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넷. 백화점 입구의 노점에서 신발을 사려는데 점원이 내가 고른 신발의 장점을 이야기하며 “이거 요즘 젊은 사람들도 많이 신는 거예요.”라고 한다. 마트 앞에서 가벼운 스카프 하나를 고르는데 점원이 이것저것 골라주며 “이거 젊은 사람들도 많이 해요.”라고 한다. 아마도 ‘젊은 사람’의 선택을 받는다고 홍보하면 상대적으로 젊지 않은 사람들의 구매욕을 더 자극하는 모양이다. 게다가 백화점이 아니라 백화점 입구, 마트 안이 아니라 마트 입구에서 정신없이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저렴하게 파는 물건을 고르는 ‘장 보러 나온 아줌마’인 나에게 딱히 취향이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은 듯 했다. 하나같이 다들 ‘젊은 사람들’의 취향을 강조한다. 패션은 젊은이들이 주도한다는 생각이 팽배하고, 어느 정도 현실이기도 하다.
   젊은 사람이요? 어떤 젊은 사람이요? 얼마나 젊은 사람이요? 이십대? 삼십대? 내가 뭐, 사십대라서 삼십대처럼 보이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왜요? 나는 딱히 더 젊어 보이려고 애쓰지도 않아요. 내가 지금 내 나이를 부정해야 하나요? 게다가 나도 젊다구. 왜 벌써부터 ‘젊은 사람’ 범주에서 빼버리죠? 괜히 이런 생각이 마구 쏟아지지만 물론 입을 꽉 다물고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래봐야 나는 ‘진상 손님’ 밖에 안 될 테니까.
   그렇게 나는 엄마의 과거 어느 날과 겹치는 순간에 다다랐다. “사람들이 참 이상해. 언제부터인지 나보고 자꾸 젊을 때 미인이었겠다고 하는 거야. 그럼 내가 지금은 늙었다는 거야?” 오십 살 전후의 엄마는 가끔 이런 푸념을 늘어놓았고 이십대 후반이던 나는 엄마의 그 감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미인이었겠다는데 뭐가 문제지? 엄마에게는 ‘과거형’이 문제였다.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에게 지속되는 ‘과거형’의 말.
   마흔다섯.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는데 “염색 안 하세요? 이제 딱 하실 때가 됐네요. 요즘 젊은 사람들도 많이 해요.”라고 한다. 건강만이 아니라 미적으로도 늙음을 준비해야 할 시기라고 곳곳에서 신호를 보낸다. 급기야 어느 날은 TV 광고에서 곱디고운 젊은 여성이 도도하게 바라보며 말한다. “언니, 뭐 믿고 콜라겐 안 먹어요? 나도 먹는데!” 이런, 나는 콜라겐도 안 먹는 주제에 진짜 주제파악을 못했구나. 온 사방에서 젊음을 따라하라고, 젊음을 유지하라고, 염색으로 흰머리를 감추고, 늘어진 피부를 단단히 고정시키라고, 그러지 않는 너는 게으른 것이라고 주문을 외고 있다. 엄마를 닮지 않은 나는 ‘과거형’ 미인도 못 되는 주제에!
   ‘나이듦’을 대하는 이 사회의 태도에 나는 거부감을 갖지만, 그 거부감의 정체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늙음을 비하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나 역시 늙음이 두렵다. 두려움의 대상이 비하의 대상이 되기란 얼마나 쉬운가. 늙음에 대한 내 마음속의 불안은 현재 노인인 나의 부모에게 향한다. 꼼짝 말고 가만히 있어! 이 말은 누군가에게 총구를 들이댄 폭력배의 언어가 아니다. 내가 요즘 수시로 엄마에게 하는 말이다. 육십대 후반과 칠십대 중반인 부모님이 혹시라도 코로나에 감염되면 위험하니 “어디 가지 말고, 집에 가만히 있어! 꼼짝 말고 가만히 있어!”라고 말한다. 전화를 끊고 나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게 고작 ‘가만히 있어’라는 사실에 스스로 씁쓸해진다.
