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말
   ‘공동(체)’ 코너에서는 지난 10년 간 작가들이 사회적 사건에 연대하거나 함께한 경험을 되돌아보는 연속 기획 ‘연결’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연결’에서는 #문단_내_성폭력 고발 사건 이후 변화된 문학계 전반의 상황이 문학을 하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미친 영향과 제기된 질문들에 대해 자유롭게 듣고자 합니다. 우리는 2010년대 중반 sns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단_내_성폭력 고발과 이에 연대하는 움직임이 불러온 사회 변화를 겪었고, 이로 인해 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을 비롯해, 여러 측면에서의 질문들에 봉착했습니다. 건강한 문학 생태계란 어떠해야 하는가와 같은 의문에서부터 독자와 매체, 출판 환경의 변화에 관한 사유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겪고 있고 고민하고 있는 바로 그 문제들과 경험에 대해 묻고자 하는 이번 기획은, 문학이 ‘공동(체)’라는 단어를 ‘지금-여기’에서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단초가 되어줄 것입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몸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나?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나? 혹은 손발이 더 있거나 다른 기능의 신체 기관이 있는 삶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곤충의 겹눈으로 보는 풍경이 진짜 풍경일까, 인간의 눈으로 보는 세계가 진짜 풍경일까? 우리는 이 몸이 느끼는 만큼의 세계를 ‘진짜’라고 여기며 살아갈 뿐이다. 우리를 둘러싼 것들이 제한되거나 변화하면 그 세계는 아주 쉽게 우리의 것이 아닌 낯선 세계처럼 느껴지곤 한다.

   사회 초년생일 때 다니던 회사의 모든 구성원이 여성이었다. 가끔 다른 팀에 속한 남성들이 찾아오긴 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문학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등이 이어지던 시기는, 내가 여성 구성원뿐인 직장을 떠나 한국 남녀 성비와 비슷한 환경의 직장에 놓인 때였다. 남성이라곤 집 안에밖에 없었는데, ‘9 to 6’로 매일같이 남성 직장 동료들을 마주하고 함께하는 첫 경험. 오, 나는 그들에게 단체로 정신의 역병이 창궐한 줄 알았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다들 비슷한 경험이 있을 테니 당시의 일을 짐작할 만한 몇 마디 말(내가 누군가에 한 말)을 여기에 남기는 것으로 상황 설명을 대신한다.
   “과장님, 마침 경찰서가 가까운데 같이 가시죠.”
   “사장님도 JTBC 나가고 싶으신가보다. 녹음합니다!”
   “너와 전혀 대화하고 싶지 않아. 영원히 입을 다물든가, 그만 헤어지자.”
   이후의 시간 동안 나에게 가장 중요해진 것은 두 팔 안에서만큼은 확실하게 책임질 혼자의 세계와, 그 세계의 모습이 유사한 사람들과의 모임이었다. 내 영역을 마련해 친구들과 모여 살고, FDSC(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에 가입해 나가 놀았다. 은은하게 성차별을 느끼게 하던 이들과의 만남은 다 정리했다. 마지막은 일견 어려워 보일 수 있지만 인내심 같은 건 일찍이 밤샘 작업으로 갈아 없앴으므로 실행은 쉬웠다. 결과적으로 이 일들은 거의 ‘새로운 시각의 취득’에 비견할 만했다. 소실점이 있는 원근법의 세계에서 조감도의 세계로 왔다고나 할까. 바라지 않았지만 필수적이라 말해지던 기준점을 치우니 세계의 배치가 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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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들은 아주 일찍부터 인지와 시각을 가지고 고민해왔다. 신과 상징에서 멀어져 인간 주변을 그리게 되면서 물체의 크기와 위치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 후로는 더 적극적이었다.
   사람들은 고정된 가상의 초점을 가지고 모든 물체들을 한 점을 향하는 사선 위에, 혹은 두세 개의 점을 향하는 사선 위에 놓고, 그 형태도 초점을 향한 사선을 따라 정돈되도록 했다. 투시원근법이다. 먼 곳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려 공기 중에 무언가가 있고 이것이 멀어질수록 공기 중에 겹쳐 보이는 게 많아지니 흐려 보이는 것이라며 희미하게 그릴 것을 개발해냈다. 이건 공기원근법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익히며 살아와서 이제는 실제로 어떻게 보이는지를 관찰해 그려내는 것을 더 어려워한다.
   시각 자체도 그렇다. 머리는 소실점이 있는 원근법처럼 장면을 바라보지만 눈은 계속해서 떨리듯 움직인다. 보고 있는 것이 정말인가 의심되는 일은 언제나 있고 그걸 극도로 즐기는 사람들이 매년 세계 착시 대회에 참가한다. 이들은 기하학적 착시, 암시에 의한 착시, 명도의 변화에 의한 착시, 시야를 제한함에서 오는 착시 등 기능하는 눈과 보는 눈 사이를 파고드는 작업물들을 내놓는다. 인지에 유용한 것을 기준으로 보는 눈으로는 진실한 상황을 보기 어려운 것이 착시의 중심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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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배움에서 가장 큰 장애와 왜곡은 감각의 둔함, 한계, 속임에서 나온다.”
   ―프란시스 베이컨, 『신기관』 중에서.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때부터 눈을 뜨면 보이는 것 외에도 흑백으로 된 눈맞춤 책을, 그 뒤로는 색이 있는 눈맞춤 책을 보면서 형태를 보는 법, 색을 보는 법을 찬찬히 익힌다. 움직이는 것, 중요한 것과 아닌 것 등을 보고 만지고 그려가며 매일 익힌다.
   우리는 눈맞춤을 배우듯 인간을 배운다. 누구를 가까이해야 좋은지, 어떤 인간과 상황은 위험한지, 혹은 혼자 참아내는 것이 단기적으로 나은지도. 그래서 배우는 것을 ‘사회화’라고 부른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주로 남성을 위한 사회에 안전히 편입하기 위한 것들이다. 그래서 우린 너무 남성들에 대해서만 잘 안다. 심지어 욕도 남자 욕을 더 다채롭게 할 줄 안다. 무의식적으로 중심에 ‘그’가 있어서다.
   우리를 위한 현실을 구축할 시기다. 소실점이 찍힌 세계에서 발 뗄 수 없다면 옆에 하나의 판면을 새로 만든다. 조감도가 될 수도, 축을 하나 더 그어 3D 창이 될 수도 있다. 시점을 달리한 세계는 기대한 적 없는 기쁨을 준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살아,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니?’ 이런 말들이 나의 세계를 다른 것들이 점령하는 것을 허락하게 했다. 먼저 그저 아주 작은 세계를 구축해보는 거다. 그렇게 해도 별문제가 없는 걸 경험해봐야 한다.
   얼마 전에 FDSC에서 진행한 인쇄물 소모임을 참여했다가 집에 와서 ‘진짜 재밌었다. 이제는 여한이 없다’ 이런 생각을 했다. 뭐가 여한이 없단 건진 알기 어렵지만 아무튼 여한이 없었다. ‘FDSC 거기 완전 천국이라면서요?’라고 물으면 당신은 유토피아에도 노동자로 임할 생각이 있냐고 묻고 싶다. 일 얘기 하는데 천국일 리가! 근데 일 얘기 하면서 이렇게 재미있을 수는 있더라.

   천국이 아니더라도 바라는 둥지를 짓자. 누구보다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각자의 삶을 살기 위해.

이지선

주로 책을 만드는 디자이너. 화석, 나무, 풀, 털 동물과 남이 만든 이야기를 좋아한다.

2022/09/27
5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