠습니다.”라는 말이 들려오고야 말 정도의 아주 근접한 장소에, 오래전부터 있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본다. 사당역에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순간이 떠오른다. 내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한 정거장 떨어진 지하철역 근처의 어느 건물 강당에서 고양예고 문창과 졸업생 연대 ‘탈선’이 기자회견을 진행하던 2016년 11월 11일에 대한 기억이다. 발언은 이미 시작되었고 나는 지하철 연결통로의 의자에 앉아서 휴대폰으로 생중계되는 회견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당시 한국일보 기사에 실린 내용을 정리하자면, ‘탈선’ 대표의 발언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1
   “가해자로 지목된 작가들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강사’와 ‘문인’, ‘남성’이라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책 강구에 앞장서야 하는 학교와 문단, 사회는 여전히 침묵하며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고 있다.”
   “가해자로 지목된 작가들은 법적 조사와 처벌에 따르고 사죄할 것과 모든 문단 및 교육 활동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학교는 문학 강사 성폭력 사건 진상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본 사건을 철저하게 조사할 것과 실기 강사 채용 기준을 공개하고 범죄 혐의 유무를 채용 기준에 포함할 것을 요구한다.”
   “문인단체는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을 개인의 문제, 외부의 문제, 타인의 문제로 은폐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한 나무가 자란다. 폭풍 속에서 자란다. 나무를 알지만 폭풍을 몰랐다거나 폭풍을 알지만 나무는 나와 무관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까운 사람들이다. 가까운 사람들이지만 가까운 지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그들이 모를 수 있다. 모를 수 있다. 모를 수 있다.
   나무는 짐작보다 빨리 자랐다. 폭풍은 짐작보다 서둘러 잠잠해졌다. 나무는 자라지 못했거나 부러졌거나 폭풍은 잠잠해지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믿었을 가능성이 있다. 가깝기 때문에 가능성이 있다. 가깝다는 것은 폭풍이 잠잠해졌다는 믿음을 높이는 일에 얼마만큼의 확률로 기여하는가.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이 위치추적기에는 “안내를 종료할까요?”라고 묻지도 않고 안내를 종료하는 기능이 있다.
   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해마다 여름이면 진행하는 공모전인 ‘청소년, 성평등 쓰고 그리다’에서는 아동과 청소년들의 원고를 받는다. 어느 해였는데 공모전 시상식장에서는 수상자들의 간담회가 열린다. 모인 사람들은 이곳이 숲이 불탄 자리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상을 수상한 사람은 갓 스무 살이 넘었는데 스무 살이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을 글로 썼다. 간담회에서 그는 말했다. 그 글을 쓴 이유는 자신이 있었던 불탄 자리에 다음에 도착할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에 열 살을 넘긴 어린이가 그 말을 듣고 자신도 계속 다음에 도착할 동생들을 위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했다.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어린이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나무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폭풍 속의 나무가 모두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은 아니므로 정확히 적자면, 어떤 나무의 말과 어떤 나무의 말 없음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지도를 보이거나 지름길을 찾아주어 자동차 운전을 도와주는 장치나 프로그램은 ‘내비게이션(navigation)’으로 적습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은 ‘길도우미’로 순화하였으니, 순화어인 ‘길도우미’를 적극적으로 써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한다. 목적지는 당신과 내가 있는 이 지점이며 우리에게는 섣부르게 안내를 종료하지 않는 길도우미가 필요하다.
   위에서 인용한 탈선의 회견문 중에서 “제대로 된 답변을 주지 않고 있다.”는 대목을 다시 읽어보게 된다. 지금은 제대로 된 답변을 주고 있을까. 빵집에서 만난 청소년과의 인터뷰는 아동청소년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종결되지 않는 인터뷰다. 자라는 사람들이 있으며 사라지는 사람들은 없다. 어디선가 성장 중인 나무의 말들은 글로 기록된다. 한 그루 나무는 폭풍을 제압할 수 없다. 그러나 ‘나무들’은 불길 속에서도 그걸 한다. 그리고 살아남은 숲에서 그들은 쓴다. 이 세계에서 자라나는 나무들 중에는 2016년 11월 11일과 멀리 있지 않은 나무들이 있다. 어쩌면 당신이 읽고 있는 지금 그 소설이다. 어쩌면 당신이 어젯밤 읽다가 잠든 그 시다. 믿을 수 없겠지만 바로 그 책이다.

김지은

아동청소년문학 평론가. 그림책 연구자. 당신이 어젯밤 읽다가 잠든 동화를 함께 읽는 사람.

2022/07/26
5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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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16년 11월 11일자 기사 〈문단 내 성폭력 고발, 고양예고 졸업생 107명 뭉쳐〉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