   내 또래나 혹은 더 젊은 사람들에게서 미래에 자기는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상상해봤다. 알록달록 니트 스웨터를 입고 염색하지 않은 흰 머리에 웃는 모습이 귀엽고 젊은 사람과 말도 잘 통하는 그럼 모습? 어릴 때 보았던 만화 ‘호호 아줌마’ 같은 모습이 떠오른다. 아니면 세련된 단발머리에 청바지도 여전히 잘 어울리는 모습? 멋지다고 칭송 받는 시니어 모델 같은 그런 노인인가? 어떤 모습일까. 인스타그램의 스타? 그러다가 생각했다. 지금 우리 곁에 존재하는 할머니들은 어떤 모습일까.
   요양원에 있던 내 할머니의 모습은 표정이 없고 다른 사람들과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똑같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그럴 만해서 그런 것일까. 할머니는 자기 관리를 못해서 개성도 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늙어갔을까. 미래의 할머니 상을 구할수록 현재의 할머니들이 소외된다는 점에서 ‘나는 이러이러한 할머니가 될 거야’라는 말이 어쩐지 울적하게 다가왔다. 늙음을 소외시키는 다른 방식일 뿐이다. 쪽방촌의 삶을 다룬 『노랑의 미로』(이문영, 오월의봄, 2020)의 서혜자, 폐지 줍는 여성 노인의 삶을 분석한 『가난의 문법』(소준철, 푸른숲, 2020)의 윤영자, 다양한 소수자의 목소리가 담긴 『나는 숨지 않는다』(박희정 외 2명, 한겨레출판사, 2020)중에서도 노숙인 김복자, 이 가난한 여성 노인은 누군가의 미래에서는 물론이고 지금 여기, 현재 시점에서도 지워진 존재다. 돈도 ‘효도 자원’도 없는 이들은 수시로 위험에 처해 있지만, 노인학대는 아동학대처럼 공분을 일으키지도 않는다.
   늙은 호박은 달고 어여쁘다. 수백 년 된 고목은 보호받고 신령스럽게 바라본다. 그러나 늙은 사람은 노동력도 싼값에 후려쳐지고 아름답지도 않게 여겨진다. 돈 없이 늙으면 쓸모없고 보기 흉한 인간 취급 받지만 돈 많은 노인은 자본주의 시장에서 마치 재개발 대상의 낡은 아파트처럼 쓸모를 인정받는다. 그들의 노화, 질병 나아가 죽음도 모두 돈벌이가 되기 때문이다. 실버타운에 거주하다가 알츠하이머에 걸리고 서서히 죽어간 어머니의 마지막을 기록한 최현숙의 『작별일기』(후마니타스, 2019)는 이러한 대비를 잘 보여준다. 저자의 어머니는 보증금 2억에 매달 200만원씩 돈을 내야 하는 실버타운에 있었지만 저자는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전혀 다른 계층의 늙음을 마주했다. 알츠하이머가 심한 여성 노인도 화장 서비스를 받을 때 행복해 한다고 한다. 우아한 늙음에 환호하기에는 돈의 실체가 결코 가볍지 않다. 대다수의 노인들은 생계를 걱정한다.
   나는 어떻게 나이 들어갈지, 그 상을 미리 정해놓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걸 정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언제부터 ‘노후’ 혹은 ‘노년’인지도 알 수 없어서다. 다만 미래 나의 노인상이 아닌 현재 내 곁의 노인의 삶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게 낫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현재 타인의 늙음은 곧 미래 나의 늙음일 테니까.

이라영

매일 아침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하여 규칙적으로 생활합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꾸준히 만지거나 만드는 일을 통해 ‘생각하는 손’이 되려고 애씁니다. 그렇게 생활과 괴리되지 않고, 몸과 떨어지지 않는, 작은 습관들로 쌓아올린 글을 쓰고자 합니다.

2021/02/23
39호